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주 연재] 참여정부의 개혁 실패

2007년 참여정부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서울 양재동 서울 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참여정부 평가포럼 강연회에서 참석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LA=시니어타임즈US] 본지는 2020년 7월부터 최익주 선생의 <그렇게 선진국이 가능해?(가제)> – 국민의 반성과 국가적 전환점(부제)을 저자와의 합의 하에 글이 출판되기 이전에 연재를 시작한다. 연재는 회차별로 매주 한편씩 실리게 되며, 글의 배포는 무방하나 무단전재는 금한다. 글의 소유는 전적으로 저자 최익주 선생에게 있음을 알리며, 본지의 편집방향과는 무방하다.

<그렇게 선진국이 가능해?>는 저자가 20년여 전부터 대한민국이 인간적으로는 물론이고 총체적으로 한계에 봉착했고, 또다시 혼란과 위기와 망국의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라는 점을 인지함과 동시에 한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원인들을 연구했다. 이에 저자는 대한민국이 부디 새롭게 출발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가지고 산업화 이후의 시기부터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일어난 일련의 최근 사건들을 통해 그 문제점 되짚으며, 앞으로 대한민국이 바르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편집자주>

16. 참여정부의 개혁 실패(2003.10.13. 작성, 내블로그)

노무현 대통령은 한국의 대통령들 중 처음으로 “내부동력에 의한 개혁”이란 말을 꺼냈다. 나는 무려 10년 이상 ‘개혁’, ‘부정부패’를 연구해왔고(※당시에),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강조해왔다. 그리고 참여정부에 개혁의 핵심원칙 등을 정리해줬다. 그런 상황에서 노무현대통령의 말(내부동력)을 처음 접할 때 너무나 반갑고 감격스러웠다. 하지만 불과 취임 2-3개월 만에 ‘국민의 정부’ 내내 느꼈던 좌절감과 배신감이 또다시(참여정부에서도) 뼛속으로 파고들었다.

눈이 있고 생각이 있고 양심이 있는 사람들은 아래 낱말들을 살펴보기 바란다. 우리 역사를 장식하고 국민성을 지배해온 대표적인 용어들이다.

왕권주의, 봉건주의, 관료주의, 신분(양반상놈)차별, 지역차별, 남녀차별, 지역차별, 적자서자 차별, 가족(며느리, 아들딸, 장남차남)차별, 당파싸움, 식민지배, 독재, 권위, 특권의식, 기득권의식, 대립, 전쟁, 비난, 투쟁, 유착, 쟁취, 씨족, 가부장제, 빈곤, 부정부패, 무사안일, 무소신, 청탁, 압력, 학연, 지연, 혈연, 뇌물, 개인적인 비현실·사후세계(천국, 해탈, 영생, 구원) 등이다.

이처럼 과거와 현재와 사후까지 몽땅 뒤엉켜서 엉망이 된 상황에서 변한 것이라고는 대통령만 한사람 바뀐 것뿐이었다. 그런데 없던 ‘내부동력’이 갑자기 어디에서 솟아나겠는가. 더구나 바로 직전 ‘국민의 정부’는 입만 가지고 껍데기 개혁을 진행하다가 곳곳을 망쳐놓았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이 되었다면 내부동력을 제조해내든지 아니면 최소한의 기초동력이라도 제공하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었다. 그런데 곧바로 “내부동력”을 요구했다면 노무현 대통령의 정신 속에서부터 제일 먼저 개혁해야 하고, 이미 개혁에 실패한 셈이다.

이는 자신감을 상실한 대통령이 개혁실패의 책임을 미리 정부 부처로 떠넘겨놓기 위해서 공(내부동력, 개혁의 주체)을 공무원과 국민들 쪽으로 슬며시 던져놓은 것과 같다. 더욱 기막힌 점은 검찰(개혁)에 대해서는 내부동력은 안중에 없이 대통령이 주인공으로 전면에 직접 나섰다. 이후 여러 정황들을 살펴보면 노무현 대통령과 측근들은 내부동력 방안은커녕 개혁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다.

아마 노무현대통령은 당선만 되면 또 다른 거대한 「형님 노사모」가 나타나주고, 「제2의 붉은 악마」들이 떼거리로 쏟아져서 개혁을 진행해주고, 대통령을 성공시켜줄 것으로 착각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만일 국민들이 대통령을 뽑아놓고 내부동력까지 제조해서 개혁을 성공시켜준다면 그런 대통령은 누구든지 할 수 있고, 존재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간에 대한민국을 지탱해온 ‘내부동력’

그럼 우리 국민의 삶과 국가를 유지해준 그간의 내부동력을 살펴보자.

첫째, 고난의 역사에서 국민의 삶을 지탱해준 내부동력이다.

