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혜 칼럼] 추방

• 남자의 눈물(1)

여러분은 남자가 눈물을 흘릴 때는 어떤 때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제가 알고 있는 K선교사는 창의적 접근지역인 C국에서 선교사역을 감당 하다가 추방을 경험 하였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남자 선교사가 추방을 당하는 법인데, k선교사의 가정은 반대로 아내인 여선교사가 추방을 당했습니다. 아내 선교사가 현지인 청년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는 죄 아닌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K선교사는 아내가 추방을 당했지만 목양하고 있는 교회가 있어 쉽게 나올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내와 가족들을 만나러 가끔 한국에 나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추방으로 급하게 나가느라 옷이며 자신의 물건들을 미처 가져가지 못한 것을 가져다 달라고 아내는 부탁하곤 했습니다.

K선교사는 아내가 다 챙겨가지 못한 아내의 옷을 장롱에서 꺼내어 하나하나 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눈물이 핑그르 돌았습니다. 자신 곁에 없는 아내의 옷을 싸고 있는 그의 손끝이 떨렸습니다. 가슴 한켠이 싸하게 저려왔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다행히 아내가 살아 있기에 옷을 가져다주려고 챙기고 있는데도 이렇게 울컥한데, 아내가 죽어서 죽은 아내의 옷을 챙기고 있다면 얼마나 슬플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니 비록 나는 선교지에, 아내는 추방되어 한국에 있어도 서로 살아 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 얼마나 크나큰 주님의 은혜인가…, 그렇기에 이럴 때 흘리는 남자의 눈물은 그래도 희망 입니다.

• 남자의 눈물(2)

아내가 선교지에서 추방되어 떠나고 난후, 혼자 남은 K 선교사의 면전에 닥친 문제는 먹는 문제였습니다. K선교사는 매일 세끼 식사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습니다.

30년 가까운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아내와 헤어져 살아본 경험이 별로 없는 K선교사에게는 혼자서 식사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 먹어야 하지? 고민하던 K선교사는 무릎을 “탁!!” 쳤습니다. 그는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그래, 맞아 그게 있었지, 이 때가 올 걸 알고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 주신거구나.”

K선교사가 기뻐한 것은 석달 전인가 한국에 나갔다 오는 길에 본인이 직접 사서 들고 온 ‘요리책’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동안 오십 여년 살아오면서 수많은 책을 샀지만 한 번도 요리책을 산적은 없는 K선교사였습니다.

그런데 석 달 전 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눈에 띤 요리책을 두 권 사들고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리솜씨가 좋은 아내에게 그 책을 보라고 산 것도 아니었습니다. 딱히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들고 와서 생각 없이 던져두었던 두 권의 요리책!

그것이 이렇게 필요할 때가 올 줄이야 K선교사 자신도 꿈에도 몰랐던 일입니다. 그 요리책에는 찌개와 국 끓이는 법에서부터 나물 무치고 오뎅 볶는 법까지 다 나와 있으니 일단 식사문제가 해결된 셈입니다.

하나님의 주밀하신 도우심에 k선교사는 잠시 아내가 없이 혼자 남았다는 외로움도 잠시 잊고, 은혜의 감격 속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 남자의 눈물(3)

아내 없이 혼자서 선교지에서 일 년을 보냈을 때 선교부에서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일단 6개월의 안식년을 갖으라는 것입니다. 부랴부랴 후임 목회자를 구해 교회를 맡기고 돌아온 k선교사는 우선 옥천의 바나바 훈련원에 연결이 되어 영성훈련을 받았습니다.

