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 시간에는 천국을 소유하기 위하여 죄를 회개한 다음에 어떤 성품을 가져야 완전한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 되는지를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 3절 말씀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본문 5절 말씀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본문 10절 말씀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 가지 성품을 소유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세 가지 성품을 소유하는 사람이 천국을 완전하게 소유한다는 말씀입니다. 천국이 나의 것이 될 때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천국을 소유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온유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을 소유합니까?
마태복음 5장 3, 5, 10절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이끄는 말
오늘 이 시간에는 천국을 소유하기 위하여 죄를 회개한 다음에 어떤 성품을 가져야 완전한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 되는지를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 3절 말씀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본문 5절 말씀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본문 10절 말씀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 가지 성품을 소유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세 가지 성품을 소유하는 사람이 천국을 완전하게 소유한다는 말씀입니다. 천국이 나의 것이 될 때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천국을 소유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온유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 가지 성품을 소유하지 않는 사람은 영원한 천국이 나의 것이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진리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버리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의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박해를 받는 사람에게 천국이 주어진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시간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라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지금 이 시간 온유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지금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찾아오는 고난과, 환란과, 박해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렇게 살아가는 성도에게 예수님께서는 “천국이 너희 것이라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옥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예비 된 곳입니다. 지옥은 마귀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위해 예비 된 곳입니다. 마태복음 25장 41절 말씀에,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믿는 사람들을 위해 예비 된 곳입니다. 마태복음 25장 34절 말씀에,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줄거리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기독교는 형식보다 마음을 중요시하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주로 “심령”의 상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심령은 다른 말로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드러나는 외형적인 부분보다 감추어진 내면의 세계를 더욱 중요시하였습니다. 사실 마음만 바로 품으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모든 범죄는 악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상태를 따라 마음속에 천국을 건설할 수 있고 지옥을 건설할 수 있습니다(누가복음 17장 21절). 마음을 중요시하는 예수님은 형식적인 종교 생활을 하는 바리새인들을 심히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형식이나 체계보다 마음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뜻을 따라 형식적인 신앙 습관을 버리고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겸비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겸비한 마음이란 자기 자신을 확실하게 알 때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파악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철학적 명제를 우리에게 남겼던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안다면 그는 겸비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지식은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많아지고 권력도 취하면 취할수록 오히려 무력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탕자는 자신을 발견하고 나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사람도 겸비해야만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겸비한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다.
통회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다가 죄인임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괴로워합니다. 통회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매우 큰 용기입니다. 그러나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의 잘못을 통회하는 것은 더욱 용기 있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가까이하시고 그의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시편 34편 18절,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깨끗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죄로 인하여 인간의 마음도 타락하여 부패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예레미야 17장 9절). 예수님도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 등 모든 악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가복음 7장 21절).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는 깨끗한 마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깨끗한 마음은 죄를 미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는 사람을 들어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2장 22절 말씀에서, 디모데에게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따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국이 나의 것이 되기를 진정으로 소원하십니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가난한 사람은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을 가리켜 가난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세상의 재물과, 명예보다는 하나님의 일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사람은 마음에 세상의 욕심과, 명예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심령 가운데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라보는 삶이 전부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라보는 마음으로 주어진 삶 가운데서 만족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 함 같이, 영혼이 주님을 찾기에 갈급 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영혼에 평안을 얻기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바라보지 않고, 세상의 그 어떤 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예수님만 바라보는 신앙을 가지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천국이 주어져 있는데도 왜 우리는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고 살아갑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우리가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살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만족함을 채워주시는데, 우리는 세상의 것으로 만족함을 채우려고 힘쓰기 때문에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무능력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거룩과 영광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산산 조각난 자기 자신, 죽음과, 진노와, 심판 앞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사람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말씀드리면 하나님 앞에서 깨어진 심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을 보면서 자신의 죄와, 무능과, 연약함을 깨닫고 “주님,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고백하는 영적인 회개와, 진실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백하는 마음,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니라고 인정하는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이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복과, 은혜를 받고 있는 상태 즉 현재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복을 받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미 천국을 소유했음을 나타내고 있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를 기준으로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의 짧은 생애, 보잘 것 없는 생애를 위해서 평생 이렇게 살다가 가시렵니까? 아니면 포기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기준에 맞게 사시겠습니까? 주님은 나의 성품의 변화, 가치관의 변화, 목표의 변화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이 변화가 천국 기준에 맞추는 삶의 변화입니다. 이 기준의 삶은 내가 진실로 죄인이라는 사실과, 기도, 전도, 십일조, 감사, 봉사 등 모든 일이 내 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머리를 숙이게 되는 삶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과, 사랑과, 용서 밖에는 기다릴 것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이 사람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단순히 영적으로 빈곤하여 가난하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영적 가난을 뼈저리게 느끼며, 자각하므로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도움만을 바라며 간구하면서 살아갑니다. 즉 자신의 전적 무능력함을 철저하게 깨닫고, 자신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자신의 힘이나, 능력을 결코 신뢰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 한 분에게만 모든 것을 기대하고, 바라고, 의지하고, 하나님 한 분만을 온전히 신뢰하는 사람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가난한 심령이 되어서 천국을 소유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8절 말씀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겸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이 곧 예수님의 마음이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의 전부입니다. 자신을 비어 종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 사람의 모습으로 낮아지신 예수님, 그리고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이야말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또 누가복음 22장 42절 말씀에서,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자신의 뜻과, 계획을 포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순종하는 예수님의 마음 가운데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의 실체를 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심령이 가난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의 빈자리에 주님을 모시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 중심에 주님을 모시게 될 때에 천국을 이루는 것입니다. 천국을 내 마음에, 천국을 내 가정에, 천국을 내 교회에, 천국을 내 삶에 이루면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의 의미
온유는 무능하고 약한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얼핏 생각해 보면 온유하다는 것은 나약하고 무능하다는 말처럼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온유는 약함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온유한 사람은 여유가 있습니다. 반면에 약하고 무능한 사람은 매우 조급합니다. 여유가 있는 사람은 강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온유하신 분이시지만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거역하거나 침범할 수 없었던 가장 강하신 분이었습니다.
