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 [19]

광주시민을 사격 표적으로 배치한 도청방어 작전

[LA=시니어타임즈US] 본지는 2019년 1월부터 518사건과 관련한 신간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The War of 5∙18 History between Moon Jae-in and Chun Doo Whan)>을 저자와의 합의 하에 연재를 시작한다.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은 5.18사태 전문가인 김대령 박사의 16년간의 연구 결산으로 지난해 11월 26일을 기해 출간됐으며, 인터넷 서점 아마존(www.amazon.com)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편집자주>

폭도들 중 다수가 군복을 입고 지프차를 타고 있었기에 광주 시민들은 군인과 시민군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제3장 ∙ 광주시민 쏜 5·18 유공자들

5. 광주시민을 사격 표적으로 배치한 도청방어 작전

시민군 도청 사수라는 용어는 사실 잘못된 용어이다. 5월 27일 새벽에 도청광장에 배치되었던 고등학생들 대부분은 한번도 도청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던 학생들이었다. 그 청소년들은 대부분이 5월 26일 밤에 남녀 학생들이 공짜 저녁밥을 같이 먹으며 어울리는 재미에 집에 안가고 YMCA 강당에 모여 있다가 거기서 잠을 자게 된 것이었다. 그들에게 언제부터 도청을 사수하려는 목표가 있었는가? 이 아이들은 국군과 전투하며 도청을 사수하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었다.

도청사수의 개념이 성립하려면 도대체 무장한 난동자들이 도청을 점거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이 있어야 한다. 만약 국군이 난동자들의 무기를 회수한 것이 잘못이라면 38년이 지난 지금도 난동자들이 도청을 점령하고 있어야 한다는 논리인가? 괴무장단체가 도청을 점령하고 있는 동안에는 전라남도 전체의 행정과 치안이 마비되었고 난동자들이 모든 차를 징발하였기애 광주에 전혀 공중 교통수단이 없었으며 생필품 보급도 안되었다. 80만 광주시민들 중에서 그런 상태가 영구히 지속되는 도청 사수를 원하는 시민은 10명도 채 안되었다.

수학적 수치로 따지면 5월 27일 새벽에 난동자들의 무기가 계엄군 무기보다 훨씬 많았다. 도청 난동자들의 무기 강제회수작전에 투입된 계엄군 특공대는 총 66명으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난동자들 수가 최소 3배 더 많았다. 계엄군의 M16은 66정이요, 난동자들이 보유한 M16은 최소 34정이었다. 여기에 난동자들은3,600여정의 카빈소총을 비롯한 각종 총기류 수천 정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도청 옥상과 전일빌딩 옥상과 전남대 병원 옥상 위에 기관총을 설치해 놓고 있었다.

이 날 새벽 시내 요소요소에 배치된 공비 부역자들의 수도 백명 내지 2 백명 일 것으로 추산된다 (Cf. 風間公一 1985, 269). 이때 도청광장에서 서편으로 금남로 일대는 물론 금남로 한참 저편으로 유동 삼거리와 계림국민학교까지 괴무장단체가 배치되어 있었다. 황석영은 괴무장단체의 계림국민학교 매복작전 목표를 이렇게 기록한다: 도청 상황실로부터 계엄군이 진입할 것이 확실하다는 통보를 받고 YMCA에서 대기 중이던 외곽 배치 병력은 신속하게 그들의 방어지역으로 이동했다. 계림국민학교 부근에는 30여 명의 병력이 육교를 중심으로 좌우의 건물과 학교의 담을 엄폐물로 삼아 서방과 오치 방면에서 들어오는 계엄군을 차단할 계획이었다 (황석영 1985, 237).

광주사태 주동자들 및 무장시민들은 도청 본관 2층 민원실을 회의실겸 식당으로 사용하며 잠도 여기서 같이 잤다. 그럼에도 무장봉기 지도부의 외무담당 부위원장 정상용과 기획위원 이양현은 새벽 3시경에 “약 2백명쯤 되는 사람들이 도청에서 무기 지급을 받은 후 지프나 트럭에 분승되어 어디론가 어두운 거리를 향해 떠났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1988~89년의 광주청문회 때도 정상용과 이양현은 이 기본적인 중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위증을 하였다.

