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하늘과 새 땅(3),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생명나무의 열매를 함께 먹읍시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요한계시록 22장 1-5

22장 1-5절 말씀, “(1) 또 그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치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들어가는 말 

세 번째 : 생명나무의 열매를 함께 먹읍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르는 “천국”은 실제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새 예루살렘”을 일컫는 영원한 도시입니다 (요한계시록 21:2). 이 영원한 도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요한계시록 21:3-5)

이 새로운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원한 집이 될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요한계시록 21:27) 모든 사람들은 죽음에서 육체적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경험할 것이며 예수님의 보좌 앞에 세워질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11-13) 비록 예수님께서는 처음에는 구세주로 오셨지만 이제부터는 만왕의 왕 재판관으로서 보좌에 앉아 계실 것입니다. 또한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은 불의 연못에 던져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0:14-15)

우리 모두가 죽은 이후에 천국에 가서 친척들을 모두 만난다는 것은 성경에 근거한 생각이 전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는 자만이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6). 요한계시록 7:9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절한 무리들은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22장 말씀에서 거룩한 성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Alan F. Johnson은 21장 말씀에서 묘사하고 있는 거룩한 성은 성의 외부적 모습에 중심을 주었지만, 22장 말씀은 내부 생활을 강조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묘사하고 있는 거룩한 성의 모습은 하나는 이 성의 보좌로부터 수정과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강 주변에 생명나무가 있어서 달마다 새로운 열매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본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 강 좌우에도 많은 나무들이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강물이 구원과 생명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특별히 이 나무들은 모두 열매를 맺는 나무들로서 달마다 새로운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이 나무들의 잎사귀조차 약재료로 쓰였습니다. 여기 나무가 맺는 열매와 약재료가 되는 잎사귀는 생명의 충만함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우리는 이 생명의 근원을 생명수 강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생명수 강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생명의 원천임을 말해 줍니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생명으로 충만한 곳입니다. 이 생명으로 인하여 이 성에는 다시 저주가 없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생명 되신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한 이 성에서의 삶의 모습을 이와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22:3-5)” 이 성에는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성에 사는 자들은 세상에서처럼 믿음에 대하여 조금도 의혹을 갖지 않을 것이다. 여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들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대하여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했었지만 이제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것처럼 확실하게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취심이라” 이 말씀을 우리가 문자적으로 이해 할 수도 있지만 또한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대한 상징으로 이해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다시 밤이 없겠고”라는 말은 이 성에는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영광으로 충만해 있기 때문에 영적 침체와 같은 어둠, 불신앙과 같은 어둠이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이처럼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영광의 빛으로 충만해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 성도들은 신앙에 어떤 도전도 받지 않고 영원토록 왕 노릇 하게 될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으므로 저주를 받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 먹지 못하게 하나님께서 감추어 버렸습니다. 생명나무를 먹지 못한 인류에게는 죽음이 찾아올 수밖에 없었는데 그 생명나무가 지금 천국에 다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는 영원한 성 새 예루살렘성의 정경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예루살렘 성 한가운데를 흐르는 생명수의 강과 또 그 주위에 심겨 있는 생명나무, 그리고 그 나무들에 달려 있는 열매들을 보았습니다. 이 정경은 장차 구원받은 성도들이 들어가 살게 될 주의 나라가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한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풍경은 또한 지금 현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상징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줄거리

1절 말씀의 그는 21장 말씀에서 요한에게 새 예루살렘을 보여준 천사입니다. 그 천사가 요한에게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흘렀습니다.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는데 달마다 그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었습니다.

생명수의 강과 생명나무의 열매와 치료를 위한 잎사귀는 무엇을 말합니까? 3절 말씀에서 보듯이 새 예루살렘에게는 다시 저주가 없을 것을 말합니다. 저주는 죄의 댓가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형벌을 말합니다. 새 예루살렘에 참여한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 죄는 지난 일이 되었습니다. 새 예루살렘에서는 다시는 죄와 저주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그들 가운데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는 오직 생명만이 흘러나옵니다. 그의 종들은 하나님을 높이며 예배하되, 그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게 됩니다. 

