'백전 노장' 한고조 유방

2018.03.03 05:18

온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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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전쟁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을 3명 꼽자면 항우와 유방, 그리고 한신입니다. 이들 중 항우와 한신은 그 궤는 다르지만 모두 전쟁에서의 신화적인 활약으로 이름이 높습니다.

반면 유방에 대해서는 딱히 전쟁에서의 이야기는 언급이 나오지 않는 편인데, 정확히 말하면 거의 대부분의 매체에서 유방은 ‘무능하고 졸렬한 지휘관’ ‘군대를 부리면 안되는 사람’ 수준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잦습니다. 즉 그 시대 기준에서 평균 이하의 군사 지휘관이라는 말이고, 이 경우 주로 팽성전투에서 56만으로 항우에게 깨졌다 등등의 이야기가 주로 언급되곤 합니다. 더 언급될 경우, ‘소설’ 인 초한지에서 유방이 한신의 군사 지휘권을 박탈해서 팽성에서 졌다 등등의 말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 소리는 제 기억으로는 한 4,5년 전만 해도 진짜 무슨 사실인양 자주 언급되던데 요새는 그래도 덜 나오긴 하더군요.

그런데 여기서 잠깐, 실제로 ‘사기 고조본기’ 를 통해, 단순히 영향력 행사가 아니라 실제 전투를 펼쳤다고 볼 수 있는 유방의 모든 군사적 행동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면….(이하 대부분의 출저는 사기 고조본기. 몇몇 부분만 ‘한왕 신 열전’ 등에서 가져옴.)



1. 진나라 사수군감(泗水郡監) 평(平)과의 풍읍 전투

– 진의 사천군(泗川郡) 군감 평(平)이 병사를 거느리고 풍읍을 포위했으나 이튿날 나가 싸워 격파했다.


1승 0패





2. 진나라 사수군 태수 장(壯)과의 설현 전투

– 옹치(雍齒)에게 풍읍을 지키게 하고 병사를 데리고 설현으로 갔다. 사주 명령을 내리고 자신은 군사를 거느리고 설현(薛縣)으로 진격했다. 사천군 군수 장(壯)이 설현에서 패하여 척현(戚縣)으로 도망쳤다.


2승 0패



3. 옹치의 배반, 풍읍 전투

– 옹치가 평소 패공 밑에 있고 싶지 않았는데 위의 회유를 받자 바로 돌아서 위를 위해 풍을 지켰다. 패공이 병사를 이끌고 풍읍을 공격했으나 취하지 못했다. 패공이 병이 나서 패현으로 돌아갔다.


2승 1패





4. 진나라 장군 장한의 별장 사마니와의 탕현 전투

– 이때 진의 장수 장한은 진왕(진섭)을 추격하고, 별장 사마니는 병사를 거느리고 북으로 초 땅을 평정한 다음 상현(相縣)을 함락시키고 탕현(?縣)에 이르렀다. 동양 사람 영군과 패공은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나아가 소현(蕭縣) 서쪽에서 싸웠으나 불리하여 병사를 수습하여 유현으로 돌아와 다시 모아 탕현을 공략하니 3일 만에 탕현을 취했다.


3승 1패




여기까지가 거병 초기, 전국에서 수없이 많았을 독자적인 세력 중에 하나로 활동하던 당시의 모습들.






5. 하읍 전투

– 하읍(下邑)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군을 풍읍으로 돌렸다.


4승 1패





6. 항량의 밑에서 부장으로 항우와 연합하여 성양 함락

– (항량은) 패공(유방)과 항우에게는 별도로 성양을 공격하게 하여 도륙하고, 복양(?陽) 동쪽에 주둔하여 진의 군대와 싸워 격파했다.


5승 1패



7. 항우와 연합하여 옹구에서 진군을 무찌르고 이사의 아들 이유를 죽이다

– 패공은 항우와 서쪽 땅을 공략하며 옹구에 이르러 진의 군대와 싸워 대파하고 이유(李由)의 목을 베었다.


6승 1패



8. 항우와 연합하여 외황을 공격하다

– 군을 돌려 외황(外黃)을 또 공격했지만 외황은 함락되지 않았다.


