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을 향하여 가는 사람들
마태복음 7 : 13 – 14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니라
들어가는 말
함께 읽은 본문 말씀 가운데 인생 앞에 두 문과, 두 길이 있음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 속담에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길이 아닌 곳을 간다면 너무나 힘이 들고, 고생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길이 아니라면 빨리 돌아서야 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흔히 우리 인생을 가리켜 “길을 가는 여행자”로 비유합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비유의 말씀이 자주 등장합니다. 본문 말씀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산상수훈” 가운데 한 말씀인데, 길의 비유를 통해 우리 인생을 잘 설명해 줍니다. 얼른 보면 인생의 길은 여러 갈래인 것 같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동서고금, … 또 직업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고, … 그러나 주님은 인생길이 몇 개라고 말씀하십니까? 딱 두 개라고 말씀합니다. 다양하게 살아가기 때문에 여러 개가 아닌가 생각하지만 결국은 두 개로 집약된다는 것입니다. 무엇 무엇입니까? 넓은 길과 좁은 길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길(way)은 문(입구, gate)과 행선지(목적지, destination)를 가지고 있습니다.(우리가 길을 갈 때 어떤 과정을 거치는가 생각해 보면 바로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인생이 걸어가는 길은 크게 둘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넓은 길이고, 다른 하나는 좁고 험한 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좁고 험한 길 보다는 넓고 평탄한 길을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넓은 길은 찾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좁고 험한 길은 찾는 이가 매우 적어서 그 길을 걸어가는 자는 참으로 외로운 것입니다. 인생은 그 어느 것을 선택하면 다른 것은 포기해야만 합니다. 원하는 모든 것을 취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재물과 권모술수로 가능할지 모르나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법칙은 공명정대(公明正大)합니다.
성경에는 문(門)에 관한 비유의 말씀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 나오는 문의 비유도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말씀하신 문은 좁은 문, 넓은 문,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 등으로 나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세상과 교회에 대한 비유로 오해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말씀해 주시는 비유의 뜻은 하나님을 섬기는 길에 두 길이 있고, 하나님을 따르는 길에 두 문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중에도 좁은 문으로 가는 사람이 있고 넓은 문으로 가는 사람이 있다는 교훈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예외 없이 이 둘 중에 하나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그 길은 인생을 다 마칠 때 행선지에 도착해서 후회 없이 만족하고 기뻐할 수 있는 길입니까? 이 시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바른 선택을 하시고 영원히 후회 없는 인생, 진정으로 복된 인생을 만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태복음 5,6,7장을 일컬어서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오르셔서 보화와 같은 말씀으로 가르치셨다고 해서 이를 산상수훈(山上垂訓) 혹은 산상보훈(山上寶訓)이라고 부릅니다.이를테면 보석 가운데서도 핵심이 되는 보석이 다이아몬드인 것처럼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도 핵심이 되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톨스토이(Nikolaevich Tolstoy)는 이 말씀이 너무 좋아서 미치다시피 탐독을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이 말씀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소중하게 읽히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산상수훈의 특징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원칙을 제시해 주는데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철학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의식과 삶의 방법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좁은 길로 가라“고 하십니다.
