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필자가 겪어본 박원순과 시민단체에 대한 정리

[LA=시니어타임즈] 본지는 2020년 7월부터 최익주 선생의 <그렇게 선진국이 가능해?(가제)> – 국민의 반성과 국가적 전환점(부제)을 저자와의 합의 하에 글이 출판되기 이전에 연재를 시작한다. 연재는 회차별로 매주 한편씩 실리게 되며, 글의 배포는 무방하나 무단전재는 금한다. 글의 소유는 전적으로 저자 최익주 선생에게 있음을 알리며, 본지의 편집방향과는 무방하다.

<그렇게 선진국이 가능해?>는 저자가 20년여 전부터 대한민국이 인간적으로는 물론이고 총체적으로 한계에 봉착했고, 또다시 혼란과 위기와 망국의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라는 점을 인지함과 동시에 한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원인들을 연구했다. 이에 저자는 대한민국이 부디 새롭게 출발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가지고 산업화 이후의 시기부터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일어난 일련의 최근 사건들을 통해 그 문제점 되짚으며, 앞으로 대한민국이 바르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편집자주>

12. 필자가 겪어본 박원순과 시민단체에 대한 정리

관세청(광주본부세관)과의 ‘부정부패이야기’ 배포사건을 계기로 필자는 우리 대한민국이 역사에서도 현대사에서도, 독재세력도 민주화세력도 자유민주주의에 자질미달과 역부족임을 뼈저리게 실감했고, 총체적인 한계에 빠졌으며, 우리의 모든 것에 대해서 근본적인 접근과 해결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역시 어느 한 분야의 개혁으로는 어림없고, 국민의 의식향상이 최고 급선무이며, 종합적이면서도 정교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박원순과 잠시 함께했던 시민단체를 거론하기 전에 필자가 박원순에게 했던 이야기를 하나 소개한다.

필자는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워크숍’(2003년 1월 24-5일(금토, 1박 2일) 숭실대 사회교육관(백마당))에 참석했으며, 박원순에게 “훗날 나에게 기회나 능력이 있다면 위원장님(박원순)에게 ‘명예 대통령’을 추천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얼핏 듣기에 박원순을 ‘대통령’이라고 칭찬해주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각도를 약간 달리하면 “당신은 대한민국의 진짜 대통령은 꿈도 꾸지 말라.”라는 이야기가 된다. 당시에 필자는 박원순에게 ‘명예 대통령’이 가장 적합한 평가라고 생각했다.

필자는 노무현 정부(초기) 때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에서 박원순을 몇 차례 직접 겪어보았고, 그의 관심사와 능력과 한계와 시민단체 핵심들의 면면을 확인했고, 지극히 실망했다. 지금부터는 실망했던 이야기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박원순을 만나게 된 이유와 그에 대한 필자의 원래 기대감

필자는 독재시대에 이어서 민주화(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초기)에 극도로 실망했다. 특히 노무현(대통령후보)에게는 나름대로 개혁안을 만들어서 직접 손에 건네줬는데도 무용지물이었다.

노무현은 어렸을 때 태생적·환경적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했고, 대통령이 되자 안하무인(도도, 교만)의 철부지(무능)함이 노골화·극대화되었다.

역시 노무현처럼 열등한 의식수준으로는 대한민국의 열악한 역사와 잔악한 민족성과 비합리적인 문화를 바로잡을 수 없으며, 제대로 인식하기조차 어려웠다. 실제로 우리 역사는 물론이고 현대사도 부정비리와 아부아첨과 상명하복과 복지부동과 무능과 무기력과 곗방민족 수준의 상부상조 관행과 차별적인 인간관계가 고질화되었다. 이로 인해서 젊은이들로 구성된 군대(내무반) 생활도, 대학생들의 선후배 문화(음주, 폭력, OT 등)도 조폭 수준에 불과했고, 진취적이고 긍정적이고 건전한 사회분위기와 인간성과 국민성과 인간관계를 기대할 수 없었다. (심지어 오늘날 군대 생활과 분위기도 상당 부분 마찬가지며, 이는 자유민주주의 원리에 무지하고 충실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지경에서 그나마 박원순이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를 조직해서 활발하게 이끌었고, 필자는 당초에 박원순을 좋아했으며,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갖고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온통 정치꾼(정치지망생)들이 주도했고, 적극적인 대안과 반성과 분석과 포용과 휴머니즘은 완전히 결핍되어 있었고, 겨우 남을 떨어뜨리기 위한 ‘낙천낙선’ 운동이 고작이었으며, 남의 잘못에 대한 비난으로 자신들이 돋보이려는 수준에 불과했고, 참여연대와 경실련과 환경연합 등을 제외한 나머지 시민단체들은 맞춰주고 끌려가는 분위기였으며, 권한이라고는 거의·전혀 없었다.