6승 2패

여기까지가 이후 항량의 초나라 세력에 포섭되어 항량의 부장 격으로 활약하던 시기의 모습들. 항량이 죽을 무렵에는 역시 항우와 함께 진류를 공격하던 참이었지만 항량의 죽음 때문에 바로 물러나서 이 사례는 제외했습니다.



9. 강리에서 진군을 격파하다

– 강리(?里)의 진군과 보루를 끼고 진의 2군을 격파했다.


7승 2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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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월

10. 팽월과 함께 창읍을 공격하다

– 패공은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다가 창읍에서 팽월과 만나 함께 진군을 공격했으나 전세가 불리했다. 철수하여 율현에 이르러 강무후(剛武侯)를 만나서 그의 군사 4천여 명을 빼앗아서 합쳤다. 위의 장수 황흔(皇欣), 사도(司徒) 무포(武蒲)의 군사와 함께 창읍을 공격했으나 창읍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7승 3패



11. 진나라 장수 양웅을 연이어 격파하다

– 다시 서쪽으로 전진하여 백마(白馬)에서 진나라 장수 양웅(楊熊)과 싸우고, 또 곡우(曲遇) 동쪽에서 싸워 대파했다. 양웅이 형양으로 도망치니 진 이세가 사신을 보내 (양웅의) 목을 베어 조리를 돌렸다.


8승 3패



12. 영양 전투

– 남쪽으로 영양(潁陽)을 공격하여 도륙했다


9승 3패



14. 한원 전투

– 장량과 함께 한(韓)의 땅 환원(?轅)을 공략했다.


10승 3패



12. 낙양성 공격

– 남하하여 낙양 동쪽에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회군하였다.


10승 4패



13. 남양 태수 여의를 주현에서 격파하다

– 군중의 기병을 수습하여 남으로 남양 태수와 여의(呂?)와 주현(?縣) 동쪽에서 싸워 격파했다. 남양군이 공략당하자 남양태수 여의는 달아나 완성을 지켰다.


11승 4패
(이후 여의가 지키는 완성을 항복을 받아들여 함락시킴)



14. 무관 함락

– 장량의 계책대로 역생과 육고(陸賈)를 보내 진의 장수들을 설득하고 이익을 유혹한 다음 바로 무관을 습격하여 격파했다.


12승 4패



15. 남전 전투

– 진의 군대와 남전(籃田) 남쪽에서 싸웠는데, 가짜 병사와 깃발을 늘리고 지나는 곳에서 약탈을 하지 못하도록 하니 진 사람들이 기뻐했고 진의 군사들은 해이해져 대파할 수 있었다.


13승 4패



16. 남전 북방의 전투

– 그 북쪽에서도 싸워 대파하고, 승세를 타고 마침내 무찔렀다.


14승 4패

여기까지가 초나라의 장수이자 항우와 별도의 군단으로 서진하여 진나라를 멸망시키던 때의 행적입니다.



17. 삼진의 장한을 진창에서 격파하다

– 한왕이 한신의 계책을 써서 옛길을 따라 돌아서 옹왕 장한을 습격했다. 장한은 진창(陳倉)에서 한을 맞이하여 공격했으나 옹(장한)의 군대가 패하여 도주했다.


15승 4패

18. 호치에서 장한과 연이어 대결하다

– 호치(好?)에서 다시 싸웠지만 (장한이)또 패하여 폐구로 도망쳤다.


16승 4패



19. 하내를 함락시키고 은왕 사마앙을 사로잡다.

– 하내를 함락시키고 은왕을 포로로 잡은 다음 하내군을 두었다.


17승 4패



20. 팽성 전투

– 항우가 이를 듣고는 바로 군대를 끌고 제를 떠나 노현에서 호릉을 나와 소현에 이르러 한의 군대와 평성, 영벽(靈壁) 동쪽의 수수(?水)에서 크게 싸워 한의 군대를 대파했다. 많은 사졸들이 죽어 수수가 흐르지 못할 정도였다.


