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시니어타임즈US] 본지는 2020년 7월부터 최익주 선생의 <그렇게 선진국이 가능해?(가제)> – 국민의 반성과 국가적 전환점(부제)을 저자와의 합의 하에 글이 출판되기 이전에 연재를 시작한다. 연재는 회차별로 매주 한편씩 실리게 되며, 글의 배포는 무방하나 무단전재는 금한다. 글의 소유는 전적으로 저자 최익주 선생에게 있음을 알리며, 본지의 편집방향과는 무방하다.
<그렇게 선진국이 가능해?>는 저자가 20년여 전부터 대한민국이 인간적으로는 물론이고 총체적으로 한계에 봉착했고, 또다시 혼란과 위기와 망국의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라는 점을 인지함과 동시에 한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원인들을 연구했다. 이에 저자는 대한민국이 부디 새롭게 출발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가지고 산업화 이후의 시기부터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일어난 일련의 최근 사건들을 통해 그 문제점 되짚으며, 앞으로 대한민국이 바르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편집자주>
8. 필자의 인생이 180도 바뀐 배경 Ⅰ
대한민국을 총정리하는 상황에서 필자의 인생 역시 중요해졌다.
여러분도 이번 주제를 끝까지 읽어가면서 개인이 어떻게 이처럼 엄청난 일들을 겪게 되었으며, 개인적으로 어떻게 감당·극복·승화해내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는지 간접으로나마 실감해주기 바란다.
필자는 이처럼 기막힌 일들을 당하면서 개인(운명)적으로는 물론이고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시대적으로, 인생과 인간과 인류의 차원에서 수많은 고민과 갈등과 생각들을 집중했다.
역시 아래 내용은 필자가 대한민국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적응하지 않았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기 내용을 접하는 동안만이라도 최소한 자신의 종교, 이념, 학력, 지위, 자존심을 모두 내려놓고 순수한 인간으로 되돌아가 보길 진심으로 고대한다.
필자의 어린 시절 요약
어려서부터 필자는 시대와 종교와 사상에 관계없이 인류에게 획기적으로 공헌해준 훌륭한 사람들의 인생과 업적과 의식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부처와 예수와 소크라테스와 공자와 훌륭한 정치인들의 자서전을 뒤적거렸고, 스님들과 목사들과 명교수들의 강좌를 경청했으며, 까다로운 서적들을 좋아했고, 사색하는 시간을 적극적으로 많이 가졌다. 하지만 세상과 인간과 인생을 생각할수록, 알아갈수록 오히려 의문이 많아지고 깊어졌고, 만나보고 싶은 사람들도 있었다.
필자가 만나보고 싶었던 사람들
필자도 어느덧 기성세대가 되었고, 김대중과 노무현과 김수환 추기경과 박원순과 오웅진 신부를 만나보고 싶었다.
– 김대중에 대해서는 책의 주제 ‘13.김대중의 생애는 우리가 열등한 민족성과 문화인 증거’, ‘17.박정희와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 순서를 바꿔보면’에서 다뤄진다.
– 노무현에 대해서는 주제 ‘20.참여정부의 개혁실패’, ‘21.노무현의 한심한 개혁과 비참한 말로’, ‘28.문재인이 노무현의 인생과 실패에서 얻어야 할 교훈’에서 집중적으로 다뤄진다.
– 김수환 추기경에게는 필자가 장문의 서신을 연거푸 발송했다. 당시에 필자는 노무현 대통령의 교만과 무능에 극도로 실망했고, 참담한 실패를 확신했으며, 대한민국에 획기적인 전환점(개혁안)이 필요하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취지로 김수환 추기경에게 서신을 발송했고, 정체된 대한민국의 위기 해결과 참다운 개혁을 위해서 김수환 추기경이 특별한 계기(성명서 발표)라도 마련해줄 것을 몇 차례 간절하게 건의하면서 면담을 신청했다. 하지만 비서 신부로부터 ‘검토 중’이라는 답변에 이어서 ‘어렵다.’라고 통보가 왔다. 당시에 김수환 추기경은 상당히 노쇠했고, 정신도 체력도 오래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다.
실제로 노무현은 무능과 교만과 아집으로 일관했고, 대한민국은 대립과 분열과 적대적인 분위기로 바뀌었으며, 탄핵에 이어서 열린우리당에서 퇴출당했으며, 참담한 실패와 비참한 말년으로 죗값을 치렀다.
