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하늘과 새 땅(1), 영원한 성 새 예루살렘-이기는 자의 신앙으로 만납시다

새 하늘과 새 땅, 영원한 성 새 예루살렘         

요한계시록 21 : 1 – 8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들어가는 말

이기는 자의 신앙으로 만납시다. 

그동안 천국에 대한 설교가 18번에 걸쳐서 우리에게 들려졌습니다. 맨 처음 천국 복음을 외치신 예수로부터 시작해서 천국과 세상 어느 쪽을 택하며 살겠느냐? 천국 가는 길이 쉽지만 않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천국의 비밀 7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천국은 누가 들어가는가?를 살펴보았고, 천국 초대장이라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천국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달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최고의 신앙 목적은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 구원은 곧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천국은 두 가지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죽어서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아 들어가는 천국이 있고, 이 땅에서 구원받은 자가 누리는 심령 천국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믿고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 심령 천국입니다. 내 마음이 어두운 지옥 같은데 어떻게 보이지 않는 천국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보이지 않는 천국이 믿어지고 그 천국을 소망 삼고 살아가는 것은 심령 천국이 이루어져야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기쁘지 않다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내 안에 심령 천국이 이루어졌는데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천국 시리즈가 이제 마지막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새 하늘과 새 땅”을 소개하면 천국에 대한 설교는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본문 말씀에서 사도 요한은 천국의 실제적인 모습을 자세히 보고 우리들에게 그 천국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세상의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말을 다 동원해서 천국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이보다 몇천배 아니 인간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사도 요한 당시의 표현으로는 이것밖에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천국에서 우리 모두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이 아름다운 천국에서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가 이 땅에서 심령 천국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요한계시록은 성경 66권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책입니다. 이 책을 기록한 사람은 사도 요한입니다. 때는 주후 95년경 로마황제 도미티안이 다스릴 때인데 이 때가 로마제국에 의한 기독교의 박해가 극에 달했을 때였습니다. 갈릴리에서 시작된 천국복음 운동이 예루살렘을 휩쓸고 예루살렘의 박해로 천국복음 운동은 흩어지게 되어 사마리아를 거쳐 소아시아 지방에까지 전해졌고, 마침내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에까지 전해지긴 했으나 힘도 없고 연륜도 짧아서 어린아이 같은 연약한 형편이었습니다.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연약한 예수 그리스도교를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강대한 로마제국이 국력을 총동원해서 예수 그리스도교 말살운동, 박해운동을 끈질기게 펼쳤습니다. 교회의 기둥인 사도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박혀 순교했고, 그 밖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원형극장으로 끌려가 굶주린 사자의 밥이되거나 화형에 처형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성도들은 카타쿰에 숨어서 겨우 복음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주님의 제자 사도 요한은 나이가 많은 고령이었는데, 천국복음 예수 그리스도교를 전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죄인의 몸으로 지중해의 고도, 밧모란 작은 섬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날마다 채석장에서 힘겨운 강제노동을 하는 절망적인 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안목으로는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다시 재기하리라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며, 예수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하나의 사건으로 잠깐 전해지다 끝나는 한때의 운동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어느 주일 아침 밧모 섬에 유배되어 있는 사도 요한에게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여 주셨는데 그 내용 즉 천국복음은 어두움과 절망, 즉,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다가올 천국복음의 승리와 천국의 영광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생생하게 목격한 사도 요한은 이 놀라운 승리와 영광의 소식을 내일에 대한 기약도 없이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과 절망 가운데 있는 소아시아 교회에 전하여 주었고, 이 새 하늘과 새 땅을 간직한 교회와 성도들은 새 힘을 얻고 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자랑하고 전하면서 굶주린 사자 앞에서도, 포악한 로마 군인의 칼날 앞에서도 신앙의 지조로 굽히지 않고 마치 최전방의 장군처럼 대항하고 싸웠으며, 죽으면서도 신랑을 맞은 신부 모양으로 기쁨과 승리의 찬송을 부르면서 용감하게 순교했습니다.