17승 5패

여기까지가 삼진을 평정하고 나와 기세좋게 팽성까지 진군했다가, 팽성 전투에서 항우에게 처참하게 무너졌던 시기까지의 상황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삼진을 평정한 것이 흡사 한신이 군사를 총지휘하여 한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기록상으로 보면 장한과의 주요 전투때까지 군사 총지휘는 모두 유방이 맡고 있었습니다. 수하의 여타 제장들은 대승리 이후 여러지역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활약했습니다.

21. 폐구성 전투

– 물을 끌어들여 폐구로 흐르게 하니 폐구는 항복하고 장한은 자살했다.


18승 5패

22. 형양 탈출

– 한군의 식량이 바닥이 났다. 이에 밤중에 여자들 2천여 명에게 갑옷을 입혀 동문으로 나가게 했고 초는 사방에서 이들을 공격했다. 장군 기신이 한왕의 수레를 타고 한왕인 것처럼 초를 속이니 초는 모두 만세를 부르며 성 동쪽으로 와서 구경했다. 이 사이에 한왕은 기병 수십과 서쪽 문을 통해 달아났다.


18승 6패



23. 성고 탈출

– 항우는 팽월을 격파하고 한왕이 다시 성고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바로 다시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형양을 함락시키고는 주가와 종공을 죽이고 한왕(韓王) 신(信)을 포로로 잡아 드디어 성고를 포위했다. 한왕은 등공만 데리고 수레를 타고 성고의 옥문으로 탈출했다.


18승 7패



24. 사수 전투

– 사람을 보내 대엿새 동안 욕을 해대자 대사마는 화가 나서 병사를 이끌고 사수를 건넜다. 사졸들이 반쯤 건넜을 때 한이 공격하여 초군을 대파하고 초국의 금은보화와 재물을 모조리 얻어갔다. 대사마 조구, 장사 사마흔은 모두 사수에서 스스로 목을 그어 자결했다.


19승 7패



25. 고릉 전투

– 하양 남쪽에 멈추어 주둔하며 제왕 한신, 건성후 팽월과 날을 정해 합류하여 초의 군대를 공격하기로 했다. 고릉까지 왔으나 이들이 오지 않았다. 초가 한의 군대를 공격하니 대패했다. 한왕이 다시 보루에 들어가 참호를 깊이 파고 수비에 들어갔다.


19승 8패



26. 해하 전투

– 고조가 제후군과 함께 초군을 공격하여 해하에서 항우와 승부를 지었다. 회음후는 30만으로 직접 맞섰고, 공장군(孔將軍)은 그 왼쪽에, 비장군(費將軍)은 그 오른쪽에 진을 쳤다. 고조는 뒤에, 강후(주발)와 시장군(柴將軍)은 황제의 뒤에 위치했다. 회음후가 먼저 겨루었으나 불리하여 물러났다. 공장군과 비장군이 협공하자 초의 군대가 불리해졌다. 회음후가 그 틈에 다시 공격하여 해하에서 대파했다. 항우는 한군이 부르는 초의 노래를 듣고는 한이 초의 땅을 다 차지한 것으로 알았다. 항우가 패하여 달아나니 군대를 크게 패했다. 기장 관영에게 항우를 추격하게 하여 동성에서 죽이고 8만의 목을 베니 마침내 초의 땅을 평정할 수 있었다.


– 20승 8패

여기까지가 항우와의 초한전쟁 시기의 전투들입니다.



27. 장도의 반란 진압

– 연왕 장도가 반란을 일으키자 대 지역을 공략했다. 고조는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에 나서 연왕 장도를 잡고 바로 태위(太尉) 노관(盧?)을 연왕으로 세웠다.


21승 8패






28. 이기의 반란 진압

– 이기(利幾)가 모반했다. 고조가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그를 치자 이기는 달아났다. 이기는 항우의 장수였다. 항우가 패할 때 이기는 진현의 현령이었는데 항우를 따르지 않고 고조에게 도망쳐와 투항하여 고조가 영천후에 봉했다. 고조가 낙양에 이르러 명부의 제후들을 모두 부르자 이기가 겁을 먹고 반란을 일으켰다.


