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 [25] – 광주사태 관련 용어 해설

광주사태 관련 용어 해설

[LA=시니어타임즈US] 본지는 2019년 1월부터 518사건과 관련한 신간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The War of 5∙18 History between Moon Jae-in and Chun Doo Whan)>을 저자와의 합의 하에 연재를 시작한다.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은 5.18사태 전문가인 김대령 박사의 16년간의 연구 결산으로 지난해 11월 26일을 기해 출간됐으며, 인터넷 서점 아마존(www.amazon.com)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편집자주>

제4장 ∙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

2. 광주사태 관련 용어 해설

한국 언론의 5∙18 왜곡 보도의 뿌리는 아주 깊으며, 최근에도 한겨레신문은 “전두환 회고록에 담긴 5∙18에 관한 5가지 거짓말” 제하의 광주사태 37주년 특집 기사에서 광주사태란 명칭의 유래를 이렇게 왜곡한다: 시위대의 폭력성에 무게를 둔 ‘광주사태’란 표현은 신군부가 사건을 은폐·왜곡할 때 사용한 용어였다(김지숙, 정대하 2017).

한국 근현대사에서 신군부라는 것이 존재한 적이 없음에도 한겨레 기자들은 제4공화국 시절의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하하여 신군부라 지칭한다. 한겨레가 신군부가 의도적으로 민주화운동이란 명칭을 사용하였다는 논조로 보도하였지만, 신군부라는 명칭도 민주화운동이란 명칭도 모두 제6공화국 시절 생긴 신조어였다. 광주사태 주동자들이 제2의 부마사태를 일으키자는 의미로서 스스로 만든 명칭 이었다.

광주사태는 광주사태 이후 여러 광주단체들이 각기 다른 명칭으로, 즉 광주항쟁, 5월 항쟁, 광주민중항쟁, 광주무장봉기 등 여러 명칭으로 불렀다. 조국 문재인 정부 정무수석 소속 단체였던 반국가단체 ‘남한 사회주의 노동자동맹(일명, 사노맹)’에서는 ‘광주무장봉기’ 혹은 ‘광주인민 무장 봉기’라는 명칭을 가장 선호했었다.

광주사태 당시에는 ‘민주화운동’이란 단어나 그런 개념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80만 광주시민들 중에서 단 한 명도 광주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 인식한 시민은 없었다. 광주사태 구호는 ‘민족민주화’였다. 한국판 베트콩(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었던 <남조선 민족해방 전선>의 전용어는 ‘민주투쟁’이었고, ‘민주화운동’은 일평생 김일성주의자였던 왕년의 빨치산 박현채가 사용한 ‘민족민주화 운동’의 준말로서 광주사태가 꿑난지 여러해 후에 비로소 통용된 신조어였다.

이렇듯 ‘민주화운동’은 본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시키고 민족민주화의 단계를 거쳐 인민민주주의혁명으로 나아가자”의 의미를 담은 ‘민족 민주화운동’의 준말이다. 공산당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침투하여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시키고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일으키기 위한 중간 단계를 ‘민족 민주화’라고 한다. 주사파의 위장용어 ‘민주화운동’은 ‘자유민주주의’ 타도를 목적으로 하는 ‘민족민주화’, 즉 북한식 인민민주주의 체제화였다.

사진 35 ▲보궐대통령으로 당선 되자마자 윤상원을 위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라고 지시한 문재인에게 가장 권위 있는 5·18기록물은 그 노래 주인공이 5월 20일에 발표한 5·18성명서일 것이다. 그런데 이 성명서에서 학생혁명군은 광주시민들이 아닌 무장공비들을 지칭하였다.

광주사태는 1980년 5월 18일 갑자기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적화통일 세력 <남조선 민족해방전선>이 전라도 무기고 정보를 간첩들과 공유하며 근 3년간 치밀히 준비하여 일으킨 무장봉기였다. 그래서 광주사태 슬로건이 남민전 슬로건 ‘반미 민족민주’였다.

사진 36 ▲1980년 5월 19일 상무대에서 무기 탈취하는데 성공하였던 학생혁명군 1개 분대 중 세 명이 지난 2010년 5월 17일 평양의 광주인민봉기 30돐 전야제 행사 때 양복 차림으로 행사장 맨 앞좌석에 앉아있다.