이런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이 시들어가는 성도들의 믿음에 다시 불일듯이 일어났으며, 쇠퇴하는 교회가 왕성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로마제국을 천국복음으로 정복하기까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존귀한 소망, 찬란한 소망, 화려한 끈을 계속 이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새 하늘과 새 땅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천국복음의 말씀 속에는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이 살아 있는 복음 말씀의 터 위에 세워졌으며, 이 살아있는 천국복음의 말씀을 위탁받은 기관입니다. 그러므로 음부의 권세가 이 생명력이 있는 천국복음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천국복음의 말씀, 터 위에 세워진 교회, 생명의 말씀인 천국복음을 위탁받아 전하는 교회를 그 어떠한 세력도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이 아무리 국력을 총동원하여 천국복음을 말살하려 해도 최후의 승리는 천국복음이고, 천국복음의 터 위에 세워지고 천국복음을 위탁받은 교회라는 교훈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믿고 살아야 승리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합니다.

본문 말씀에는 사단과 그 세력들이 최종적으로 결박당한 뒤 나타나게 될 아름답고 새로우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아주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영원한 미래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음으로 사단의 세력을 물리치신 이후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서 점점 왕성해졌습니다(마태복음 13장 13절).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 말씀을 단순한 미래사에만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현재 이 땅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본문 말씀이 묘사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줄거리

새로운 나라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1절)” 사도 요한은 둘째 사망이 끝난 뒤 세상이 전혀 새롭게 변화된 것을 환상으로 보았습니다(요한계시록 20장 15절). 계속해서 사도 요한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이 둘째 사망은 사단과 그 세력들이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하게 패망한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철저하고 완전하게 주님의 뜻이 실현되는 영역은 결국 완전하고도 새로운 세상, 즉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인 것입니다. 비록 우리 주변의 하늘과 땅이 창조 이후 옛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해도 주님이 다스리는 사회, 정의가 실현되는 세상, 선이 악을 이기는 국가는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에 속한 새로운 세상인 것입니다.

세상 나라와는 구분됩니다.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1절)” 사도 요한은 환상 가운데서 바다가 소멸된 것을 보았습니다. 바다는 고대인들에게 엄청난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더욱이 해상 생활과 무관했던 유대인들에게 바다는 다른 민족들에 비해 더 큰 두려움을 주었습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이나(창세기 6-9장), 출애굽의 경험(출애굽기 14장), 요나의 경험(요나 1장) 등도 이런 바다에 대한 이미지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다가 사라졌다는 것은 주님이 다스리는 세상이 어떤 불안이나 공포와는 무관한 평안과 안정된 나라라는 것을 뜻합니다. 또 바다는 육지와 육지를 분리시키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바다가 사라졌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더 이상 아무런 장애 요인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인간이 인간과 교제하며 서로 교통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 해도, 서로 사상이 다르다 하더라도 빈부, 성별, 학력의 차이가 있다 해도 주님의 나라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분리가 아닌 연합밖에는 없습니다.

거룩한 나라입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2절)” 하나님의 나라는 거룩합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원래 구별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일치요 연합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정한 것과는 구별되는 것이 또한 주의 나라의 특성입니다. 구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의 백성으로서 성결함을 유지하기 위해 부정한 음식을 피하고 율법으로 정결한 삶을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는 불의한 일에 가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온갖 세상의 부정한 일에 가담하며 악한 풍속을 따르고, 또 이웃을 압박한 대가로 자신의 배를 불리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결한 자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나라가 연합과 일치를 도모한다 해도 불의를 벗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백성이 되지 못한다면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시민으로서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합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2절)” 새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옵니다. 하나님이 지배하는 세상은 하나님에게 기원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아브라함을 불러 자신의 백성을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 땅에서 자신의 구속 계획을 실행에 옮기셨습니다. 그리스도 역시 이런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새롭고 참신하게 보이는 사상이나 신앙도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이라면 옳지 않습니다. 또 우리가 지금까지 고수해 왔던,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에게 기원을 두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가운데서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은 것은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2절)” 하나님의 나라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요한은 이를 말로 표현할 수 없어 모든 종류의 아름다운 보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하였습니다(요한계시록 21장 10-27절).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가시적인 아름다움뿐 아니라 불가시적인 기쁨과 행복으로도 가득 찬 세상입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이웃과 함께 나누며 고난받는 자들을 위로하며 형제의 슬픔을 함께하고 기쁨을 함께 누리는 아름다운 사회, 바로 이 사회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이 천국에서 우리는 반드시 다시 만나야 합니다.