– 박원순은 노무현 정부 시절에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에서 만나봤고, 주제 ‘7.필자가 겪어본 박원순과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8.진보(세력)에게 상대가 안 되는 무능한 보수(세력)’으로 대신한다.
– 오웅진 신부는 필자의 두 아들이 초·중학교 때(20년여 전) 가족을 데리고 음성 꽃동네를 찾았다. 필자는 꽃동네를 둘러보았고, 꽃동네가 오웅진 신부(업적, 인생)의 전부(최종)이고, 더는 나올 것도 기대할 것도 없음을 확인했고, 사실은 상당한 실망을 안고 돌아왔다. 그런 뒤 얼마(몇 달) 지나지 않아서 오웅진 신부와 동생의 부정비리가 밝혀졌고, 필자가 꽃동네를 돌아보면서 실망하고 예상했던 것이 사실로 맞아떨어졌다.
(※ 필자는 누군가를 판단하고 평가하고 예측하는 나름의 기법이 있다. 그래서 꽃동네를 찾아가서 오웅진 신부의 일생을 대략 확인했고, 기대와는 반대로 오히려 크게 실망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의 불안한 예측이 사실로 맞아떨어졌다.)
여기서 거론되는 사건에 연관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여기서 소개되는 필자의 과거 사건에 관련자들을 불쾌하게 만들거나, 우리의 관심사를 과거로 후퇴시키려는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
아마도 여기서 거론되는 사람 중에는 좋지 않은 과거가 드러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유로 피차 안타까운 역사와 사회와 문화와 민족성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누군가는 가해자와 피해자이기 쉽고, 사실은 이러한 우리가 모두 안타까운 희생자들이다.
그래서 여기 내용과 관련된 사람들은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바람직한 사회문화와 미래와 후대를 위하는 당연함과 애국충정으로 승화해주고, 완벽할 수 없는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서 서로가 당하고 겪을 수밖에 없었던 갖가지 일들 중 하나로 여겨주기 바라며, 가능하다면 잘잘못에 연연하지 말고 오히려 인생의 소중한 교훈과 추억과 보람으로 간직해주길 바란다.
필자의 인생이 180도 바뀌어버린 사건
필자는 군을 제대하고 개인적으로 이것저것을 시도해보다 실패했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관세사무소(재무부 시행 1기 관세사) 개업을 준비했고, 한동안 도와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개업해서 5·6개월 만에 경력이 15-17년인 직원 세 명이 한꺼번에 퇴사해버렸다. 필자는 6개월 동안 독학으로 수출입에 관련된 법들과 실무를 터득해놓은 상태였으며, 세 명의 사표를 수리했고, 사무장이 되었으며, 광주세관을 15년여 출입하면서 수출입(통관)업무에 종사했다.
그러던 중 필자가 열렬히 지지했고, 참다운 개혁을 기대했던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필자는 날아갈 것처럼 기뻤고, 김대중이 참다운 개혁(우리에 대한 점검, 반성, 대안 마련 등)을 시작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필자는 15년여를 돌이켜보았고, 모두가 반성하면서 좋아지자는 취지로 소책자(‘부정부패 이야기’)를 제작해서 광주본부세관과 관세청 등에 배포했다.
당시까지 필자는 관공서를 15년 출입하면서 별별 짓들을 다 했었고, 별별 꼴들을 당하고 겪었으며, 모두 함께 반성해서 새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한편으로는 책자의 제작과 배포가 상당히 당돌했고, 황당했고, 우둔했고, 순수했고, 정의로웠고, 용기 있었고, 참신했고, 사실은 당연한 발상과 시도였다.
‘부정부패 이야기’ 책자의 제작과 배포
필자는 광주본부세관(공무원 약 65명)과 산하 세관(전라남북도)과 지역 수출입업체(직원)들과 관세청(장)과 한국관세사회와 동일업종 종사자들에게 ‘부정부패이야기’라는 책자(A4 용지 110여 쪽짜리, 200부)를 제작·배포했다. 책의 취지는 필자가 장기간 관공서를 출입하면서 겪고 당하고 느꼈던 경험들을 통해서 좋은 분위기와 바람직한 사회문화를 만들어가자는 내용이었고,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책자를 함부로 빼앗아버리지 못하도록 개인 앞으로 우편으로 발송했다.