어떻든 필자가 꼭 만나보고 싶었던 사람 중 한 명이 박원순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나보고 지켜본 박원순은 기대와는 전혀 달랐고, 아쉽기 그지없었으며, 다만 절망적인 시대에 위험을 무릅쓰고 시민사회운동을 이끌었다는 점을 감사하기로 했다. 그래서 “훗날 나에게 권한과 기회가 생긴다면 ‘명예 대통령’으로 추대(인정)할 것”이라고 감사를 표했고, 그는 “아이고, 혹시라도 누가 듣는데 그런 말씀 마세요.”라고 손사래를 치면서 특유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이후에 그가 서울시장이 된 이후로 필자는 그나마 지녔던 이미지조차 없어지고 정반대로 바뀌었다.

필자가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에서 박원순을 보고 느꼈던 점은 그가 ‘대통령’ 야심을 가졌다는 점이다. 하지만 시민단체들에서는 박원순을 대통령감으로 여겨주지 않았다고 생각되었다. 실제로 박원순은 함께했던 시민단체 동지들이 국회의원 빼지를 달았음에도 그는 정치권에 진입하지 못하고 바깥에서 맴돌았다. 그러다가 안철수와 연결되면서 갑자기 서울시장을 불로소득 했고, 더 이상의 능력과 가능성에는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이때라도 자신의 분수와 주제를 알고 나라와 국민에게 봉사하는 것을 소임과 운명으로 알았어야 했고, 그랬다면 그토록 참담한 불명예와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애당초부터 자신의 분수와 주제와 대한민국의 국운과 미래에 무지한 채 남(독재자)들의 잘못에 기생해서 인권(운동가, 변호사)으로 위장(변신)했고, 서울시장이 되어서는 일관된 모습을 상실한 채 자신의 실체와 무능과 본색(좌경화)과 한계와 야심까지 스스로 드러냈다.

결국 박원순은 자신의 개인사와 사생활도 제대로 관리·감당하지 못했음을 스스로 입증했으며, 반평생을 남의 잘못에 기생해서 비난하고 공격으로 일관하면서 ‘인권’과 ‘민주화’라는 위선과 위장으로 살아왔던 대가 겸 죗값을 치르는 비극적인 운명으로 전락했다.

박원순에 대한 객관적인 입장과 정리

※ 여기에서 소개하는 내용은 2년 전(2018. 8. 31)에 내블로그(http://blog.naver.com/choiik58) 메뉴 중 ‘대한민국의 이해와 운명과 미래’의 화면3, 상단 6번째 주제(출세에 눈먼 시민단체?, 박원순과 김기식 등)에 정리해놓은 내용이며, 지금도 그대로 원문이 보관되어 있다.

출세에 눈먼 시민단체? (박원순과 김기식 등)

참으로 답답했던 우리 현대사(독재와 민주화)

오늘은 인류로서와 국민으로서와 인간(개인)으로서 진심과 충심과 열정과 순수함에 대해서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를 예로 들어서 다뤄본다.

독재시대가 끝난 이후 민주화 시대에도 우리는 대통령들과 정부와 정치인(정당)들에게 극도로 실망했다. 왜냐면 독재에 잔뜩 분개했던 국민들이 민주화(김영삼, 김대중)에 한껏 기대를 걸었지만 참담한 무능과 실패(국가부도)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적어도 현대사(독재와 초기민주화 40년여) 동안에 보여줬던 어리석은 내 자신을 비롯해서 언론인들과 지식인들과 재벌들과 고위공직자들과 하위공직자들과 성직자들의 비겁하고 비열하고 졸렬하고 소극적이었던 겁쟁이 모습들과 하수인들 노릇은 언급을 생략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인데도 오죽했으면 무사안일, 복지부동, 무소신이라는 용어들에 그치지 않고 땅바닥에 찰싹 달라붙어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는 ‘낙지부동’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고, 그런 지경인데도 한쪽에서는 실질적인 대안도 원인분석도 반성도 없이 허구한 날 투쟁과 타도와 시위로 일관하는 나라와 국민으로 전락했다.

