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천국, 천국, 천국을 향하여 (15)-천국 초대장, 왕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

천국 분명히 있습니다

천국 초대장, 혼인 잔치 비유

마태복음 221 – 14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사업하러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 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들어가는 말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

우리는 지금 하나님 나라의 임시적인 측면에 대해서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여러 비유들을 통해서 한 단면으로 표현되어 질 수 없는 천국의 다양한 국면들을 설명해 가셨습니다. 우리는 씨 뿌리는 비유를 시작으로 여러 가지 비유를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그만큼 천국은 한 마디로 표현되어질 수 없는 다양한 국면들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혼인잔치 비유는 마태복음 21장 23절의 질문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시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십니다. 그런데 성전의 지도자들이 보니까 자신들의 수입원인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뒤엎으시고 내 쫓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 서기관들이 주님께 따져 묻습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요한의 세례에 대한 질문을 하시면서 이들의 질문에 답변하시지 않는 듯 하셨지만 사실은 이어지는 비유를 통하여 이들의 현재 상태를 고발하십니다.

더구나 이 일련의 사건들은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잡히시기 전 한 주간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쉽게 말해서 주님께서는 지금 골고다 십자가를 코앞에 두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두 아들 비유와, 포도원 소작인 비유를 통하여,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백성의 장로들의 현재 상태를 고발하신 바 있습니다. 두 아들 비유에서는 큰아들과, 작은 아들이 등장하면서 “예”라고 대답했으나, 불순종한 큰아들과, “아니오” 라고 대답했으나 회개하고 돌이킨 작은 아들이 대조를 이룹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이라고 답변하는 그들의 면전에, “세리와 창기들이 너희 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쉽게 말해서 기득권자들은 큰아들이며 세리와, 창기들은 작은 아들이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먼저 된 사람들의 교만과, 먼저 된 사람들의 불순종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먼저 되었다는 것이 곧 구원 받음의 증거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처음에는 잘못된 길로 들어갔다고 할지라도, 천국은 회개하고 돌이키는 진실한 자들 즉 작은 아들과 같은 세리와, 창기들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또한 포도원 소작인 비유를 통하여, 잘못된 기득권을 주장하려는 소작인들의 착각을 지적하셨습니다. 주인이 모든 것을 다 만들어주고, 후원까지 해 준 포도원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보이지 않는다고 욕심을 내고 주인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엄청난 착각을 하면서, 주인이 보낸 종들을 매질하고 죽이고 심지어는 상속자인 아들까지 죽이는 소작인들, 그들은 바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백성의 장로들인 너희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인의 것을 나의 것으로 하려고 애쓰며 모든 불법을 자행하는 사람들 다시금 주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줄거리

이제 혼인 잔치 비유를 통하여, 주님은 다시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시면서 좀 더 나아갑니다. 앞의 비유들에서 세리와, 창기들로 묘사되었고, 다른 농부에게 세로 줄 것을 말씀하셨던 것을 좀 더 구체화하시면서 천국 잔치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이제 이 비유가 자신들에 대한 이야기인줄 알고 흉흉한 분위기 가운데 있습니다. 만약 백성들만 아니라면 당장 지금이라도 잡아들여서 죽여 버릴 기세로 둘러 서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십자가를 향한 행보를 시작하신 주님에게 그런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담담하게 혼인 잔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당시의 혼인잔치 자리로 여행을 떠나보겠습니다. 우선 먼저 이해해야 할 사실은 당시의 혼인식은 오늘날 우리가 하는 결혼 예식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당시에는 무슨 특별한 예식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신랑이 신부 집에 도착하면 혼인잔치를 벌였습니다. 이 잔치는 보통 몇 일 동안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면 잔치가 끝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혼인 잔치의 비유 중 혼인 잔치를 배설한 왕의 초대와 이를 거절한 사악한 자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제 이러한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서 혼인 잔치에 초대하는 주님의 사랑과 청함 받은 자의 자세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혼인 잔치에의 초대

주님의 초대는 신랑으로서의 초대였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신랑이시며, 우리는 그의 정결한 신부입니다. 혼인 잔치를 배설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신랑과 신부를 축하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초대는 죄인이었던 우리들을 주와 동등한 신분으로 간주하며 그와의 축복된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신부로서의 초대는 종으로서의 초대가 아닌 주인으로서의 초대입니다. 신부에로의 초대는 어두움에서 빛으로의 초대입니다. 신부에로의 초대는 불완전에서 완전으로의 초대입니다. 그리고 신부에로의 초대는 죽음과 저주에서 생명으로의 초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초대장을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주님의 초대는 영광의 자리에로의 초대입니다. 그의 초대는 고난과 한숨, 땀 흘림과 고통의 자리에서 기쁨과 풍요로움, 안식과 영광의 자리에로의 초대입니다. 그의 초대는 마치 풍랑 이는 바다 위에서 고통하는 자들에게 평안을 허락하시는 초대입니다. 그의 초대는 이 땅의 모든 번민으로부터 해방되는 온전함으로의 초대인 것입니다.