또 다시 밤이 없어지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가 없는데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시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관계 회복의 영광스러움을 말합니다. 우리가 새 예루살렘으로서 구원의 완성에 이를 때 이처럼 생명과 빛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또 그런 가운데 우리는 세세토록 왕 노릇 합니다. 왕 노릇은 인간 본연의 모습의 회복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처음 창조된 사람은 왕적인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만유를 다스리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모습을 회복한 것이 새 하늘 새 땅에서 왕 노릇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 노릇 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를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될 때 새 예루살렘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중요한 사실을 한 가지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생명으로 충만한 상태, 풍성한 생명의 상태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 성읍의 거리 가운데로 생명수의 강이 흐른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어린 양으로부터 공급될 풍성한 생명을 말합니다. 이는 첫 창조의 완성이자, 구약과 신약의 예언의 성취로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첫 창조 때에도 에덴동산에서는 강이 흘러나왔습니다. 구원의 완성을 예언하는 구약성경 에스겔 47장에서는 성전에서 강물이 흘러 나왔습니다. 그 강물은 생명으로 풍성하게 하고, 죽어 있는 모든 것, 심지어 사해까지도 살려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에서 생수 곧 예수님을 믿는 자의 속에서 솟아나오는 영생의 샘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서는 자기를 믿는 자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약속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아버지께로 가신 후에,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님은 먼저 오순절에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오셨고, 다음으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증거할 때, 그 복음을 듣는 자들 가운데 임하셨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시는 일을 하시고, 그들 가운데 또한 거하시면서 그들이 땅 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으로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이는 마치 성전에서 흘러나온 강물이 온 세상을 향해 흘러가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거하시며 온 세상을 향해 흘러가십니다. 성령께서 생명의 강물이 되심으로 흘러가는 곳마다, 그곳에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워져 왔습니다.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는 믿는 자들이 전하는 예수님의 복음증거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의 생명의 역사, 성령님이 마치 생명수의 강으로 흐른 역사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본문 말씀에서 ‘수정 같이 맑은’이라고 할 때의 ‘맑은’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람프로스, lamprov”)인데, 이 단어는 19:8절 말씀에서 어린 양의 신부가 입도록 허락받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의 ‘빛나고’와 같은 단어입니다. 또 본문 16절 말씀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하실 때, ‘광명한’이란 단어도 같은 단어입니다. 이는 생명수의 강이 단지 우리가 여기서 경험할 수 있는 강물의 어떤 ‘맑은’ 속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어린 양 안에 있는 영원하고 참된 생명을 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생명이 지금은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영생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영생을 가진 자는 여기서부터 삶의 차원이 달라집니다. 이 생명이 없는 자들인 바벨론의 화려함, 거대함, 그 이면의 음란하고 추악함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이 됩니다. 크고 작고와 겉모습에 관계없는 위대함과 고결함과 자유함과 영광스러움을 지닌 삶이 되게 만듭니다. 맨발 천사 최춘선 할아버지의 8복 영상에서 그런 것을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붙드는 삶을 살 때, 그렇게 믿는 우리 안에는 성령이 충만해지고 생수의 강이 흐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믿는 자로서의 자신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7-11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에게 항상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넘쳐도 과하지 않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영적인 생명입니다. 영적인 생명은 우리를 강건하게 하는 생명입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게 하는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예수님을 믿을 때 믿는 자의 속에서 솟아나는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예수님을 믿는 자의 배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입니다. 이 생명은 믿는 자 그 자신만을 살게 하지 않습니다. 그가 만나고 복음을 전해주는 자, 사랑으로 섬기는 자에게도 강물처럼 흐르며 살아나게 하는 생명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결국 생명의 역사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을 인생을 살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첫째 부활이 있고 새 예루살렘이 되는 참된 소망의 인생을 살게 하는 역사입니다. 이 놀라운 성령의 역사, 생명의 역사가 무엇으로 일어납니까? 우리가 말씀을 듣고 지킬 때 일어납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 자신에게 일어납니다. 우리가 다른 영혼들에게 말씀을 전해주고, 그들을 위해 상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그들에게도 일어나게 됩니다. 결국 성령의 역사는 생명의 역사이고, 말씀과 기도의 역사입니다. 이런 성령의 역사와 생명의 역사가, 우리의 말씀의 역사와 기도의 역사를 통해 우리 자신과 모두에게 풍성하게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생명수의 강

사도 요한은 우선 생명수의 강에 대해 묘사합니다. 그 강은, 수정같이 맑습니다. “또 그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1절). 모든 물이 다 맑은 것은 아닙니다. 또한 모든 물이 단번에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더욱이 팔레스티나 비롯한 근동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수정같이 맑은 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거의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적 같은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나라에서는 모든 불가능한 일들이 가능하듯이 믿는 자들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마가복음 9장 23절). 비록 세상이 혼탁하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은 이웃에게 생명력을 공급해 주어야 할 사명이 있으며, 또 이 일은 비록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나 가능한 것입니다.

