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7일 새벽의 무장시민 사망원인
[LA=시니어타임즈US] 본지는 2019년 1월부터 518사건과 관련한 신간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The War of 5∙18 History between Moon Jae-in and Chun Doo Whan)>을 저자와의 합의 하에 연재를 시작한다.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은 5.18사태 전문가인 김대령 박사의 16년간의 연구 결산으로 지난해 11월 26일을 기해 출간됐으며, 인터넷 서점 아마존(www.amazon.com)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편집자주>
제3장 ∙ 광주시민 쏜 5·18 유공자들
8. 5월 27일 새벽의 무장시민 사망원인
5월 27일 새벽 도청 구간에서의 12명의 무장시민 희생자 전원은 무장한 광주시민들의 총기난사 희생자들이었다. 도청 건물 안에서 윤상원과 박병규 등 두 명의 무장시민이, 그리고 도청 돌담 바깥에서 광주상고 1학년 문재학과 안종필 등 10명의 무장시민이 이 사고로 희생당한 것은 3공수여단11대대 1지역대가 도청 본관에 도착하기 전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어둠 속에서 새벽 4시부터 서로 자기 편을 향해 총질을 하던 무장시민들은 동틀 무렵 막상 계엄군 모습이 눈에 띄기 시작하였을 때는 모두 순순히 무기를 버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항복하였다. 도청 안에서의 항복 과정에서 단 한 명의 무장시민도 총에 맞거나 총상을 입는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았다.
5월 27일의 새벽의 무장시민 사망자가 17명이라는 기록은 잘못된 기록이다. 계림국민학교 인근 두 명의 사망자 중 한 명은 무장시민이 아니라, 무장시민 총에 맞은 경찰관이었다. 1995년의 검찰보고서 139쪽에서 당시 14세의 서광여중 3년 김명숙 양도 17명의 시민군 사망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큰 오류이다. 광주시 동구 보건소장 명의로 작성된 1980년 5월 30일자 사망진단서에서 김명숙 양의 사망시간은 5월 27일 새벽이 아닌 오후 9시 35분이었으며, 그 장소도 전남대 정문앞 천변이었다.
5월 22일부터 26일 사이에 광주공원을 점령하고 있었던 괴무장 단체는 5월 26일 갑자기 광주에서 철수한 공비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광주공원 무장단체의 무기 회수작전은 7공수여단 특공조 181명이 맡았는데, 특공조가 광주공원에 도착하였을 때 의외로 그곳에는 무장시민이 아무도 없었다.
5월 27일 새벽에 무장폭도들의 무기 강제회수작전은 세 군데서 실시되었고, 그 중 한 곳이 전남도청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도청’과 ‘도청구간’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도청은 도청 돌담 안의 건물을 지칭하고, 도청구간은 돌담 바깥의 도청광장을 포함한다. 5월 27일 새벽에 도청광장에서 10 명의 무장시민들이 사망한 이유는 도청광장 쪽에 배치된 50 여명의 무장시민들을 향하여 도청 안의 무장시민들이 집중 사격하였기 때문이다.
5월 27일 새벽의 무장시민 사망자 총인원 15명 중에서 1명은 도청구간이 아닌 전혀 다른 장소에서 사망하였다. 2명은 계림국민학교 부근의 공비 매복지역에서 발생한 총격전으로 사망하였고, 두 명은 광주 YWCA 회관에서 박용준의 선제사격으로 발생한 총격전 희생자였다. YWCA 무장시민들의 무기회수 작전 임무는 11공수여단 61대대 특공조에 주어졌다. 사건전개 순서상 이 작전이 가장 나중이었다.
5월 27일 이른 아침에 도청 쪽에서 들린 총소리는 계엄군이 쏜 총소리가 아니라, 도청 안 무장시민들이 어둠 속에서 도청 바깥 무장 시민들을 향해 쏘는 총소리였다. 동틀 무렵 임수원 중령의 인솔 하에 수십 명의 3공수 특공조가 도착하였을 때는 아무도 저항하지 않고 모두 순순히 항복하였으므로 특공조는 금방 도청을 무혈 탈환하였다. 도청과 달리 YWCA에서는 총격전이 발생한 이유는 아침 6시경 계엄군이 항복 권유 방송을 하자 광주운동권 박용준이 회관 위층에서 건물 바깥 길거리의 군인들을 향해 맹렬하게 총을 쏘았기 때문이었다.
