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필자는 한국교회를 비판하지 않는가?
세습방지 교회해체 전리품으로는 상을 얻지 못한다.
명성교회가 설사 가라지라고 해도 뽑아서는 안 된다.
필자는 명성교회 문제가 본격적으로 세간에 이슈가 되기 전에 “선교사의 관점에서 본 한국교회 세습 문제”란 제하로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세습 찬반 여부를 떠나 수많은 인터넷 신문에서 이 칼럼을 화두 기사로 다루어 주었고 SNS를 통해 빠르게 확산되기도 했었다.
그 당시 몇 몇 교단에서 세습 금지법을 만들어 총회에 통과시킨 후였고 사회 전반에서 교회 세습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이 팽배 할 때에 선교사의 시각에서 한국 교회세습 문제를 다룬 글이 독자들의 눈에 신성하게 비쳤던지 교계 안팎에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었다.
필자가 두 번째 똑 같은 주제로 글을 쓰게 된 동기는 대략 이렇다.
“목사님은 글도 잘 쓰시고 매사를 예리한 시각으로 보시고 정확하게 판단하시는데 한국 교회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침묵하고 계십니까?” 이런 질문을 주변에 아는 집사님으로부터 받았었는데 이 질문의 요지는 당신은 문제 많은 한국교회는 왜 비판하지 않느냐? 고 하는 것이다.
지난해 한국에 나갔을 때 우연의 일치였는지 명성교회 사건의 한 가운데서 총회 재판국장이셨던 이만규 목사님과 증경 총회장이신 최기학 목사님을 개인적으로 뵐 기회가 있었고 최근 명성교회 장로님 한 분도 만났었다. 특별히 증경 총회장님과는 장시간 대화를 나누었는데 진솔, 겸손하시고 교단과 명성교회를 무척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감사한 것은 필자의 의견을 진지하게 들어 주셨고 또한 당신의 깊은 속내를 나누어 주시기도 하셨다.
지금부터 나열되는 이야기는 위의 분들과 나눴던 내용들인데 기억을 더듬어 정리해 보며 성령의 영감에 따라 필자의 의견을 나누고자 한다.
필자가 교회를 비판하지 않는 이유와 교회 세습 반대자들에 대한 견해
만약 필자가 지금까지 경험해 온 한국교회에 대해 날선 검을 들이대며 일일이 들추어 낸 다면 나 보다 더 잘 할 사람이 있을까? 이런 일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것이며 책이라도 몇 권 쓰고도 남았을 것이다. 필자와 같이 신앙생활 하면서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경험한 사람은 아마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수십 년 전 군인시절. 부교역자 시절과 선교사로 파송 받을 때의 꿈을 꾸기도 하는데 얼마나 뼈에 사무쳤으면 아직까지 그런 악몽을 꿀까? 한 동안 깊은 생각에 젖어 보기도 한다.
소위 대학을 나와서 신대원 3년하고 목사가 되어 서울 큰 교회를 두루 섭렵하며 교수로 스펙을 쌓고 집안의 후광을 입고 대형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한 소위 목사계의 금수저들이 변방에서 평생을 받치고 목회를 마감하며 노후를 걱정하는 흙수저 목사들과 세계에 흩어져서 주님의 지상 명령에 순종하여 고군분투하며 혹 후원교회가 끊길까? 선교비가 줄어들까? 고민하는 선교사들의 마음을 얼마나 헤아릴 수 있을까?
요즘 그런 목사들이 한국교회를 바로 잡아야 한다며 교회 세습 결사반대 투사가 되어 명성교회를 타겟으로 삼아 온갖 매체를 동원하여 마구 돌팔매질을 해대며 강단에서 성토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피켓을 들고 일인 시위까지 하는데 이것이 과연 잘 하는 일인가?
필자도 목회 30년을 회고하며 한국교회 한을 품고 적폐청산, 교회 바로 세우기 팻말을 들고 정의감에 불타서 글을 써서 좌파 안티 신문에 넘기고 한국교회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들추어낸다면 누구보다 더 잘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잘 하는 일일까? 이런 행동이 하나님을 예수님을 성령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동일까? 먼저 생각해 보게 되어 말을 아끼게 된다.