인생 앞에 두 문과, 두 길이 있는데, 어떤 한 문과, 한 길로 반드시 들어가고, 걸어가야 합니다. 하나의 문과, 길은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고, 또 하나의 문과, 길은 멸망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생명으로 가는 문과, 생명으로 가는 길을 찾는 것은 쉬워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문에 들어서면 길이 좁고,험하고, 어려워 보이지만 이 길을 걸어 갈 때 기쁨과, 평안과,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멸망으로 가는 문은 찾기가 쉽고, 가는 길이 넓고, 너무 편한 길 같지만 이 길은 기쁨이 없고, 평안이 없고, 안식이 없고, 고통이 기다리는, 영원한 멸망의 길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지금 어떤 문을 열고, 어떤 길로 걸어가고 있습니까? 생명의 문을 열고 들어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멸망의 문을 열고 들어가고 있습니까? 나는 어떤 문에도 들어가지 않고 있다고 생각할지라도 우리는 두 문 가운데서 어떤 한 문을 선택하여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내가 지금 어떤 문에 들어가고 있는지 분명히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멸망의 문에 들어가고 있다면 빨리 돌아서서 생명의 문으로 들어서기를 바랍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생명의 문을 찾아서 들어가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좁은 문“과 “좁은 길” 의 의미는 이미 마태복음 5,6,7장 말씀에서 말씀하신 내용대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거기서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 되고 빛이 되라. 형제를 향하여 미워하거나 욕하지 말라. 네 사지가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성한 몸으로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비판하지 말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거든 먼저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모두 좁은 길을 가는 삶의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한 결 같이 행하기도 어렵고, 지키기도 어렵고, 수고와 희생과 땀이 요구되는 삶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길을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길을 “좁은 문“이라고 했고 “좁은 길“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신앙들이 가야할 길입니다.
중심 내용
두 갈래 길의 선택
선택은 자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을 부여하셨습니다. 자기가 원하고 바라는 것을 택할 수 있는 자유야말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고귀한 자유일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권은 매일매일 그리고 매시간 우리들의 삶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잡다한 여러 가지 일들을 그때그때마다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도 있을 것이고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종류의 선택해야 할 많은 사항들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본문 말씀의 내용대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의 선택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최선의 선택은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신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선택은 책임을 요구합니다. 선택은 우리가 자유로이 할 수 있지만 선택한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자유로이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그 책임이 바로 모든 인류가 걸머진 원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원죄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대신 형벌을 받음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서로 선택하여 결혼한 두 남녀는 남편으로, 혹은 아내로 최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여야 합니다. 이렇듯 선택과 책임은 과정과 결과로써 언제나 함께 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선택의 중요함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 앞에 두 가지의 길이 놓여 있습니다. 선택은 우리의 자유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길”과 “멸망의 길”중 어느 길을 선택할 것입니까? 한쪽은 영생이요 다른 한쪽은 저주입니다.
천국을 향하여 가는 사람들은 영생이 있는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갑니다. 본문 13절-14절 말씀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좁은 길을 걸어야 생명의 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생명의 문에 이르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좁은 길은 넓은 길에 비해 걸어가기가 불편하며 힘이 듭니다. 생명의 문으로 이르는 진리의 길은 고난의 길이며 고통의 길입니다.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은 골고다의 길이며 가시밭길이었습니다. 제자들도 신앙을 보수하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좁은 길은 생명의 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영광과 승리가 보장된 길입니다.