온유한 성품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비롯됩니다. 사람의 성품은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이 있습니다. 이중 선천적인 성품을 “천성”이라고 하며 후천적인 것을 “습관”이라고도 합니다. 사람의 모든 성품이 이 두 가지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온유는 천성이 아니고 습관도 아닙니다. 온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가지고 계신 성품으로 우리가 그의 제자가 될 때만이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명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온유한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고 그를 배우며 닮아 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가 온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부터 온유한 성품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훈련을 통하여 온유한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성도의 온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순종은 복종과는 달리 강제성을 띠지 않습니다. 순종은 따르는 자의 자발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온유한 자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인내하는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인내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신실하게 믿고 인내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때”까지 인내하지 못함으로 실패하고 좌절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온유한 성품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웃을 향한 성도의 온유
성을 내지 않거나 본을 내더라도 쉽게 가라앉히는 것입니다. 화를 잘 재는 사람만큼 상대방을 불안하게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내면적인 불안정과 불편함을 그대로 남에게 신경질적으로 전가합니다. 이런 사람이 가는 곳마다 평화와 질서는 사라집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20절 말씀에서,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마음의 분을 자제하고 참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감정으로 상대방을 불쾌하게 하거나 당황하게 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온유함으로 이웃에 대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의 평안을 심어 주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국이 나의 것이 되기를 진정으로 소원하십니까? 온유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순진하고, 사람들에게 대접을 잘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온유한 성품이 아닙니다. 온유한 성품은 외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마음이 되지 않고는 온유한 성품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나 자신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 온유한 마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을 보고 자신이 악한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면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자신은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음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신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칩니다. 모세는 처음부터 온유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을 나타내기 좋아했고, 자신을 위해 살아 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40년의 목자 생활을 하는 가운데 온유함을 배우게 되었고, 자신을 나타내지 않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온유함을 높이 칭찬하셨는데 민수기 12장 3절 말씀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8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120세까지 온유한 사람으로 살아 간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주님 또한 한 평생을 온유함으로 사신 분이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면서 평생을 사신 분이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 말씀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이런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머무르지 않으셨습니다. 이 마음이 본질적으로 온유한 마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한 순교자들은 모두 온유했습니다.
온유한 마음은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의 능력을 입었을 때,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고, 기쁘게 헌신하는 마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자신의 방법을 정당화하거나, 자신의 목적만을 추구하는 사람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방법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언제나 손해를 보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언제나 자신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나의 이익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의 손해라는 말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권리와, 입장을 세워 주는 사람입니다. 분노를 품지 않고, 기다리고, 참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온유한 마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나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천국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국이 나의 것이 되기를 진정으로 소원하십니까? 의를 위하여 박해를 기쁘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고난과, 환란과, 박해를 피하지 말고 기쁘게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고난과, 환란과, 박해는 잠시 잠깐이지만 천국은 영원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어떤 고난과, 환란과, 박해가 오더라도 담대하게 받아야 합니다. 많은 믿음의 선배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고난과, 환란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단 한 명도 고난과, 환란과,박해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 가운데 고난과, 환란과, 박해를 당한 성도들을 설명한다면 밤이 새도록 말을 해도 다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은 모두 순교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마감했습니다. 또 믿음의 사람들이 순교는 하지 않았어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 갈 때 많은 고난과, 환란과, 박해가 뒤따라옵니다. 예수님만을 위해 살아가는 성도에게 환경적으로, 육체적으로, 고난과, 환란과, 박해가 찾아옵니다. 한 가지 예로 예수 믿는 직장인이 회식 자리에서 술을 거부할 때 고난과, 환란과, 박해가 옵니다. 주일 날 회사에 나오라고 했을 때 나가지 않으면, 고난과, 환란과, 박해는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일은 가정 안에서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죽은 조상 앞에 제사를 드릴 때 절을 하지 않으면, 고난과, 환란과, 박해가 옵니다. 불효막심한 자식이라고 악담을 듣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환경적으로, 육체적으로 얼마나 많은 고난과, 환란과, 박해를 받았습니까? 고린도후서 11장 23절에서 30절 말씀에,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도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친히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예수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손해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마태복음 16장 42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자, 의를 위하여 고난과, 환란과, 박해를 받자고 말은 하지만은 우리 앞에 십자가가 어디 있습니까? 