22승 8패



29. 동제에서 한왕 신의 반란군을 격파

– 고조가 직접 출정해 한왕 신의 군대를 동제(銅?)에서 격파하고, 그 장수 왕희(王喜)의 목을 베자 한신은 흉노로 도망쳤다.


23승 8패



30. 백등산 포위전

– 고조가 몸소 가서 그들을 쳤다. 때가 겨울이라 사졸들 열에 두 셋은 손가락이 얼어 떨어져 나갔다. 결국 평성(平城)으로 물러났는데 흉노는 고조를 평성에서 포위했다가 7일만에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23승 9패
(백등산에서 포위되기 전 흉노를 상대로 야전에서 거둔 승리가 3차례 있지만 흉노의 유인책으로 보여 제외함)



31. 동원을 함락하고 진희의 반란을 진압하다.

– 진희의 부장 조리(趙利)가 지키고 있던 동원(東垣)을 고조가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한 달 넘게 병졸들이 고조를 욕하자 화가난 난 고조는 성을 항복시킨 다음 욕을 한 자들을 찾아내서 목을 베게 하고, 욕하지 않는 자는 용서해주었다.


24승 9패



32. 경포의 반란을 진압하다

– 고조는 경포의 군대를 회추(會?)에서 격퇴시켰다. 경포가 달아나자 별장에게 그를 추격하게 했다.


25승 9패

여기까지가 통일 이후 흉노와의 싸움, 그 외 기타 반란을 진압한 싸움들입니다.

이렇게 보면 총 34번을 싸워서 25승을 하고 9번을 졌다는 계산이 되는데, 어디까지나 제 기준에서 전투라고 볼 수 있는 경우만 포함시킨 경우이기에 실질적인 군사 활동은 더 많은 편이며, 그 외에도 초한쟁패기가 우리나라로 치면 위만이 고조선에 들어오기도 전인 지금으로부터 2,200년 전 고대라는 점, 그리고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했던 시점우로부터도 100년 전의 일인데다, 문인들의 암흑기였던 대혼란기에다 글 정도는 아는 사람은 있다쳐도 제대로 저술을 남길만한 인물이 극히 드물었을 당시를 생각하면, (* 이에 아래 덧붙임) 실제 유방이 치룬 전투는 더 있어도 이상할게 없긴 할겁니다.

 이렇게 보면, 항우가 죽기 전에 스스로 “나는 평생 70여번을 싸웠는데 한번도 진 적이 없고…” 같은 말을 했는데, 유방 역시 실제로 생전에 치룬 전투의 숫자는 40~50번은 너끈히 될법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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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氏初興,書唯陸賈而已;子長述楚、漢之事,譬夫行不由徑,出不由戶,未之聞也。」


“유씨가 처음 일어났을 때, 글을 아는 이는 오직 육가 뿐이었다.” 


“육가가 초, 한나라 사이에 벌어진 일을 (처음) 기록하기 시작했을 떄, (누군가 써놓은 글이 없다시피 하여) 마치 가려해도 길이 없고, 나가려해도 문이 없는 것과 같아,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당나라 유지기(劉知幾), 사통(史通) 잡설(雜說) 상(上) 

초한전쟁 시기 유방군의 인적 구성이나 당대의 특성상, 글 정도는 아는 사람이 있다쳐도 ‘역사 서술’ 같은 장대한 서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전무했기에, 당대인으로서 이 시기에 대해 제대로 저술을 남겼던 인물은 ‘육가’ 라는 사람 한 명 뿐이라는 말이 입니다. 소하가 관리 일에 재능이 있고 장량이 큰 계책으로 흐름을 꿰뚫어 볼 줄 안다고 쳐도 저술, 그것도 역사 서술을 남기는 건 완전히 다른 영역의 문제라… 현대의 연구가인 왕리기(王利器) 등도 사마천은 사기를 작성하면서 이 무렵의 일에 관해선, 육가가 남긴 초한춘추(楚漢春秋)를 확실히 1차 레퍼런스로 삼았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초한춘추는 여기저기 부분적으로 인용된 기록이 남은것 말고는 책 자체는 소실됨)