좁은 길을 찾는 사람이 적습니다. 생명의 문과 연결된 좁은 길은 이용하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지니고 있는 모든 짐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명예나 권력, 물질 등 모든 소유를 아낌없이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듯 많은 욕심꾸러미를 들쳐 멘 사람은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조심을 하면서 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삶은 늘 마음을 졸이며 마귀를 경계하는 삶입니다. 성도는 조심스런 언동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성도는 좁은 길을 통하여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좁은 길은 성도의 신앙생활을 말해 줍니다. ① 좁은 길은 목표가 있는 길입니다. 우리는 다른 곳을 기웃거릴 필요가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푯대만 바라보고 달려가야 합니다(빌립보서 3장 13-14절). ② 성도의 생활은 인내하는 삶입니다. 좁은 길을 걷기 위해서는 “나를 이겨야” 합니다. 즉 자신의 욕망과 탐심과 유혹과 모든 죄의 본성을 이겨야 합니다. 그래야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 생명의 문에 다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좁은 문과, 좁은 길은 마태복음 5장, 6장, 7장에서 말씀하신 내용대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산상수훈은 하나님의 백성이 지키면서 살아가야 하는 천국의 윤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윤리와, 교리가 있는데 바로 이 윤리와, 교리가 산상수훈입니다. 산상수훈에 말씀한 대로 살아가는 삶이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걸어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같이 행하기도 어렵고, 지키기도 어렵고, 수고와, 희생과, 땀이 요구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좁은 길을 걸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로 걸어가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바로 이렇게 살아가는 삶이 생명으로 들어가는 천국을 향하여 걸어가는 삶입니다. 좁은 문에 들어서고, 좁은 길을 걸어가려면 이 세상의 사람과는 분명히 다르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는, 갈등을 이기면서 살아야 합니다. 신앙의 삶은 엄밀히 말하자면 평안의 삶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고민이 많은 삶이고, 또 어떤 면에서는 싸움을 해야 하는 삶입니다. 언제나 자신과 싸워야 하고, 욕망과 싸워야 하고, 물질과 싸워야 하고, 육신과 싸워야 하는 삶입니다. 사람의 본성에는 언제나 정도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의 갈등, 말씀대로 사느냐, 아니면 말씀을 적당하게 지키며 사느냐, 신앙을 지키면서 사느냐, 세상과 적당하게 타협하며 사느냐, 성령님의 인도하시는 대로 사느냐, 아니면 내 육신의 욕심대로 사느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느냐, 아니면 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느냐, 이렇게 갈등을 느끼며 살아가는 삶이 바로 좁은 문,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삶입니다. 이런 갈등과 싸워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삶이 좁은 문과, 좁은 길의 삶입니다. 이런 삶이기 때문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로 걸어가는 사람이 아주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넓은 문과, 넓은 길은 사람들이 들어가서 걸어가기가 아주 쉬워 많은 사람들이 찾습니다. 넓은 문과, 넓은 길에는 재미도 있고, 평안함도 있고, 굳이 갈등을 느끼며 싸울 필요도 없는 길입니다.주어진 대로 그냥 즐기며 살아가면 되는 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 문과, 이 길은 넓어서 걸어가기는 재미있고, 쉽고, 아주 편안한 길이지만 이 길은 결국 멸망의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세상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로 걸어가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좁은 문에 들어가고, 좁은 길을 걸어가려고 하면 신앙의 갈등을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신앙의 양심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걸어가려고 하면 신앙의 양심대로 살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신앙의 양심대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위로는 하늘을 향하여 떳떳하고, 아래로 세상을 향하여 떳떳하게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사람이 정도를 걸어가며 살아가기가 그만큼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이 문을 좁은 문이라고 말씀하셨고, 이 길을 좁은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들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삶을 살아가는 하는 가운데 가장 어려운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융통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융통성 없이 살다 보면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신앙의 양심대로 살고, 믿음을 지키며 살 때 우선 돈을 제대로 벌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신앙의 양심대로 살아가면 돈이 많이 벌어지지가 않는 세상입니다. 넓은 문과, 길을 가면서 적당하게 편법을 쓰고, 적당하게 얼버무려 나가며 살아야 부자가 될 수 있고, 세상에서 성공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처세술이고, 이 시대의 성공의 비결입니다. 오늘 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양심을 버리고 적당하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적당하게 속이기도 하고, 편법도 쓰고, 적당하게 얼버무려 가며, 적당하게 양심을 팔고, 세상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오늘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살아가야 재물을 모으면서 이 세상을 편안하게 살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신앙의 양심을 지켜야 합니다. 이런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깨끗하게 모든 희생을 감수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적당하게 살아가면 얼마든지 부를 누릴 수 있고, 성공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과감하게 거부하고 심령이 가난한 마음으로 신앙의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성도가 세상에 그렇게 많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소수라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은 바로 이와 같은 소수의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지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면서, 깨끗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로 걸어가는 성도입니다.
