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선지자, 불법을 행하는 자, 반석 위에 세운 집
마태복음 7장 15 ? 27
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7: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7: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7: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7: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7: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7: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7: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들어가는 말
주님께서 산상수훈을 마무리 하시면서 본문 말씀을 통하여 3가지 교훈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갈 것을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이란 거짓 교훈으로 성도를 미혹하여 멸망으로 인도하는 자들입니다. 또 하나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가 천국에 입성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인생의 주추를 반석 위에 지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3가지 말씀은 산상수훈의 결론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제자들과는 저 멀리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향해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제자인 우리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주님은 거짓 선지자에 대해 정의를 내리십니다. 말씀을 듣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지 않고 자기의 뜻을 실천하는 삶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습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도 뭔가를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완전히 무시하는 삶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척은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는 것이다. 반석이 아니라 모래 위에 그럴듯한 집을 지은 것입니다. 이런 자가 거짓 선지자요 거짓 선생입니다. 주님은 이런 자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호통하시고 계십니다.
줄거리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거짓 선지자들은 항상 성도들에게 가까이 접근하고자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도들을 그냥 두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베드로전서 5장 8절).
거짓 선지자의 접근 방법–위선(양의 탈), 단번에 그들을 분별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쉽사리 분별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거짓 선지자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접근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진실을 공개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모습을 감추고 양의 옷을 입은 채 접근합니다. 그들은 성도를 미혹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게 되는데, 이들의 말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호감을 불러일으킬 만큼 과장된 것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에베소서 5장 6절)고 기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의 접근 방법–능력 행사, 사도 바울은 이들이 사탄의 능력을 힘입기 때문에 얼마든지 표적과 기사를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데살로니가후서 2장 9절). 사탄의 능력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할 수 있는 엄청난 것입니다(요한계시록 13장 13절). 그러므로 이적만을 바라고 이적만을 제일로 여기는 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이적 행하는 능력을 보고 미혹되기 쉽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적은 반드시 있고 또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적 그 자체만을 너무 중요시 여기지 마십시오. 이적은 하나님의 종뿐만 아니라 사탄의 종인 거짓 선지자들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목적, 본문 말씀은 그들을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첫째로, 그들의 노략질은 물질을 빼앗는 것입니다(에스겔 22장 27절).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누가복음 20장 47절).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행위를 보고 비판하신 말씀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물질에 대해 탐욕적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업, 또는 영광을 위한다는 미명 하에 물질을 바치라고 강요하지만 실상은 그 모든 헌물을 삼키는 탐욕적인 자들입니다.
둘째로, 그들은 생명을 빼앗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이란 영혼을 가리키는데 거짓 선지자들이란 보다 합리적이고 쉬운 방법을 제시하여 많은 사람들이 넘어가도록 하는 약탈꾼이요, 살인마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미혹되어 쫓아가다가는 생명을 빼앗기고 맙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좁은 문, 협착한 길일지라도 정로로 걸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마태복음 7장 14절).
셋째로, 그들은 물어뜯는 이리와도 같습니다. 창세기 49장 27절 말씀에 이리를 비유한 말씀이 있습니다. “…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이와 같이 이리는 싸우기를 좋아하며 사납기 그지없는 맹수입니다.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는 양의 옷을 입은 이리와 같이 양을 집어삼키기 위해 다가옵니다. 그들은 사납게 덤벼들어 영혼을 파멸시키는 데 온 힘을 다합니다(에스겔 22장 27절).