때문에 사마천이 사기를 쓸 시점에는 이미 당대에 대한 기록 자체가 완전히 소실되거나 애초에 그런게 있지도 않아서, 사마천 시대에서 천년전인 상나라의 계보도 거의 정확하게 맞춘 사기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기록이 중간에 뭉텅 잘려나간 듯한 경우도 많습니다. 가령 해연(奚涓) 등을 비롯해서 당대에 제법 활약한 인물임에도 거의 기록이 남지 않은 사람이라던가, 꽤나 중요한 계책을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생(袁生)이니 한생(韓生)이니 하는 식으로 아예 이름도 제대로 안남은 사람이라던가, 그 외에 그나마 유방의 부하이거나 유방에게 투항해서 행적이 남을 게 많은 사람들에 비해 항우측 인사들은 딱히 그렇게 남을 게 없기 때문에 거의 기록이 안남은 부분이라던가… 여하간 이건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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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편의상 ‘패전’ 으로 분류한 유방이 졌다는 전투들도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는 ‘어디를 공격했는데 수비가 완강해서 쉽게 함락을 못시켰다더라.’ 하는 경우가 대부분 입니다. 풍읍 전투, 외황 전투, 창읍 전투, 낙양성 전투가 이것으로, 총 8번의 패배에서 절반에 해당합니다.

‘완강하게 요새에서 수비하며 버티는’ 경우는 사실 언제라도 함락하기 힘든 법입니다. 유방의 저 4번의 전투들은 모두 거병 초반부에 해당했는데, 별다른 공성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을 당시의 군단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하물며 외황성 전투 같은 경우는 유방이 항량의 명령으로 항우와 같이 움직인 전투였는데, 유방이 실패했다는 것은 항우도 실패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항우는 자기 입으로 “난 평생 진 적이 없었다.” 라고 말했으니, 이렇게 치면 이를 패전이라고 말하긴 힘들 것입니다. 더군다나 풍읍 전투의 경우는, 유방이 군사를 이끌고 나간 사이에 옹치가 배반하여 근거지가 사라진 상태에서의 전투라는 최악의 상황이기까지 했습니다.

그 외에 창읍, 낙양성 전투 등은 유방이 공격을 퍼붓음에도 불구하고 수비가 완강하자, 유방은 미련없이 아예 우회해서 진군했고 승승장구했습니다. 즉, 유방에게 전혀 타격을 끼치지 못한 전투였으니, ‘실패’ 에서 느껴지는 좌절감은 없다시피 합니다.

또한 남은 5번의 패배 중 형양-성고 전투의 경우는, 애당초 적의 전력이 압도적인 상황에서 유방의 가장 큰 전략적 목표가 ‘도주’ 였으며, 실제로 도주에 성공해서 형양-성고-완 등을 끊임없이 오고가며 항우의 주력을 이리 끌고 저리 끌면서 다녔고, 그 사이에 수만이 넘는 부대를 항우의 후방으로 파견해 팽월을 지원하면서 되려 초나라군의 뒤통수를 쳤다는 것을 생각하면, 초나라군은 눈앞에선 조그마한 승리를 거두고 전략적으로 압도적인 패배를 되려 당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오히려 유방이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방의 가장 큰 패배는 자기 자식마저도 버리고 달아나려고 했던 ‘팽성전투’ 입니다. 56만의 병사가 3만의 항우군에게 무너진 것으로 유명한 이 전투는 유방의 이미지를 굳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만, 이때 유방을 비롯한 제후연합군의 인물들 전부가 승리에 도취되어있고 ‘다 끝났다’ 고 생각해 ‘아예’ 대비를 하지 않고 있던 시점에서 당한 기습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를 ‘안일한 태도’ 등으로 비난하는 것은 정당할지언정 군사적인 능력의 유무를 따지는데는 적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팽성전투에서 속절없이 쓸려나간 사람들 중에는 유방 외에도 여타 수많은 다른 제후들이나 한군의 장수들이 전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들 모두를 ‘군사적 저능아’ 로 결론 내리는게 아닌 이상에야 더 그럴 수 있구요.