이는 연고(혈연, 지연, 학연) 중심의 인간관계, 대소사(애경사)를 위한 상부상조, 가부장제 중심의 경로효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익혀진 정분을 바탕으로 서로 도움을 주고받거나, 위계질서를 잡는 내부동력이었다. 덕분에 어둡고 처절한 역사 속에서 그럭저럭 견뎌냈다.

하지만 빈곤이 해결된 첨단복지사회에서는 모두에게 공통으로 적용되는 포괄적 휴머니즘이 생명이다. 따라서 과거 위주의 정과 이익과 인연(정분, 인맥) 관계는 참다운 자유민주주의와 선진국 진입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둘째, 국가를 유지해준 내부동력이 있다.

이는 각 시대의 충신과 열사, 독립 운동가, 반독재 투쟁이었다. 역시 국가적으로 망국의 위기(외세침략, 동족전쟁, 외환위기 등)에서 뭉쳐준 국민의 단결력도 중요한 내부동력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합리적인 철학과 가치관이 부재했고, 이로 인해서 위기가 없는 평상시에는 관행, 인연, 부정, 기득권, 특권, 대립, 분열, 투쟁, 시위로 엉망이었으며, 또다시 혼란과 위기와 망국을 초래했고, 이런 수준으로는 자유민주주의에 어림없다.

셋째, 인간다운 질적 삶과 밝은 미래로 움직여주는 내부동력이다.

이는 국민이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서 질적 사회와 미래로 향해가기 위한 협조적이고 유기적인 시스템적인 내부동력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예 동력이 없는 것보다 못할 정도로 후진적이고 부정적인 요인들에 붙들려 살았다. 이는 국민성 자체가 내부동력을 망치는 기득권과 특권과 패권과 이기심으로 가득하다는 이야기다.

이로 인해서 당파싸움, 분열과 대립, 지역감정, 각종 차별과 악습, 권모술수, 시기 질투, 투쟁과 시위, 비교·경쟁이 심각했다. 더구나 아첨과 권위와 청탁과 뇌물과 연줄이 거의 모든 분야와 국민성에 자리 잡혀 있다. 이처럼 불결한 요소들(비리, 유혹, 압력 등)에게 건전한 사회의식과 참신한 인물들이 계속 패배당한 나머지 개인의 창의력과 사회적 잠재력이 망가졌고, 부정적인 현상들과 격차들이 심해지면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존심까지 잃어가고 있다.

‘내부 동력’이 살아날 수 없는 이유

두 사람 이상이 모인 조직과 단체가 갖춰야 할 필수적인 3대 요소는 공통 목표, 원활한 의사소통, 협동 의욕이다. 하지만 한국은 암울한 역사, 폐쇄적 문화, 봉건적인 악습, 권위적이고 비민주적이고 차별적인 어른공경, 심지어 죽어서 썩어버린 조상(시체, 귀신)들에게 엄청난 것(비용, 시간, 정신, 인생)을 허비해버리는 비인간적인 짓들을 기어코 미덕으로 미화하고 합리화해왔다. 이러한 후진성들로 인해서 건전한 자체 동력이 살아날 수 없었다. 그래서 서로의 것을 함께 나누고 화합하고 발전해가는 ‘모두 함께 문화’가 아닌 ‘끼리끼리 북장구 치는 문화’의 연속이었다.

첫째, ‘공통 목표’를 방해하는 요인은 개인 위주의 본능과 감각과 감정(행복과 사랑) 위주의 삶, 황금만능, 권력만능,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영웅호걸, 인격도야, 사후세계(해탈, 영생) 등이다. 이는 개인으로 시작해서 개인에 머물다가 개인에서 끝나는 어쩌면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근시안적인 문화다. 그래서 중국은 물론 한국도 역사와 현대사가, 민족성과 국민성과 인간성이 국민 개개인이 성공하고 부자가 되려고 하고, 권력을 누릴 때까지 항상 열등하고 혼란하고 경쟁하고 대립하고 분열할 수밖에 없는 답답한 시스템(구조)이다.

둘째, ‘활발한 의사소통’을 방해하는 요인은 권위와 아첨과 청탁과 뇌물과 연줄이다.
우리는 각자의 존엄성 확보와 포괄적인 휴머니즘(자유, 평등, 정의, 인권, 복지, 가치관 등)과 합리적인 사회의식보다 권위와 청탁과 아부와 뇌물과 연줄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는 갑자기 서양을 모방해서 실시한 수준 높은 자유민주주의(법, 제도, 형이상학적인 개념들과 밑바탕)보다 수천수백 년 익숙해진 문화와 관행과 차별적인 인간관계를 우선해버린 탓이다. 다시 말해서 서양은 자유민주주의가 곧 인생과 문화다. 하지만 우리는 문화와 자유민주주의가 따로 놀면서 국민들이 함께하기도, 엇박자를 놓기도, 역행하기도, 무관심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에 이어서 현대사에서도 ‘개 버릇 남 주지 못하듯이’ 똑바른 소신과 합리적인 의견제시와 전체적인 안목보다 적당히 주고받고, 끼리끼리 노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하지만 이는 전체적이고 장기적으로 모두가 손해이고, 악순환과 실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이며, 자유민주주의에 자질미달과 역부족인 이유다.