성도의 지혜
예수께서 열두 제자들을 훈련시켜 파송하시면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거짓 선지자가 횡행하는 세상에서 성도의 삶은 위태하게만 보입니다. 그러나 연이어 하신 말씀에서 주님의 요구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 하라” 즉 성도의 지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지혜는 땅의 지혜가 아니라 하늘의 지혜입니다(야고보서 3장 17-18). 이 지혜는 순결한 삶을 살게 하며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하는 무기입니다. 그분께서 주신 지혜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안다”(마태복음 7장 16절)는 말씀이요, 다른 하나는 “예수의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갈라디아서 1장 8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가지 말씀을 굳게 붙잡고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는 지혜를 소유하여 그들에게 미혹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도록 합시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두 문 곧 좁은 문과 넓은 문을 통해서 어느 문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진짜 문인지 배웠습니다. 오늘은 양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나아오지만 우리를 멸망으로 인도하는 거짓 선지자에 대해서 함께 생각하려고 합니다. 오늘날은 짝퉁이 판을 치는 시대입니다. 특히 명품일수록 짝퉁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명품은 갖고 싶지만 돈이 없어 싼 맛에 짝퉁을 삽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옷이나 가방이 짝퉁인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선지자를 따라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생명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짝퉁이 판치는 이 시대 거짓 짝퉁 선지자도 판을 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어떤 자가 거짓 선지자이며, 어떻게 그들을 구분할 수 있는지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거짓 선지자를 삼가고 생명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복된 인생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5절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하셨습니다. 선지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곧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엉터리로 분별하고 엉터리로 가르쳐서, 멸망 길로 인도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이 끼칠 구체적인 손상이나 가르침에 대한 특징 등은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만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삼가라”하신 것을 볼 때 우리가 현재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를 분별한다는 것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내가 거짓 선지자다”하고 이마에 써 붙이고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외관상 참 선지자인 것처럼 철저히 위장하고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15절 말씀에 주님께서는 거짓 선지자의 특징을 이렇게 묘사하셨습니다.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거짓 선지자들은 얼핏 보면 참 선지자 같습니다. 그들은 전통적인 말을 하고, 외관상 성경적인 경건을 보여주기 때문에 참 선지자와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다가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절대로 본색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짓 선지자들은 어떤 자를 말할까요? 구약의 배경뿐만 아니라 산상수훈의 내용 흐름을 통해서 볼 때 그들은 좁은 문, 좁은 길을 통해서 생명에 이르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는 자들입니다. 도리어 넓은 문, 넓은 길을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평강이 없는데도 “평강하다, 평강하다” 외치는 자들입니다. 예레미야서와 에스겔서 등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백성다움을 잃어버리고 살 때, 이방인의 침략을 통해 그들을 징계하셨습니다. 이 때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은 참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전파하라고 하신 말씀을 그대로 백성들에게 전파했습니다. 백성들의 죄악을 지적하며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메시지를 전파하였습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한 순간에도 “평강하다, 평강하다”며 평강만을 외쳤습니다. 예레미야 6장 14절 말씀에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하찮게 여기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는 의미)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고 했고, 또 예레미야 8장 11절 말씀에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고 했습니다. 또한 에스겔 13장 말씀에도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평강의 묵시를 보았다”고 했습니다(에스겔 13장 10절, 16절). 그들은 결코 하나님 백성답게 살지 못하는 죄를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 곧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과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평강만을 역설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이니까 만사형통할 것이다”, “만약 전쟁이 나더라도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실 것이다”하며,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하도록 돕지 않았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모든 환란에서 건져 주신다고만 말했습니다. 그들은 듣기에 좋은 말만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을 행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뻔뻔하였습니다. 예레미야 8장 12절 말씀에,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하니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는 믿지 않는 이방인들에게나 임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으로 인해 백성들의 신앙은 피상적이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죄악을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회개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습관적이고 형식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며 넓은 문, 넓은 길 곧 멸망의 길로 갔습니다. 이처럼 거짓 선지자들은 양의 탈을 쓰고 나오지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입니다. 겉으로는 정통적인 말을 하고 성경적인 경건의 모습을 보여 주지만 백성들을 생명의 길인 좁은 문, 좁은 길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멸망의 길인 넓은 문, 넓은 길로 인도합니다.
신약 성경에도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에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5절 말씀에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교회사에도 교회 안에 많은 거짓 교사들이 난무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거짓 선지자들이 난무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복음을 너무 피상적으로 전합니다. 예수님만 믿으면 만사형통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 진리를 신중한 의미로서 사용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믿기만 하면 된다는 피상적 의미로 사용합니다. 이들은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기보다, 긍정적인 메시지만 선포하려 합니다. 복을 난발합니다. 교인들도 죄를 지적하면 싫어하고 복을 많이 해 주어야 좋아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많지만 도덕성은 떨어지고, 한국 교회 전체가 지탄을 받기도 합니다. 하나님 백성답게 살지 않으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하나님 백성답게 살지 않으면서 회개할 줄도 모르고, 오히려 얼마나 당당하고 뻔뻔한지 모릅니다.