이렇게 보면, 유방이 실제로 ‘야전’ 에서 완패를 당한 전투는 고릉 전투와 백등산 포위전 밖에 없다는 결론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도 또 아예 말을 할게 없는것은 아닙니다. 고릉 전투는 애시당초 유방이 팽월, 한신 등과 ‘날짜’ 까지 잡고 스케줄에 맞춰 움직였는데, 막상 도착하고보니 약속했던 그 사람들은 “왕을 시켜주거나 상을 더 주면 갈수도 있고~아니면 말고~” 식으로 갑자기 강짜를 부리며 오지 않았습니다. 즉 처음에 “이 정도면 되겠다” 고 생각했던 전력의 3분의 2가 빠져나간 상태에서 원치 않은 전투에 나서게 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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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등산 포위전은 유방이 생전에 당한 가장 완벽한 패배입니다. 이 전투에서 유방은 초전의 몇몇 승리로 인해 지나치게 군사를 움직이다가 결국 포위되어 오도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다만 한나라가 흉노를 격파하기 시작한 시점이 초한전쟁의 참상이 진정된 100여년이 지난 후, 국가가 부강해진 뒤 정예 기병대를 육성한 시점이었으며 유목민의 유인-포위 전술이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우위를 생각하면, 양군의 전투력은 애당초 차이가 극심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때 유방의 가장 큰 실책은 묵돌이 이끄는 흉노군 본대와 맞상대 해서 ‘이기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애당초 흉노군 본대가 기다리고 있던 곳으로 갔던 점이 가장 큰 실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아예 싸워주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패전이었지만, 그 중간 과정에서 의외로 유방도 여러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점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유방은 묵돌이 기다리고 있던 평성으로 진군하기 전, 여러차례 거두었던 초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수차례 사자를 파견해 현지의 흉노군을 정탐하게 했습니다. 그것도 무려 10명이나 되는 사자를 차례대로 파견해 흉노군을 샅샅히 살펴보는 참을성까지 보였습니다. 그런데 묵돌 선우가 한수위였고, 일부러 사신들에게 흉노군의 약한 점만 최대한 과장해서 보여주도록 유도하는 치밀함으로 결국 유방을 유인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즉 유방 역시 나름대로 식견을 보였지만, 애당초 전투력 자체도 앞선 적이 식견에서도 한수위를 보여준 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또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저거 다 부하들이 해준거 아니냐. 유방이 무엇을 한게 있겠느냐. 하는 이야기 입니다. 우리가 보통 유방을 하면 ‘부하운이 억세게 운 좋은 사람’ 이라던지, ‘유방의 고향인 풍읍은 영웅들이 숱하게 나온 전설의 고장’ 이라던지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전설의 고장에서 나온 능력치 쩔어주는 부하들 덕분에 유방이 운좋게 성공했다, 라는 인식이 여기에는 있는데….

그런데 유방의 휘하였던 사람들의 초창기 행적을 살펴보면 기묘한 공통점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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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 휘하의 직속 무장들 중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다’ 고 평가받는 조참 입니다. 아래는 사기 조상국세가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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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것저것 많습니다. 막 싸우면서 성을 병사들보다 가장 빠르게 올라가고 적의 군관도 한명 포로로 잡고 그랬다고 합니다. 

그럼 다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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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의 동서이자 용맹함으로 유명한 번쾌입니다. 유방 휘하의 무장들 이름을 열거할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아래는 그런 번쾌 열전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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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것저것 많습니다. 막 전투 할때마다 적군 목을 막 10개씩 베어댔고 성에도 가장 먼저 올라가고 그랬다고 하는군요. 역시 용맹한 번쾌입니다.

그럼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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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 사후 우직하게 기다리다가 여씨를 숙청하고 다시 유씨 천하를 만들었다는 주발입니다. 아래는 강후주발세가의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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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발도 마찬가지입니다. 싸울떄 가장 늦게 철수했다거나 가장 먼저 성에 올라갔다거나 먼저 성루를 올라갔다거나 하는 내용들입니다.

특징을 찾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유방의 부하들은, 본래 처음에 군을 지휘한 적이 없습니다.