이기는 자의 신앙으로 만납시다. 

1절 말씀,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절 말씀,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8절 말씀,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본문 말씀은 요한계시록 전체 내용 중에서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새 창조에 대한 선언, 이긴 자에 대한 복, 그리고 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모든 모순과 질곡이 가득 찬 이 세상에 살면서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위로를 얻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막연히 상상 속에서 그려보는 피안의 세계가 아니라 역사의 마지막에 이루어질 실제 세계이기에 성도의 소망 또한 절실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그날을 바라보며 악이 지배하는 이 세상, 온갖 고통을 참고 견디는 성도들에게 본문말씀은 큰 감동을 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인간 세계로 내려와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거하며 다시는 슬픔이 없는 세계를 이룩하리라는 본문 말씀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언급이며 성도가 지닐 소망과 신앙의 근거입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실현과 이곳에서 누리게 될 성도의 영원한 삶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세상에 임재하는 하나님의 장막

성도들 중에는 하늘 저편 어딘가에 하나님의 나라가 현존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이 같은 생각은 분명히 오류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추상화처럼 막연한 신기루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장차 이 땅 위에 이룩될 구체적인 실재입니다. 하나님은 죄악으로 오염된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을 완전히 심판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조성하여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태복음 6장 10절)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이를 뒷받침해 주는 확실한 근거입니다. 또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2절). “하나님의 장막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3절)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본문 3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당신의 거처로 삼으신다는 말씀으로 읽을 수도 있기에 더욱 큰 은혜가 됩니다. 장막이란 본래 하나님이 거하시는 지성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지만 새 세계에는 하나님의 거처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에스겔 37장 28절). 새 예루살렘 성이 곧 하나님의 거처이며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이 인간과 더불어 현존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실제로 이 땅에 실현되리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하나님

하나님 나라가 이룩되면 성도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그 공의로운 통치 아래서 살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기까지 성도들이 참고 견뎌야 하는 고난의 순간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담대히 악에 맞서며 의로운 신앙을 지킨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된 거민의 권리를 누립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과 맞서 싸우는 투쟁의 전 과정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고난당하는 성도들과 함께하셨기에 성도들이 겪은 어려움을 낱낱이 헤아리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모든 고난의 파도를 헤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성도들의 모든 아픔을 충분히 위로하실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는 하나님이 성도들의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4절)시리라고 증거합니다. 이것은 모든 고난의 상처들을 치유하시는 행위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마음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베풀며 모든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시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사야 61장 1-2절, 누가복음 4장 18절). 이것으로써 성도들이 죄악 된 역사 가운데 살면서 당했던 모든 고난들은 완전히 상쇄됩니다. 참된 위로는 슬픔의 근본 원인을 제거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지닌 아픈 상처들을 일일이 어루만지고 싸매 주십니다. 이제 고난에 찬 옛 역사는 지나갔습니다.

다시 슬픔이 없는 곳

하나님께서 직접 공의로 통치하시는 이상 하나님 나라에는 사망이나 애통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 이미 모든 슬픔과 고통의 근원인 죄악을 소멸시켜 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성도가 누릴 삶은 완전한 평화와 안식뿐입니다. 하나님은 악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 이기는 자에게는 갖가지 상급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요한계시록 2장 7절, 11절, 17절, 26절). 하나님의 말씀은 조금도 거짓됨이 없이 진실하기에 이 언약은 심판이 종결되었을 때 실제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승리한 성도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의 왕이 되어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곧 모든 복과 권세의 임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통치자로 임재하심에 따라 이 세상에는 다시는 파괴되지 않을 절대적인 평화가 깃들이게 됩니다. 죄악일 범람하고 부정과 부패가 판을 치던 이 세상이 다시는 슬픔이 없는 영원한 낙원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새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슬픔이 없는 세상을 속히 이루기 위해, 그리고 이 신천신지의 새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죄악의 권세와 맞서는 오늘의 싸움을 잠시도 쉬지 말아야 합니다.