① 광주본부세관장과 관세청의 과민한 반응
당시에 책자를 받아든 광주본부세관장(부이사관)은 관세청장에게 보고했고, 관세청장은 직원들이 가진 것을 모두 회수할 것을 지시했으며, 세관장은 책자를 빼앗아버렸으며, 내가 쏟은 시간과 비용과 정성이 무용지물로 끝나버리는 상황이 되었다.
필자는 세관의 과민반응에 당황한 것은 물론 입장이 애매해지고 난처해지고 난감해졌다. 광주세관을 마치 내 집과 가족으로 여기고 출입하던 필자로서는 그토록 즉각적으로(사실은 몰상식하게) 과잉조치할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세관(감사과)에서 책자(‘부정부패이야기’)를 수거해버리자 필자는 곧바로 감사과를 찾아갔다. 당시에 감사과장은 공석(부임하기 전)이었고, 감사계장에게 차분하게 설명 겸 항의 겸 올바른 대처를 당부했다. 당시에 감사계장에게 했던 이야기를 대략 정리한다. (실감 나도록 약간만 살을 붙여서 소개한다. 물론 거짓은 전혀 없다.)
“형님(감사계장)도 알다시피 나는 내 집처럼 15년여를 광주세관에 출입했고, 수출입담당 공무원(20-30명)과 일반직원(30여명)과 경비아저씨들을 구분하지 않고 친하게 잘 지내왔습니다. 이런 내가 수출입업무를 진행하면서 상식 이하의 문제들로 금품을 요구받는 등 100차례 넘게 싸움을 하고 살았네요. 심지어 내가 세관을 출입하면서 이런 지경인데 생면부지인 사람이나, 순진한 사람들은 어떻게 수출입업과 수출입업무를 무난하게 진행할 수 있겠소?
내가 이런 책자를 배포한 이유를 형님도 잘 알지 않은가요? 그간에 내가 형님에게 개인적으로 1층(민원현장)의 상황들을 전해주지 않았소? 그간에 형님이든 세관이든 민원인들의 애로점과 문제점들을 알면서도 소극적이었고, 무관심했었다면 이러한 나의 시도를 선의로 받아들여야 하고, 문제로 인식했다면 책자를 빼앗기 전에 나부터 먼저 불러서 조사하든 면담해야 하지 않는가요? 무슨 목적으로 책자를 제작하고 배포했는지, 왜 먼저 감사과나 세관과 상의하지 않았는지, 직원들 중 누군가 비리는 없는지, 누군가의 처벌을 원하는지, 추가해서 또 다른 문제나 불만은 없는지 등 감사과에서 나에게 확인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역시 다른 민원인들에게도 의견을 들어보고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은가요?
나를 불러서 조사하거나, 면담할 예정은 잡혀 있나요? 그것도 없이 곧바로 책자를 빼앗아버리다니요? 그간에 왜 민원현장과 문제공무원들을 훤히 알면서도 모른 척했는가요? 매번 형식적이고 상투적인 설문조사만 하는 곳이 감사과요? 나에게든 민원인들에게든 단 한 번이라도 애로사항을 실질적으로든 진심으로든 청취한 일이 있었는가요? 사실은 형님도 민원부서에 있었을 때 똑같았거나, 비슷했으니까 대충 넘어가자는 생각 아니요? 말썽만 안 나면 그만인 것이 감사과요?
관세청과 총리실과 감사원 감찰팀이 무서워서 요리조리 눈만 피할 것이 아니라 우리끼리 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잖소?”
(감사계장은 한 마디도 답변하지 못하고 듣기만 했다.)
(※ 필자는 관공서(공무원들)는 물론 우리의 민족성과 문화와 인간관계를 한 마디로 상부상조와 유유상종하는 ‘곗방민족’, ‘곗방문화’, ‘곗방놀이(애경사, 회식) 수준의 인간관계’라고 표현한다. 이런 수준으로는 포괄적인 인류애와 합리적인 사회의식이 필수적인 자유민주주의에 모두가 자질미달이고 자격부족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우리는 거의 모든 면에서 자유민주주의에 역부족이었다.)
(※ 필자는 대한민국 땅에 태어났고, 정규교육을 받고 자란 정상적인 인간과 국민과 성인이다. 하지만 필자가 학교에서 선생들에게 당하고 보고 겪은 것은 강압적인 조폭사회와 군대에서의 군기문화와 역사에서의 굴종관계였다. 역시 직장생활에서 공무원과의 관계와 분위기는 처세와 상납 등 차라리 구토를 해버리고 싶을 정도로 지저분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도 필자는 한동안 당연하게 여기고 열심히 적응하고 처세하고 살았다.