보좌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1절). 사도 요한은 생명수의 강이 주의 보좌에서부터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에스겔은 환상 가운데에서 성전으로부터 생수가 솟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에스겔 47장). 또 시편 저자는 “한 시내가 있어 나누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시편 46편 4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찬양하는 고백입니다. 영원한 성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지배하에 있습니다. 이 성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도성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미치는 영역은 모두 하나님의 나라요 새 예루살렘 성입니다.

길 가운데로 흐릅니다.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2절). 생명수의 샘은 새 예루살렘 성의 한가운데를 관통하여 흘렀습니다. 이 때문에 이 샘은 예루살렘 성안의 모든 식물을 치료하게 하는 근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총, 모든 자연의 혜택, 그리고 우주 만물의 원래적인 아름다움을 모든 사람이 꼭 같이 나눌 수 있는 세상,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어떤 외적인 조건도 이런 하나님의 은총을 가로챌 수는 없습니다. 만인이 공유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누려야 할 땅과 물과 대기가 소수의 특권층에 의해 독점되고 오염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생명나무

사도 요한은 예루살렘 성 가운데를 지나는 생명수의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심어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생명나무는, 과실을 달마다 맺습니다. 사도 요한은 생명나무가 열두 가지 과실을 달마다 맺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풍족한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생명을 끊임없이 공급하는 처소인 것입니다. 성도는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생명력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사치하고 타락하며 오염된 세상에서 성도로서 성결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런 생명력을 가져야 합니다. 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신선한 생명을 날마다 우리의 사회에 공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만국을 치료합니다.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2절). 하나님의 나라는 치료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많은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또 죽은 자들을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외형적인 치료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사탄의 세력에 눌려 있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처럼 만물을 치료하게 한다는 것은 상한 심령을 위로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죄인을 구원시키는 역사를 말합니다. 이러한 역사는 나아가서 생명의 기쁨을 크게 증대시키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믿음에 연약한 믿음의 구성원들에게 단순히 죄를 회개하여 주님의 복음을 듣는 것에만 머무르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복음을 들은 자가 더욱 성장하여 복음 가운데서 큰 생명의 기쁨을 누리며, 또 이 기쁨을 서로 나눌 수 있도록 양육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새 예루살렘 성에 흐르는 생명수의 강과 생명나무를 막연히 죽음과 질병과 고통이 없는 세상, 그저 좋은 세상 정도로만 상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성도에게 본문 말씀은 그저 상상 속의 세상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성은 동화책 속의 그림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지금 우리의 현실 속에 있으며, 또 이런 세상이 이 땅 위에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각박하고 혼탁한 세상을 사는 우리 성도들이 맡은 사명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큰 위안과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서 선한 싸움에 분투하고 승리를 얻은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기에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성도의 소망은 더욱 크고 절실합니다. 본문 말씀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여러 가지 증거들 중에서도 실제 정황에 대해 언급하는 말씀입니다. 이미 많은 성도들이 본문 말씀에 익숙하며 은혜와 위로와 소망을 얻었습니다. 새 예루살렘 도성에는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이 친히 얼굴을 대하고 그 종들을 바라보시기에 영원히 밤이 없다는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서 성도들이 누릴 삶을 깊이 생각 해 보아야 합니다.

사라진 저주

저주는 죄악과 매우 밀접한 연관성을 지닙니다. 하나님께 복 받은 만물의 영장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저주받은 존재로 전락하게 된 것은 죄악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른 인간의 죄악은 복을 저주로 바꿔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를 저주로 징벌하셨습니다. 즉 하와는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창세기 3장 16절) 남편에게 종속되어 평생 지배를 받아야 하고, 아담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흙으로 돌아갈”(창세기 3장 19절)것을 명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우주를 움직이는 능력이기에 이 저주의 말씀은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인간의 삶은 원초적인 고통 위에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존재가 겪어야 하는 모든 고난 속에서 영위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저주의 질곡 속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새로운 소망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죄악의 대속물로 주어 인간이 죄악을 씻어버림으로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거할 저주 없는 처소, 새 예루살렘 성을 세우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스가랴 14장 11절). 본문 말씀은 이러한 약속을 통해서 실제로 이룩된 새 예루살렘 성을 예시하는 말씀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모든 죄악은 도말되고 오직 의인들만이 이 거룩한 도성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므로 죄악이 사라진 이곳에 저주가 있을 리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저주의 빌미가 될 만한 물건조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영원한 복만이 넘칠 뿐입니다. 새 예루살렘 성은 저주가 사라진 안식의 처소입니다.

