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광주5.18 민중항쟁’이라는 명칭을 만들어낸 범인들의 의도

[LA=시니어타임즈US] 본지는 2020년 7월부터 최익주 선생의 <그렇게 선진국이 가능해?(가제)> – 국민의 반성과 국가적 전환점(부제)을 저자와의 합의 하에 글이 출판되기 이전에 연재를 시작한다. 연재는 회차별로 매주 한편씩 실리게 되며, 글의 배포는 무방하나 무단전재는 금한다. 글의 소유는 전적으로 저자 최익주 선생에게 있음을 알리며, 본지의 편집방향과는 무방하다.

<그렇게 선진국이 가능해?>는 저자가 20년여 전부터 대한민국이 인간적으로는 물론이고 총체적으로 한계에 봉착했고, 또다시 혼란과 위기와 망국의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라는 점을 인지함과 동시에 한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원인들을 연구했다. 이에 저자는 대한민국이 부디 새롭게 출발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가지고 산업화 이후의 시기부터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일어난 일련의 최근 사건들을 통해 그 문제점 되짚으며, 앞으로 대한민국이 바르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편집자주>

11. 필자가 광주 5.18 때 학교에서 겪은 이야기

필자가 겪은 5.18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

광주 5.18은 당초에 “광주사태”로 불렸다. 이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공식 명칭이 되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5.18 광주 민중항쟁’으로 호칭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에 대해서 필자는 80년 ‘광주사태’ 당시와 지금의 ‘광주 5.18’에 불순세력이 개입했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고, 그에 대한 정황 겸 증거를 이렇게 설명하겠다.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가 ‘자유민주주의’로 바뀐 배경

우리는 대한민국을 ‘민주주의’ 국가로 생각해왔다.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도 그냥 민주주의로 통한다.
그런데 우리는 불과 몇 년 전부터 ‘자유’를 추가해서 ‘자유민주주의’로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자유’라는 단어를 더 추가하는 것은 귀찮은 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사실은 ‘자유’를 추가하는 것을 정말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게 여긴다.
이처럼 우리가 ‘자유’라는 단어를 추가한 것에는 그럴만한 배경과 이유가 있다.

첫째, 북한의 지령을 받은 남한의 불순세력은 북한의 인민민주주의(‘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를 남한에 적용하기 위해서 ‘민중민주주의’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실제로 학생운동권에서는 ‘민주주의’가 아닌 ‘민중민주주의’라고 부른다.

둘째, 문재인 악당이 헌법에서 ‘자유’를 빼버리고 일단 ‘민주주의’로 바꾸려는 역적 짓들을 도모했다.
하지만 ‘민중민주주의’가 ‘인민민주주의’와 똑같거나, 전초전이라는 것이 알려졌고, 국민들에게 강한 거부감과 반발을 일으켰다.
그러자 한발 물러나서 그냥 ‘민주주의’로 바꿔 부른다.
대신에 불순세력이 개입된 집단과 사건에서는 ‘민중’이라는 표현을 기어코 집어넣으려고 안달한다. 그래서 ‘광주 5.18’을 ‘민중항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불순한 의도를 숨기거나, 동조하는 사람들일 수 있다.

셋째, 불순세력의 의도를 알아차린 국민들은 ‘인민’, ‘민중’(대중)에 맞서서 ‘자유민주주의’라는 호칭을 의도적이고 자랑스럽게 사용한다.

넷째, 정리하면
북한의 세습독재 정권에 기반을 둔 불순(종북·좌파·주사파·친중 사대주의·반미) 세력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일단 대중(다수를 선전선동하고 조작하는 숫자놀음) 민주주의로 유도하고, 대중이 먹혀들면 민중(봉기, 혁명)민주주의로 유도하고, 민중민주주의가 먹혀들면 인민민주주의(고려연방제, 적화통일)를 계획하는 듯하다.
다시 말해서 대한민국의 헌법에서 ‘자유’부터 삭제하고, ‘민주주의’ 세력과 정통성을 무너뜨리고(고려연방제), 이어서 북한정권을 위해 민중(혁명, 폭동)을 이용(선전선동)하고, 인민민주주의(적화)로 유도하려는 불순한 의도로 보인다.