셋째, ‘협동의욕’을 저해하는 요인은 타고난 인연(정분)을 중시하는 감각적·감정적·이기적·소아적인 정서와 비교·경쟁에서 생겨난 열등감과 피해의식이다. 이는 국민 다수가 공통으로 추구하고 실현하는 합리적인 세계관과 포괄적인 인생관과 보편적인 가치관과 자율적인 존엄성에서 취약하거나, 아예 없거나, 정반대라는 증거다.
이는 생각을 지닌 인간이라면 철이 들고 나이가 먹을수록 막연했던 생각과 감각과 감정이 합리적인 의식과 관심사와 인생으로 바뀌면서 세상으로 넓어지고, 생각이 깊어지고, 관심사가 높아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 협력해서 더 나은 사회와 문화를 만들어본 긍지감과 자신감과 경험이 턱없이 부족하다. 대신에 가까운 인연들(혈연·지연·학연)이 모여서 애경사의 상부상조와 친목 도모 수준으로 소중한 시간과 고귀한 존엄성을 낭비한다.
더구나 무의식에서는 홍익인간과 입신양명과 부귀영화와 영웅호걸이라는 부담감을 지닌다.
이처럼 의식과 관심사가 합리적인 사회문화와 더 나은 미래로 성장하지 못하고 끼리끼리 어울리면서 오히려 졸렬해지고 굽어짐으로써 서로를 비교하는 등 ‘사돈 네 논밭 사면 배가 아픈’ 질투심과 경쟁심을 갖고 산다. 그뿐만 아니라 구태의연한 권위와 위계질서에 맞춰서 굽실거리느라고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받으며, 이는 악감정과 반항심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인간답고 순수한 파인 플레이는 찾아보기 어려운 저질 사회문화로 진행되었고, 환멸을 느낀 일부 국민들은 단순하고 극단적인 흑백논리 수준에 머문다. 역시 극도로 실망하고 혐오한 사람들은 나라를 등지거나, 양다리를 걸치고 살아가거나, 전문가들은 양비론에 머물면서 어중간한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모든 원인과 잘못은 국민들에게 있어

지금도 우리는 선진국들의 좋은 면들을 본받아서 더 나은 곳을 향하기보다 후진적인 나라들에 비교하면서 우리를 합리화한다. 반면에 우리는 과거 빈곤과 열등의식으로 인한 반작용으로 고급명품과 호화사치와 향락생활과 퇴폐행위까지 서민들에게 전이되어왔다. 과거에는 재벌, 고위층, 정치인, 부유층에서나 행해졌던 고급명품과 해외 원정 골프와 카지노 고액도박과 해외여행이 일반 국민과 청소년들에게 당연해지고 있다.

그래서 내부동력은커녕 모여서 먹고 쓰고 노느라고 시간과 정신과 인생의 여력과 잠재력을 까먹으면서 내리막을 향한 채 급기야 갖가지 이유들로 파산하고 이혼하고 자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국민들은 문제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한 채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 “혼자 앞서가면 찍힌다.”, “너무 많이 알면 다친다.” 등 무기력과 무능을 합리화한다. 이는 자기반성과 자기변화를 포기·외면한 채 적당히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이런 상태로는 내부동력이 생겨날 수 없다. 무사안일, 눈치 보기, 줄서기, 연줄 달기, 적당주의는 하루 이틀 통용된 낱말들이 아니다. 더욱 어두운 점은 사회에 봉사하고 공헌하고 미래를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반대하고 시위하느라 자기 삶의 개척도, 새로운 미래 대안에도 소홀하다는 점이다. 독재시절에 정당성을 얻었던 투쟁과 시위와 반대를 이제는 건전한 사회분위기와 국가미래를 주도해야 할 노조, 전교조, 의사, 교수, 교장, 공무원들도 자기주장과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무기로 당연히 사용하고 있다.

순수하고 진지하고 똑바르고 실천하고 책임지는 교양인들과 지성인들은 모두 어디로 숨었기에 우리는 매일 매시 곳곳에서 비난과 투쟁과 시위와 반대의 목소리만 듣고 살아야 하는지 안타깝다.

지도자에게 철학이 없으면 절대 살아날 수 없는 ‘내부동력’

철학이 없는 지도자와 지식인과 국민들은 결과에 가서 보면 나라를 망치거나, 어떻든 도움이 안 된다. 우리는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범죄자와 방조자들에 다를 바 없다.