5월 27일 아침 경찰을 제외한 민간인 사망자 수는 총 15명이었는데, 도청광장에서 광주시민들의 총에 맞아 사망한 10명과 YWCA 전투 사망자 2명을 제외한 나머지 2명은 도청 건물 내에서의 광주시민들의 총기 오발 사고 희생자들이었다.
도청 안 무장시민들의 무기회수작전 임무는 장교 13명과 사병 66명으로 구성된 3공수여단 11대대 특공대에 주어졌는데, 그들의 임무는 광주학살도 무장시민 사살도 아니었다. 그들의 작전목표는 무장한 난동자들과의 전투가 아니라 항복 유도였다. 광주운동권으로서 무장봉기 지도부 기획위원으로 선출된 이양현의 아래의 증언을 살펴보면 무장시민에게 총을 겨느지도 쏘지도 않았던 계엄군과 달리 무장시민들은 살의를 품고 국군을 향해 조준사격을 하였다:
그때 밖은 이미 동이 터서 사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수협 공판장 앞에도 8∼9명의 계엄군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몇몇은 우리가 LMG를 설치해 놓은 전일빌딩으로 달려갔다.
계엄군이 도청 수위실을 점거하는 것도 보였다. 나는 그들을 향해 카빈총으로 탄환 한 클립을 다 쐈는데도, 그리고 내가 특등사수였는데도, 이상하게도 한 방도 맞지 않았다.
그때 등 뒤가 시원한 것 같아 돌아보니, 김영철 씨가 없었다. 옆방으로 가니까 그가 유리창 밑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는 그러다가 창너머로 총을 한 차례씩 갈겼다. 김영철 씨는 카빈으로 이미 창밖 베란다에 바짝 접근해 있는 계엄군을 향해 총을 한방 탕 쏘고 주저앉고, 또 한방 탕 쏘고 주저앉곤 했다. 그러자 계엄군도 M16을 드르륵 갈기고 숨고, 또 드르륵 갈기곤 숨곤 했다. 나는 그 방에 들어가 그걸 보면서 순간 나는 다른 생각이 싹없어지며 「이제 죽는구나」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 내 눈엔 계엄군이 보였는데, 총이 쏴지질 않았다. 그 계엄군도 나를 봤는데 총을 못 쏘는 것 같았다. 그저 보지 않고 방에 대고 드르륵 드르륵 갈기는 것 같았다. 나는 순간 총을 들어 그를 쏘려했다. 그 순간 「항복」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밖에다 대고 소리쳤다. 『항복! 항복!』 (月刊朝鮮특별취재반 1988, 447-448).
이양현이 증언하는 상황, 즉 계엄군이 항복 권유 방송을 하고 있었을 때 몇 명의 무장시민들이 여전히 M16 소총으로 전일빌딩과 분수대 방향으로 총기난사하고 있었던 상황을 박남선은 그의 가장 최근의 자서전 『오월그날: 시민군 상황실장 광주상황보고서』 87~88쪽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옆에 있던 한 시민군이 욕을 퍼부어 대면서 스피커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하여 자동으로 M16을 긁어댔다.
“와서 죽일 테면 죽여라, 이놈들아! 네 놈들한테는 죽어도 항복은 못한다!” 그는 악을 쓰면서 정신없이 총탄을 퍼부었다 총구는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하였다. 정신없이 무조건적으로 탄알이 빠저 나가 악마들 사이에서 춤추고 있을 것이다. 총을 쏘면서도 옆에 있던 시민군들은
“어이! 왜 이렇게 시간이 안가냐!”
“빨리 날이 새야 쓰것는디!”
“날이 얼른 새야 시민들이 나와서 우리를 도와줄건디!”
“계속 버티면 날이 세겠지 뭐!”
시민군들은 악에 바쳐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화를 나누며 총을 긁어대고 있었다(박남선 2014, 87-88).
이양현은 동이 트자 “수협 공판장 앞에도 8∼9명의 계엄군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고 말하지만 그때 수협 공판장 앞에는 그곳에 갑자기 배치된 천순남 보급부장 일행이 있었다. 이양현은 “계엄군이 도청 수위실을 점거하는 것도 보였다”고 말하지만 도청 수위실을 점거한 자는 상황 부실장 손남승 이었다. 이양현이 무장한 광주시민들을 저 멀리서 보고 계엄군으로 오인하였다. 이양현이 상황실이 가까이에 있는 수위실 쪽으로 총을 쏘니까 손남승도 계엄군이 도청 쪽에서 쏘는 것일 줄로 알고 응사하였던 것이다. 군복무 경험이 있는 이양현 마저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었을 때는 눈에 띄는 무장세력은 무조건 적이라고 오판하는 바람에 전남대 동문끼리 서로를 향하여 총을 쏘는, 즉 전남대 출신 이양현과 전남대 학생 손남승이 총격전을 벌이는 촌극이 벌어졌다.