5월 27일 새벽 도청 안에는 오합지졸들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오합지졸들의 전투대형이 광주시민을 사격 표적으로 하고 있었다. 박남선은 자신의 지휘 하에 민원실 옥상, 즉 도청 건물 옥상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상무관 옆의 전일빌딩 옥상에도 기관총을 설치하고, 도청 본관건물 앞과 양 옆으로 시민군을 배치한 사실을 이렇게 기록한다: 상황병이 칼빈 한자루와 실탄 3크립을 가져왔다. 묵직한 소총과 탄창을 받아쥐고 부실장과 통제관을 불렀다.
『도청에 남아 있는 병력이 얼마나 되지?』
『글쎄요. 정확한 숫자는 파악이 안되고 경비만 병력과 민원부서 사람들 그리고 YWCA에서 들어온 학생과 시민 전부해서 1백여명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그 사람들을 본관건물 앞과 측면에 밀집배치하지!』
『예! 알겠습니다.』
『전일빙딩 옥상과 민원실 옥상의 기관총 설치는 끝났나?』
『예, 캐리버50과 LMG를 배치하고 실탄도 충분히 지급했습니다.』
『자! 그럼 이곳의 방어병력배치를 끝내시오』 (박남선 1988, 379).

새벽 4시 직전에 위성삼이 약 50명의 무장시민들을 정문을 앞으로 해서 10명씩 배치시켰다. 1989년 3월 13일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 현장검증 소위원회가 광주현장에서 있었다. 이 날 위성삼 증인은 27일 새벽 4시경에 무장시민군이 서쪽 금남로를 향해 도청 담장 앞에 10명씩 배치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 때 당시 저희 자체내에서 비상이 걸려서 모든 사람들이 당시 정비가 됩니다. 그때 제가 경비를 담당했는 데 그 때 총 한 자루와 실탄 20발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기 전에는 실탄을 소지한 사람은 일부였지 전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앞을 배치시켰는 데 배치시키기 전에 시민군의 안전을 위해서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정문을 앞으로 해서 10명씩 배치시켰습니다 (제145회 국회 1989, 4:2).

광주운동권으로서 윤상원의 최측근 동지들이였던 정상용과 이양현은 새벽 4시경에 위성삼이 50명의 무장시민들을 도청 정문 주변에 배치한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위성삼이 주로 고둥학생들인 학생들 50여명을 골라 도청 정문 앞에 배치하기 직전에 박남선 상황실장이 무장봉기 홍보요원이었던 송원공업전문대 보육과 2학년 여학생 박영순에게 광주 전지역에서 들리는 방송을 하도록 시켰다. 황석영의 책에는 박영순이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 가고 있읍니다. 우리 모두 일어나서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라고 청승맞게 울부짖으며 시민들을 선동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황석영 1985, 236).

만약 박영순이 그 문장 그대로 방송하였다면 그것은 전옥주 못지 않은 허위사실 유포였다. 그때는 계엄군이 도청에 도착하기 한두 시간 전이었고, 그때까지 박영순은 숨져가는 사람은커녕 계엄군을 본 적조차 없었다. 당시에는 도청에 민방위용 대형 옥외스피커가 있었으며, 박영순은 그 스피커로 방송하였다 (박영순 2016).

당연히 도청 안에서 그 소리가 귀청이 떨어져 나갈 만큼 가장 잘 들렸다. 박영순은 도청 안 방송실에서 방송하였으나, 광주시민들은 전옥주가 가두방송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청 앞으로 모이라는 선동 방송에 응하는 시민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전남대 운동권 학생 전용호는 YWCA에서 투사회보를 제작하던 중 윤상원을 만나러 도청으로 가던 길에 박영순의 방송을 들은 후에 오히려 발걸음을 돌려 도망갔던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27일 새벽 3시쯤 여자(박영순) 목소리가 들렸다.
“시민 여러분! 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 먼저 여자들을 뒤문으로 해서 산수동 쪽으로 대피를 시키고 남자 20여 명이 남았다. 나와 김상집 선배는 도청에 가 보기로 하고 도청으로 향했다. 가면서 우리는 도청 앞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을 줄 알았는데 사람들은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 겁이 나서 나도 녹두서점으로 들어가버렸다.
조금 있으니까 총소리도 나고 헬기 소리도 들렸다. 방안에서 꼼짝도 못 하고 있다가 아침 8시쯤 일어나 세수를 했다. 9시쯤 되자 한두 명씩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나도 궐기대회 때 낭독했던 궐기문을 가지고 녹두서점에서 나왔다. (전용호 1988).