짝퉁은 비싼 값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품에 비해 아주 싼 값에 살 수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값진 은혜의 복음을 값싼 은혜로 만들어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그저 주셨으나, 그 은혜는 예수님의 보혈의 피를 다 쏟으신 후에야 마련된 은혜였습니다. 그 은혜는 결코 싸구려처럼 짓밟고, 마음대로 해도 좋은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까닭은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누가복음 1장 75절)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빌립보서 2장 12절). 세상에는 선한 선지자뿐만 아니라 거짓 선지자도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이들 거짓 선지자에 대한 경고와 이들을 구별하는 방법에 대한 기록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그들의 열매에 의해 알 수 있으므로 이들을 삼가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양의 옷을 입고 나타나는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고 경고하십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가장 큰 특색은 위장입니다. 그들은 선지자와 같은 선한 모습으로 위장하고 성도들을 미혹하는데, 본문 말씀에서는 이러한 그들의 위장을 한 마디로 양의 탈을 쓴 이리로 표현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양 같은 순진함과 거짓 없는 단순함으로 위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이렇듯 순수함과 선한 모습으로 나아오지만 그들의 목적은 노략질하는 것이요 성도들을 미혹하여 멸망으로 빠뜨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려움이 닥칠 때는 양들을 버리고 자신의 목숨만을 부지하기 위해 급급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특성을 지닙니다. 첫째, 거짓 선지자는 보냄을 받아서 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유익과 목적을 구하기 위해 나아온 것이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보냄을 받아 나아온 것은 아닙니다. 둘째, 거짓 선지자는 우리들에게 넓은 문을 제공합니다. 그들은 편하고 쉬우며, 안락한 넓은 문으로 우리를 미혹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미혹은 결국에는 타락과 멸망을 가져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거짓 선지자를 알 수 있도록 지혜를 주셨습니다.
자신의 가르침에 얼마나 모범을 보여 주는 가로 알 수 있습니다. 참 목자는 양들에게 가야 할 곳을 일러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양들의 앞에 서서 양들을 직접 인도하고 앞장섭니다. 따라서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는 첫 번째 방법은 그들이 자신들의 가르침을 솔선수범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보면 됩니다. 거짓 선지자는 성도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며, 많은 짐을 지우지만 정작 그 자신은 자신의 가르침과는 무관한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참 선지자는 갈 길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먼저 그 길로 행함으로 참 길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여 줍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본문 말씀의 핵심입니다. 나쁜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듯이 거짓 선지자들에게서는 거룩함과 성결의 열매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가르침이 아무리 훌륭하고 그럴듯하게 들린다 할지라도 그들의 삶이 무절제하고 엉망이며 경건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참 선지자가 아님을 깨닫고 그들의 가르침에 미혹되지 않아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최후
본문 말씀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을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거짓 선지자들의 최후가 어떤 것인지를 말해 줍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선지자들입니다. 따라서 본문 말씀의 심판은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양육 받고 귀한 열매를 맺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계속 성장하는 아름드리나무가 되지만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썩은 고목이 되어 찍혀 불에 던지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발밑에는 언제나 날이 선 도끼가 놓여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거짓 선지자들은 겉으로 볼 때 가르침은 제대로 합니다. 그래서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가 거짓 선지자들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다고 하십니까? 16-20절 말씀에 그의 열매로 그를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어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우리는 열매로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열매는 속일 수 없습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습니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17). 결코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18). 우리는 사람의 언행의 열매로부터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3장 10-12절 말씀에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말과 행동은 그 사람 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짓 선지자들을 쉽고 빠르게 분별하지는 못하더라도 결국 그 열매를 볼 때 알 수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처음 얼마 동안은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가르쳐 주신대로 사는 것처럼 가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그 가장됨이 다 나타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의 품은 뜻은 그의 행위 속에서 드러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말을 조심한다 할지라도 말은 그 사람의 정체를 폭로시킵니다(마태복음 12장 33-37절, 누가복음 6장 45절).
우리가 겉으로 볼 때는 좋은 나무와 못된 나무를 잘 구분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두 나무는 외관상으로는 비슷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열매가 맺힐 때 보면 분명하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좋은 나무, 못된 나무는 그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좋은 나무에는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고, 못된 나무에는 나쁜 열매가 맺힙니다. 열매가 나무의 좋고 나쁨을 결정해 줍니다. 거짓 선지자도 나름대로의 열매를 맺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 열매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아닙니다. 곧 성경에서 말하는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좀 더 좁게 말한다면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시는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나쁜 나무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심령의 가난, 애통, 온유, 의에 주리고 목마름, 긍휼히 여김, 마음의 청결, 화평하게 함, 의를 위하여 핍박 받음 등의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의를 맺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에서는 결코 이런 열매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반면에 좋은 나무는 개인에게 있어서나 그가 속한 공동체에서나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가르쳐 주신 그런 열매를 맺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한 동안은 도덕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참 선지자인지, 거짓 선지자인지는 시간이 흐르면서 열매로 드러나게 됩니다. 참 선지자는 산상수훈에서 가르쳐 주신 제자의 도를 쫓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가르치지만 그렇게 살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좁은 문, 좁은 길로 가지 않고 넓은 문, 넓은 길로 갑니다. 백성들까지 멸망의 길인 넓은 문, 넓은 길로 가도록 합니다. 결국 그들은 믿음을 무너뜨리고(디모데후서 2장 18절), 분쟁과 훼방을 조장하고(디모데전서 6장 4-5절, 디모데후서 2장23절),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게 해서(디모데후서 2장 16절) 하나님의 백성들을 노략질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거짓 선지자를 잘 분별하고 삼가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를 어떻게 한다고 하십니까? 19절 말씀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거짓 선지자에 대한 주님의 준엄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열매 맺지 아니하는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우리가 이 주님의 경고의 말씀을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거짓 선지자를 잘 분별하고 삼가며,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사람을 복된 삶을 사는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천국을 향하여 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서 살아갑니다.