가장 먼저 성에 올라갔다느니, 전투마다 적병 목을 12개 정도 베었다느니, 이 말인 즉슨 이들이 지휘관이 아니었다는 말이고, 유방이 군을 지휘할때 앞에서 앞장서서 싸웠다는 정도의 의미들입니다. 애시당초 이들의 기록을 잘 살펴 보면 이유를 죽였다거나 진나라 장수 양웅을 공격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대다수 행적이 똑같은데,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유방이라는 지휘관이 전투를 치를때 거기서 같이 싸웠던 정도의 위치였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이는 막 거병했던 봉기군 때를 지나 초한전쟁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물론 그때쯤 되면 이들은 다들 명실상부 당당한 장군들이 되었고, 휘하에 부대를 이끌고 다녔지만, 단독으로 무언가 큰 전투를 치루거나 한 적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이를테면…



한왕은 회군해 삼진(三秦)을 평정했고, 번쾌는 단독으로 백수(白水) 북쪽에서 서현(西縣) 현승(縣丞)의 군대를 공격했으며, 옹현(雍縣) 남쪽에서 옹왕(雍王)의 날쌘 기마병을 격파했다. – 번쾌 열전

번쾌전을 보면 유방이 삼진을 평정할떄 번쾌가 단독으로 따로 나서서 서현에서 현승의 군대를 공격하고 옹왕 장한의 기마병을 격파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걸 보고 ‘번쾌가 단독으로 장한을 때려잡고 삼진을 평정했구나’ 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유방이 이끄는 본대가 장한과 격돌하는 큰 대전을 펼치는 와중, 일부 부대를 이끌고 큰 전투의 작은 부분에서 이런저런 공적을 세웠다는 것이니 말입니다.



폐구(廢丘)를 수몰시킨 것은 번쾌의 최고의 공적이었다. – 번쾌 열전



장한을 폐구에서 포위 공격했다. (생략) 괴리(槐里)와 호치(好?) 공격에서도 공이 가장 많았다. (생략) 곡우(曲遇) 공격에서도 최고였다. – 강후주발세가

장한을 폐구성에서 수몰시켰던 것이 번쾌의 최고 공적이라는 언급이 번쾌전에 나오는데, 강후주발세가에서도 장한을 폐구에서 친 기록이 나옵니다. 이들은 별도로 군을 이끌고 장한을 친게 아니라, 유방이 총사령관으로 장한을 칠때 밑의 부하로서 활약했다는 것입니다. 주발세가에 나오는 다른 전공의 문맥들에서도 그런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칠때는 주발이 가장 공이 많았다’ ‘이 전투에서도 주발이 최고였다’ 이 말들 역시, 주발이 단독으로 군을 이끈게 아니라 대군의 일원으로서 활약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부분들입니다. 

오히려 주발, 번쾌, 관영등이 (대군의 소수 별동대 정도가 아닌) 단독으로 ‘군단’ 을 이끌고 다닌 시기는 초한전쟁 때보다도 한나라가 천하를 통일한후 ‘반란 진압’ 을 하던 시기에 더 많았습니다. 그나마도 경포나 한왕 신, 장도 등 가장 강력한 제후왕들은 대부분 유방의 친정으로 격파된 경우가 대부분이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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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의 부하로서, 단독으로 전황을 바꿀만한 군단장 급의 위치에서 움직인 사람은 한신 밖에 없습니다. 한신의 공적은 유방의 영향력과는 완전히 별개의 영역에서 벌어진 일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본래 부하였으나 별도 세력으로 변신한)한신이나 팽월 등의 ‘포섭 세력’ 이 아닌 유방의 부하들의 전공은 모두 ‘유방의 영향력’ 아래서 거둔 전공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방이 어디서 싸울때 한갈래 군사를 가지고 여기서 적의 장수 누구를 죽였다던가, 유방의 부대에서 나와 별동대로 오고가면서 보급을 공격했다던가….