백성들 가운데 임재하는 어린양의 보좌

죄악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격리시켰습니다. 어떤 생명체이든지 존재 근거와 유리된 것은 생존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아 하나님과 교통하는 관계 속에서 생명의 본질을 부여받은 인간에게 하나님과 유리되는 일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없는 죄악 된 피조물로 살아야 했던 오랜 역사 동안 인간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룩된 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린양의 보좌가 항상 백성들 가운데 임재합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언제나 주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할 수 있다는 것은 피조물인 인간에게 최고의 영광입니다. 얼굴을 대면하는 것은 곧 깊고 완전한 교제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하나님은 자신이 친구로 여길 만한 믿음 있는 사람에게만 얼굴을 나타내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본 복 있는 자 가운데 하나입니다(민수기 12장 8절). 하지만 그도 하나님의 실체를 보지는 못했다고 전합니다. 환상 중에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던 요한도 하나님의 위용에 대해서는 보석처럼 빛나는 영광의 광채만을 언급했습니다(요한계시록 4장 3절). 그러나 이제 새 예루살렘 성의 거민으로 영원한 삶을 사는 자들은 언제라도 하나님을 만나며 친밀하게 교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양의 보좌가 백성들 가운데 있어 하나님과 백성들이 더불어 사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에는 어떠한 절망이나 고난이 있을 수 없으며 영원히 찬란한 아침만이 계속됩니다.

세세토록 왕 노릇할 성도들

하나님은 독선적인 이념으로 백성들을 억압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진리 안에서 모든 백성을 자유하게 할 수 있는 권능을 지니고 계십니다.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인간은 무한히 자유롭습니다.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고 압제하며 비인간화시키는 것은 죄악의 질곡입니다. 아직 이 세상에 죄가 없었을 때 인간은 완전한 자유와 평화를 누렸습니다(창세기 2장 25절).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룩되는 그 날, 인간은 이 자유와 평화를 되찾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처음에 부여해 주셨던 만물의 통치권도 되찾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 맞은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라는 본문 말씀의 증거는 이를 확증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실로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권위를 가지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왕 노릇하는 성도들은 모두 참인간화의 실현을 위해 정의와 진리를 외치며 온갖 불의와 투쟁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억압받는 의인들이 주인 되는 세상입니다.