복된 소식을 전할 자를 보내심, 이러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주님은 최대의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이것을 위해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고 많은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최후에는 당신의 아들까지도 종의 형상을 입혀 보내시는 최대의 희생을 보이셨습니다. 진정 그의 초대는 모든 것을 다하여 전하신 초청이었고 생명을 아끼지 않는 초청이었습니다.

완악한 자들의 거절, 이러한 주님의 초청에도 불구하고 완악한 인생들은 이 초청을 거절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초청을 거부하는 자만큼 어리석은 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절은 곧 죽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초청을 거부했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거절할 뿐만 아니라 선지자들을 때리고 능욕했으며, 나중에는 왕의 아들까지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범죄로 인해 이제 그들에게는 심판만이 남아 있게 된 것입니다. 말씀의 거절, 주의 초대에 대한 거부, 이것은 그 반대의 현상, 즉 더 큰 완악함으로 말씀을 대적하고 주의 종을 대적하는 죄악으로 발전하며 결국에는 심판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 속으로 들어 가 보겠습니다.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해서 혼인잔치를 배설했습니다. 정성껏 음식을 장만하고 평소 친분이 있거나 왕의 영향권 내에 있어서 올 만한 사람들에게 사람을 보내서 초청장을 발부했습니다. “친애하옵는 영주님 저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금번에 혼인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바쁘시더라도 오셔서 자리를 빛내 주시고, 함께 즐거워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왕의 초청장을 든 종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면 초청장을 전했지만 사람들은 잔치에 오기를 싫어했습니다. 당시는 무슨 Online으로 결재를 할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초청장을 발부 한 왕은 자신의 권위가 무시당한 것이며, 사람들은 왕권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고 했습니다.

왕은 끓어오르는 노기를 참으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혼인잔치를 엉망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다시 사람들을 보내서 초청을 계속했습니다. “친애하는 영주님, 대제사장님, 장로님, 서기관님,”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그저 오셔서 자리를 빛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왕은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어서 종들에게 다시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아주 귀찮아하면서 싫어합니다. “아니 싫다는데 왜 자꾸 귀찮게 하는 거여 아예 자리를 비워야지 이거야 원!”하면서 밭으로 나가고, 장사하러 가버렸습니다.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니고, 꼭 가야할 상황도 아니었지만, 이들은 왕권을 무시하고, 왕을 왕으로 대접하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보자보자 하니까 점입가경이라고 그나마 어디로 가지 않고 남아 있었던 사람들은, 보낸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더 이상 왕권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종들이 나가서 청한 사람들을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잔치 자리에 오기를 싫어했고 심지어 보낸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본래 하나님의 섭리를 거역한 유대인들을 두고 한 말이지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고 반대하는 모든 세대의 모든 불신자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초청을 거절함

그들은 혼인 잔치에 대해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혼인 잔치보다 더 마음을 쏟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5, 6절) 말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세상적인 일과 이익에의 집착은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가까이하는 데 있어 큰 장애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농촌에 살고 있는 사람이든지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이든지 이 세상을 살고 있는 한은 감당해야 할 많은 직무가 있으며, 그들 모두가 맡겨진 일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도 당연히 옳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그들의 구원을 방해하는 일이 된다면 오히려 아무 것도 아니한 것만 못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오늘날도 청함을 거절하는 자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지금도 현실의 순간적인 이익만 알고 내세에 관하여는 무관심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육적 삶의 일시적 가치만 알고 영적 삶의 영원한 가치는 모르는 자들입니다. 땅의 것만 알고 하늘의 것은 모르며, 잠깐의 즐거움은 알되 영원한 즐거움은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면한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로 인하여 구원의 초청을 거절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임금의 종들을 적극적으로 박해하였습니다. “그 남은 자들”(6절)이란 밭이나, 사업하러 떠나가고 남아 있는 자들로 농부나 상인이 아닌 교회 지도자들, 즉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박해자들이었으며,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인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의 행위는 훗날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제자들, 그리고 숱한 성도들에게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초청을 거부하거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만으로 죄를 범한 이들은 오히려 종들을, 그리고 그리스도와 그의 많은 성도들을 계속해서 능욕하고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거절의 결과