무장시민들 중 가장 고학력자요, 특등 사수로서 군복무를 하였던 나이 32세의 이양현이 자신의 전남대 후배 손남승을 향하여 총을 쏘는 실수를 범하였다면 하물며 그의 나이 절반밖에 안되었던 청소년들, 새벽 3시경에 깡소주를 마셨던 청소년들의 경우는 어떠하였겠는가? 그런 청소년들에게 무기를 지급하고 사격 명령을 내렸을 때 광주시민이 광주시민 총에맞아 열사가 되는 사고는 예고되어 있었다. 김동수, 김종연, 이강수, 박성용, 유동운, 안종필, 문재학, 민병대, 문용동, 홍순권 등 10명이 모두 도청광장 쪽에 배치되어 있다가 도청 안 광주시민들의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임수원 3공수 11대대장이 오전 6시 30분에 20사단에 인계하고 부대로 복귀하기 직전 보고받은 작전 결과에서는 도청 구간의 무장시민 사망자 수가 4명이었다(제144회 국회 청문회 1989, 26:54). 1989년 2월의 제26차 광주청문회의 주요 쟁점 중의 하나가 임수원 중령 지휘 하의 무기회수작전 중 도청에서 사망한 무장시민들의 숫자였다. 임 중령이 보고받은 작전결과에서는 도청 담장 안의 무장시민 사망자 수가 4명이었는데, 20사단 작전 보고서에는 도청구간 전체 사망자 숫자가 13명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때 임수원 증인을 심문하던 박태권 위원은 나머지 9명의 시신은 도청 담장 안이 아니라 바깥 및 전혀 외딴 장소인 YWCA 회관에 있었다는 사실을 모른체 임 증인에게 호통을 연발하였다.
그러나 임수원 중령이 보고받은 4명이라는 숫자는 정확한 것이었다. 도청 뒷담을 넘어 새벽 4시 반경에 진입한 3공수 11대대 특공조는 두 시간 후 도청을 보병부대에 인계하고 원대복귀하기 전까지는 도청 정문 바깥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그래서 도청 건물 안에서 발견한 윤상원과 박병규 두 명의 시신, 그리고 도청 정문 가까이에서 찾아낸 2명 등 총 4명만 보고했던 것이다. 그러나 20사단 작전보고서 작성자는 20사단 61연대가 도청광장에서 더 찾아낸 시신 8구와 YWCA전투 희생자 박용준까지 합해 13명으로 기록하였다.
5월 27일 아침에 3공수 11대대의 임무와 20사단 61연대의 임무는 전혀 달랐다. 난동자들의 무기 강제회수 작전은 3공수 11대대 특공중대가 맡았고, 무기회수 상황 종료 후의 업무를 인수인계 받은 20사단 61연대는 거리 청소와 쌀 배급 등 대민봉사를 주로 하였다. 1995년 검찰보고서에는 인수인계 시간이 한 시간 늦추어 표시되어 있으나, 그런 사실을 다음과 같이 확인한다.
○ 5.26. 23:00경 3공수여단 특공조 11대대 1지역대 장교 13명, 사병 66명은 광주비행장을 출발하여 주답에 도착한 후 다시 조선대 뒷산으로 이동하여 조선대 종합운동장, 조대부종, 조대여고, 전남 기계공고, 조대앞, 노동청을 거쳐 5.27. 04:00경 전남도청 후문에 도착, 도청 후문을 넘어 3중대, 2중대, 1중대, 특공중대, 4중대, 11중대 순으로 진입하여 05:21 전남도청 점령을 완료하고, 07:30경 20사단 61연대에 전남도청을 인계한 후 08:00경 부대로 복귀하였음 (서울지방검찰청· 국방부검찰부 1995, 137-138).