그러던 중 필자는 왜 이런 꼴로 살아야 하는지 회의감이 들었고, 해결점도 종착점도 없이 무작정 참으면서 일방적으로 가져다 바치면서 살아야 했다. 물론 어떤 시대와 사회에도 문제점과 문제아들은 항상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필자는 정상인 사람들이 극소수 문제아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거나, 정상이라는 사람들이 동료들의 부정을 모른 척해버리거나, 민원인들이 일방적으로 가져다 바쳐야 하는 것에 반항심과 반발감이 생겼다.
우리처럼 정상인 사람들이 곳곳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는 문제점들과 문제아들을 감당해내지 못한다면 사실은 우리가 훨씬 더 문제아이고, 우리 사회는 위기와 혼란과 망국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미 우리는 역사 내내 그렇게 살아왔고, 더는 그러한 짓들이 반복하면 안 되고, 절대로 자녀들과 후대에 이러한 짓들을 대물림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대한민국 정부와 공무원들과 언론인들과 정치인들과 전문가들과 지식인들과 성직자들과 국민들과 젊은이들이 서로 계방(선후배, 동호회) 놀음하는 수준의 인간관계라면 우리는 현대사에서도 참담했던 5천 년 역사와 민족성과 문화를 재현해내는 망가진 후손들이 아닌가? 이런 식으로 대한민국이 제대로 굴러가겠는가?)
②-1 관세청과 광주세관장의 작태
그런 직후 관세청 총무과장이 광주본부세관장으로 부임했고, 세관장(부이사관)은 나와의 면담을 요청했으며, 면담 도중에 나오려는 필자의 팔목을 세관장이 붙들고 껴안다시피 통사정하는 등 추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에 세관장실에서 세관장과 필자가 단둘이 면담하던 중에 그의 비굴한 태도에 일침을 가한 이야기를 하나 소개한다.
필자는 창문 밖(광주지방국세청)을 가리키면서
“세관장님이 현 상황을 상식적으로 이해하시도록 잠시 장면을 바꿔보겠습니다. 지금 광주지방국세청장이 세무·회계사무소 사무장을 붙들고 사정하는 것과 같고, 광주지방 검사장과 법원장이 변호사무소 사무장에게 통사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세관장님과 저와의 만남과 대화가 대외적으로든 대내적으로든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제기한 문제는 법적으로도 업무적으로도 조금도 복잡할 것이 없고, 세관장님이 개인적으로 이러실 필요도 없으니 있는 그대로 처리하시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일침을 가했다.
그리고는 일어서서 나오려는데 세관장은 “좀 더 이야기를 나누자.”라고 나의 팔소매를 껴안고, 팔목을 잡아끌면서 사정했다.
필자는 사건 이후 이런 이야기를 처음으로 소개한다. 왜냐면 사건을 전후로 세관장이 인간적으로나마 가엾고 측은하게 여겨졌고, 그의 체면과 자존심을 최소한은 보호해주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으며, 사건이 끝난 이후에도 언급을 자제했다. 그런데 내가 업계를 떠난 이후 그 세관장은 관세청장까지 되었고, 참으로 기가 막힌 대한민국의 연속이었으며, 당시에 필자가 당하고 겪었던 기가 막혔던 사건과 심정들을 여러분도 실제처럼 경험해보기 바란다.
※ 당시에 세관장과 관세청장이 깨끗하고 개혁적이었다면 그토록 당황하고 비굴할 필요가 없었고, 오히려 개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아마도 당시에 그들이 진정으로 개혁을 추진했다면 나라에 애국하고, 국민에게 충성했을 것이고, 다른 부처들에서도 관세청을 모델 삼아서 개혁들이 진행되었을 것이며, 세관장과 관세청장은 또 다른 임무에 발탁되어서 맹활약할 수도 있는 최고의 기회였다. 물론 그들이 정말 개혁적이었다면 세관장과 관세청장까지 승진하거나, 이후에도 계속 영전할 수 없었겠지만…….
뜻대로 하지 못한 세관장은 강온 양면 전략을 구사했다.
세관장은 이후에 나에게 강온 전략을 병행했다. 온 전략으로는 운영(총무)과장을 수시로 필자에게 보내서 친분을 쌓고, 동태를 살피도록 온유한 전략을 펼쳤다.