유대 교회와 백성에게 임한 완전한 멸망은 초청을 거부한 자들의 악독한 행위에 분노한 임금의 명령에 의해 주어졌습니다(7절). 하나님의 사랑과 복을 받았던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절함으로써 스스로 진노와 저주의 도가니를 끌어안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죄는 파멸을 불러들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살인죄였습니다. 임금이 자신의 부르심을 업신여긴 자들을 진멸시켰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그의 종들을 죽인 자들을 진멸시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특히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역자들을 핍박하는 행위는 어떤 죄보다도 더 큰 범죄라는 사실입니다(열왕기하 24장 3-4절).

파멸의 예언은 성취되었습니다.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동네를 불사르고”(7절). 이 말씀은 이일이 있은 뒤 40년 되는 해에 로마 군대에 의하여 유대인들이 파멸되고 예루살렘이 불탔던 끔찍한 사건에 의해 뒷받침됩니다. 일찍이 이 세대 중에 이보다 더한 파멸과, 또한 불과 칼로 인한 비참한 멸망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두시기 위하여 택한 거룩한 도성이요,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큰 심판이 이르러 다시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폐허로 변해 버렸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반대하는 모든 자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본보기였습니다. 이처럼 그의 언약을 파기하거나 훼손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멸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을 대신하여 다른 사람으로 잔치 자리를 채웠습니다. 종의 보고를 들은 임금은 이제 사거리에 나가서 다른 손님들을 청하여 오라고 명령했고, 이에 종들은 나가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사람들을 데려다가 잔치 자리에 참석케 하였습니다. ‘사거리’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밖의 온 세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대로(이사야 52장 15절) 유대인들이 복음의 초청을 거절함으로써 유대에서 이방 세계로 넘어간 것입니다(사도행전 13장 46절). 또한 사거리에서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초청되었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민족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데 비하여 많은 이방인들은 개인적으로 복음을 받아 믿게 될 것임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메시아를 거역하고 대적하는 자들이 받게 될 것이라면 오직 영원한 멸망뿐이라는 것과 그 약속된 복의 자리마저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는 불행을 맛보아야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왕의 인내는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왕의 혼인 잔치는 피의 잔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왕은 군대를 보내서, 그 살인한 자들의 동네를 불살랐습니다. 왕은 탄식합니다. 혼인잔치는 예비되었지만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않구나. 그래서 본래 청함을 받지 못했던 무자격자들에게로 특권은 넘어갑니다.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그래서 종들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왔습니다. 왕은 그들에게 준비된 예복으로 갈아입게 했습니다. 원래 하객으로 온 사람들이 왕의 예복을 입는 것은 예의에 속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문제없이 사람들은 예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잔치에 참여해서 음식을 즐기고 있습니다.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왕은 손님들을 둘러보기 위해서 들어왔습니다. 급조된 손님들이지만 왕이 내어준 예복을 입어서인지 정돈된 분위기 속에서 잔치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푼 임금은 사람들을 초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초청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로 바쁜 나머지 임금의 초청을 거부하고 묵살하고 나아가 임금이 보낸 종들을 능욕하고 죽였습니다. 이에 화가 난 임금은 그 동네를 불사르고 진멸하였습니다. 그리고 사거리로 종들을 보내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초청하여 잔치를 치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잔치에 참석한 사람 중 하나가 예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고 참석하는 것은 매우 큰 결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리들 가운데는 의연하게 예복을 입지 않은 모습으로 잔치에 앉아있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왕이 묻습니다. 도대체 왜 내가 제공한 예복을 입지 않았느냐? 그런데 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어떤 핑계를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이 잔치는, 예복을 입어야만 참여할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예복을 입지 않고 참여한 것입니다. 왕은 그를 용서 할 수 없습니다. 가차 없이 왕의 명령이 떨어집니다.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러면서 임금은 탄식합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예복을 입지 않은 자

초청에 응한 사람들은 주인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초청을 받아 잔치 석상에 나온 많은 사람들은 잔치를 배설한 임금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종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초청에 응함으로 귀한 대접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인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의 초청에 응답한 성도들을 하나님께서는 기뻐 맞으십니다. 아무런 대가나 조건도 없이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에 응답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를 우리의 구주로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천국의 귀한 손님이 될 것이며, 결국 천국의 영원한 주인이 되는 영광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예복을 입지 않는 자는 그때까지 종들이나 다른 사람들에 의해 발각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복을 입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잔치 자리에 참석하여 함께 행동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위장된 행동은 사람은 속일 수 있었으나 임금은 속일 수 없었습니다. 임금은 많은 무리 가운데 섞여 있는 단 한 사람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로 신앙과 가식적인 신앙을 분명히 가려내십니다.