위 33번 사진에서 보듯 20사단 61연대 1대대 대장병들이 아침 6시 30분경 3공수 11대대로부터 도청을 인계받은 후 도청 앞 분수대 주변을 청소하다가 시신 9구를 발견하여 수습하게 되었다. 모두 새벽 4시부터 약 30분간 지속된 도청 안 무장시민들의 집단 발포 희생자였다. 그러나 20사단 61연대 장병들이 아침에 그 시신을 보았을 때는 광주시민들의 총기난사 희생자들이라는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20사단이 광주작전일지를 기록하였을 때 사건 당일에 기록한 것이 아니라, 6월에 기록하였다. 게다가 3공수 11대대 특공조의 작전일지를 20사단에서 작성했기 때문에 무장시민들이 계엄군과 전투 중 사망한 것으로 억측하여 오기하게 된 원인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전기한 바와 같이 나중에 도청광장에서 발견된 무장시민들 시신은 모두 도청 안 무장시민들의 집단발포 희생자들이었다. 그러나 무장 시민들이 도청에서 이런 참사를 저지른 후에 도착한 3공수 11대대 특공조는 그런 광주시민들의 총기난사 참사가 있었는지를 알지 못한 채 도청 안에서 무기 회수를 완료한 후 즉시 원대복귀 하였고, 항복한 무장시민들 연행 등 나머지 일을 인계 받은 20사단 61연대 1대대는 새벽의 무장시민 총기난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후 한 달이 지나서야 작성된 20사단 작전일지에는 무장시민 13명의 사망원인에 대하여 시중의 광주사태 유언비어의 영향을 받은 억측도 있으므로 광주단체들에 아주 유리하였다. 그럼에도 광주단체들이 20사단 작전일지를 거부한 이유가 있었다.
사기꾼들은 처음에는 북한이 방송해 준 유언비어대로 시민군 5천명 사망 유언비어를 퍼뜨렸다가 1995년에는 그 수를 2천명으로 줄이고 전두환 전 대통령을 고소고발하였다. 이처럼 김영삼 정부 시절의 5∙18 재판은 수천 명 사망 유언비어를 깔고 시작 되었다. 그런데 5월 27일 새벽 도청구간에서 겨우 13명 사망하였다는 기록으로는 도저히 수천 명 사망설과 숫자를 맞출 수가 없었다. 실제로는 그 13명 중 12명이 무장한 광주시민들의 총기난사 희생자들이었지만 자신들이 가해자이면서 적반하장 가해자 누명을 애매한 국군에 뒤집어씌운 사기꾼들 입장에서는 5월 27일 새벽 도청 구간에서의 무장시민 사망자 수가 겨우 13명밖에 안 되었다는 것은 너무 적었던 것이다.
김영삼 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에서 3공수 여단 지휘관 에게는 살인죄가 적용되어 여단장 최세창 장군이 5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임수원 중령이 인솔한 3공수 특공조는 도청에서 단 한 발도 무장시민을 겨냥하고 쏜 적이 없었다. 임 중령의 그런 결백을 입증하여 주는 일화 하나가 19세의 새파란 청년 윤석루가 자기를 권총으로 사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쳤을 때 보복 사격은커녕 젊은 청년의 장래를 위해 수사기관에 신고조차 하지 않은 일화이다. 그 일화는 1989년 광주청문회 때 공교롭게도 윤석루와 임수원 두 사람이 같은 날 광주청문회에 출석하게 되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5월 27일 아침 6시경 폭력 전과자 윤석루가 자신과 아무런 원한관계가 없는 임수원 대령(광주사태 당시 계급 중령)을 권총으로 사살하려 한 사건이 있었다. 1989년 2월의 광주청문회에서 임수원 대령은 윤석루가 자기를 사살하려 했던 일화를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 김홍길 위원: 도청진압 당시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사람도 처참하게 사살됐다는 그러한 주장이 있습니다. 증인께서는 여기에 대해서 책임 여부를 분명히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 증인 임수원: 여기 앉아 계시는 위원님들도 마찬가지 이겠읍니다 마는 저희 군인도 여러 위원님들과 형제자매 또 국민들의 자제로 이루어진 군인들입니다.
제가 예를 하나 든다면 도청에 들어가 가지고 이제 막 무전기를 들고 야! 빨리 작전을 종료할 수 있도록 해라 하고 독려를 하는 중에 바로 발밑에서 총성이 두발 딱 났습니다. 그래서 긴장을 해 가지고 어떻게 된 것인가 하고 딱 확인을 해 보니까 차 바로… 도청 그 안에는 아주 많은 장비도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고 차량이 많이 있었습니다.