바나바 훈련원에서는 청주지역을 책임지고 중국인 유학생을 사역할 사람을 찾고 있던 중 k선교사가 기도의 응답이라고 하면서 사역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K선교사는 청주의 대학근교에 월세방을 하나 얻어서 지내면서 청주에 유학와 있는 중국유학생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선교부와는 아내 N 선교사의 비자가 풀리면 다시 선교지로 돌아가는 것으로 허락을 받았기에 그동안 의미 있는 중국유학생 사역을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K 선교사는 후원교회들에게 이런 사실을 자세히 서면으로 보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응답은 국내에서의 타문화사역을 시작하는 것에 대한 격려가 아니었습니다. 매정하게도 그 다음달부터 후원금을 중지한 것입니다. 선교사가 안식년을 보내러 고국에 돌아오면 안식년이 아니라 ‘안식년’이 된다는 말을 이미 경험한 선교사들에게 듣고 있었지만 k선교사 자신의 삶에 그대로 현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k선교사는 선교후원비가 중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역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선교의 열정을 불태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청주 C대학교의 법학대 학장님을 지인의 소개로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는 모교회의 장로님으로서 영혼구령에 뜨거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법대 학장님의 소개로 알게 된 박사과정의 여교수(본국대학교수) 한 사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여교수의 가장 큰 고민은 논문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한국어로 쓰는 논문이 어렵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대학에서 국어교육학 전공에 오랜 교사와 교수의 경험을 가진 k선교사에겐 가장 잘 도와 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어느날 입니다. 매일 논문을 무보수로 도와주는 K 선교사가 목사의 신분인 것을 안 여교수는 자기 스스로 교회에 나오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만 인사로 나오려던 그 여교수를 하나님께서 만져주셨습니다. 예배 전 부르는 찬송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던 그 여교수는 결국 그 교회의 새신자가 되어서 매 주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한국교회가 선교지로 정한 C국의 법학대 여교수는 교회의 새신자 훈련과 나와 함께 하는 성경공부를 하며 믿음의 삶을 배워나갔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도우시니 박사 논문도 잘 마쳤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여교수는 예수님 만나 새생명을 얻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C국에서 온 여교수는 후원이 끊기는 고난 가운데서도 영혼구원의 미션을 수행한 k선교사의 아름다운 열매였던 것입니다.

• 남자의 눈물(4)

청주에서 시작한 중국유학생 사역에는 점점 물이 오르고 있었습니다. C대학교에는 중국인 유학생이 1,600명 가량 와서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유학생들을 위한 아파트를 따로지어 최대 3천명 가량 수용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대학교들이 미래에 살아남으려면 이제는 해외 유학생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실정에 봉착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외 유학생들이 우리나라에 찾아오던 초창기에만 해도 유학생들은 대부분 수도권의 대학교에 몰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지방의 대학교들과 2,3년제 전문학교들도 해외 유학생을 유치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선 것입니다. 당연히 해외 유학생 중 가장 많은 유학생은 중국학생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지방일수록 중국 유학생 일색이었습니다.

해외 유학생들이 무더기로 들어오기 시작하자, 대학에서 가르치는 기독교수들은 저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의 부담을 대부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수 자신들은 전공을 가르쳐야 함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 시점에서 만난 K 선교사를 C대학교의 기독교수님들은 아주 반가워했습니다.

기독교수 가운데서도 법대 학장이신 장로님은 K선교사가 복음전도 사역을 잘 할 수 있도록, 강의실을 쓸 수 있게 해 주고, 종종 교수님들은 유학생들과 K선교사에게 점심대접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호의는 그 이상을 감당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기독대학이 아니기에 행정상 어떤 후원 이라든가 하는 도움을 줄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k선교사는 자신의 월세방에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중국 유학생 선교 사역에 물이 오르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k선교사를 그동안 지원하던 교회들이 하나하나 후원을 중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역자요 선교사이기 이전에 한 가정의 가장인 자신의 책임을 생각하며 k 선교사는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어머니의 생활비도 K선교사가 담당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삶의 무게가 더욱 무겁게 느껴지기만 했습니다.

K선교사는 입을 열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의 뜻대로 살려는 저이지만 저의 선교사역을 지원하던 교회들이 더 이상 저를 돕지 않습니다. 한국교회의 타문화에 대한 선교패러다임이 바뀌지 않는 한 이 어려움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 저를 태초부터 택하시고 선교사로 부르신 아버지여, 제가 주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끝까지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여 주옵소서. 후원이 다 끊겨져 비록 수제비만 먹고 사는 한이 있어도 선교하게 하옵소서”

이와 같이 기도하는 k 선교사의 눈에서는 어느덧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여간해서 눈물을 보이지 않는 남자가 흘리는 눈물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기억하시는 눈물일 겁니다.

예수님을 너무도 사랑했기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사가 되었고,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들이 너무도 고마워 복음의 빚진 마음으로 선교지로 향하여 갔던 k 선교사였습니다.

K선교사에게 있어서 삶이란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복음전도자로 사는 그 삶에 고난이 있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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