그는 예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잔치에 초청을 받은 사람의 최소한의 의무는 예복이었습니다. 예복은 그 잔치를 배설한 사람에 대한 손님이 갖추어야 할 예의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예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예복을 입지 않는다 함은 준비가 없었다는 말을 뜻합니다. 그것은 외형적인 준비가 아니라 마음의 준비를 말합니다. 복음의 잔치에 초청된 우리는 먼저 복음의 부르심에 합당한 마음(빌립보서 1장 27절, 에베소서 4장 1절)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온전히 신앙하는 삶의 구체적인 표현이 있어야 합니다.

드러난 죄악

부끄러움을 당하였습니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12절). 아무에게도 들키지 아니하고 잔치의 여흥 속에 파묻힌 그는 그만 임금의 날카로운 시선에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 앞에 노출되고 말았습니다. 무언가 약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대중 앞에 갑자기 노출될 때 커다란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의 신분을 가장한 채 남의 눈을 속인 그에게 임금의 이와 같은 호령은 매우 큰 수치감을 가져다주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거부하고 영생을 준비하지 못한 자들은 언젠가는 이러한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요한계시록 16장 15절).

유구무언이었습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그는 임금의 추궁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것은 일종의 형벌입니다. 그는 너무나 당연한 자신의 과오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에 인간은 아무런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에는 여하한 반론의 여지도 있을 수 없습니다. 특히 구원의 기회를 거부하고 포기한 자들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묵묵히 감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

자유를 빼앗겼습니다. 그는 임금의 명에 의하여 수록이 결박당하고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짐을 당하였습니다. 죄인은 먼저 그의 손이 결박을 당하게 됩니다. 이것은 자유를 상실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또 수족이 모두 결박을 당하게 된 것은 자기들의 행위에 대한 형벌에 저항하여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을 뜻합니다. 복음을 거부한 자는 진정한 자유를 유보 당한 자입니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자유는 진리 안에서만 가능합니다(요한복음 8장 32절).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요한복음 14장 6절).

후회를 하게 됩니다. “슬피 울며 이를 살게 되리라.” 슬피 우는 것은 회한의 눈물입니다. 땅을 치며 후회하는 눈물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구원의 문은 닫혀지고 하나님의 심판은 반복될 수 없습니다. 영원히 어두운 곳에서 엄청난 고뇌의 눈물을 흘려야 할 날이 인류에게 곧 닥칠 것입니다. 그날을 위해 우리는 “예복”을 준비합시다.

우리는 이 비유가 앞의 비유들과 흡사한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습니다. 우선 혼인 잔치는 곧 천국 잔치를 이야기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 할 수 있습니다. 임금은 곧 예수 그리스도요, 하나님입니다. 먼저 청함을 받은 기득권자들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며, 지금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백성의 장로들일 것입니다. 이미 그들에게는 초청장이 발부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얼마나 많은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찾아갔는데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은 선지자들의 말을 귀찮아하고, 능욕하고, 때렸으며, 심지어는 죽였습니다. 여기까지는 앞의 비유에서도 잘 드러난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진노한 왕이 그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이것이 궁극적으로 혼인 잔치가 끝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만 혼인 잔치를 배설한 왕을 무시한 그들을 진멸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전혀 초청을 받을 자격이 없는 모든 사람들, 즉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혼인 잔치에 초청이 됩니다. 원래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무조건 그저 왕의 은혜로 참석하게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아직도 초청장이 발부되고 있는 시점입니다. 그 초청장은 신분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발부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이천 여 년 동안 여전히 초청장을 발부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천국 잔치의 자리는 조금 씩 조금 씩 채워지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는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자리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의 잔치에 참석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다만 왕의 호의로 혼인 잔치에 참여했습니다. 그 왕의 호의를 나타내는 것이 왕의 예복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예복이 무엇이냐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 예복을 믿음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잔치에 참석한 사람은 무엇을 가지고 참석한 것일까요? 초청장이 발부되고 잔치 자리에 참석했다는 것은 이미 그가 믿음으로 혼인 잔치에 들어왔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예복을 믿음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예복은 무엇입니까?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던져 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청함을 받은 자는 많지만,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금 생각하고 지나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원래 아무런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냥 은혜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데 그 천국은 무작정 아무렇게나 들어가서 마음대로 행동하는 천국은 아니었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혼인 잔치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초대하신 것입니다. 그 초대에 응한다는 것은 임금이 원하는 절차에 따라서 혼인 예식의 하객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얼떨결에 초청에 응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예외가 아닙니다. 일단 혼인 예식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진심으로 왕의 혼인 잔치를 기뻐하며, 즐거워하기를 왕은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예복을 입는다는 것은 왕의 요구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왕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왕이 제시한 칭의의 옷을 입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의 삶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앞의 비유에서 열매 맺는 백성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신 바로 그것입니다.