본문 7장 21절에서 23절 말씀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한 행위 때문에 천국에 들어 갈 것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본문 21절 말씀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선한 행위를 한다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본문 말씀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주여, 주여 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는, 입으로 주여, 주여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열 두 명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물론 사도는 열 두 명이지만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제자들은 이보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그들은 다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어떻습니까? 그들도 처음에는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을 갔지만 나중에 모두 순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사도행전 1장 15절 말씀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무리의 수가 120명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120명이 예수님을 위해 끝까지 남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 계셨을 때는 많은 무리들이 주여, 주여, 하며 우리 주님을 따라 다녔지만, 그들 앞에 십자가가 놓였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앙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는 사람은 바로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버린 사람들을 말씀합니다. “주여”라는 말의 원어는, “퀴리오스”인데, 이 말은 초대교회 당시에 “오직 예수님만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부르던 말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주여”라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께 목숨까지도 드려서 충성하겠노라고 결단하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말이었고, 삶 가운데서 반드시 예수님을 죽기까지 따르리라는 사람이 사용 할 때만이 참되다고 인정받는 말이었습니다.
오늘 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이 세상에서 하늘의 기쁨을 맛보며 살아갑니다. 오히려 예수님 때의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르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노라고 고백하고, 또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이렇게 살겠노라고 결단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광만, 복만 바라보고 나는 십자가와는 아무 상관없이 살고 싶어요”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을 때 예수님을 떠난 사람처럼 십자가를 져야 하는 순간에 십자가를 기꺼이 지기보다는 그만 예수님 앞에서 떠나 버리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입니다. 또 이런 사람들은 평안할 때는 예수님을 잘 믿으나 고난의 순간이 다가오면, 환난의 날에 이르게 되면,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지지 않고 그만 예수님 곁을 떠나 버립니다.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을 자세하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 날에 우리 주님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버림받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은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쁠 때나,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에도 예수님을 진정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되셔서 하나님의 심판대에 설 때에 하나님의 칭찬을 들으시고, 하나님의 환영을 받으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뜻”이라는 말은, “목적”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 하나님의 목적대로 행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내 마음과, 내 생각에 맞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감당 하겠습니다 하고 심령 마음 속 깊숙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늘 솟구치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뜻대로, 나의 말씀대로 살아라”. 우리는 항상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돔과, 고모라 성이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는,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
예수님께서는, 7장 22절에서 23절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하나님의 심판 날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주여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한 사람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능력을 행한 사람입니다 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주님께 말씀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밝히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너희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밝히 말씀하시되” 이 말씀은 공적인 선포를 할 때 쓰는 용어입니다. 뜻을 번복할 수 없을 때 사용하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행했다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살 때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지 못했다고 한다면, 이런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라”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교훈 하시고자 하는 뜻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고자 하는 목적이 선하다고 해서 우리가 취하는 방법이 모두 선하게 인정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불법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본문말씀의 거짓 선지자들이 바로 이러한 자들이었습니다. 더욱이 본문 말씀에서 거짓 선지자들이 “주여! 주여”’라고 불렀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들이 예수님을 열심히 믿는 것처럼 보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모든 사실로 미루어 보아 결코 외모로 보기에 예수를 열심히 믿었다는 사실이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감추어 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도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선지자란 어원적으로 보면 예언자와 같은 뜻인데 여기에는 앞을 미리 내다본다는 뜻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국민들에게 전달한다”는 뜻이 더 강하게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거짓 선지자의 노릇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만이 가장 진실 된 복음을 전하는 자로 가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러한 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 8절 말씀에, 그러나 우리나 혹은 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귀신을 내어 쫓을 수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우리는 분명히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으로부터 불법을 행하는 자들로 판정 받았다는 사실에서 그 이유를 다음 두 가지 중의 하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주시는 능력 이외에 다른 힘을 입어 귀신을 내어 쫓은 후에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행하는 것인 양 가장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며, 둘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귀신을 내어 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은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기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내 자신이 그러한 은사를 받든지 아니면 그러한 은사를 지닌 사람을 보든지 간에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권능을 행할 수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때로 하나님께서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에게 권능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이 권능이란 말은 비단 초자연적인 힘뿐만 아니라 통치권, 능력, 권세, 세력 등의 의미가 있는데 이렇듯 불법을 행하는 자들의 능력은 대부분 구조적 폭력이나 권력 남용을 이용한 폭력 등으로 표출됩니다. 비록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사회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어떤 지위를 획득한 경우에 우리는 얼마든지 이러한 불법을 행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또한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사탄이 이 세상을 통치할 수 있는 권세를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처럼 허세를 떨었다가 예수님의 한마디의 말씀 앞에서 꼼짝없이 굴복하고 말았다는 사실에서 좋은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권세를 주님 앞에서 올바로 행사하여야 할 것이며, 옳지 못한 권세 앞에서는 예수님의 경우에서와 같이 비굴하지 말고 담대해야 합니다.