전용호가 윤상원에게 무기 지급을 받으러 도청 정문까지 왔다가 발걸음을 딴 데로 돌려 녹두서점으로 도망간 후 조금 있다가 총소리가 났다. 아래의 여러 부장시민들의 증언들을 살펴보면 5월 27일 새벽 4시경을 기하여 무장시민들의 최초 발포 시점 및 발포 경위와 동기 등을 파악할 수 있다.

광주의 대표적 5·18시민군 윤기권은 실은 5월 27일 도청을 사수한 것이 아니라 도망갔다. 그는 도청을 지키러 가겠다는 당초의 약속을 깨고 도망가기 직전 자신이 목격한 사실과 심정을 이렇게 증언한다: 새벽 3시경 누군가가 “계엄군들이 밀고 들어온다”고 외쳤다. 그 말을 듣고 모두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나는 부상때문에 YMCA 밖으로 나가지 않고 헬스 클럽으로 들어가 엎드려 있었다. 고막이 찢어질 듯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가까이서 들리니까 무서웠다. 잠깐 밖을 내다보니 바로 문 앞에서 총 쏘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그 청년이 총을 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아마도 죽었을 것이다. 나는 헬스 클럽에 엎드려 있다가 위험할 것 같아 그 안에 있는 샤워 장으로 들어갔다. 문이 녹슬어 있어서 사용하지 않는 곳인 듯했지만 문을 밀어보니까 열렸다. 안으로 문을 잠가버린 다음 숨을 죽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헬리콥터가 저공비행을 하는지 날개 소리가 굉장히 시끄럽게 들리면서 숨어 있는 폭도들은 자수하라고 계속해서 방송을 했다. 나는 숨이 막혀버릴 것 같은 긴장과 공포 속에서 자수할까도 생각해 보았다(윤기권 1989).

실제로는 계엄군이 도청 뒷담에 도착한 시간은 그로부터 한 시간 지나서였고, YMCA로는 나중에라도 계엄군이 온 적이 없었다. 그러나 박영순의 옥외방송이 이미 계엄군이 밀고 들어왔다는 느낌을 주었고, 도청에 가서 무기 지급을 받은 고등학생들이 막 도착해 있었다.

북한군 황두일은 5월 26일 밤에 YMCA 강당에서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사격훈련만 실시한 것이 아니라 사상 교육도 하였다. 윤기권이 시민군 활동 보상금 2억원을 수령하기 전에 작성한 5·18 증언록에는 황두일과의 대화 내용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26일 시위대를 따라다니다가 그날은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도청 앞에 있는 YMCA에서 잠을 잤다. 항상 덕준이와 1년 후배인 유석이와 함께였는데 2백 ∼3백 명 정도였다. 나이가 좀 들어보이는 청년이 총 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총이 모자라 각자 총을 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설명만 들었다. 밥은 도청에서 직접 여대생들과 아줌마들이 해가지고 왔다. 우리는 밥을 먹고 난 다음 모두 앉아서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직접 일어나서 질문도 하였다. “사람들은 보통 우리나라를 말할 때 남한만을 말하는데 실질적으로 삼천리 강토 전체의 사람들이 전부 우리나라가 아닙니까?” “오랫동안 분단이 지속되다 보니까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남한만으로 생각하게 된 것뿐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 청년이 대답해 주었다. 우리들은 체계적으로 토론을 벌인 것이 아니라 끼리끼리 모여앉아 중구난방으로 이야기를 했다 (윤기권 1989).

이렇듯 대동고 학생 윤기권(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의원 동창)은 광주사태 때 공비 부역을 하며 북한군 황두일에게 받은 사상 교육의 영향으로 훗날 월북하여 북한 대남 선전부에서 근무하였다. 5월 26일 밤에 YMCA 회관에서 취침하던 고등학생들에게는 비상이 걸리면 도청으로 가서 무기 지급을 받으라는 지시가 내려져 있었다. 그러나 윤기권은 그 지시를 거역하고 헬스 클럽으로 들어가 엎드려 있었기에 황두일이 쏘는 총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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