유방의 부하들은 생각보다 제한된 위치였고, 실제로 큰 대세에서 자신들 개개인의 끼친 영향력도 생각보다 미미 했습니다. 그들은 장기말일 뿐이었지 결코 말을 두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말을 두는 사람은 말할것도 없이 유방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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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칼을 휘두르며 개를 잡고 비단을 팔고 있었을 때, 어찌 준마(유방)의 꼬리에 붙어 한의 조정에 이름을 드날리고 날리고 은덕이 자손까지 내려 갈 것을 알았겠는가? 나는 번타광(樊他廣)과 교류했는데, 그는 나에게 고조의 공신들이 일어났을 때 이와 같았다고 말해주었다.” – 사마천

‘부하 잘둔 유방’ 이라는 말과는 정반대로, ‘대장 잘 만나 꼬리잡고 출세한 공신들’ 이라고 표현한 사마천. 심지어 사마천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해준 번타광은 번쾌의 손자(번쾌의 장자는 여씨 숙청때 죽었고, 번쾌의 서자의 아들)였습니다. 유방이 고조라 높이는 것을 감안한다쳐도 자기 할아버지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고조 떄 공신들은 개 잡고 칼 휘두르다가 고조 꼬리잡고 팔자 핀 거지.” 라고 말하고 다녔을 정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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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

실제로 경포는 반란을 일으킬 당시, “황제는 나이가 들어 이제 싸움을 싫어하니 직접 오지 않을테고, 그 장수들을 보낼텐데 장수들 중에선 단지 회음후 한신과 팽월만이 걱정될 뿐이었는데 그 둘은 모두 죽었다. 나머지는 두려워할 것들이 없다.” 는 말을 했습니다. 유방 부하들 따위야 대수로울건 없고, 그나마 걱정되던 한신과 팽월도 죽었으니 자신을 막을 사람은 없으며, 유일하게 막을만한 황제는 나이 탓에 직접 오지 않을것이라 자신만만 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당대에 경포가 군지휘관으로 받던 명성은 높았습니다. ‘경포의 용병이 뛰어나 백성들이 두려워한다(布善用兵, 民素畏之)’, ‘천하의 명장으로서, 전투에 뛰어나다(?布, 天下猛?也, 善用兵)’, ‘제후들 가운데 공은 으뜸(功冠諸侯)’ 이라는 것이 사기에 기록된 경포에 대한 평가입니다. 

이때 유방은 경포의 말마따나 병에 걸린 상태였고, 태자에게 경포 토벌을 위임했지만 여후가 “도저히 태자는 경포의 상대가 될 수 없다” 며 베겟머리를 붙잡고 하소연하자, “그 조무래기가 시원치 않으니, 당신 남편이 나서야겠군. (吾惟?子固不足遣,而公自行耳)” 라는 말을 남기곤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군을 이끌고 경포를 토벌하는데 성공합니다. 

이런저런 점을 고려하면, 유방은 여타 미디어의 이미지처럼 무능한 졸장은 커녕 오히려 그 시대에서 손꼽히는 지휘관으로 볼 수도 있으며, 설사 그렇게까진 보지 않는다고 해도 수없이 많은 전투를 경험한, 당대에서 가장 경험이 많은 축에 속하는 지휘관이라는 점은 확실합니다. 단순히 전장터에서 창칼을 휘두르는 수준을 떠나 거병 떄부터 황제가 되고 난 이후까지 전투 경험이 있는 셈이니…

‘군대의 지휘와 유방’ 을 뭔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보는 대중매체의 이미지와는 달리, 당대에는 오히려 유방이 ‘황제라는 이미지에 걸맞지 않게 위험하게도 지나치게 전투에 많이 나서는 군주’ 라는 인상이 되려 강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가령 유방이 거병하기 전부터 그를 쭉 따랐던 괴성후 주설이라는 사람은 천하를 통일하고도 반란 진압에 늘 군을 이끌고 출정하는 유방을 말리면서,





“이전에 진나라가 천하를 정벌할 때도 황제가 몸소 군대를 인솔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폐하께서 몸소 나가려 하시니 이는 보낼 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러시는 것입니까(始秦攻破天下, 未嘗自行. 今上常自行, 是?無人可使者乎)?”

라는 말을 올리기까지 했으니…..

라정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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