강 전력으로는 필자(거래업체)에 대한 광주세관의 탄압(불이익)이 시작되었고, 급기야 감시과장(사무관)이 우리 거래업체에게 불법(월권)으로 불이익(기한 내 관세납부 요구)을 행사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짓이었다.
이에 필자는 광주세관에 항의했고, 관세청 감사과에 진정서와 비리들(A4 16장 분량)을 구체적으로 작성해서 전달했다. 내용은 ‘세관원의 부정비리’, ‘관세청 중앙(부산)분석소의 성분분석 요청 시에 특소세 대상에 대한 함량(기준) 조작 비리(구체적인 조작내용), 월급쟁이 관세사 고용 문제 등 심각한 문제들이었다.
(※ 당시에 관세사업계는 사무장에게 고용된 월급쟁이 관세사들이 꽤 있었고, 관세사는 이름만 빌려주고 근무도 출근도 하지 않는 경우들도 있었으며, 한국관세사회는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세관 공무원들이 주관식을 면제받아서 관세사 자격을 쉽게 획득한 사람들이 많았고, 퇴직 후에 생활비라도 벌어 쓰려고 자격증을 빌려줬으며, 관세사를 고용한 불법 고용주들은 세관과 관세청과 끈끈한 유착 관계였고, 관세청은 관세사 법인제도를 도입해서 애써서 눈가림해가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필자가 문제 삼자 관세청과 세관과 그 주변에서 그에 관련되고 연루된 사람들이 발칵 뒤집혔고, 필자에게 조직적으로 대응한 흔적이 역력했다.)
관세청에서 감찰팀(3-4명)이 내려왔고, 감찰반(팀장은 사무관)은 필자가 제기한 문제들에 경의를 표하면서 적극적으로 조치할 것처럼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감찰반에서 적당히 얼버무려버렸고, 합당한 조치들을 취하지 않았다. 이에 필자는 다시 관세청에 항의했고, 직급(팀장)이 격상된 2차 감찰반(서기관)이 내려와서 조사했다. 당시에 감찰팀장(서기관)은 여당 국회의원의 형제였고, 관세청에서는 정치권과 청와대에 집요하게 로비를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관세청의 태도는 처음과 완전히 달라졌다. 이에 필자는 관세청장과의 면담을 요청했고, 관세청을 방문해서 감찰팀을 찾아갔으며, 1-2차 감찰팀들은 몸을 피해버렸는지 한 명도 자리에 없었고, 다른 사람에게 따지고 항의하고 돌아왔다.
②-2 모범공무원에게 누명을 씌워서 문제공무원(2명)과 함께 쫓아내버려
그러던 중 기막힌 일이 생겼다.
광주본부세관장은 부정한 공무원들에게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한동안 버텼다. 당시에 광주세관 공무원들도 문제 많은 공무원들의 소행을 잘 알고 있었고, 대부분 싫어했다. 왜냐면 꼴뚜기 몇 마리가 우물을 몽땅 어지럽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세관장은 그들을 보호하는 분위기였다. 왜냐면 세관장이 지역 실정과 직원들의 동향도 파악하지 못했고, 이해관계와 권위로 멋대로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에 그치지 않고 지역에서 월급쟁이 관세사를 고용해서 관세사무소를 운영 중이던 불법행위(사무장)를 감싸기 시작했고, 심지어 불법관세사무소의 사무장(사실상 주인)이 필자를 회유하고 협박했다. 필자는 또다시 광주세관과 관세청에 항의했고, 결국 문제공무원 2명이 산하 세관으로 전보됐다.
몰지각한 광주본부세관장의 처사
광주본부세관장은 산하 세관장에게 전화해서 두 사람을 부탁했고, 그곳 세관장은 “세관장님이 발령을 내주시면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라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당시에 산하 세관장의 답변이 통쾌한 영웅담처럼 전해질 정도였다. 그렇게 산하 세관으로 옮겨간 두 공무원은 가장 멀리 떨어진 오지(출장소)로 보내졌다.
성실한 모범공무원에게 누명을 씌워서 내쫓아버린 세관장
그런데 필자가 그대로 멈출 수도 없고, 용납할 수도 없는 사건이 또다시 발생했다.
필자는 세관은 물론 관세청의 동향까지 상당히 깊이 꽤 뚫고 있었고, 적절하게 대응했다.