또 하나는,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을 걸어가려면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문이 너무 좁고, 길이 너무 좁아서 심령이 교만한 사람은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세상의 짐이 많은 사람도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이 문을 통과하려면 먼저 자신의 교만을 감량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자신을 낮춰야 한다는 말씀이고,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문과, 이 길은 부끄럽게 삶의 몸집이 크거나, 자신의 교만으로는 갈 수 없는 길이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교만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이 길을 걸어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그냥 쉽게 오신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철저한 자신의 부인이 있었습니다. 하늘 보좌도 버렸고, 영광도 버렸고, 변하고, 병들 수밖에 없는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가장 낮은 종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6장 24절 말씀에서,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자신의 부인이고, 자신의 축소입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고, 제자의 길을 걸어간다고 하면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야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이 문과, 이 길을 걸어 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문과, 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삶의 규범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생각이 있고, 철학이 있고, 원칙이 있습니다.이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이고,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삶입니다. 주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좁은 길로 걸어가라, 이 문과, 이 길이 생명의 길이다. 이 말씀이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좁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문”은 구원의 도, 종교, 신앙관, 인생관을 가리키며, “길”은 생활방식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은 주님의 모든 말씀과 성경 전체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따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만 유일한 구주로 믿어야 합니다. 이것은 좁은 문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증거한 바와 같이(사도행전 4장 12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이사야 45장 6절, 45장 22절). 창조주 하나님만 또한 구주이신 것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유일한 구주이시라는 말씀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곧 신적 구주이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요 구원의 진리이며 영생이 되십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증거하였습니다(디모데전서 2장 5절).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구주이십니다. 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11장 28절). 모든 사람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께로 나오면, 그는 그들에게 참 안식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6장 35절 6장 39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마지막 날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생과 부활을 주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순종하고 그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10장 37-38절). 우리는 가족들보다도, 심지어 우리 자신보다도 더 예수님을 사랑하며 우리 자신을 부정하고 그를 따라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얼마 후에도 또 말씀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16장 24-25절). 또 누가복음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그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누가복음 9장 23-24절).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예수께서는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믿고 따르는 자는 고난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큰 희생, 어려운 희생을 요구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고 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누가복음 14장26-27절, 33절).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했습니다(요한일서 2장 15절).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 지방에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운 후 그들을 돌아보며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며,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그는 빌립보서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말했고(빌립보서 1장 29절), 디모데후서에서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말했습니다(디모데후서 3장 12절). 예수를 믿고 따르는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삶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좁은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좁은 문이며 좁은 길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예수 그리스도만 따르며 어려운 희생과 고난도 각오해야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까? 왜냐하면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힘들어서 찾는 이가 적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애굽기 20장 3절). 하나님께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며 그는 우상숭배를 용납하지 않으시며 우상숭배를 가장 큰 죄로 간주하십니다. 그것은 배타주의입니다. 기독교는 배타주의입니다.
예수께서도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니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고(마태복음 10장 37-38절), 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14장 6절). 또 그는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가복음 16장 16절).
사도 베드로도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말했고(사도행전 4장 12절), 사도 바울도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했습니다(디모데전서 2장 5절). 성경적 기독교는 배타주의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만 구주이시며 다른 구주는 없다고 고백하며 증거합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은 우리의 주관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을 부정하며 자신을 절제하며 성경의 교훈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은 우리에게도 죄의 본성과 죄의 습관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항상 내면적 싸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부정하고 절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오늘날같이 교회가 넓어져서 속화된 때에 옛 신앙, 성경적 신앙, 보수신앙을 지키는 것은 좁은 길을 걷는 것입니다. 많은 교회들과 목사들과 교인들이 세상을 사랑하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말합니다. 이런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에 시대적 풍조를 반대하고 옛길을 붙드는 것은 편협하거나 극단적이게 보이는 외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성경의 교훈대로 가는 좁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이 길이 어려운 길, 힘든 길이지만, 이 길은 영생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나 이 문을 찾고 이 길을 걷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했고, 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 했고, 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했습니다(고린도전서 1장 18절, 21-24절).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는 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며 좁은 길로 가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구하며 걸어가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지 말고 넓은 길로 가지 말아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만 믿고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성경만 믿고 성경의 교훈대로만 살아야합니다. 우리는 특별히 이 혼란한 시대에 연합주의, 신복음주의,은사주의로 가지 말고, 오직 역사적 기독교 신앙, 배교와 타협과 분리된 근본주의적 개혁신앙, 즉 보수정통신앙을 굳게 지켜야합니다.