이기는 자의 복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함, 고린도후서 5장 17절,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5장 38절 말씀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거듭난 성도들이 거할 곳은 죄로 오염된 이 땅과 하늘이 아닙니다. 거듭난 성도들의 처소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1-4절). 그곳은 눈물이 없고, 사망과 애통이 없으며, 질병도 없는 곳입니다. 한마디로 바른 질서가 있고 평강이 있는 곳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이를 예언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이사야 65장 25절)”고 했습니다. 환난을 이겨내고 끝까지 인내하며 승리한 성도, 곧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거듭났음을 확인하며, 믿음을 굳게 지킨 성도에게 이 하나님 나라는 주어집니다. 마지막 때가 다가올수록 사단의 공세는 더욱 거세집니다. 그럴수록 성도들은 변하지 않는 믿음으로 승리하여 약속된 기업을 차지해야 할 것입니다.

생명수를 값없이 먹게 됩니다, 6절 말씀에,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알파”는 헬라어의 첫 글자요, “오메가”는 마지막 글자입니다. 즉 하나님은 모든 것의 처음이요 마지막이십니다. 여기서 처음은 단순히 어떤 것이 그 순서의 제일 처음인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것의 근원이란 의미에서 처음을 뜻합니다. 마찬가지로 마지막은 순서의 제일 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것의 종국과 완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에게서 만물이 시작되고 생명을 얻으며 존재의 가치를 얻게 됩니다(로마서 11장 36절). 그런데 바로 그가 그에게서 나오는 생명수 샘물로 승리한 성도들에게 값없이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영생에 대한 확증을 나타내 줄 뿐만 아니라 갈급해 하는 영혼들의 갈망을 해소시켜 주시겠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승리한 성도들만이 영생의 복을 누리며 영혼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7절 말씀에, 하나님께서는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기는 자”라는 말은 본서 2, 3장에 기록되어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 어김없이 나오는 어구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기는 자는 내 아들이 되리라”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 어느 것보다도 가장 크고 복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가 그의 아들이 된다고 하는 것, 그것은 우리의 신분이 어떻게 변화되리라는 것을 능히 짐작하게 합니다. 

전에는 하나님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버지의 아들로서 주와 친밀한 교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또 가장 영광스러운 존재로 취급받게 된 것입니다(고린도후서 3장 18절). 뿐만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후사로서 그의 유업을 이을 자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새 하늘과 새 땅, 만물이 다 우리의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를 우리는 인식해야 합니다. 그것은 모든 환난과 유혹을 이겨내고 승리한 자만이 이러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다는 것은 가장 영광스럽고 복된 일입니다.

실패한 자의 불행

8절 말씀에, 하나님의 복에 참여하지 못하고 오히려 저주의 대상이 되는 인생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그리스도로 인해 고난받기보다는 세상의 평안을 사랑한 자입니다. 믿지 아니한 자는 그리스도의 초청을 거부한 자입니다. 살인자는 성도들을 박해한 자요, 음행하는 자들은 부도덕한 자입니다. 우상 숭배자는 거짓 신을 숭배한 자요, 거짓말하는 자는 그 속에 진실이 없는 자입니다. 이들은 모두 세상에서는 성공한 것처럼 보였어도 실제로는 실패한 불행한 인생들입니다. 이들을 맞는 것은 둘째 사망입니다. 

인생에게 가장 큰 고통은 죽음의 고통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죽음을 맞아야 합니다. 그것도 소망이 전혀 없는 영원한 죽음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잠시 잠간의 고통과 환난을 인내하지 못하며 세상에 속해 사는 자는 이러한 저주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천국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끝까지 싸워 이기는 자들만이 천국에서 만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오직 기쁨만이 있는 곳입니다. 천국은 슬픔을 찾아볼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에게는 고통과 슬픔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천국의 기쁨이 영원하다면 지옥은 영원한 고통과 슬픔만 있는 곳입니다. 천국은 영적 싸움에서 이긴 자들이 만나는 곳입니다. 지옥은 영적 싸움에서 패배한 자들이 만나는 곳입니다. 

이기는 자들에게 무엇이 약속됩니까? 