고난과, 환란과, 박해가 어디 있습니까? 믿음의 선배들은 신앙이냐?, 죽음이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신앙 없이 살 것이냐? 아니면, 주님 때문에 어두운 캄캄한 지하 동굴에 살 것이냐? 편안히 살 것이냐? 감옥에 갇힐 것이냐?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어떤 고난과, 환란과, 박해를 받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은 성도에게 천국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5장 11절에서 12절 말씀에,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이 고난보다는, 환란보다는, 박해보다는 세상 가운데서 영광을 누리고, 세상의 복을 다 받은 것처럼 살아간다면 성경대로 살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박해가, 어떤 환란이, 어떤 고통과, 고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오직 예수님 한 분만을 의지하시고 끝까지 신앙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20장 23절에서 24절 말씀에,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평안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의 피 흘림을 통하여 든든히 세워진 교회 안에서 평안히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화형 당할 일도 없고, 돌에 맞을 일도 없고, 감옥에 갇힐 일도 없고, 순교 당할 일도 없습니다. 과거 환란을 당하던 믿음의 선배들은 이런 평화의 때가 오기를 사모하며, 기도했습니다. 우리들은 이런 평화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요 내가 받은 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은혜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생명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거룩한 주일을 내 생명처럼 지킬 수 없습니까?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신데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와, 감사의 예물을 하나님께 제대로 드릴 수 없습니까? 의의 주님 앞에서 불의에 맞서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아 갈 수 없습니까? 빛이신 주님 앞에서 불의에 장단을 맞추고, 세상의 어두움에 동조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화평의 주님 앞에서 화평을 위하여 힘써야 하는데 화평을 깨는 일을 해야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을 위하여 박해를 받은 성도에게 천국이 임한다는 놀라운 비밀을 깨닫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나의 시간과, 재물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내 영광마저도 포기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나의 시간과 재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어떤 어려움이라도 기꺼이 감수하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여 주신 주님을 위하여 나의 생명마저도 기꺼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한 삶을 어떻게 살아갑니까? 그것은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위하여 의의 박해와,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주님 때문에 손해를 보는 때도 있습니다. 주님 때문에 양보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주님 때문에 눈물을 흘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주님 때문에 죽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주님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부인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이 천국을 소유합니다. 천국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게 되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니 얼마나 안전하겠습니까? 이것이 성도의 참된 복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를 안전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에게 복을 주십니다. 나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을 위해 사십시오. 주님을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이미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환난과, 박해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반드시 치러야 할 대가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8절 말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그러므로 환난과, 박해를 두려워하지 맙시다. 오히려 박해가 올 때마다 기쁨으로 맞이합시다.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사는 성도에게는 결코 박해가 오지 않습니다. 내가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고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위하여 의의 박해를 얼마나 받아 보셨습니까? 의의 박해는 우리를 좌절시키는 요소가 아니라, 위장되어 찾아오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이 역설적인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지혜자가 되셔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천국을 소유하시고,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무리
예수님께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신 것처럼 천국은 지금 우리 옆에 와 있습니다. 지옥 같은 세상 가운데서 우리가 살고 있다 할지라도 내가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살아가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나의 심령 가운데 천국을 소유해야 하며, 가정 가운데, 교회 가운데, 천국을 만들어 가야합니다. 더 나아가서 지옥 같은 세상 가운데 천국을 소유한 우리가 나가서 천국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천국을 보여주고 가신 분이십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천국을 이 세상에 보여주고 갔습니다.
이제 확실한 천국을 소유하여 내 가족에게, 형제에게, 이웃에게, 내가 가진 천국을 보여주어야 합니다.너무나 귀하고 좋은 물건이 있다면 어떻게 나 혼자 가지고 있겠습니까? 자녀에게, 부모에게, 형제에게,이웃에게 보여주고 싶어 할 것입니다. 나 자신이 천국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사랑하는 내 자식에게, 내 부모에게, 내 이웃에게, 천국에 대한 확신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을 소유한 기쁨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어떻게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고만 있겠습니까? 천국을 소유한 사람은 지옥이 어떤 곳이라는 것도 깨달은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가족이 지옥에 가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 천국을 소유한 모든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반드시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우리 주님을 위하여 담대히 고난과, 환란과, 박해를 기쁘게 받아야 합니다. 천국은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 와 있지만, 이 천국을 소유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세상과, 사람을 너무 의지하지 말고, 세상을 너무 좋아하지 말고,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면서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함을 누리는 신앙을 만들어 가기 바랍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천국이 너희 것임이니라” 라고 외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외치신 천국 복음대로 천국이 내 안에, 천국이 내 가정에, 천국이 내 교회에, 천국이 내 일터에 이루어지는 큰 복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설교는 목사님들의 설교와 참고자료를 인용하여 올린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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