불과 30년여 전에 대한민국이 그런 수준과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점검도 반성도 해보지 않았던 오늘날은 어디서 그토록 많은 투사들과 정의로운 진보(세력)들이 생겨났는지, 과연 이들의 기반과 뼈대와 목표가 어디이고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고,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 얼마 전까지 보수(이명박, 박근혜)세력과 지금의 잔챙이 보수(황교안, 김종인 등)세력도 마찬가지다. 우리 현대사에 대한 필자의 이러한 정리에 대해서 반박이나, 이견이나, 질문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한때 우리 국민이 믿고 기댈 것은 오직 시민단체뿐

한때는 대한민국에서 믿고 기대할 것이라고는 오직 시민단체밖에 없었으며, 시민단체들의 활동에 초점이 모아져 있었다.

하지만 국민들은 시민단체를 후원해주지 않았고, 시민단체들은 정부와 자치단체에 의존했으며, 그런 나머지 국민들에게 뿌리내리지 못했고, 시민단체들 역시도 국민들에게 뿌리내리려고 하지 않았다. 필자는 당시에 시민단체를 주도하는 사람들은 단지 출세가 목적이라고 생각되었다. 실제로도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에서 맹활약했던 김기식과 이(오)경숙과 남(윤)인순과 김상희와 최민희와 박원순 등은 모두 정치인이 되었다.

여기서는 그때 당시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를 이끌었다가 개인적으로 출세했던 인물들과 상황을 간략하게 언급한다.

왜냐면 그간에 그들이 맹활약하면서 무수히 비난하고 공격했던 것에 비해서 지금은 대한민국이 어떤지 너무나 한심하기 때문이다. 역시 대한민국에서 그런 수준의 시민단체들과 인물들은 다시는 나오지 않아야 하고, 국민들도 그런 사람들 정도는 제대로 구분하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 중략 –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에서 겪었던 이야기

당시에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를 이끌어가는 단체와 인물들은 참여연대는 박원순과 김기식, 환경연합은 최열, 경실련은 신철용, 여성단체들에서는 이(오)경숙과 남(윤)인순과 김상희, 최민희 등이었다. – 중략 –

(※ 추가 : 이들 중 신철용과 최열을 제외한 박원순은 서울시장이 되었고, 나머지는 국회의원이 되었다. 역시 김기식은 엄청난 반발과 무리수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에 금감원장에 내정되었다. 하지만 갖가지 추문을 견디지 못했고, 사퇴와 동시에 수사를 받는 피의자 신분으로 바뀌었다. 훗날 최열은 부정비리가 발각되어서 처벌받았다. 이러한 인물들과 수준들로 최고수준의 사회의식이 필수적인 자유민주주의의 실현과 정착이 가능할까? 어림없는 이야기다.)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의 주요 활동은 ‘낙천낙선 운동’

나는 광주광역시에 살았기 때문에 회의에 자주 참석하진 못했다. 그런데 선거 때가 되면 연대회의는 고작 ‘낙천낙선운동’이라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역할들에 급급했다. 필자는 너무나 놀랐고, 실망해서 참석해서 이견을 계속 제시했다.

역시 당시에는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가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에서 활동했다. 그래서 필자는 “정개특위도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실패할 것에 대비해서 제2-3방안을 준비해야 한다. 역시 우리가 정치인들을 비난하지만 시민단체는 잘못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우리도 잘못될 경우에 대비해서 날을 새면서라도 허심탄회하게 의견들을 개진하면서 반성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당시는 참여연대가 주도권을 쥐고 있었고, 다른 단체들이 찬성해본들 전혀 먹혀들지 않았으며, 신참에 불과했던 나의 몇 차례 제안은 무위로 끝났다. 나는 대한민국의 총체적 실상과 한계를 시민사회단체에서도 절감한 채 결국 포기하다시피 광주로 내려왔다.