인간의 죽음은 곧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그 저주가 천국에는 없는 것입니다. 생명수 강가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며 영원히 사는 복된 만남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생명나무가 어디에 있습니까? 생명수 강 좌우에 있습니다. 이 생명수 강이 어디서 시작되고 있습니까? 어린양 보좌로 부터 강물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즉 이것은 오직 영생은 예수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 말씀,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 되심을 믿으십니까? 이 믿음을 가진 자 만이 천국의 생명의 강가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을 누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덴동산 가운데는 두 나무가 있었습니다. 창세기 2장 9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맡기면서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너 마음대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 16-17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따먹고 난 후 하나님은 생명나무를 천사들과 화염검을 두어서 생명나무를 먹지 못하도록 지켰습니다. 창세기 3장 22절,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에덴동산에서 사라진 생명나무가 지금 천국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생명나무가 어떤 나무입니까? 사람이 영생할 수 있는 나무입니다. 천국은 인간이 영원히 영생할 수 있는 곳입니다. 죽음이 없고 이별이 없고 다시는 저주가 없는 곳입니다. 생명나무의 12가지 열매가 어떤 열매일까요? 12가지 열매는 상징적입니다.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 나무에서 맺어진 열매는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요한계시록 2장 7절 말씀,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교회였고 복음을 전하는데 큰 일을 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에베소 교회는 타락하기 시작하였고, 결국은 예수의 사랑을 모두 잃어버렸고 죄를 범하고도 회개하지 않는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4-5절,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첫 사랑을 되찾고 회개하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해주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에베소 교회는 지키지 못하고 역사 속에서 사라진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주님은 약속하고 계십니다. 오직 예수를 사랑하고 회개하는 신앙을 가지면 우리를 천국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게 하여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 강가에서 만나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복을 함께 누리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노아가 홍수 후에 까마귀를 내어보냈을 때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비둘기를 내어보냈을 때 비둘기는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입에 물고 돌아왔습니다. 까마귀는 더러운 것을 좋아하는 새이지만 비둘기는 절대로 더러운 것을 먹지 않는 정결한 짐승입니다. 천국에서 생명나무를 먹기를 원하는 자는 절대로 세상 속에 널려있는 더러운 것들을 먹지 않습니다. 까마귀 같은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북 유럽의 모피로 유명한 하얀 담비라는 짐승이 있습니다. 이것은 족제비만한 작은 짐승인데 하얀 담비라는 짐승은 자기 털을 절대로 더럽히지 않으려는 강한 본능이 있습니다. 사냥꾼들은 하얀 담비를 잡기 위해서 하얀 담비의 굴에 안팎으로 검정 칠을 한 후 사냥개들과 함께 하얀 담비를 쫓습니다. 이때 하얀 담비는 결사적으로 굴까지 도망하여 굴속으로 들어가려다가 굴에 검정이 묻어 있는 것을 발견하면 잡혀서 죽을지언정 굴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주고 있는 짐승입니다. 천국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기 위해서 우리는 세상 것을 너무 좋아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자들에게 어떤 복이 있습니까? 

1. 천사들이 우리를 섬길 것입니다. 

2. 예수님 얼굴을 직접 볼 것이고 예수의 이름이 우리의 이마에 있을 것입니다. 

3. 영원토록 왕 노릇 할 것입니다. 

이런 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물론 땅에서 잘되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복 받고 잘 살자는데도 목적이 있지만 최종 궁극적인 목적은 지옥 가지 않고 천국 가는 데 있습니다. 천국이 없다면 예수 믿을 필요도 없고 전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분명히 있습니다. 요한복음 14:1-3절 말씀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순례자의 기본정신은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잠깐 지나가는 나그네일 뿐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집은 저 하늘에 있습니다. 거기는 슬픔도 눈물도 근심도 걱정도 어두움도 배고픔도 골치 아픔도 없는 참으로 좋은 곳입니다. 천국이 있다는 것을 몇 가지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인간의 본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전도서 3:11절 말씀에,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동물은 갖지 않은 영혼이 있고, 영생을 사모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내세를 부정하는 사람도 지옥 가라면 화를 냅니다. 그건 사람은 본능적으로 천국을 사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리 새끼와 병아리를 호숫가에 갖다 놓으면 병아리는 물에 관심이 없는데 오리 새끼는 물을 보자마자 호수가로 들어가 헤엄을 칩니다. 오리는 태어날 때부터 헤엄치는 본능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둘째 자연계를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겨울이 되면 모든 말라 죽습니다. 그러나 봄이 되면 거기서 다시 싹이 나고 잎이 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콩이나 옥수수나 곡식을 봄에 심으면 땅속에서 죽어 없어집니다. 그러나 다시 살아나 수 십 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5:35-36절 말씀에,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라고 했습니다.