1970년대부터 김대중이 민주인사로서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치도록 홍보해 준 국제적 조직이 바로 조총련 산하 한민통이며, 한민통은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의 약칭이다. 대법원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였다. 이 한민통이 적화통일 목적으로 광주사태를 조직하고 배후 조종하였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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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2017년의 영화 '택시운전사'의 실제 인물인 김사복은 1970년대초부터 한민통 요원으로서 서울과 광주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위의 한겨레신문은 광주사태를 민중항쟁으로 정의하였으나, 민중 봉기가 김대중의 집권 전략이었기 때문에 광주사태는 결코 민중항쟁이 아니었다. 1980년 3월 신민당 경선에서 김영삼 총재에게 패배하여 제5공화국 대선 후보가 될 수 없게 된 김대중이 바로 전 해 1979년 이란의 호메이니 방식의 민중봉기로 집권하겠다며 철저한 사전 준비를 하여 일어난 사건이 광주사태였다. 그때 김대중 세력의 의도가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최규하 과도정부 체제가 약하다는 것을 노려 정부를 전복시키고 선거 없이 무력으로 김대중 정권을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앞에 언급한 한겨레 기사에서 한겨레신문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전두환의 신군부와 계엄군에 맞서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이 ‘비상계엄 철폐’ ‘유신세력 척결’을 주장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열흘간 전개한 민중항쟁”이라고 정의하는 바, 이것은 아주 황당한 주장이다. 1997년 4월 대법원은 광주의 민간 무장세력은 ‘유신세력 수호(즉, 제4공화국 헌법 및 헌정질서 수호)를 주장하였으므로 헌법에 준하는 기관이라 판단하였고, 한겨레신문은 광주의 민간 무장세력이 ‘유신세력 척결을’ 주장 하였다고 하면 한겨레신문은 5∙18 재판 법리를 송두리째 부정하자는 것인가?

‘시민군’ 역시 혼동을 일으키는 용어이다. 광주사태 당시 시민군이란 것도 시민군이란 명칭도 존재하지 않았다. 광주의 괴무장단체는 공비들과 공비 부역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공비들은 모두 북한으로 복귀하였고 공비 부역자들을 나중에 시민군이라 불렀다.

수습위원이라는 명칭은 5월 22일 처음 등장하였는데, 공비 부역자들에게 무기를 반납하자고 설득하는 선량한 광주시민들을 수습위원이라고 불렀었다. 나중에 공비 부역자들도 수습위원 완장을 차고 다녔으므로 수습위원이 정체성이 애매모호하게 되었으나, 원래 의미로는 수습위원들은 전혀 전투조나 시민군이 아니었다.

결국 시민군이란 명칭이 조금이나마 어울리는 유일한 조직은 기동타격대뿐이었다. 5월 26일 오후 2시부터 4시 사이에 한 조에 6명씩으로 구성된 7개조의 기동타격대가 처음으로 편성되었는데, 엄밀히 말해 치안대였으며 그 순찰 대상도 주로 시민들이었다. 5월 21일 광주에 풀린 수천 정의 총들 중에서 강도들과 살인범들의 손에 들어간 총들이 있어서 민심이 자꾸 떠나고 있으므로 무장강도 출현 신고가 들어오면 출동하기 위해 총인원 40명의 기동타격대가 편성되었다.

사진 37 ▲시민군이란 용어가 없었던 당시 무장시민을 괴한이라 호칭했다.

사진 38 ▲1980년 봄에 김대중과 광주운동권에 자금 지원하며 광주사태를 배후 조종하였던 한통련이 최근에도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배후였음을 보여주는 북한 문건. 한통련이 문재인에게 보낸 2017년 5월 18일자 서한에는 광화문 촛불집회 배후에 한통련 세력이 있었음이 과시되어 있다. The North Korean document above indicates who played as the Big Brother behind the illegal, dirty, back-street political maneuvering by which the South Korean Leftists (under the leadership of Moon Jae-in) impeached President Park Geun-hye.