하지만 이 분들은 평생 강단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야 한다고 목청을 돋우었는데 작금의 그들의 행위는 과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일까? 되묻고 싶지 않을 수 없다.
전편에서도 언급한 바가 있지만 현재 돌아가는 한국교회 분위기를 보면 성경의 진주 같은 말씀들이 떠올라서 이 시대를 대비해 보며 교훈을 얻고자 한다.
1. 명성교회를 둘로 쪼개어 나눠 가지자고 하면 분명 지게 된다.
열왕기에 보면 솔로몬의 유명한 재판 일화가 있다. 여인 둘이 잠을 자다가 잠버릇이 험한 한 여인이 자기 아들을 깔아뭉개 죽이고 나서 살그머니 다른 여인의 아기와 바꿔치기를 했다. 나중에 다른 여인이 일어나 보니까 자기가 죽은 아이를 껴안고 있었는데 이 아이는 자기 아들이 아니었고 건너편 여인이 안고 있는 아들이 분명 자신의 아이였다.
급기야 이들은 솔로몬의 재판 앞에 서게 된다. “칼을 가져 오너라! 둘로 쪼개서 공평하게 나눠 주어라” 여기서 친 어머니는 기겁을 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 아이를 죽이지 말고 차라리 저 여인에게 주시오” 그러나 다른 여인은 “쪼개어서 내 것도 저 여인의 것도 되지 말게 하시오” (왕상3:26)
이 때 솔로몬 왕은 이렇게 말한다. “이 아이를 첫 번째 여인에게 주어라”
지금 명성교회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두 토막 세 토막 칼질 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자들이 누구인가?
서울 장안의 큰 교회 양지만을 쫓아다니며 온갖 혜택과 기득권을 다 누린 자들이 아닐까? 은퇴해서도 아무 걱정도 없고 갈 곳도 많고 원고료, 강사료만 챙겨도 다 못다 쓸 분들이 아닌가?
여기서 필자의 눈에는 이 분들의 맹렬한 활약이 마치 솔로몬의 재판과 캡처 되면서 명성교회를 두 동강 내어 내 것도 네 것도 되지 말게 하자는 계모 여인과 같음을 지울 수 없다. 자신들의 행동이 이 못된 여인과 같음을 좀 깨달았으면 좋겠다.
2. 명성교회를 뒷발질 하는 것은 고생이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라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행26:14)
이들을 보면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는 살기충천한 사울과 같음을 느낀다.
사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예수 믿는 사람을 마구 잡아 가두고 죽이는데 열성 당원이었으며 스테반 집사를 죽이는데도 가담했다.
여기서 그가 하나님께 칭찬 받았을까? 아니면 책망 받았을까?
그는 도상에서 갑자기 눈이 멀었고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라” 주님께로부터 심한 서운함의 책망을 들어야 했다.
여기서 예수를 못 믿게 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며 대적하는 행위란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교회세습을 막음으로 하나님의 교회의 질서를 바로 세우고 전도가 막히지 않고 사회적인 지탄을 방지 한다는 명분하에 명성교회를 둘로 쪼개고 박살내어 공중분해 시키는 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일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사울처럼 그렇게 하는가? 그렇게 확신과 마음의 평안이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래서 내가 응답받고 이 일을 하고 있다면 사울도 다메섹으로 갈 때까지 그런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자리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미루어 보건데 사울내면에 진정한 평안이 없었다.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라” 교회 세습을 너무 지나치게 반대하는 자들에게 필자는 이런 경고를 드리고 싶다. “가시채를 뒷발질하지 마시라, 도리어 고생이시다. 내면에 진정한 평안이 없다”
3. 명성교회 훼방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 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행5:38~39)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베드로와 사도들을 유대인들이 죽이려할 때 존경받던 바리새인 가말리엘이 나서서 경고한 구절인데 필자도 선교지에서 힘들고 어려울 때 마다 수없이 읊조리며 적용한 구절이기도 하다. 참고로 필자는 자동차 회사를 다니다가 신학을 하여 목사가 되었고 18년 전 남아공 선교사로 파송 받아 선교지에서 5년 전에 교회를 건축하고 지금 현지인 목회를 하고 있다.