셋째 예수님과 사도들의 증언으로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요한복음 14:1-3절 말씀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비겁하게 도망갔던 사람인데 밧모섬에 귀양 가서 거기서 천국의 놀라운 광경을 보고 기록한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체포하고 죽이던 그런 비겁한 사람인데 예수 그리스도를를 진심으로 만나고 영접한 후 죽기까지 천국을 증거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고린도후서 5:1절 말씀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천국의 소망이 없다면 우리는 가장 불쌍한 자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분명히 있습니다. 천국은 우리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진짜 죽을 때가 오면 그때에는 죽음을 편안하게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이 이 세상에서 다음 세상으로 이사 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유명한 교부 터툴리안은 “우리 크리스천은 이 땅에서는 순례자이며 우리의 확고한 지위는 내 본향 천국에 있다”고 했고 칼빈은 “천국이 우리의 궁극적 소망이므로 우리 크리스천은 이 세상 어디서 살든지 유랑의 장소이다”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긴 천국 여행을 이제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을 떠나시면서 우리에게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3절,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천국은 절대로 허상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죽어서 실제적으로 들어가서 살아야 할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중에는 천국과 지옥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 실제적으로 있지 않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생각이고 불쌍하게 신앙생활을 하고있는 자들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도 불쌍한 인생이지만, 우리가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면서 천국을 가지 못한다면 세상에서 이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천국에 가는 길을 걷고 있는 자들입니다. 아직 천국에 도착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상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거쳐야 할 관문입니다. 보이는 천국을 보기 전에 우리는 이곳에서 심령 천국을 소유하면서 천국의 소중함과 기쁨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모든 준비를 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헛되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겨우 예수 믿고 턱걸이 식으로 구원받는 부끄러운 구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왕이면 천국에 가서 생명수 강가에서 생명나무를 먹으면서 예수님과 더불어 왕 노릇 하면서 살아가는 복된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아름답게 만들어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아름다운 천국에 우리 모두 들어가서 영원토록 마음껏 즐기며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정금으로 된 천국 성,……… 정금으로 된 천국 길, ………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찬 천국에서 우리는 반드시 만나야 합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우리는 천국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천국에서 만나 영원히 함께 사는 복된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무리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성도 여러분, 그리고 불로거 여러분 여러분은 구원의 확신이 분명히 있으십니까? 여러가지 이유로 종교가 필요없다고 생각하지 않는 분들, 예수님을 믿지 않거나 교회에 안다니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만일 당신이 애써 무관심한척 외면하고 있었던 모든 것들이 사실이라면, 정말 우리의 조상이 원숭이가 아니고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고, 성경의 모든 기록이 진리이고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죄를 십자가의 보혈로 사해주셨고 부활하셨고 지금도 살아계시다면.. 죽으면 정말 하나님의 심판과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만일 오늘 저녁 하나님이 여러분의 영혼을 부르신다면.. 하나님의 품에 안길 확신이 있으십니까? 

오늘_하나님이_부르신다면 여러가지 이유로 종교가 필요없다고 생각하지 않는 분들, 예수님을 믿지 않거나 교회에 안다니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이 애써 무관심한척 외면하고 있었던 모든 것들이 사실이라면, 정말 우리의 조상이 원숭이가 아니고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고, 성경의 모든 기록이 진리이고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죄를 십자가의 보혈로 사해주셨고 부활하셨고 지금도 살아계시다면.. 죽으면 정말 하나님의 심판과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만일 오늘 저녁 하나님이 여러분의 영혼을 부르신다면.. 하나님의 품에 안길 확신이 있으십니까? 구원의 확신이 있으십니까?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엄마 배안에 속에 있는 쌍둥이 여동생이 오빠에게 말합니다. “오빠, 난 말이지, 이곳과는 다른 세상이 있다고 생각해.” 그러자 오빠는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아. 여기가 전부야. 이렇게 평안하고 먹을 것이 풍부한데 또 어떤 세상이 있다는 거야?”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여동생이 말했습니다. “오빠, 말해 줄것이 또 있어. 오빠는 안 믿겠지만 말이야, 난 우리를 사랑하고 늘 보호해주시는 어떤 존재가 있다고 생각해.” 쌍둥이 오빠는 무척 화가 났습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난 그런 존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오빠의 기세에 눌린 동생은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가끔 무언가 꽉 조여오는 것 같지 않아? 아주 기분이 나쁘고 어떤 때는 아프기도 해.” “나도 그래. 그런데 그게 어때서?” “음 내 생각엔 이 꽉 조여오는 게 다른 곳, 그러니까 여기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어떤 곳으로 갈 준비를 하라는 표시인 것 같아. 오빠는 떨리지 않아?” 바보 같은 소리에 질려버린 오빠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엄마 배속이 평온하고 안락하고 행복하지만 그곳은 단지 짧은 시간 동안 머무르는 곳이며, 때가 되면 전혀 다른 세상으로 나와야 합니다. 태어나는 것은 아이 입장에서 보면 익숙한 세상을 떠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상으로 나가는 두려움입니다. 때가 되어 탄생의 순간이 되면, 아기는 자신이 강하고 부드러운 팔에 안겨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보아왔던 침침한 흑백의 세상이 아닌 눈부신 태양과 믿을 수 없을 만큼 찬란한 총천연색의 세상이, 그리고 따뜻한 엄마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엄마의 자궁 속에 들어가 있는 아이에게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아이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죽음과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날 날이 옵니다. 그때가 되면 정들었던 가족들과 사랑하던 사람들, 익숙한 것들과 결별하며 전혀 모르는 미지의 세계로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너무나 두려워 준비도 생각도 별로 안하고 삽니다. 우리가 죽음이라는 터널을 통과하면 우리는 다시 한번 강하고 부드러운 팔이 우리를 붙잡는 것을 느끼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다정한 얼굴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물의 근원이나 뿌리를 생각하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꽃이나 열매만 따서 취하려고 하기에 육신이 죽어서 가는 천국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분명히 있습니다. 사단은 물귀신 작전으로 함께 지옥에 가기 위해 우리가 하나님과 사랑을 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 인생을 즐겨라, 인생을 마음껏 즐기다 나중에 믿어도 된다, 보이지도 않는 천국과 지옥은 다 지어낸 이야기다… ‘ 등등으로 의심하게 합니다.