우리는 죄의 본성과 연약성과 죄의 습관을 가진 자기를 부정하고 인내하며 영광스러운 천국만 바라보고 땅의 좋은 것들을 헛되게 여기며 하나님의 교훈대로, 신구약성경의 가르침대로,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정정당당하게 살고, 또 주 예수님을 본받아 항상 온유하고 겸손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가야합니다. 이것이 승리하는 길입니다.
두 번째, 넓은 길과 멸망의 문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큽니다. 그것은 다원주의, 포용주의의 문입니다. 그것은 무슨 종교든지 포용하는 종교다원주의입니다. 그것은 무슨 철학사상이든지 포용합니다. 그것은 무슨 인생관, 가치관이든지 포용합니다. 그것은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진 무슨 신앙관이든지 포용합니다. 그것은 자유주의를 포용하고 천주교회를 포용하고 은사주의를 포용합니다. 그것은 세속주의, 물질주의, 육신적 쾌락주의를 포용합니다. 모든 동성애도 포용합니다. 또 그 길, 즉 그 생활방식도 넓습니다.
거기에서는 오직 한 가지의 덕만 있습니다. 그것은 관용과 포용만이 덕입니다. 거기에서는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든지 상대방을 존중해야 합니다. 거기에서는 오직 한 가지만 악입니다. 거기에서는 기독교 같은 배타주의만 악으로 간주되고 배척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문과 그 길은 멸망으로 인도합니다. 다원주의, 포용주의의 사상은 마귀의 사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와 배치됩니다. 그것은 오류에 빠져 있는 자들로 하여금 회개하지 못하게 만들며 그 죄 가운데 거하게 만듭니다. 요한계시록 18장 2절,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정신]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세상은 각종 더러운 정신들의 집결지입니다. 교회들도 배교하며 다원주의적이고 포용주의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곳으로 가는 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많은 종교인들이 그 곳으로 가고 있고 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많은 교인들도 그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참된 신자나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입니다.
멸망의 문으로 인도하는 길은 넓은 길입니다. 길이 넓다는 것은 다니기가 편하고 이용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 길은 아무리 많은 죄악의 짐을 졌다고 해도 쉽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모든 죄악은 우리가 범하기 가장 쉬운 곳에 있습니다. 우리는 문만 열고 밖에 나가면 우리를 유혹하는 죄악의 손길들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귀의 손길에 쉽게 이끌리는 사람들은 넓은 길로 들어선 사람입니다. 그들은 인생을 편하고 쉽게만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넓은 길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넓은 길은 결국 멸망의 문으로 그들을 인도할 것입니다.
넓은 길은 인생의 목적이 없이 걷는 사람들의 길입니다. 멸망의 문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은 많은 사람들이 즐겨 다닙니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이 길을 걸어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저 남들이 다니니까 덩달아 함께 걸어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목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은 목적도 목표도 없는 무의미한 삶인 것입니다. 그들은 왜 사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답을 못합니다. 그저 목숨이 붙어 있으니 살아간다는 대답이 고작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멸망의 문은 입을 열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인생의 두 갈래 길에서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생명의 길입니까? 멸망의 길입니까? 영생의 길입니까? 영벌의 길입니까? 잠시 서서 뒤돌아봅시다. 그리고 좁은 길이거든 하나님께 감사하고 열심히 걸어 생명의 문에 도달해야 되겠고 넓은 길이라면 얼른 돌이켜 좁은 길로 들어서서 함께 영생의 문으로 돌진해야 하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산상 설교의 결론 부분에 속합니다. 주님은 이제 더 이상 새로운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앞에서 언급한 가르침에 따라 살라는 네 가지 결론적인 훈계를 싣고 있는데, 각각 한 쌍씩 대조를 이루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13-14절 말씀은 “좁은 길과 넓은 길”이 비교되고 있고, 15-20절 말씀은 “좋은 나무와 못된 나무”가, 21-23절 말씀은 “진정한 제자와 거짓 선지자”가, 24-27절 말씀은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가 서로 비교되고 있습니다.