1. 눈물도, 사망도, 애통함도 아픈 것도 없다. (4절) 

2. 천국을 유업으로 얻는다 (7절) 

3.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약속을 받는다 (7절) 

지옥에서 만난 자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1. 두려워하는 자들, 

2. 믿지 아니한 자들, 

3. 흉악한 자들, 

4. 살인자들, 

5. 음행하는 자들, 

6. 점술가들, 

7. 우상숭배자들, 

8. 거짓말하는 자들, 

끝까지 잘 싸워 이기는 자들이 되어서 천국에서 만나는 자들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 12절 말씀에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끝까지 잘 싸워 이기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끼리 싸우는 것도 얼마나 힘이 듭니까? 소리소리 질러야 하고 소리만 지른다고 이깁니까? 힘도 세야 합니다. 요즈음 인간들 싸움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 하는 말이 하루 종일 아이들과 싸우다 보면 진이 다 빠진다고 합니다. 사람과의 싸움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영적 싸움은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사람들하고 싸움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싸우면서 영적인 싸움에는 쉽게 포기해 버리고 맙니다. 사람들 싸움에는 지는 자가 이긴 자라는 말이 있지만 영적 싸움에서는 절대로 물러선 자가 이긴 자가 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이겨야만 합니다. 영적 싸움은 내가 지옥 가느냐! 천국 가느냐! 내 영혼이 죽고 사는 중대한 문제가 걸려있기 대문에 절대로 양보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영적 싸움을 싸울 때 참으로 고통스럽고 슬픕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 같다. 하나님이 모른 척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지켜주고 계시고 바라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김을 당할 때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다윗을 욕하고 다윗이 있는 곳을 사울 왕에게 고자질하여 죽게 만들고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골리앗을 무너뜨릴 때 함께 계셨던 하나님은 온데간데 없고 다윗을 죽이려는 적들만 우글거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다윗을 지켜주고 계셨습니다. 다윗은 이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었는데 바로 이것이 영적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은 자의 모습입니다. 

시편13장 말씀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면서 지은 시인데 그 내용을 보면 당시의 다윗의 심정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가지 하오며 내 원구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때까지 하리이까, (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4)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5)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6)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은덕을 배푸심이로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을 앞두고 얼마나 우셨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실 때 주님은 울면서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시다면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주옵소서!”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런 대답이 없으셨습니다. 빌라도 법정에서 수모를 당하고 채찍으로 맞으실 때도 하나님은 모른 체 하고 계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보시고도 하나님은 모른 체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르짖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오전 9시에 십자가에 예수님이 매달리셨는데 낮 12시가 되니까 온 천지가 어두워지기 시작하더니 오후3시까지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까지 어두워졌는데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외면입니다. 그러나 그 외면은 못 본채 하는 외면이 아니라 그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 독생자 예수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영적 싸움을 싸울 때 하나님이 나하고는 상관없는 하나님 같을 때 있습니까? 내가 고통의 눈물을 흘릴 때 못 본 척 하고 계신 하나님처럼 느껴본 적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 싸움을 할 때………. 우리가 고통의 눈물을 흘릴 때 못 본 척 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싸워 이기는 자가 되는 기쁨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서 잠간 모른 척하고 있을 뿐이지 결코 끝까지 우리를 내버려두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영적 싸움을 천국 갈 때까지 끓임 없이 해야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없는 것 같다 할지라도 우리는 싸움을 포기하지 말고 싸워서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심령 천국도 가만히 있으면 이루어집니까? 끓임 없이 나 자신과 싸워야만 심령 천국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태복음 11장 12절에서,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영적 싸움에서 싸워 이긴 자들이 만나는 곳입니다. 이 영적 싸움에서 지면 우리는 8절 말씀의 8가지 부류의 사람들 속에 거하는 자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0-12절 말씀에,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두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참 귀하고 용기를 주는 찬송입니다.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앞길에 장애를 두려워말아라, 저 마귀 흉계 모두 깨뜨리고 끝까지 잘 싸워 이겨라, 앞으로 앞으로 천성을 향해 나가서 천성 문만 바라고 나가세, 모든 천사 너희를 영접하러 문 앞에 기다려 서있네. 

우리가 끝까지 잘 싸워 이기는 자가 되어서 천국에 들어갈 때, 하나님은 그 동안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다시는 고통이 없고 애통이 없고 아픔이 없는 영광의 복을 주실 것입니다. 이 복을 우리 모두 천국에 만나 받아 누리는 자들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가 영적 싸움에 이기는 자들이 되어야합니다. 운동 경기에도 지는 자에게는 아무런 상금이 없습니다. 