[요한복음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믿든지 안 믿든지 육신의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또 다른 세상의 시작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부활하고, 믿지 않는 사람도 부활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 믿는 사람의 부활과 믿지 않는 사람의 부활은 전혀 다른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부활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심판받고 영원한 형벌을 지옥에서 받게 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천국은 어떤 곳일까요? 천국에 없는 것은 무엇이고 천국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천국에는 없는 것

천국에는 흑암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천국에는 해와 달이 없기 때문에 낮과 밤의 개념이 없습니다. 천국에서는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님 자신이 빛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영원히 하나님의 영광의 빛 가운데 거하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는 모든 불결한 것들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천국에는 죄도 없고 우리를 그렇게 괴롭히는 마귀도 없습니다. 모든 마귀는 불 못에 던지어지고 하나님의 자녀는 완전히 자유롭게 됩니다.

천국에는 질병과 고통, 죽음과 슬픔, 이별, 아픈 것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1:3~4] “~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천국은 완전하고 거룩한 곳이기에 걱정 근심이 없습니다.

천국은 영원히 변하지도 않고 파괴되지도 않고, 저주도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2: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죽음 저편의 아름다운 나라, 천국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천국에 있는 것들을 다 열거할 수도 없고 인간의 말로 그 아름다움을 다 표현할 수도 없지만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일부분만 다시 정리해봅니다. 

천국에는 거룩하고 찬란하고 아름다운 성과 완전한 안식이 있는 집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우리는 영광과 은혜가 충만한 천국 도성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것입니다.

천국에는 생명수 강과 생명 나무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1~2] “또 그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우리는 다시는 목마름과 배고픔을 경험하지 않을 것이며 기쁨과 즐거움, 행복만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노래가 항상 들려오고, 생명수 강이 흐르고 그 강가에는 온갖 생명 과일을 맺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기뻤던 일에 천 배를 더해도 천국만 못합니다.

천국에는 우리가 살면서 교제하였던 성도들이 있고, 무엇보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계십니다.

[누가복음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천국에는 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누가복음 6: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사람들은 인간의 삶을 일생(一生)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인간의 삶은 삼생(三生)입니다. 엄마 뱃속에서 10개월, 이 땅에서의 100년, 그리고 죽고나서 영원히 사는 생.. 세가지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생은 어떤 것일까요?

엄마 뱃속에서의 10개월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태어나서의 100년의 삶이며, 그보다 중요한 것은 죽고 난 후의 영원한 삶입니다. 이 땅에서 100년 동안 잘 먹고 잘사는 것.. 참 중요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어디서 보낼 것인가 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더더욱 중요합니다. 어떤 면에서 앞의 생은 뒤의 생을 잘 보내기 위한 준비 과정입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멋진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요한복음 17:2]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죄를 용서해 주시고 영생을 얻어 나를 천국에 데려가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5:24]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우주의 여관인 지구에 잠시 다니러 온 나그네입니다. 언젠가는 우리의 본향인 천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디로 돌아갈지 선택할 기회는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오늘 저녁 하나님이 여러분의 영혼을 부르신다면.. 구원의 확신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의 품에 안길 확신이 있으십니까? 천국에서의 생명의 부활, 지옥에서의 심판의 부활.. 이제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천국을 선택하셔서 영원한 영생을 소유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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