즉 이 부분에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현실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을 각각 기록하여 어떤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합당한 삶인지를 밝히며 바른 선택과 더불어 실천적 신앙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께서 가르치신 좁은 문 좁은 길에 관하여 함께 생각하며, 좁은 길에 관한 세 가지 질문에 진지한 마음으로 답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의 의미와 교훈
예수님은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들어가라(에이셀다테)’란 명령은 2인칭 복수 부정과거 명령형인데, 이것은 단회성을 나타냅니다. 즉 좁은 문에 이어진 좁은 길은 걷는 것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지만, 좁은 문을 선택하여 들어가는 것은 단회적(單回的)인 일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적인 결단과 그 이후에 지속되어야 하는 그리스도의 제자 된 자로서의 삶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이 권면하시는 삶의 특징은 “좁은 길”입니다. “좁은 길”은 폭이 좁고 한정된 삶이요 협착(狹窄)한 길입니다. 들어가는 문이 좁습니다. 동시에 성도는 좁은 길을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은 시작부터 좁고 협착한 삶이라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처음에는 제법 넓다가 계속 감에 따라 점점 좁아지는 그런 삶이 아닙니다. 좁은 문 자체 곧 이 삶에 들어가는 입구부터가 좁은 길입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 자체가 좁은 입구, 좁은 문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비타협적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의 허두(虛頭)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좁은 문을 통과해서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뒤에 버리고 가야할 것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 뒤에 두고 가야 할 첫 번째는 “세속(世俗)”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군중과 대중과의 세속적인 관계를 끊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예외적이고 유별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기쁘게 하는 것들을 문 밖에 남겨두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를 요구하고 싶은 우리의 마음을 억제해야 합니다. 우리는 악한 자를 대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는” 우리의 본능과는 반대로 행동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이처럼 시초부터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죄악 세상과의 근본적인 단절을 의미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 속에는 이런 뜻이 들어 있습니다. 더구나 그 문이 좁고 협착하다고 표현하신 것은 그 길이 항상 고난을 수반하기 때문이며, 참되게 살 때는 항상 박해를 수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 11-12절 말씀은,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세상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을 항상 박해하여 왔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 점에서 완전한 샘플이 되십니다.
여러분 또한 오해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때로는 가장 가깝고 소중한 사람들로부터 오해 받을 준비도 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태복음 10장 34-36절)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좁은 문을 찾으셨습니까? 그리고 그 문을 통과하셨습니까? 여러분은 진리를 보고 그것에 동의를 표시하고 나서 자신에게 “이 진리를 위해 나는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고 물어보셨습니까? 이 문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그동안 살아왔던 삶의 길을 벗어나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분석해보고 자신에게 정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것을 거부하면서, “내가 해야 할 것을 정확히 발견하기까지 나는 이 일을 계속하겠다”라고 다짐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다음 단계는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문을 찾아 들어간 후에 좁은 길 여행을 그대로 계속한다는 것입니다. 좁은 길 여행의 매 시간마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신분인가를 변함없이 상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매일 아침 깰 때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나는 세상 사람과는 달리 하나님의 가족의 한 사람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나를 흑암의 나라에서 빛의 나라로 옮겨주셨다”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천국을 향하여 가고 있다. 나는 이 세상의 나그네로서 시험과 시련이 무엇인지 안다. 나는 사탄의 간교한 유혹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나는 영적 전투에 부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요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이다”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말씀의 요점 중 하나는 우리 앞에 두 가지 유형의 삶이 열려 있고 우리에게 두 가지 다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넓은 문을 통해 들어가는 넓은 길이 있고, 좁은 문을 통과해 들어가는 좁은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길의 성격을 잘 인식하기만 한다면 망설임 같은 것은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힘든 것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의 요지는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7일 중 하루를 이런 일들을 묵상하며 사람들이 주일 예배에 함께 모이도록 정하신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일단 벗어나 객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넓은 길 위의 사람들이 사는 세속적인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온갖 허례와 호사와 더불어 그 속에 있는 궁극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의 칭찬이나 찬양에 무슨 진정한 가치가 있습니까? 신문이나 방송에 얼굴을 올리는 것이나 세상 유행을 앞서 가는 것들에 무슨 고상함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정답을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로마서 6장 21절). 거기에 비하면 그리스도인의 길, 좁은 길은 얼마나 놀라운 삶인지요! 신약성경, 특히 산상 설교를 다시 읽어보십시오. 2000년 전의 기록이지만 여전히 우리의 지성을 매혹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얼마나 윤리적이며 얼마나 크고 고상한 삶인지 오직 놀라울 뿐입니다.
