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시니어타임즈US] 본지는 2019년 1월부터 518사건과 관련한 신간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The War of 5∙18 History between Moon Jae-in and Chun Doo Whan)>을 저자와의 합의 하에 연재를 시작한다.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은 5.18사태 전문가인 김대령 박사의 16년간의 연구 결산으로 지난해 11월 26일을 기해 출간됐으며, 인터넷 서점 아마존(www.amazon.com)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편집자주>
제5장 ∙ 문재인이 바로잡아야 할 5·18 기록
정현진 기자의 “올해는 5.18 진상규명 마지막 기회” 제하의 지난 3월 21일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인터뷰 기사에서 김양래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2017년이 광주사태의 진상규명을 마무리할 수 있는 마지막 시기이며, 상당히 중요한 때임을 이런 말로 강조한다:
올해는 조사와 분석을 통해 역사가 새로 쓰여지는 발판이어야 하고, 그래서 중요합니다. 진상규명을 위해 전반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에요. 정부 공식 보고서가 없고, 사실 관계의 일부만 밝힌 것에 불과한 상태에서 사건의 근본에 아직도 접근하지 못했습니다(정현진 2017).
그런데 만약 문재인 정부가 진정으로 광주사태의 진상규명을 할 의도가 있는 것이라면 우선적으로 필요한 작업이 지난 30여년간 반복적으로 언론에 잘못 보도되고, 책자에 잘못 기록되어 잘못 알려진 광주사태 관련 가짜뉴스 및 엉터리 정보들의 사실관계들을 바로잡는 일일 것이다.
1. 군 무기고 무기 최초 피탈 시점
한국에서는 일명 ‘푸른눈의 목격자’로 불리는 위르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가 1980년 5월 20일 택시운전사 김사복과 더불어 광주에 막 도착하였을 때 광주 입구에서 찍은 사진은 광주사태는 ‘항쟁’이 아니라, ‘무장반란’이었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입증한다. 광주사태가 ‘항쟁’이었느냐 ‘무장반란’ 이었느냐는 군무기 최초 피탈 시점이 언제였느냐에 따라 갈라진다. 그런데 힌츠페터가 5월 20일 오후에 찍은 사진은 공비 부역을 하던 민간인들이 이미 총기 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증한다.
힌츠페터가 광주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윤상원은 「결전의 순간이 다가왔다!」라는 제목의 5월 20일자 5∙18 성명서를 유인물로 제작하여 홍보반을 시켜 광주시내에 쫙 뿌렸는데, 거기에 “학생혁명군, 상무대 에서 무기탈취에 성공!”이라고 적혀 있었다. 따라서 5월 21일 오후 3시 이후에야 광주시민들이 무기 탈취하러 출발하였다는 사기꾼들의 주장은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5∙18 기록물의 기록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14] A group of people riding on the back of a truck Description generated with high confidence.
5월 21일 40여명의 사망자가 있었지만 그 중 다수는 광주에서 사망한 것이 아니었으며, 사고 발생 시간도 오전이었는데 어떻게 그들이 공수부대 집단발포 희생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 날 사망자가 생긴 첫 번째 원인은 그 날 오전에 난동자들이 광주 외곽도로에서 일으킨 대형교통사고들이었다. 아직 대학생들도 소형차 운전면호도 없었던 때에 난동자들은 오전 9시에 아세아자동차에서 수백 대의 군용차량을 탈취한 후 전라도 44개 무기고를 향해 과속으로 질주하였다.
그런데 그 운전자들이 그 날 아침 각자 자기 집에서 온 것이 아니라 밤새도록 시청과 세무서와 전신전화국과 방송국 등으로 몰려다니며 방화하던 자들이었다. 방화하던 난동자들은 술에 취해 있었다. 5월 21일 아침 아직 술이 덜 깬 채로 초보 운전자들이 전혀 운전해 보지 않은 군용차량이나 대형차량을 과속으로 몰며 졸음 운전한 것이 교통 참사의 원인이었다.
무기 탈취 차량 교통사고 희생자들을 제외한 총상 희생자들은 공비 및 그 부역자들 총탄에 맞은 희생자들이었다. 5월 21일 오후 한 시경부터 시작된 간헐적으로 울린 총성 대부분은 (나중에 시민군이라 불리기도 한) 괴무장단체의 총성이었다. 만약에 공수부대 집단발포라는 것이 있었다면, 당연히 가장 근거리에 있는 시민들이 사망했어야 했는데, 무기탈취 도중 교통사고 희생자를 제외한 총기 사고 희생자들은 대부분은 무장난동자들 밀집 지역에서 총에 맞았다.
탈북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그 날 시민군을 가장한 북한군이 시민들 등 뒤에서 총을 쏜 것이라고 증언한다. 그런데 현장 목격자들과 기자들과 시민군들의 증언들이 모두 그런 증언을 뒷받침한다. 광주대교구 사무국장 유팔동 씨는 가톨릭센터 6층에 거주하며 센터 건물 총관리 책임자로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그 날 정오 무렵부터 시민군들이 가톨릭센터 7층 옥상에서 금남로와 도청을 향해 총질하는 것을 현장 목격하였다(유팔동 2013, 527).
조선일보 조성호 기자는 공수부대 바로 앞에서 대치하고 있던 시위군중은 이미 오후 2시경에 러시아제 AK-47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는 것을 보았으며, 「르 몽드」기자 필립 퐁스(Phillippe Pons)는 그 날 오전에 시위대가 이미 자동소총으로 무장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퐁스 기자는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시민군들이 시민들 등 뒤를 겨냥하고 총을 쏜 사실을 이런 말로 표현하여 보도한다: “시위대 중 몇 명은 계속해서 군중에 총격을 가하고 있었다(퐁스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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