심판 날에는 그들의 행위가 밝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때로 진실 된 성도들은 예수의 이름을 도용하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로 말미암아 선의의 피해를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들도 교회 안에 있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로 말미암아 세상의 지탄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억울한 것은 그처럼 예수의 이름을 도용하며 불법을 행하는 자들과 진실한 성도가 세상 사람의 눈에는 물론 심지어 교회 안의 성도 간에도 서로가 구분을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교회의 심각한 문제가 되기도 하며 심한 경우에 교회가 분열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흔들리지 아니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본문의 말씀과 같이 심판 날에 주님 앞에서 옥석이 밝히 구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성도는 다른 사람의 행동에 구애됨 없이 항상 하나님 앞에서 옳게 행동하는 성도입니다.
예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불신자들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예수를 열심히 믿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저들은 예수를 열심히 믿었지만 불법을 통하여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받을 것을 이미 다 받았기 때문에 하늘나라에서 받을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에게 성경은 그들이 “이를 갈며 심히 슬퍼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에서 쾌락을 얻을 생각을 하지 말고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 디모데후서 2장 3절 말씀과 같이 더욱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예수님의 상급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22절 말씀에서,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버림받을 사람들이 소수가 아니라 많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고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표준은 사람의 표준과 다른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 위주로 생각합니다. 나에게 은혜로운 설교를 해 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나에게 축복 해 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나에게 권능 베푸는 사람을 좋아하고, 나의 뜻대로 해 주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면서 설교도 잘하고, 귀신도 내어 쫓고, 권능을 행하고, 충성을 하고, 열심히 봉사를 하고,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열심히 교회를 섬기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은 어떤 환경, 어떤 경우에라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달게 받으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혜로운 인생 건축자
7장 24절에서 27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본문 말씀은 주의 말씀을 듣는 그 즉시 그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지혜로운 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대한민국은 장마철마다 폭우로 인해 많은 집이 무너지고 도로와 농경지가 유실됩니다. 미국도 계절마다 토네이도와 함께 강력한 허리케인이 상륙하여 엄청난 피해를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마치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익숙한 광경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두 종류의 집이 있습니다. 집을 반석 위에 세운 집과 모래 위에 세운 집입니다. 비가 오고 창수가 나고 강한 바람이 불어 올 때, 반석 위에 세운 집은 끄떡없이 서 있지만, 모래 위에 세운 집은 가차 없이 무너져 버립니다.
폭우와 홍수와 태풍은 마지막 날 있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비유어입니다. 사람들은 그날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날의 심판장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날 사람들을 두 종류로 분류할 것입니다. 집을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집을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들은 하나님의 칭찬과 복 속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책망과 함께 쫓겨나 영원한 멸망의 세계로 들어갈 것입니다. 주님께서 산상수훈을 마치시면서 결론으로 이 비유를 주시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본문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즉, 인생의 집을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자가 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혜로운 인생의 건축자
주님은 인생을 건축자로 비유하셨습니다.
지리적 요건, 주님께서는 먼저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 기초가 튼튼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즉 집을 튼튼하게, 그리고 굳건히 세우기 위해서는 먼저 그 기초가 튼튼한 반석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 말씀을 바꾸어 말한다면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천국이라는 우리의 목적을 온전히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의 기초가 반석과 같이 튼튼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즉 그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할 뿐만 아니라 그 말씀대로 행함으로 탄탄한 반석처럼 믿음을 닦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로운 건축자가 굳건한 지리적 요건의 터전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은 지혜로운 자의 믿음인 것입니다.