좁은 길에 관한 세 가지 질문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 말씀의 문맥에 비추어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이 길로 가기로 결정했는가? 나는 이 길을 선택했는가? 내가 원하는 것은 이것인가? 내가 노력하고 있는 것은 이것인가? 나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을 살고 있는가?” 본문 말씀을 통하여 “좁은 길에 관한 세 가지 질문”을 생각하며 여러분 자신이 지금 좁은 길 위에 서 있는지 자신을 점검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는 신앙생활 하는 것이 정말 어렵다고 생각될 때가 자주 있는가? “처음 예수님 믿기 시작할 때는 너무 쉽다고 생각하고 덥석 믿었는데, 믿으면 믿을수록 신앙생활 바로 하는 것이 정말 어렵구나”라고 느끼지는 않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성경 말씀대로 사는 것이 피나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라고 자주 느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좁은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는 예수 믿는 것이 너무 좋은 것으로만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예수 믿는 것이 이렇게 좋은 줄 몰랐어요. 왜 좀 더 빨리 못 믿었는지 정말 아쉬워요.”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마냥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만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린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신앙생활도 처음부터 제대로 시작하면 기쁘고 감사하고 세상이 달라 보이는 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의 의미를 점점 더 깨닫게 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점점 알게 되고, 우리의 변화된 신분이 얼마나 고상하고 거룩한지 점점 깨닫게 되면 그때부터 신앙생활 하는 것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 세상의 거짓되고 음란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아질수록 하나님의 자녀답게 믿음생활을 바로 하는 것은 피 흘리는 전투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제자도를 기억하십니까? 마태복음 16장 24절 말씀은,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데, 이것이 좁은 길의 삶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지고 있던 나의 욕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 가슴 속에 품고 있던 나의 꿈과 야욕을 버리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부패한 본성의 욕구를 죽이는 것입니다. 나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 이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자기를 부인하고 좁은 길을 걷고 있습니까?나는 믿음의 길을 가기 위해 희생을 치르는 것이 있는가? 만일 여러분이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희생을 치르는 것이 있다면 여러분은 좁은 길을 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다시 마태복음 16장 24절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십자가를 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희생입니다. 주석가인 바클레이가 지적한 것처럼 기독교의 길에는 항상 어떤 십자가가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에는 신앙의 길을 가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믿음의 선진들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건강을 희생하고 자신의 부귀와 명예를 희생하고 직장을 희생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자원한 이름 없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따라 좁은 길을 가기 위해 무슨 값이든지 치르고 있습니까? 주일을 거룩히 지키기 위해서 때로는 직장도 사업도 심지어 모처럼의 출세의 기회까지도 희생하고 있습니까? 혹시 매월의 수입이나 생활환경에 비해 너무나 초라한 헌금을 드리면서 하나님을 위하여 무슨 희생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혹시 여러분 주위에 예수님을 알지 못해서 넓은 길,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이 있는데, 년이 지나가도 그들을 붙들고 욕을 먹든지 말든지 전도 한 번 제대로 못하면서 무슨 희생을 치른다고 자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주변에는 어두운 그늘에서 인생을 힘들게 사는 불행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가진 것을 함께 나누기 위해 찾아가는 일이 몇 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없이 살면서 “십자가 지고 주님 따라 가리라”는 찬송을 태연히 부를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말씀대로 살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고 있습니까? 지불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좁은 길을 가고 있는 성도입니다.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오늘부터 자세를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나라를 생각만 해도 문득문득 기쁨이 가슴에 차오르는가? 하나님 나라에서 장차 우리가 누릴 영광을 생각해보면 우리의 마음에 갑자기 은혜의 강수가 흐르는 것과 같은 기쁨과 감격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그 기쁨이 있다면 여러분은 좁은 길을 걸어가는 성도일 것입니다. 좁은 길을 가는 것은 마치 험한 산을 등산하는 경우에 비견됩니다. 오르기 힘든 산을 두 세 시간 오르고 있는데 아직도 정상이 보이지 않으면 지쳐오기 시작합니다. 이럴 때 정상에서 내려오는 사람을 만나면 묻게 됩니다. “얼마나 더 가면 되지요?”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됩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정상이 다가 온다”는 생각으로 기뻐하면서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험하고 높은 길을 올라가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땀 흘리며 올라가는 사람은 자기 앞에 천국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기쁨이 샘솟게 되고 황홀한 감정을 맛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런 기쁨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험한 길, 좁은 길을 가고 있는 사람입니다.로마서 5장 2절 말씀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좁은 길을 가는 자는 그 영광을 바라볼 때마다 즐거워하는 법입니다.