“내가 목사가 된 것이 사람의 뜻으로 되었으면 무너지겠고 하나님의 뜻으로 되었으면 끝까지 가리라”
“이 교회가 세워진 것이 사람의 뜻으로 세웠으면 무너질 것이요 하나님의 뜻으로 세웠으면 견고히 세 워지리라”
지금의 명성교회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교회 후임을 사람이 세웠으면 무너질 것이며, 하나님께서 세웠으면 그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을 것이다. 그 다음 구절이 더 무섭지 않은가? “너희가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이 얼마나 무서운 경고의 말씀인가? 지금 명성교회에 대해 날선 공격을 퍼붓는 자들이 이 구절에서 자유 할 수 있을까? 여기서 나의 행위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아닐까? 신중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4. 명성교회를 집요하게 공격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요셉은 17세에 형들에 의해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가서 숱한 고생 끝에 대국의 총리가 되고 인생 역전의 주인공이 된 인물이다. 그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수 없이 많지만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에 형들에게 보여준 그의 행동은 그가 어떤 신앙의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며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가로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창50:18~19)
아버지 야곱을 장사 지낸 후에 10명의 형들은 동생 요셉이 자신들을 보복할 것으로 생각하여 동생을 찾아와서 엎드리며 종이 될 것을 자청하였다. 여기서 요셉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어찌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습니까?”
무슨 말인가? 형들에게 손을 내밀어 복수를 하면 그 자신이 하나님이 된다는 의미이며 손을 대는 그 영역은 하나님의 권한이라는 것이다.
이로 보건데 명성교회나 다른 교회를 향한 사람들의 지나친 간섭과 공격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월권 행위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영역과 권한을 침범하는 행위는 곧 자신이 하나님이 되는 교만의 극치를 달리는 루시퍼의 우를 범하는 것이며 참으로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누구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으며 대신 해서도 안 된다. 여기서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앞서가는 사람들은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며 낮추고 하나님을 대신 하는 것을 멈추고 눈물로 회개해야 한다.
5. 명성교회 세습반대는 하나님께 칭찬과 상급이 없다
1) 하나님의 권위 앞에 더 겸손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사울은 충신 다윗을 죽이기 위해 군대를 총 동원하여 집요하게 추적하였다. 다윗은 세 번씩이나 사울을 제거할 기회가 있었지만 살려 주었다.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일 충분한 명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다.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하지 아니 하였음이니이다] (삼상26:24)
그 때 다윗이 사울을 죽였다면 당장에는 속이 후련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를 쳤다고 하는 죄책감과 오명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을까? 과연 다윗이 이 일로 칭찬받았을까? 필자는 이것을 이미 알고 있던 다윗이 이를 악물고 참고 후일에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했을 것으로 본다. 사실 이것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점수를 많이 얻었던 것이다.
여기서 상황은 좀 다르지만 명분이야 어찌 되었던 간에 명성교회를 적용시켜 볼 필요가 있다.
교회세습을 반대하며 우겨 싼 세력들이 무릇 세 번씩이나 명성교회를 아웃시킬 충분한 대의명분과 기회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종과 교회를 아웃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이며 칭찬받을 일일까? 이들은 진정 하나님의 권위 앞에서 더 겸손해 지고 두려워해야 한다.
2) 이것으로는 칭찬과 상을 받지 못한다
압살롬은 다윗의 여섯 아들 중 셋째 아들로 그술왕 달매의 딸 마아가가 낳은 용모가 아주 출중한 왕자였다. 그에게는 이복형 장남 암논이 있었는데 이가 자신의 친누이 다말을 강간하자 이에 앙심을 품고 형을 죽임으로서 그의 인생 파멸의 서곡이 시작된다.
이 사건으로 사이가 벌어진 부자지간이 요압장군의 중재로 2년 만에 화해를 하고 압살롬이 궁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가 결국 아버지를 왕위에서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황급히 망명길에 오른 아버지를 압살롬은 퇴로조차 열어주지 않고 고도로 훈련된 군사를 동원하여 추적하여 죽이려 했고 백주에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하는 패륜을 저질렀다.