자연적 요건, 하나님께서는 지리적 요건에 이어 두 번째로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자연적 요건에 의한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두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는 모두가 좋은 자연적 환경에서 일을 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원하지 아니하는 폭풍과 홍수 등의 가혹한 시련이 우리가 예측하지 못하는 바로 그 시간에 찾아옵니다. 이러한 자연적 요건의 장애와 시련의 극복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기초에서 우리는 오래 참고 견디는 믿음의 진실한 행위를 따라야 합니다. 즉 삶속에서 믿음의 열매를 맺는 진실한 삶을 통하여 돌발적인 모든 일에 준비를 하는 지혜로움을 가져야만 합니다.
지혜로움에 대한 보상, 주님께서는 세 번째로 지혜로운 건축자에 대한 보상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역경에서도 손상되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의 진실 된 모습 그대로를 보존한 것에 대한 영원한 보장입니다. 그 어떠한 역경이나 시련도 어느 것 하나 손상시킬 수 없는 지혜로움의 보상을 받기 원한다면 우리 모두는 마땅히 지혜로운 인생의 건축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지혜로움의 비결
듣는 자의 지혜로움, 지혜를 얻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지혜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구약의 지혜자는 말하기를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라“(잠언 2장 2절, 6절, 10절, 3장 13절)고 하였습니다. 지혜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은 성령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령께서는 지금도 온갖 지혜의 말씀으로 성도와 모든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요한계시록 2장 7절, 11절, 17절, 29절, 3장 6절, 13절 22절, 13장 9절, 마태복음 11장 15절, 13장 9절). 지혜를 얻기 위한 가장 소중한 자세, 그것은 먼저 지혜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듣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지혜의 소리는 언제나 우리의 귓가에서 그 소리를 발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그 소리를 듣기를 원한다면 언제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지키는 자의 지혜로움, 지혜는 그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그가 온전한 지혜자라고는 말하지 아니합니다. 지혜는 우리가 들은 지혜의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서 지켜 생활함으로 온전한 지혜를 갖으라고 계속하여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은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그 말씀에 의한 진실한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빛과 소금으로서의 진가가 보여 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혜로움을 위하여, 지혜의 말씀을 듣고, 그 지혜의 말씀을 지킬 때 우리는 비로소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지혜를 얻은 사람은 언제나 그 사람 자신의 생각과 그 사람의 믿음이 그리고 그가 살아가는 일상의 생활이 하나로 조화가 되어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듣기만 하는 자의 지혜는 완성되지 못한 지혜입니다. 마찬가지로 듣지 아니하고 사회 윤리적, 도덕적 측면의 자기 주관적인 선을 추구하는 행위도 온전한 지혜가 아닙니다. 지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요구대로 자기 자신을 다스려 행하는 것입니다. 이 지혜로 아름다운 여러분들의 인생을 만들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모래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자
7장 26에서 27절 말씀입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본문 말씀은 주의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그 말씀을 행하지 않는 자의 위험에 대한 경고입니다. 본문의 말씀이 우리에게 있어서 더욱 의미심장하게 경종을 울리는 것은 이 말씀이 우리가 “황금률”이라고 말하는 산상 수훈의 모든 설교를 마치는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자의 유형
주님께서 말씀하신 어리석은 자에 대하여 성경의 표현은 “어리석은 자” 혹은 “미련한 자” 또는 “시기하는 자” 등 여러 가지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어리석은 자의 유형을 좀 더 세분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시작과 끝이 다른 표리가 부동한 자, ① 갈라디아 교인의 경우: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하여 그들이 처음 믿던 순수한 믿음을 떠나 변질되고 오도된 교리를 따르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서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라디아서 3장 1?3절)라고 그들의 시작과 끝이 다른 신앙의 행위에 대하여 그것은 어리석은 자의 행위라고 책망을 하였습니다. ② 바리새인의 경우: 주님께서는 율법보다는 장로들의 전송된 유전에 얽매여 있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겉과 속이 다른”(누가복음 11장 37-40절) 표리가 부동한 자들로서 스스로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어리석은 자 중의 어리석은 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시작과 끝이 다르고 겉과 속이 다르며 생각과 그 행위가 다른 자가 곧 어리석은 자입니다.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는 자, 주님께서는 재물을 많이 쌓아 놓고 자기 영혼의 안일을 추구하는 부자를 향해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자”라고 하셨습니다(누가복음 12장 16-21절). 야고보 사도는 물질을 추구하여 부를 축적하기를 원하는 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야고보서 4장 14절)라고 하였습니다. 순간을 사는 사람들이 그 한 순간을 위한 물질에 얽매일 때 주님은 그들을 어리석은 자로 정죄하신 것입니다.