첨언하면, 광주사태에는 주동자들과 공비 부역자들은 전혀 다른 집단이라는 아이러니가 있다. 주동자들은 공산주의 혁명을 꿈꾸던 ‘꼬뮌주의 지하혁명가’ 그룹으로서 상당히 과격한 운동권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소총수가 아니라 이론으로 전투하는 문민 집단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실제로 총을 든 무장시민들 중 대다수는 그저 ‘공짜밥 한끼 얻어먹기 운동’이었을 뿐이었던바, 정문영은 그런 사실을 이렇게 기록한다: 5월 25일 도청에서 수습위원들이 무장 시민군들을 설득하여 총기를 회수하고자 할 때 무장 시민군 중 한 사람이 일어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들은 총을 반납하고 돌아갈 집이라도 있지만 우리는 총을 반납하고 나면 돌아갈 집은커녕 밥 한 끼 얻어먹을 데도 없소. 그런데 이제 끝났으니 너희들은 돌아가라 하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 솔직히 우리는 총을 가지고 있어야 밥이라도 한 끼 얻어먹을 수 있습니다. 오갈 데 없는 우리에게 총을 내놓으라는 말은 죽으라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차라리 죽으라면 싸우다 죽겠습니다(정문영 2012, 54).

사진 39 ▲위 사진에서 보듯 광주사태 사진 속의 시민군 대부분들은 광주시민들이 아닌 공비들이었다.

사진 40 ▲지금 5·18측이 시민군이라고 기동타격대는 5월 26일 오후에 조직되었으며, 총인원이 40명 미만이었다(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 속의 중무장한 공비들은 광주시민들이 아닌 북한군들이었음이 35년 후에 확인되었다.

지금 왜 문재인 정부가 5·18 을 재조사하여야만 하는가? 그 이유는 김영삼 정부 시절의 5·18 재판은 아무런 증거 뒷받침 없이 궤변에 궤변을 더하고, 궤변으로 꽈배기를 만들어 억지로 유죄 판결을 한 엉터리 재판이었기 때문이다(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발포 명령자 이기는 커녕 무장폭동 진압에 관련되어 있다는 증거조차 없어 비자금 유언비어를 급조하여 비자금에 대해서만 대법원이 유죄를 인정하였다.)

사진 41 ▲5월 21일 대낮에 금남로에 기관총으로 무장한 괴무장단체가 등장하였다. 사진에서 빨간 원 안의 총들은 기관총들이다. 외국에서는 민간인이 기관총 들고 도로를 점령하면 테러리스트라고 부르지 결코 시위대라고 부르지 않는다. The photo shows that the rioters used machine guns for their armed riot in Gwangju as early as the noon of May 21.

무장난동자들 중에서 가장 사진기자들의 관심을 끌었던 난동자들, 즉 기관총으로 무장했던 무장시민들을 찾기 위해 방송사들과 언론사들은 1999년부터 무장괴한들 사진을 공개하며 행방을 수소문하였다. 한겨레신문 1999년 5월 18일자 기사는 “이들은 지금 어디에…” 제하에 “방송사들이 광주민중항쟁 19돌을 맞아 ‘이름 없는 얼굴’ 찾기에 나섰다. 빛바랜 영상화면이나 사진 속의 그 얼굴들은 지금 무엇을 할까”라고 보도하였다. 그러나 5·18 기념식 행사에는 단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었던 이 무장난동자들이 북한의 광주인민봉기 30돌 행사에 참여한 사실이 2010년 5월 18일자의 연합뉴스 기사 사진으로 확인되었다.

광주의 무장한 난동자들은 헌법기관이라는 김영삼 정부 시절의 5·18 재판 판결은 사실 광주사태 33주년 연합뉴스 사진 몇 장으로 그 유통기한이 이미 끝난 것이었다. 북한이 남파한 무장공비들이 대한민군 헌법기관이라는 판결은 미친 판결이었다. 이렇듯 세기의 재판이라던 1990년대 김영삼 정부 법정의 5·18 재판은 궤변과 공리공론으로 얼룩진 사기극이요, 희대의 코미디 잔치였다.

사진 42 ▲광주사태 사진 속의 인물들을 찾는 한겨레신문 기사. 이 중 철모 쓴 무장괴한은 광주시민이 아닌 공비였음이 지난 2015년에 밝혀졌졌다. A news article of the Hankyoreh on May 18, 1999, which asked its readers for the information about the Gwangju militia. So far, this effort proves to have been in vain because many of the rebels have been turned out to be North Korea Special Fo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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