이런 패륜의 아들 압살롬을 향한 아버지 다윗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당장 그 자리에서 목을 잘라도 성이 차지 않았을 것이며 그 목에 현상금이라도 걸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나 여기서 필자가 주목해 보는 것이 있다. 다윗은 자신의 군사들에게 압살롬을 죽이지 말 것을 당부했다고 하는 것이다.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장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 (삼하18:5)
결국 압살롬은 다윗의 용장 요압의 벽을 넘지 못하고 머리가 수풀에 걸려 그의 칼에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가 죽은 소식을 빨리 다윗에게 알리고픈 병사가 있었는데 제사장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였다. 그러나 요압은 이를 제지한다.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다시 요압에게 이르되 `청컨대 아무쪼록 나로 또한 구스 사람의 뒤를 따라 달음질하게 하소서’ 요압이 가로되 `내 아들아 왜 달음질하려 하느냐? 이 소식으로 인하여는 상을 받지 못하리라’] (삼하18:22)
이 소식을 왕에게 알려 보았자 상을 얻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왕이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승전보고 인데 왜 이 소식을 알리면 상을 얻지 못할까?
이와 유사한 일들이 사울이 죽었을 때도 나온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길보아 전투에서 세 아들 요나단, 아비나답, 말기수아와 함께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 소식을 처음 다윗에게 전한 아말렉인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중상을 입고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사울 왕의 요청에 의해 요즘 말로 안락사를 시킨 후 흥분하여 요즘 같으면 인증 샷을 찍었을 테지만 그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 사울의 왕관과 팔찌를 가지고 다윗 왕에게로 왔다.
이 청년은 어떻게 되었을까? 다윗에게 칭찬받고 큰 상금을 받았을까?
이 젊은이는 이런 승전보를 올림으로 다윗 왕으로부터 내심 어떤 상급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그와 정반대였다.
[다윗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소년 중 하나를 불러 이르되 `가까이 가서 저를 죽이라’ 하매 그가 치매 곧 죽으니라] (삼하1:14~15)
칭찬과 상금은 커녕 도리어 죽임을 당했다. 여기서 요압 장군의 판단과 기지가 뛰어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이미 그가 압살롬을 통해 다윗의 복심이 어떠함을 간파했기 때문이며 그래서 아들의 전사 소식을 먼저 알리지 말라고 했고 알려 보았자 다윗이 결코 기뻐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알았던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데, 필자는 여기서 하나님의 마음도 이와 같다고 본다.
교회 세습 방지를 명분 삼아 명성교회를 난도질 하고 공중분해 한 후 하나님 앞에 전리품을 갖다 바치면 하나님은 무어라 하실까? 명성교회가 거꾸러진 것을 보고 춤을 추며 이 소식을 하나님께 빨리 알리면 과연 하나님께로부터 칭찬과 상급을 받을 수 있을까?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성경을 좀 더 자세히 읽고 하나님의 진정한 의중을 바로 알아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명성교회를 박살냈다는 승전보와 전리품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할 뿐만 아니라 절대로 상을 얻지 못한다. 도리어 심한 책망과 함께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요압의 지혜를 배우고 하나님의 진정한 복심이 무엇인지? 먼저 파악하고 경험하는 것이 이 시점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3) 명성교회를 뽑아내어서는 안 된다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 하노라] (마13:29~29)
만보 양보해서 명성교회가 가라지라고 하더라도 그냥 두어야 한다. 아니 그냥 두는 게 맞다. 왜냐하면 주변의 곡식이 같이 뽑히어 다치기 때문이다. 세습방지, 교회 정의의 명목아래 그 잘난 사람들끼리 피터지게 싸우는 동안 상처 받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과 아예 교회에 담을 쌓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는 왜 생각을 하지 않는지? 한국교회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것 같아서 참으로 안타깝다.
필자가 왜 한국교회를 비판하지 않느냐 하는 물음에는 이미 답이 나와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바라 건데 한국교회는 세습방지를 위해 싸우는 그 힘 절반만이라도 들여 온 세계를 어지럽게 하고 있는 신천지를 비롯하여 각종 이단과 싸우고 국내 전도와 세계 선교에 더 큰 힘을 기울이고 어지러운 이 사회 정국에 불의와 불법과 부정을 향해 한국교회가 합심하여 싸워 나가길 간절히 부탁드린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갈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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