인내가 없는 조급한 자, 잠언의 지혜자는 말하기를 지혜로운 자는 노하기를 더디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조급함으로 쉽게 노한다고 하였습니다(잠언 14장 29절, 29장11절). 인내가 없는 사람, 이는 지혜가 없는 어리석음을 스스로 드러내어 놓는 행동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행동을 삼가지 못하고 조급히 행하는 스스로의 행동으로 “어리석은 자”라고 정죄를 받았습니다(잠언 14장 15절).
자기 주관대로만 믿는 자, 지혜로운 자는 모든 경고와 경계의 말씀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인하여 두려워 악에서 떠나며 경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만 어리석은 자는 오히려 자기 주관의 판단대로 자기감정과 정욕에 의하여 방자하게 판단하고 그것을 믿으므로 스스로 어리석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잠언 14장 16절).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 어리석은 자들은 그 자신의 주관에 의한 판단으로 그 마음이 부패하여있으며 그 소행이 가증한 자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의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대로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선이 무엇인지를 알면서도 행하지 않습니다(야고보서 4장 17절). 이와 같은 행위는 죄악의 행위로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부정하는 가증한 행위인 것입니다(시편 14장 1절). 우리는 욥의 아내를 통하여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에 대하여 더욱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욥기 2장 10절). 하나님을 아는 자의 하나님에 대한 부정보다 더 어리석은 죄는 없습니다.
어리석은 자에 대한 교훈
명철의 길을 따라 행하라, 잠언 9장 6절의 말씀은 어리석은 자를 향하여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고 경고에 경고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행동 지침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그것은 어리석음을 버리고 명철로 그 어리석음이 차지하였던 부분을 채우라는 말씀입니다. 어리석음은 죄악입니다. 죄악은 그 삯으로 우리의 생명을 지불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과감히 죄악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은 알고 행하는 것이 바로 명철의 길입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기 이해하라,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무지와 아집으로 말미암아 깨닫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어리석음을 더욱 가중시켜 영원한 구제 불능의 상태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향하여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에베소서 5장 17절)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를 위한 가장 소중한 말씀입니다. 지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이 곧 지혜자를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 잎에 설 때에 모두 참 잘 왔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내 딸아, 창세전부터 너를 위해 예비한 기업과, 상급을 차지하거라 하시는 하나님의 환영을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단호하게 거절하시고, 인정하시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방법대로 신앙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을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말씀에서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24)라고 하신 반면에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26)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차이는 한 문장 차이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입니다. 곧 ‘행하는 것’과 ‘행하지 않는 것’ 거기에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고 어리석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나의 이 말은” 산상설교의 말씀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이제까지 말씀해 오신 산상설교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에 반해 주님께서 말씀하신 산상설교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는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은 단순히 윤리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느냐, 들어가지 못하느냐 하는 종말론적인 심판과 관련된 말입니다. 곧 주님께서 말씀하신 산상설교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혜롭고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은 평소에는 그 차이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제 그 차이가 들어나게 됩니까? 비가 오고 창수가 나고 태풍이 불어오면 알게 됩니다. 그 집을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비가오고 창수가 나도 끄떡없습니다. 태풍이 몰아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비가오고 창수가 나면 쓸려 가버립니다. 태풍에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두려운 것은 내가 지혜로운 자인지, 어리석은 자인지 확인하는 순간이 오면 그 때는 이미 늦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칭찬과 꾸중은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즉각 결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에 나오는 비와 창수와 바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심판은 종말론적인 심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심판 때에 내가 그 집을 반석 위에 집은 지었는지, 모래 위에 집을 지었는지 확연하게 들어나게 됩니다. 그 때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음을 깨닫고 후회하고 뉘우쳐 봐도 이미 때가 늦은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연습이 없습니다. 비와 홍수와 태풍에 비유된 하나님의 심판도 반복이 없습니다. 한번 오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전에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은 기회가 주어졌을 때 지혜롭게 그 집을 반석 위에 집을 짓도록 충고하신 것입니다. 짧은 생애 동안 어리석게 모래 위에 집을 짓지 말라는 경고로 주신 것입니다.