이 예복을 주님께서는 무엇을 뜻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를 나왔다 할지라도 진실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내 죄가 씻음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구원의 혼인 잔치에 참석 할 자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없이는 사람의 아무리 작은 죄도 사함받을 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에 나온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옷을 입지 않고 있다면 우리의 기도, 우리의 정성, 우리의 예배, 우리가 드린 헌금 모두가 소용없는 일입니다.

구약에 성막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 제단에 짐승의 피가 뿌려지지 않으면 그 제사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 짐승의 피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는 피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올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 없이 나온다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예복을 입지 않는 사람이 혼인 잔치에서 쫓김을 당해 지옥에 내던짐을 당했다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천국 잔치의 초대에 응했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혼인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에게는 모두 다 이 예복을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이 예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왜, 입지 않았느냐?는 임금의 질문에 이 사람은 유구무언이었습니다. 어떤 변명도 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예수님의 십자가와의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왜 예수님의 피의 체험을 하지 못하였는가? 에 대한 질문에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도 피의 복음을 전해 들었어도 들을 때뿐이었고, 그렇게 죄에 대해서 회개를 촉구하고 예수님의 피만이 내 죄를 사한다고 들었어도 들을 때뿐이었던 이런 사람들이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이 시대 우리에게 이런 신앙인들이 많다는 것을 깊이 깨닫기를 바랍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귀담아 들으시기 바랍니다. 초대에 응한 사람이 예복을 안 입어서 지옥에 갔다면, 아예 초대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갈 곳은 너무나 뻔한 일입니다. 구원의 혼인 잔치 초대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지만 언제인가는 천국복음이 전 세계에 증거되고 나면 이 초대가 끝이 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의 상태입니까? 기꺼이 이 초대에 응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 드려지는 모든 예배가 곧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초대하고 계시는 천국 잔치인것입니다. 이리 저리 핑계되지 말고 열심히 초대에 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미 천국 잔치 가운데 거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예수님의 피의 옷을 입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청함 받은 사람으로 끝나지 말고 택함 받는 사람들이 되기 바랍니다.

마무리

혼인잔치 비유는 천국의 초청장이 발부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원래 초청을 받았던 사람들은 이미 다 거부해 버렸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들, 기득권을 가지지 못했으며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 무자격자들에게 초청장이 발부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 초청장은 계속해서 발부되고 있는 중입니다. 이 초청에 믿음으로 응하는 사람들은 혼인 잔치에 참석하게 됩니다. 이들에게 왕은 왕이 준비한 예복을 입히십니다. 본래 죄악 중에 출생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칭의의 예복을 입히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권세를 주십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는 여전히 왕의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이 오셔서 잔치 자리를 자세히 살필 때 이들은 드러납니다.

지금은 초청장이 발부되고 있는 시기입니다. 먼저 초청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이미 잔치 자리에 자리를 펴고 있기도 합니다. 이 잔치 자리에서는 왕의 예복만이 필요합니다. 내가 무엇을 했고, 내가 얼마나 능력 있는 사람인가를 왕이 보기 원하지 않습니다. 왕이 원하시는 것은 왕의 백성답게 사는 것입니다. 왕의 권세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왕이 입혀 준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것이 왕이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왕의 혼인 잔치에 참석한 사람의 모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The following two tabs change content below.

편집국

시니어 타임즈 US는 미주 한인 최초 온라인 시니어 전문 매거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