‘광주 5.18 민중항쟁’이라는 명칭을 만들어낸 범인들의 의도

대한민국은 현대사 내내 ‘민주주의’ 정착에 실패했고, 불순세력이 승승장구하면서 정권을 장악했고, 곧바로 헌법에서 자유를 빼려고 시도했다. 그리고는 곳곳에 ‘민중’이라는 말을 끼워 넣으려고 혈안이다.

첫째, 우리 민족성과 역사와 문화와 관행들과 인간관계(형태, 방식)가 워낙 차별적이고 후진적이어서 애당초부터 수준 높은 자유민주주의에 필수적인 밑바탕과 환경과 자질에 턱없이 미달이었다.

둘째, 민주주의에 역부족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고루한 유교 문화(어른공경, 조상모시기)와 중공정권과 세습독재 정권의 집요하고 교활한 방해가 계속되었다.

셋째, 이러한 방해가 먹혀들자 정권을 탈취했으며, 곧바로 ‘자유’를 위축·무력화하려고 시도했다. 이는 실패했지만 곳곳에서 ‘민중’, ‘인민’, ‘백두칭송’, ‘하수인 짓들’, ‘역적 짓들’이 계속되고 있다.

넷째, ‘민중항쟁’이라는 호칭을 만들어낸 사람(세력)들은
‘광주 5.18’이 북한정권의 대남적화 선동과 개입을 사전·사후로 인정하고, 정당화해서 갈수록 일반화시키고, 칭송하려는 의도가 아닌지 의심된다.

다섯째, 최근 미국에서 기밀이 해제된 문서에서는 ‘광주 5.18이 좌경화된 김대중세력과 북한군이 개입한 합작품’으로 결론 내려져 있다. 그러자 갑자기 ‘5.18 왜곡 금지법’으로 5.18을 폄훼하면 처벌하겠다고 하는 등 비판과 거론조차 못하게 하려고 한다.
이에 필자는 ‘5.18 왜곡 금지법’이 만들어질 경우 광주시민으로서 나라와 국민에 죄를 진 것을 사죄하는 의미로 1호 위반자로 처벌을 자처(예약)해둔 상태다.
(주제 92. ‘광주 5.18 왜곡 금지법의 1호 처벌대상자 자진신고’ 내용 참조)

여섯째, 필자는 5.18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을 통해서 ‘북한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라는 결론이 나올 때까지 ‘광주사태’도, ‘5.18 광주 민주화 운동’도 아닌 ‘광주 5.18’, ‘5.18’로 호칭하겠다.

광주 5.18은 필자가 대학 3학년 때 사건

필자는 1980년 5.18이 일어났을 때 광주에서 대학 3학년이었다. 그런데 3월 초에 개학했다가 3월 23일에 재단비리에 대한 학내시위로 휴강에 들어갔고, 이어서 5.18로 연결되면서 3학년을 며칠 다니지도 못하고 4학년이 되었다.

80년 5월 1일에 엄마가 돌아가셨고, 5월 5일 장례 절차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5.18이 터졌다. 나는 5월 20일 밤에 광주를 벗어나서 도보로 나주 남평까지 이동했고, 6월 중순에 광주로 돌아왔다.

5.18에 대한 필자의 생각

5.18(단체)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97년에 출판한 ‘이제는 바꿔봅시다.’에 정리되어 있다. 책에는 5.18이 끝난 이후에 관련 단체들의 한심한 상황과 수준과 미래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들이 정리되어 있다. 아마도 5.18이 끝난 이후에 대한 문제점과 불안한 미래를 지적했던 사람은 필자가 최초이고 유일할지도 모른다. (이후에 지만원씨가 ‘5.18의 원인과 당시에 불순세력의 개입’을 폭로했다.)