지금 우리는 편 가르기가 아니라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 국민들이 흥분과 대립과 감정의 도가니에 들끓는 것으로 끝나버리면 갈수록 희생자들만 양산되면서 대다수 국민이 박수부대 신세를 면할 수 없다.

누군가의 잘잘못을 떠나서 한국은 지금도 앞으로도 큰일이다. 내가 한국의 총체적인 실상과 미래를 깨닫고 뭔가 계기를 만들어보려고 노력한 지 13년째다. (※이제는 최대 30년째)

하지만 아직도 누군가와 대화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을 정도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정상인들이 함께하기도, 모여서 논의하는 것도, 만나서 진지하게 대화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모든 것이 너무나 어렵고 힘들다.

물론 그간에 주변에서 칭찬은 많이 받았다. 그런데 실제로 함께 해보자고 나서는 사람은 없다. 지금도 수많은 네티즌들이 비난과 악플에는 전문가들에 가깝다. 하지만 자신이 부담해야 할 순간에는 빠져나갈 이유를 몇 개씩 준비해놓은 채 비난과 변명으로 살아간다.

(※ 나이가 99세지만 의식이 젊은이들처럼 총총한 나의 아버지(강진군 병영면 고향)의 이야기를 전한다. 노무현은 원래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몽리 출신(태생)이고, 황해도 풍천군을 본관으로 하는 풍천 노씨였으며, 우리 할머니도 풍천 노씨였는데 멀지 않은 동네(뚝 아래쪽)에서 살았다고 한다. 당시에 뚝 아래쪽에서 사는 노씨(집성촌)는 대부분 공산주의자였다고 한다. 무척 빈곤했던 시절이고, 그중에서도 노무현의 부모는 극심하게 가난했으며, 공산주의라는 차별과 탄압과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김해로 이사했다고 한다. 이는 강진군 병영면 출신인 나의 아버지와 강진읍 몽리 출신인 할머니와 인척들과 지인들이 상식처럼 하던 이야기라고 한다. 아직은 입증되지 않은 설에 불과하고, 기회가 된다면 연구가들이 더 파헤쳐봐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필자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을 전후로 그의 주변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체계적인 대한민국의 개혁을 요청했고, 정권인수위원회에서 개최한 세미나들을 대부분 참석했다. 그런데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한심한 관심사와 의식수준들임을 직접 목격했고, 참담한 실패를 확신했으며, 그의 비참한 말년을 줄기차게 예고·경고했다.

필자는 머잖아서 우리가 또다시 갖가지 혼란과 위기와 분열과 망국의 악순환을 반복할 것이라는 사실이 확연해졌고, 심각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우리는 현대사 내내 대통령들은 물론이고 정부, 정치인들, 언론인들, 재벌들, 지식인들, 성직자들, 국민들이 자유민주주의와 무관하거나, 역행했고, 특별하게 희망을 기대할 수 없는 연속이었다.

사실상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흉내 내기도 버거운 수준이었고, 어렵사리 본색을 숨기거나, 그럴듯하게(민주화, 인권, 평등, 공정, 정의 등으로) 위장한 채 시늉해서 주도권을 쥐기에 급급했다.

심지어 종북·좌파·주사파·친중·반미 세력들은 독재자들이 살아왔던 역사와 문화와 사회와 환경과 민족성과 관행들에서 똑같이 영향받은 똑같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자신들을 민주화와 인권으로 위장해놓고 스크럼을 형성했으며, 서로의 비리와 비행과 만행들을 묵인·은폐·보호·두둔·변호해주면서 승승장구했고, 어느 하나만 무너지면 연쇄적으로 동시에 몰살할 수밖에 없는 블록(장난감)세력이 실체이며, 역사와 현대사에서 최악으로 망가졌다는 점에서 ‘엉덩이에 뿔 난 망나니 정권’인 셈이다.

저자 최익주 선생은 전남 목포 출생으로 목포북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광역시로 이사해서 북성중학교, 동신고등학교, 조선대학교 경영학과(78학번)를 졸업했다.

군생활을 오산비행장 방공포부대에서 병장 만기 제대, 3년간의 개인 사업을 했으며, 관세사무소에서 16년 동안 사무장으로 지내다가 광주세관과 관세청과 부정비리 문제로 싸움(형사소송)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의 실체와 실상을 깨닫고 인생을 180도 선회. 이후 밑바닥부터 다시 터득하고 통달해야 한다는 각오로 시민단체(2-3년), 택시기사(2년 6월), 생산공장과 건물경비(10년여)를 전전하면서 노동자 생활을 해왔다.

저서로는 <이제는 바꿔봅시다(1997.7.30.)> <대화로 여는 새아침(1999.9.20.)> <사랑하는 선·순·아에게 제1-4권(2018.7.13.)>이 있다.

다음은 “17. 노무현의 한심한 개혁과 비참한 말로”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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