차 밑에서 총을 바로 저를 보고 쏜 것입니다. 그래서 확인을 해서 딱 보니까 그 밑에 한 사람이 한 시민군이 철모에 기동타격대장이라는 그런 직책을 표시해 가지고 M1 총을 들고 그렇게 붙잡혔습니다.
그래서 제가 보시다시피 키가 좀 작지 않습니까? 그래서 쳐다봤습니다. 그 순간에 옆에 있던 우리 병사가 노리쇠를 후퇴 전진시켜서 딱 잡았습니다. 너 이놈! 극구 만류하면서 왜 이래! 다른 임무 수행해! 하면서 제가 화가 나서 빰을 한 대 때렸습니다. 아마 지금도 광주에 계시는가 어디 계시는가 모르겠지만 이 TV를 보고 계신다면 저를 기억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당신 나하고 무슨 원수가 져서 서로 죽이려고 총을 쏘고 그러느냐 제가 병사를 보고 이 특공대장은 특별히 표시해 가지고 후송을 해라 해서 후송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물며 살려달라고 하는 사람을 죽이겠습니까?(제144회 국회 1989:26:43).
박남선 상황실장은 그 전날인 5월 26일 오전 9시에 윤석루를 기동타격대 대장으로 임명하고, ‘리벌버’ 권총을 지급하였다. 1961년생 윤석루는 1974년 동신중학교 2학년을 중퇴한 후 잠시 양화공으로 일하다가 직업 없이 놀고 있던 중 1978년 4월 21일 광주지방법원에서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죄로 징역 2년에 3년간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광주사태 때 그 유예기간 중 살인미수가 된 것이었다. 집행 유예 중에 권총에 의한 살인미수는 형이 더 무거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임수원 중령은 자기를 권총으로 쏘아 죽이려 한 윤석루에게 정당방위권을 행사하지도 않았고, 그가 실탄을 다 쏜 후 임 중령 부하가 그를 때리려 하자 때리지 못하게 말렸고, 윤 군의 장래를 생각하여 경찰에 신고하지 말고 덮어주라고 하였다.
1989년 2월 23일의 제29차 광주청문회에서 윤재기 위원은 윤석루 증인에게 “지난번 청문회에서 임수원 증인이라고 당시 3공수 11대대장이 도청 앞 진압부대였는데 증언을 통해서 윤석루 증인이 임수원 대령을 향해서 두세발의 총을 발사했다고 증언하였는데 이것은 사실입니까”라고 심문하였다.
이 심문에 대한 답변으로서 윤석루는1980년 5월 27일 새벽 날이 밝아오는 때 기동타격대 부대장 이재호 그리고 제1조 조장 이재춘과 함께 큰 차 밑에 숨어있었는데, 이재호와 이재춘이 수류탄으로 자폭 제의를 하자 그러느니 총을 쏘고 죽겠다며 자신이 소지하고 있던 ‘리벌버’ 권총으로 임수원 대령에게 총을 두세발 쏜 사실을 이렇게 증언하였다:
그래서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는 상황에서 제 동지들이 수류탄으로 자폭도 제의를 했었지만 그것은 나는 의미가 없다고 보고 어차피 나가서 접혀 죽으나 여기에서 총을 쏴서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가 소지하고 있던 ‘리벌버’ 권총으로 공수부대 제일 지휘자급으로 보이는 임수원 대령에게 총을 두세발 쏴읍니다(제145회 국회 청문회 1989, 29:106).
윤석루는 도청 안 무장시민 집단발포 명령자였다. 체포되면 발포명령자로서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을 두려워하였던 윤석루는 싸우다 죽기를 선택하였고, 불과 몇 미터 앞의 계엄군 지휘관 임수원 중령을 겨누고 두세 발 쐈다. 만약 그에게 권총 사격 경험이 있었더라면 바로 눈앞의 표적에 명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난생 처음 쏴 보는 권총이라 단 한 발도 임 중령에게 명중하지는 못했다.
임수원 중령은 자기를 죽이려 한 윤석루를 현장에서 정당방위 권한으로 응사하지 않는 대신 법적 책임을 물어 보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임 중령은 이 젊은 청년의 장래를 생각하여 그 일을 9년 후의 광주청문회 때까지는 비밀에 부쳐 주었으며, 수사관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폭력전과로 그때 집행유예 기간 중에 있었던 윤석루는 임수원 중령을 겨냥하였던 살인 미수 건으로는 아무런 조사나 재판을 받지 않았다.