여기서는 필자가 출판한 【‘사랑하는 선.순.아에게’(2018.7.13.) 제1-4권 中 제2권의 제5장. 사회 24. ‘자율적인 민주주의와 독재에 저항하는 자유화(5.18)’】의 본문을 소개한다.

【개발도상국들과 후진국들과 독재국가들에서 밑바탕도 진지한 과정도 없이 공짜로 얻은 자유민주주의는 정착이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이들은 수준 높은 자유민주주의보다도 오랜 세월 자신들을 지배해왔던 내부(역사, 문화, 사회, 무의식, 국민성, 관행들, 인간관계)를 점검해서 바로잡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그간에 겪었던 쓰라린 상처와 처절한 기억들을 서로의 진실한 마음씨와 노력으로 포용하고 용서하고 치유하면서 자유민주주의라는 전혀 다른 사회문화와 희망과 월등한 미래로 함께 나아갈 수 있다.
최악의 빈민국가였고 동시에 왕조국가였던 우리나라를 살펴보자. 우리는 수천 년 동안 일체의 변화 없이 정치는 왕권주의로, 문화는 봉건주의로, 경제는 농사로, 사회는 양반상놈으로, 외교는 배타성과 쇄국정책에 머물렀다. 역시 내부에서(우리민족끼리)는 신분·서열·계급·나이·남녀·지역·며느리·아들딸·장남차남까지 차별할 정도로 망가진 인간성과 민족성이었다.
당연히 나라를 망해 먹다가 결국 나라를 빼앗겼다. 하지만 선진국들 덕분에 해방되었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랬음에도 잔혹하고 암울했던 과거를 단 한 번도 정리·반성하지 않았다. 그처럼 참담한 민족성이었기 때문에 동족전쟁을 또다시 치렀다. 그래도 반성하지 않았고, 일당독재와 군사독재와 부정비리와 비자금축적이 계속되었으며, 규모가 천문학적으로 커졌다. 그러던 중에 무자비한 군홧발(진압)에 반발한 광주시민들에 의해서 반독재 투쟁(5.18)이 일어났다.

이때 투쟁(5.18)이 ‘자유민주주의 운동’인지 ‘민주화 운동’인지 따져보자.
이 역시도 사전에 시민들에게 자율적인 과정들이 있었는지에 의해서 결정된다.
‘자유민주주의 운동’이 되려면 평소에 시민(국민)들이 자유와 평등과 정의와 인권과 복지 등 민주주의에 대해서 머리를 맞대고 노력 중이었어야 한다. 이때는 ‘민주주의 운동’(의거, 혁명)이 될 수 있다. 왜냐면 시민들이 민주주의라는 순수한 동기 속에서 자율적으로 시간과 비용과 애정을 쏟는 등 노력(변화, 발전)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무자비한 진압(독재)에 반발해서 저항(투쟁)한 것이라면 민주주의 전 단계인 ‘민주화’(민주주의가 되기까지의 다양한 과정들 중 하나)에 해당한다.
만일 ‘자유민주주의 운동’이라면 인류사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고, 성역화가 가능하다. 반대로 민주화(저항과 투쟁)였다면 국가적인 가치를 지니지만 성역화까지는 무리일 수 있다.

만일 5.18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에 직접적으로 기여했다면 국가에서 성역화를 추진해야 하고, 뜻을 기리고, 포상하고, 축하하고, 기념하고, 만방에 홍보해서 인류사회와 후대에 교훈으로 남겨야 한다. 역시 타지역과 개발도상국들에서는 자유민주주의 시민(국민)의식에 경의를 표하고, 희생과 공로에 감사하고, 교훈으로 본받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민주화운동(저항과 투쟁)이라면 국가가 잘못과 피해를 배상(보상)하고, 희생(넋)을 위로하고, 책임자를 처벌하고, 재발을 방지하는 등 후속조치(국민적인 반성, 의식향상)를 취해야 한다.】

5.18 직후에 필자에게 26차례나 전화했던 교수들 이야기

5.18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당시에 필자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필자는 5.18이 진압된 이후 6월 중순에 집(광주)에 돌아왔다. 그런데 집에서는 학교에서 나에게 온 전화를 모두 메모해놓았고, 무려 26회나 되었다. 교수, 학생과장, 처장 이렇게 3명으로부터 번갈아가면서 온 전화였다.