C. H. 가브리엘이 쓴 찬송가 492장 4절을 보면 성도의 소망과 기쁨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숨 가시고 죽음 없는 날 사모하며 기다리니, 내가 그리던 주를 뵈올 때 나의 기쁨 넘치리라, 열린 천국 문 내가 들어가 세상 짐을 내려놓고, 빛난 면류관 받아 쓰고서 주와 함께 길이 살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할 때마다 여러분의 마음에 이런 놀라운 황홀감 같은 기쁨이 있으면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좁은 길을 가는 성도입니다. 여러분은 힘들지만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면서 신앙생활을 바로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분명 좁은 길에 서 있는 성도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은 비록 무겁지만 십자가를 지고 주님 따라가기를 기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영광스런 주님의 제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주님이 여러분에게 영광스런 면류관을 준비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날이 오기까지 포기하지 말고 이 좁은 길을 함께 걸어가는 성도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무리
성도 여러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이 약속의 말씀을 믿는 사람만이 천국의 길이 보장 될 것입니다. 약속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 어디입니까? 영원한 멸망이 기다리는 지옥입니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이를 갈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의 말씀을 너무 가볍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귀에 들려지는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을 너무 가볍게 듣지 않기를 바랍니다. 천국 문과, 천국 길은 약속의 말씀을 믿는 사람만이 들어가는 문이고, 걸어가는 길입니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좁고, 천국으로 가는 길 역시 좁고, 불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편하고, 넓은 길이 지금은 편할지 몰라도, 지금은 행복할지 몰라도 그 길은 멸망의 길이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왕이면 편한 것이 좋지 않은가?” 사탄의 달콤한 속임수에 속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 문은 좁고, 가는 길이 좁고, 불편하지만 이다음에 우리가 들어 갈 천국 문과, 천국 길은 너무나 아름답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국 문은 열 두 진주 문으로 되어있고, 천국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으로 되어있고, 길 가운데로는 수정같이 맑은 물이 흐르고 있고, 강 좌 우에는 생명나무와, 열 가지 실과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천국 문으로 들어가고, 이 천국 길을 걸어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좁은 문,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만이 이 천국 문과, 이 천국 길이 허락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만이 이 천국 문과, 이 천국 길이 허락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천국 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이 천국 길을 걸어가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만 의지하고, 예수님의 손목을 꼭 잡고 따라 가기만 하면 됩니다. 세상 바라보면 이 문에 들어서는 것이,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이, 너무 힘이 들고, 고통스럽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만 의지하고, 예수님만 생각하시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시고, 좁은 길로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이 길이 생명의 길이며, 이 길이 영생의 길이며, 이 길이 영원한 천국이 보장되는 길입니다.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여러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음을 믿으시면서 영원한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시고, 천국의 길을 걸어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설교는 목사님들의 설교와 참고문헌을 인용하여 작성한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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