그래서인지 세관장은 내부 상황을 필자에게 누설하는 공무원을 찾기 시작했고, 필자와 가깝다고 생각(오해)하는 직원을 술주정뱅이로(국무총리실 감찰반에게 술주정한 것으로) 모함(조작)해서 문제공무원 2명과 함께 광주세관에서 내쫓았다.
하지만 누명을 뒤집어쓰고 쫓겨난 공무원은 최고 모범공무원이었고, 국가유공자 가족이었으며, 민원인들이 가장 좋게 생각하는 공무원이었다. 물론 불이익을 당한 모범공무원은 유능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남들이 감히 흉내 내기 어려울 정도로 업무를 신속하게 처리했으며, 실제로 쉽게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성실한 모범공무원이었다. (필자가 그의 신속한 업무처리, 조기 출근해서 주변 청소, 다량의 국화 화분 재배 등에 대해서 세관에 출입하는 민원인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진행했을 정도다.)
(※ 필자는 광주본부세관 공무원들(60여 명)과 인간적으로 상당히 가까웠다. 하지만 새로 부임해온 세관장은 권위를 앞세울 뿐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엉뚱한 희생양을 하나 만들어서 마치 광주세관을 잘 수습해가는 것처럼 희생양을 만들어서 관세청에 모양새를 갖추려고 무리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 당시에 필자는 억울하게 쫓겨나간 공무원이 얼마나 성실하고 모범적이었는지 관세청 홈페이지에 사례들을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그래서인지 산하 세관에서 문제공무원 두 명은 육지 끝에 위치한 출장소(오지)로 보내졌고, 함께 쫓겨간 모범공무원은 출장소가 아닌 산하 세관에서 근무했다.)
이후에도 기막힌 일은 계속되었다. 광주본부세관장은 2년이던 내규를 1년으로 고쳐서 말썽 많은 두 사람을 다시 불러들였다. 그런데 함께 쫓아낸 모범공무원은 부산본부세관으로 발령이 나버렸다.
필자는 관세청(홈페이지)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 모범공무원이 산하세관으로 쫓겨났을 때 지역의 수출입업체 직원들은 그의 억울함과 부당한 인사조치에 반발했고, 민원인들이 필자에게 그에 대한 구명운동을 요청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필자는 수출입업체 직원들을 상대로 자체적인 여론조사를 실시했고, 탄원서와 그의 모범적인 공직생활에 대한 여론조사 내용과 결과(통계)까지 관세청 홈페이지에 모두 공개했다.
그즈음에 관세청장이 바뀌었고, 부산본부세관은 고충(돌봐드려야 할 노모에 대한 어려움)으로 처리해서 모범공무원을 광주본부세관으로 다시 보내줬다. 그는 무사히 복귀하게 되었음을 필자에게 알려왔고, 함께 식사하면서 서로를 위로하면서 회포를 풀었다.
(※ 당시에 필자가 듣고 느꼈던 바로는 궁지에 몰린 관세청장이 청와대와 정치권 등에 강력하게 로비(청탁)했을 것이고, 당시에 그러한 소문들이 퍼졌으며, 로비를 기회로 그들은 기사회생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막강해졌고, 갈수록 기고만장해지고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후에 관세청장과 광주본부세관장은 출세 가도를 달렸고, 아래서 참으로 기막힌 이야기들이 계속 소개된다).
저자 최익주 선생은 전남 목포 출생으로 목포북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광역시로 이사해서 북성중학교, 동신고등학교, 조선대학교 경영학과(78학번)를 졸업했다.
군생활을 오산비행장 방공포부대에서 병장 만기 제대, 3년간의 개인 사업을 했으며, 관세사무소에서 16년 동안 사무장으로 지내다가 광주세관과 관세청과 부정비리 문제로 싸움(형사소송)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의 실체와 실상을 깨닫고 인생을 180도 선회. 이후 밑바닥부터 다시 터득하고 통달해야 한다는 각오로 시민단체(2-3년), 택시기사(2년 6월), 생산공장과 건물경비(10년여)를 전전하면서 노동자 생활을 해왔다.
저서로는 <이제는 바꿔봅시다(1997.7.30.)> <대화로 여는 새아침(1999.9.20.)> <사랑하는 선·순·아에게 제1-4권(2018.7.13.)>이 있다.
다음은 “8. 필자의 인생이 180도 바뀐 배경 Ⅱ”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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