그 동안 19회에 걸쳐 살펴 본 천국에 대한 말씀을 한 마디로 축소시켜서 말씀드리면 영적 싸움에서 잘 싸워 이기는 자가 되어서 천국을 소유하자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4장 7절 말씀에,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영적 싸움을 싸우면 승리는 우리 것으로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왜 싸우기도 전에 두려워하고 포기해 버립니까? 기도하는 것 왜 해보지도 않고 포기해 버립니까? 전도하는 것 왜 해보지도 않고 포기합니까? 성경을 보는 것 왜 읽어보지도 않고 포기합니까? 교회에 열심히 나오는 것 왜 싸워보지도 않고 포기하고 주저앉아 버립니까? 교회에 충성하는 것 왜 시도도 해보지 않고 미리 포기부터 합니까?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닙니다. 어둠의 세력 사단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내가 지고 있다는 것은 곧 사단에게 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사탄에게 이기는 자들만이 천국에서 만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모두 영적 싸움에서 이기는 자들이 되어서 천국에서 만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무리

오늘 우리가 살고 시대를 가리켜 어떤 학자는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말했습니다.그리고 오늘 우리 사회에는 이처럼 내일을 알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한 불안증상들이 전염병처럼 만연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일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미래가 어떠할는지 알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그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소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이 세상은 썩어져 가는 것들로 가득합니다. 죽음과 눈물과 애통과 아픔이 가득찬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장차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다시는 썩지 않을 영광스러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을 믿습니다. 거기에는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하나도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영광스러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누리며 살 것을 믿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는 바로 그런 영광스러운 새 하늘과 새 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창세기에서 시작해서 요한계시록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첫머리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이야기로 시작을 해서,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셨던 하늘과 땅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이루어 가시는 구원역사의 목표가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과 하늘은 다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때 사단과 더불어 모든 죄악된 세력들과 불신앙의 세력들은 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불 못에 던져지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더럽고 추한 것이 다 사라진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원토록 거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고 있던 사도 요한이 계속해서 또 다른 한가지를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배경으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광경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새 예루살렘은 마치 혼인예식을 앞두고 신랑을 위해서 단장한 신부와 같이 아름답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기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이 새 예루살렘 성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예. 이 새 예루살렘 성은 그리스도의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인 주님의 교회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표현들입니다(요한계시록 21:9).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삶의 영적 공동체인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그 피 위에 탄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교회를 자기의 몸으로 삼아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어 나가십니다.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태초에 하와가 아담으로부터 탄생되어 아담의 배필이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 또는 아내라고 불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새 예루살렘으로 묘사되고 있는 까닭은 교회는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처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살펴보는 사도 요한이 본 광경에서는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끝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진 가운데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아름답게 단장한 모습으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으로서 요한계시록의 장엄한 대단원의 막이 내려지고 있는데, 이러한 새 예루살렘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그것은 교회가 이 땅, 즉 세상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세워진 하늘로부터 유래한 거룩한 영적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진 가운데 새 예루살렘 성이 하늘로부터 내려옴으로서 성경의 마지막 계시가 마감된다는 것은 주님의 몸된 교회가 완성되는 그 날에 하나님이 운영하시는 구원역사는 완전히 성취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인류역사는 언젠가 끝나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과 하늘은 사라지고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새롭게 변화시키신 영광스러운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궁극적인 완성이 언제 이루어지는가 할 때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새 예루살렘인 교회가 아름답게 단장되어 완성되는 그 날에 비로소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을 요한계시록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주님의 교회는 오늘도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위하여 정결히 몸을 보전하며 그리스도와의 혼인 잔칫날을 기다리며 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심으로 음녀와 같은 이 세상이 무너져 멸망당하는 그때에 때로는 세상에 의하여 고난을 받으며 핍박을 받기도 했던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 정결하면서도 찬란한 모습을 온 우주가운데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모든 국가들과 인간들이 자랑하던 모든 조직체와 제도들이 다 사라지고 없는 가운데 영원히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공으로 남아있게 될 유일한 영적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역사는 바로 이 교회의 완성이라고 하는 목표 한가지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살아가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말씀은 목사님들의 설교와 참고자료를 인용하여 올린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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