나는 곧바로 교수에게 전화했고, 교수는 “빨리 좀 만나자.”라고 급하게 재촉했다. 그래서 필자는 학교로 교수를 찾아갔다. 교수는 필자를 보고도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대학 학생과로 데려가서 학생과장에게 넘겨주고 가버렸다. 그런데 학생과장도 필자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고 벌떡 일어나더니 나를 경리처장실로 데려가서 처장에게 넘겨주고 가버렸다.

그렇게 필자는 초면인 경리처장과 단둘이 앉았다.

처장 : 조만간 시국이 정상화될 경우 강의가 재개되어야 하는데 제대로 진행되도록 협조해주게.
(거의 사정에 가까운 부탁을 너무나도 정중하게 해왔다.)
나 : 학생이 당연히 공부해야죠. 그런데 학생장과 과대표들에게 하셔야지 왜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처장 : 이것저것 파악해봤는데 자네가 학생들의 면학분위기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칠 것이라는 의견들이 많아서였네.
나 : 학생이면 모두 마찬가지 아닙니까? 혹시 학생장들과 과대표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까?

처장 : 아니. 자네에게 먼저 말하려고 전화를 계속했었는데 이제야 연결되었네.
나 : 저는 당연히 강의가 시작되면 공부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영향력이 있다는 말씀이나, 학교에 협조해달라는 말씀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앞으로 그런 말씀은 제가 아니라 학생장과 과대표들에게 말씀해주시면 저는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학점(기말시험) 대체용 리포트 제출을 거부한 이야기

3월에 개학해서 23일까지 학교에 다니다가 학내소요로 인해서 휴강한 뒤 5.18로 인해서 1학기 내내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그래서 학교(문교부)에서는 리포트로 대체하도록 했고, 1차분(중간시험)과 2차분(기말시험)을 동시에 제출하도록 했다.

그래서 필자는 학과 동료들에게 전화해서 의향을 물어봤다.

“우리가 중간시험을 못 본 것은 3월에 학내시위로 휴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포트를 제출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기말시험은 우리가 학교에 다닐 수 있었고, 다니고 싶었고, 다녀야 했다. 하지만 군인들이 시위를 과격하게 진압함으로써 엄청난 사건으로 확대되어서 학교에 못 다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학교에 다니지 못한 잘못과 책임은 전적으로 군인들과 정부에게 있다. 그런데 정부에서는 사죄도 사과도 없는데 우리가 리포트를 제출하는 것은 우리 잘못을 인정하는 꼴이다. 우리 모두 리포트 제출을 거부하자.”

학과 동료들은 “리포트제출을 거부하면 학점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난색들을 표명했고, 나는 전화를 포기한 채 나만 리포트제출 거부하기로 했다.

그리고는 1차분 리포트를 준비했고, 2차분에 대해서는 교수들에게 서신을 동봉해서 발송했다.

「기말시험을 보지 못한 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 정부와 군인들 잘못입니다. 그래서 나는 리포트를 제출할 수 없고, 필요하다면 정부와 군사독재 정권에게 리포트를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리포트제출을 거부해서 발생할 수 있는 불이익이나, 처벌이 있다면 기꺼이 감수하겠습니다.」라고 서신을 동봉했고, 그렇게라도 해야 조금이라도 억울함이 풀릴 것 같았다.