나는 어디에 집을 지은 자입니까? 그 집을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자입니까?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자입니까?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살펴봐야 합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고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 이 비유의 말씀을 잘못 이해합니다. 잘못 이해하는 것 중에 하나는 이 비유의 말씀을 행위 구원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뜻을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구원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 집을 반석 위에 집을 잘 지으면 그 공로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집을 잘 짓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비유의 말씀은 이런 행위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행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이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받습니다.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은 “행함”과 “행하지 않음”만을 따지신 것이 아닙니다.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 말을 듣고 행하는 것”과 “이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것”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는 믿음이란 주제가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그러나 이 말씀 이면에는 믿음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도 않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한다”는 말 속에는 이미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것을 자신의 삶의 기준으로 삼아 생각과 행동을 고치고 바른 삶을 꾸려가는 것은 적어도 이 말씀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했음을 뜻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이것을 말씀하신 예수님 자신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가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말씀의 진가를 알고 지킨다는 것은 그 말씀을 하신 분에 대한 태도 곧 그 말씀을 하신 분을 믿는 믿음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거나 위선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표명하는 것이 됩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거나 거부할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불순종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비유의 말씀을 믿음이 제외된 행위만을 강조하는 행위 구원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해석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의 말씀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따라서 이 비유의 말씀은 앞 단락의 말씀과 분리하여 따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가 본문 말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 본문 말씀을 따로 분리해서 읽기 때문에 많은 잘못된 이해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므로”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앞 단락 21절 말씀에서 “주여 주여 하는 자라고 해서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이어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의 말씀에 대한 자연스러운 귀결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24절부터 말씀하신 주제인 “나의 이 말”은 앞의 “하나님의 뜻”과 연결됩니다. 21절 말씀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과 본문 말씀의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것”은 동격입니다. 이 두 말씀이 동격이라는 것을 연결해 주는 것이 바로 “그러므로”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행함”이란 바로 예수님의 “이 말을 지켜 행하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하신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하나님의 뜻으로 인식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으로 가르쳐주셨으며, 그렇게 받아들이도록 요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신 우리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들 곧 예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뜻으로 말씀하신 산상설교의 말씀을 삶 전체로 실현하는 사람들이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운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잘 모르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아버지의 뜻을 알려주신 분으로 대접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고 따르면서 그 분의 말씀을 행하지 않는 것은 말로만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실제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지 않는 자입니다. 정말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면 그 주님의 말씀을 자신의 생각과 감정보다 더 귀중히 여기며 무조건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떤 값을 치루더라도 그 말씀에 순종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듣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이 시작되는 초창기에 제자로 부르신 자들을 향해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고…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다”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의 정체를 간접적으로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된다면 이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자세를 재고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자세가 정확하게 고정된 다음에야 이 말씀을 지킬 것인지 아닌지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산상설교를 말씀하실 당시 예수님의 정체는 아직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이른 시기에 자신의 말씀을 듣고 지킬 것을 강요하셨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씀에 이어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다”고 하심으로 자신의 설교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들에게도 예수님의 이 같은 요구에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한다는 것”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위를 하나님의 것과 같은 것으로 믿지 않는다면 “내 말”과 “하나님의 뜻”을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산상설교를 왜 지켜야만 하는가? 하고 반문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산상설교를 하나님의 뜻으로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산상설교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자입니다. 이런 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산상설교를 듣고 행하도록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산상설교 말씀을 듣고 놀라고 좋아하기만 하는 것은 주님이 뜻하신 바가 아닙니다. 이 말씀이 너무 좋고 귀한 말씀이기 때문에 외우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거나 가르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우리의 삶을 통해 구현해내야 합니다. 이런 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자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지혜로운 자가 되시겠습니까? 어리석은 자가 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이 산상설교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최소한 늘 지키려고 애쓰고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폭우와 홍수와 태풍에 대비해서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우는 자와 같습니다. 이런 자가 지혜로운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대비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산상설교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이런 자는 폭우가 몰려오는데도 불구하고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입니다. 이런 자는 집을 쉽고 빨리 지을 수 있을지라도 금방 무너지고 맙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이런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는데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리하여 그 집을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자들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자들이 되어야합니다.
마무리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거짓 선지자들을 구별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지금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반석위에 믿음의 집을 지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은 혹시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까? 내 사업이 잘되기 위해, 내 가정이 행복하고, 내가 잘되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물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부여받은 사람은 세상의 모든 복을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방법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목적만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이 사람의 결말은 우리 주님이 인정하시지 않고 결국은 버림을 당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내 생각과 맞지 않고, 내 방법과 맞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이면 따르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가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기 바랍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구별하면서 살아 갈 때, 천국이 우리 안에 임하고 영원한 천국에 입성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인생의 집을 반석위에 건축하셔서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설교는 목사님들의 설교와 참고문헌을 인용한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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