윤상원이 시킨 대로 수류탄 자폭 제의를 한 무장시민은 기동타격대 부대장 이재호였다. 이때 차 밑에서 그 옆에 있었던 기동타격제 제1조 조장 이재춘이 바로 광주시와 5·18왜곡대책위가 지난 2015년 5월 사진을 공개한 두 명의 복면시민군 임성택과 구성회 인솔자였다.
차 밑에 숨어있던 간부급 무장시민들은 그때까지도 총을 버리지 않고 소지하고 있었다. 윤석루는 ‘기동타격대장’ 계급 표시가 되어있는 철모를 쓴 채 M1소총을 소지하고 있었고, 이재춘은 공수부대 모자를 쓴 채 M16을 소지하고 있었다.
이재춘은 윤석루 기동타격대장의 살인미수 사건으로 인해 자신의 위치도 노츨되어 항복하였을 때까지도 여전히 M16을 소지하고 있었던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도청 2층으로 올라갔다.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도청 입구 쪽으로 다시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보니 군인들이 계속 도청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수위실 부근의 차 밑으로 들어가 잡히기 전까지 숨어 있었다. 차 밑에서 숨을 죽이고 내다보니 군인들이 왔다갔다하는 모습이 보였다. 도저히 다른 곳으로 도망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곳에는 기동타격대 대장인 윤석루 씨와 전남대생 한 명과 조선대생 한 명 이렇게 모두 4명이 숨어 있었다. 우리는 모두 차와 한몸이 되어 숨어 있었다. 날이 훤히 밝자 군인들이 차 밑으로 총을 한방 쏘더니 나오라고 했다. 우리는 곧바로 나갔다. 이때가 새벽 6시 30분 정도 되었을 것이다. 끌려나간 우리를 군인들은 앞을 못 보게 하고 고개를 숙이라고 했다. 그러고는 우리 등 뒤에 뭐라고 글씨를 썼다. 나는 그때 도청에 몇 정 안 되는 M16을 가지고 있어 내 등 뒤에 M16 소지라고 씌어졌다.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이 카빈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는 기동타격대로 편입된 후 카빈의 성능이 좋지 않음을 알고 M16을 소지한 것이다(이재춘 1989).
무장시민들이 최소 34정의 M16 소총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의 한 증거이다. M16은 광주시민들이 경찰서 예비군 무기고에서 탈취한 무기가 아니라, 공비들이 군 부대에서 탈취하여 난동자들에게 지급한 무기였다. 광주사태 때 민간인 사망자 164명 중 24명이 M16 총사자였는데, 그 중 최소 20명은 무장시민들이 난사한 M16 총사자들이었다.
5월 27일 새벽 미명에 전우인 11공수여단 11대대 특공중대 소속 안희선 하사가 무장난동자의 M50 기관총에 맞아 다리가 절단되었으며, 대장 철모를 쓴 무장시민 윤석루가 자신들의 직속상관인 임수원 11대대 대대장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권총으로 사살하려고 하였을 때 안 하사의 전우이자 임 중령의 부하였던 군인들은 어떻게 하여야 했는가?
군인들은 복수는커녕 상무대로 무장시민들을 호송하기에 앞서 탄환 등 무장시민들에게 불리한 증거물, 즉 총기 소지 및 총가 난사 증거물들을 인멸하라고 귀띰하며, 친절하게 증거 인멸 기회를 주는 배려를 한 사실을 위성삼은 이렇게 증언한다: 그런데 그 때 하나 고마운 것이 경상도 말씨의 군인인데 저희들이 그 때 탄약을 소지했었는 데 탄약을 빼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빼지 않으면 쟤네들한테 맞는다 그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제145회 국회 1989:4-2).
무장시민들이 탄약을 소지한 채로 상무대로 호송되어 총기 난사 사실의 증거물이 보존되는 것과 그 증거물들이 일체 인멸된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의 큰 자이가 있었다. 비록 군인들의 의도는 주로 청소년들이었던 무장시민들을 보호해 주려는 선의였지만 무장한 광주시민들의 총기난사 사실이 감추어 졌을 때, 무장시민들의 총기난사로 무장시민 12명이 도청 구간에서 사망한 사건의 누명을 고스란히 애매한 국군이 쓰게 되었으며, 그 누명이 침소봉대 되어 ‘광주학살’ 누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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