당시에 필자는 학점이 나오지 않으면 한 학기 유급을 각오했었다.
그런데 각오했던 것과는 달리 교수들은 학점을 줬다. 필자는 당시에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무자비하게 짓밟혔던 것이 너무나 억울하고 분개했었고, 이러한 나라와 역사와 문화와 국민성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처럼 수치스러운 나라에서 대학졸업장을 이용해서 밥 먹고 산다면 나는 ‘개자식’이라는 저주 섞인 각오들을 다지곤 했었다.
이후에도 필자는 마음에 들지 않은 교수(과목)의 졸업(A3 용지에 문제 하나를 논술하는) 시험을 치를 때 이름만 쓰고 문제는 기재하지 않은 채 백지로 제출하는 방식으로 재단과 시국에 대한 반항심을 표출했다.
역시 그런 대학을 또다시 다니기 싫어서 4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당시에 필자는 운동권이 아니었고, 오히려 운동권 학생들의 수준(비인간성, 저질)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가입한 동호회도 하나 없었다. 하지만 필자는 대한민국에서 성장하면서 수많은 문제의식을 지녔고, 저절로 반골 기질이 생겨났으며, 모로 터진 개살구가 될 수밖에 없었다.

※ 80년도 11월 경에 개학했을 때 보안사(전 국군기무사령부, 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의 블랙리스트에 내가 올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보안사에서 장교로 전역한 지인으로부터 “자네는 당분간 항상 가방 하나를 꾸려놓고 있다가 시국이 또다시 복잡해지면 즉각 잠적하라.”라는 언질을 받았다.

정말 위험했던 시국에서 평소에 나와 절친한 관계도 아니었고, 단지 나를 옆에서 지켜볼 뿐이었던 사람이 나를 위해서 중요한 정보(비밀)를 제공해준 것에 늦었으나마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그간에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언제인가 인연과 기회가 된다면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리라고 미리 약속한다.
그런 탓으로 이후의 인생도 고생팔자가 훤할 수밖에 없었고, 그를 당연하게 여겼다. 당시는 계속되는 독재정권이어서 소심한 사람들은 무서워서 떨던 시대였고, 그런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의롭고 용기 있게 표현하고 행동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나마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왔고, 세상만사와 인생사를 총정리해냈으며, 인류미래를 위한 방향과 방안까지 뼈대를 잡아놓았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기적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 ‘우리국민끼리’, ‘우리민족끼리’ 더는 서로 질시하거나, 괴롭히거나, 적대시하면 안 된다. 그렇다고 잘못을 얼렁뚱땅 넘어가서도 안 된다. 역시 지금(남한과 북한)의 상황을 ‘우리민족끼리’ 해결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대신에 우리에 대해서 총체적인 분석과 반성과 이해와 승화와 포용과 용서와 화합과 통합을 통해서 더 나은 사회문화와 합리적인 사회의식으로 향상·도약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암울하고 처절했던 역사와 문화와 관행들과 민족성과 인간관계 등을 근본적으로 바로잡아서 자유민주주의에 일치시키려면 최소 10년에서 최대 20-30년을 노력해야 한다.

(※ 필자가 차마 노골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이야기들도 있다는 점 이해 바란다.)

 

저자 최익주 선생은 전남 목포 출생으로 목포북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광역시로 이사해서 북성중학교, 동신고등학교, 조선대학교 경영학과(78학번)를 졸업했다.

군생활을 오산비행장 방공포부대에서 병장 만기 제대, 3년간의 개인 사업을 했으며, 관세사무소에서 16년 동안 사무장으로 지내다가 광주세관과 관세청과 부정비리 문제로 싸움(형사소송)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의 실체와 실상을 깨닫고 인생을 180도 선회. 이후 밑바닥부터 다시 터득하고 통달해야 한다는 각오로 시민단체(2-3년), 택시기사(2년 6월), 생산공장과 건물경비(10년여)를 전전하면서 노동자 생활을 해왔다.

저서로는 <이제는 바꿔봅시다(1997.7.30.)> <대화로 여는 새아침(1999.9.20.)> <사랑하는 선·순·아에게 제1-4권(2018.7.13.)>이 있다.

 

다음은 “12. 필자가 겪어본 박원순과 시민단체에 대한 정리”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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