그런데 하필이면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추계)단합대회가 목포(청소년수련회관)에서 개최되었다. 그래서 나는 대한민국에 중요하고 필요한 점들과 시민단체에서 해야 하는 일들을 최대한 압축·정리·준비(A4 8쪽, 7부)해서 박원순, 김기식, 신철용, 이(오)경숙, 남(윤)인순 등에게 전달했다. 만일 우리가 반성과 실패를 대비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이 커다란 난관과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김기식이 내용을 보더니 “뭐가 이렇게 복잡합니까? 우리가 들어가서(국회에) 잘하면 되죠.”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김기식에게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나라가 그렇게 쉽고 간단했다면 왜 이런 지경이 되었겠습니까. 과거에도 잘 되었을 것이고, 지금도 잘 되고 있을 것이고, 앞으로도 잘 될 것인데 그렇다면 시민단체가 뭔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하지만 계속 내 주장을 말할 상황이 아니었고, 먹혀들지도 않을 잔소리만 하는 것 같았으며, 당장은 자제하고 저녁식사 후에 모두가 모였을 때 차분하게 다시 설득하기로 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는데 구내방송에서 “목포의 모회원이 참석자 전원이 먹을 수 있는 양의 회와 술을 준비했는데 몇 시부터 강당에서 회식할 것이니 모여 달라.”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나는 방송을 듣고 너무나 분개하고 통탄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평생을 저항과 투쟁으로만 일관해버린 김대중의 참담한 대통령실패에 뒤이어서 주제도 분수도 모른 채 교만하고 도도하게 출발하는 철부지와 망나니에 불과한 노무현이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다가 실패하고 무너질지 훤히 내다보이는 중차대한 시국에서 이토록 소중한 시간에 모여서 술과 회로 회식한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가 날을 샌다는 마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하고 토론할 것으로 생각했었고, 하늘이 내려준 기회로 받아들이면서 연대회의에 다시 참석했던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의 모든 기대를 접어버리고 나 혼자라도 원점에서부터 다시 생각해보기로 작심했고, 회식을 포기하고 조용히 빠져나오기로 했다. 그런데 마침 눈앞에 이(오)경숙이 나타났고, 단둘이 이야기할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나는 이미 화가 난 상태였으며, 곧바로 그녀에게

“대한민국의 시민단체가 모두 모였는데 진정한 고민도 없이 매번 낙천낙선운동이나 반복하는데 이런 수준으로는 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도 부족할 판에 도대체 우리가 제대로 해놓은 것이 뭐가 있어서 이토록 중요한 기회에 회와 술로 회식을 한다니요. 조만간 실망한 국민들로부터 시민단체 무용론이 대두될 것입니다.”라고 그간에 활동하면서 잠재되었던 것까지 쏟아냈다.

그런데 그녀는 회의에서 몇 번 접해봤던 이(오)경숙과는 너무나 달리 얼굴이 빨개졌고, 안절부절 당황해하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나는 예상과 전혀 다른 이(오)경숙의 반응에 갑자기 미안해졌고, 내가 ‘너무 심했는가’ 하는 미안함과 의아함과 함께 뭔가가 이상하고 수상하다는 엇갈린 마음들을 가누면서 그녀와의 대화를 끝으로 그곳을 빠져나와서 광주로 돌아왔다.

광주까지 운전하는 동안 내가 몇 년 동안 겪었던 갖가지 일들과 앞날이 복잡하게 교차되고 얽히면서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참다 울다를 반복하면서 가까스로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다음 날 방송에서 “목포에서 개최된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결과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낙천낙선운동을 결정했다.”라고 보도했다. 나는 술자리에서 술기운으로 결정해버린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분개했지만 넘어갈 수밖에 없었고, 다시는 시민단체는 물론 이곳저곳을 기대하거나, 함께 해보려고 기웃거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는 그냥 내가 하는 데까지만이라도, 할 수 있는 것까지만이라도 독자적으로 해나가겠다고 오기를 겸해서 작심했다.

그리고는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언론에서 “열린우리당의 비례대표 1번에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의 공동대표인 이(오)경숙이 결정되었다.”라고 보도했다.

바로 며칠 전에 내가 이(오)경숙에게 ‘시민단체 무용론’을 거론하면서 항의했을 때 그녀는 비례대표(국회의원) 후보로 확정된 상태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나의 항의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당황해서 안절부절했던 것이다.

저자 최익주 선생은 전남 목포 출생으로 목포북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광역시로 이사해서 북성중학교, 동신고등학교, 조선대학교 경영학과(78학번)를 졸업했다.

군생활을 오산비행장 방공포부대에서 병장 만기 제대, 3년간의 개인 사업을 했으며, 관세사무소에서 16년 동안 사무장으로 지내다가 광주세관과 관세청과 부정비리 문제로 싸움(형사소송)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의 실체와 실상을 깨닫고 인생을 180도 선회. 이후 밑바닥부터 다시 터득하고 통달해야 한다는 각오로 시민단체(2-3년), 택시기사(2년 6월), 생산공장과 건물경비(10년여)를 전전하면서 노동자 생활을 해왔다.

저서로는 <이제는 바꿔봅시다(1997.7.30.)> <대화로 여는 새아침(1999.9.20.)> <사랑하는 선·순·아에게 제1-4권(2018.7.13.)>이 있다.

다음은 “13. 보수가 진보를 이기기 힘든 이유”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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