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초대장,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10 처녀
마태복음 25장 1 – 13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그들이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들어가는 말
천국 초대장,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
우리는 복음서에 나타난 비유들을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임시적인 성격에 대해서 살펴가고 있습니다. 특히 후반부의 몇몇 비유들은 거의 흡사한 이야기들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다른 국면들을 추가해서 그려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세 개의 천국 비유가 서로 연결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그리고 양과 염소의 비유가 그것입니다. 이 세 비유는, 지금까지의 상황과는 조금 다른 상황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지 벌써 나흘 정도가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 주님께서는 성전을 청결하게 하시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며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특히 성전의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백성의 장로들과 첨예한 대립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여러 비유들을 통해서 그들의 영적인 현주소가 적나라하게 드러나지만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처럼 보잘 것 없는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고귀한 신분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이 마치 없는 사람의 넋두리처럼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백성들이 그를 선지자로 알고 있는 까닭에 잡아들이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시간들이 벌써 나흘이나 지난 것입니다.
그 동안 그들과의 골은 점점 깊어만 갔습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한 번도 연합한 적이 없었던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이 예수님을 잡아들이기 위해서 연합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제 서서히 자신이 십자가를 져야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시면서 종말론적인 담화들을 계속해 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24장에 이르러서는, 우리가 종말 설교라고 부르는 말세의 징후들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종말이 올 때에는 이런 징조들이 있을 것이다. 종말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이런 태도로 살아야 하고 인자가 어느 경점에 올지 알 수 없으니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25장에서 3가지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들은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제자들이 어떤 태도로 살아야할 것인가를 말씀하시는 비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제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셨습니다. 아니 그 길을 걸어가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30여 년간을 살아 오셨음을 잘 아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제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3년간을 동거, 동락했던 제자들은 이제 곧 그들이 주님 없이 홀로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둔감하기만 합니다. 아직도 이 땅에 이루어질 화려한 메시아의 왕국에 대한 꿈을 채 버리지 못하고 주님을 따르고 있는 제자들. 그러나 과거보다는 많이 성장했고 이제 그들에 의해서 천국의 비밀들은 전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앞서 주님께서는 그들을 준비시켜야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고 나면 다시 오시기까지 기다림의 시간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은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어쨌든 제자들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 비유들은 바로 이런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격려이며, 경고입니다.
줄거리
우리 주님께서는 앞에서도 천국에 대해서 혼인 잔치와 같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번에도 같은 혼인 잔치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구원에 대한 것은 동일 하지만, 두 혼인 잔치의 의미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혼인 잔치는 초림 예수의 혼인 잔치를 의미하고 있다면, 본문 말씀의 혼인 잔치는 재림 예수의 혼인 잔치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가 천국임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천국 그 자체이셨습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희망과, 소망을 주고 기쁨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기쁨을 사람들의 최대 기쁨인 혼인 잔치로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기쁨을 주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또 다시 재림의 기쁨으로 우리를 기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 인류의 마지막 기쁨을 본문 말씀에서 혼인 잔치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혼인 잔치 역시 아무나 참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모든 신앙인들의 모습입니다.
25장 말씀은,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때는” 무엇을 뜻하고 있습니까? 마태복음 24장 44절 말씀에,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그 때는 곧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천국은 그 때 이루어지는데 그 때에, 혼인 잔치와 같은 기쁨이 믿는 사람들에게 있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그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신랑을 맞을 신부와 같은 모습을 가져야 되는데 그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당시의 결혼 풍습은 신부가 잘 단장을 하고 집에서 기다립니다. 그런데 이때 신부는 단장을 하고 집안에서 신랑을 기다리고 우리말로 하자면 들러리 격인 신부의 친구들이 신랑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바탕 잔치를 벌인 후에 신랑의 집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열 명의 들러리들은 신랑 신부를 호위하면서 춤을 추면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의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결혼식 광경을 염두에 두고 전개됩니다.
우리는 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입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에게는 신랑을 맞을 등불과 기름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등불과 기름을 준비 하였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우리가 지혜로운 신부인가 미련한 신부인가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그러한 것에 대한 말씀으로 지혜로운 처녀의 슬기와 그 결과, 그리고 어리석은 처녀의 실수와 그 결과를 가장 분명하고도 명확하게 대비하여 보여 준 말씀입니다. 이제 이러한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서 본문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들 열 명의 처녀는 같은 부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신부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처녀였고, 신랑을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모두 같은 사람들입니다. 똑같은 죄인이며, 모두 하나같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서로 간에 나타나는 차이는 조그마한 것일 뿐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똑같은 피조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에 대한 불필요한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고, 타인에 대한 잘못된 우월감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똑같은 성정을 가진 인간들이며, 똑같은 결점을 가진 피조물이고 똑같이 불완전한 인생들입니다. 이러한 동일선상에서 우리는 서 있고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다림의 대상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기다림의 대상도 똑같았습니다. 신랑이라는 그들의 목적은 그들 모두의 동일하고도 간절한 바람이었습니다. 우리 성도는 모두 동일한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재림,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이라는 간절한 바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비록 조금은 부족해 보이고 조금은 약해 보이는 성도라 할지라도 그 역시 성도이며, 따라서 동일한 목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며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같은 장소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신랑이라는 그들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장소를 택해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세상이라는 공통된 생활 터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환난과 고통의 밤이 있는 곳, 피로와 피곤으로 가득한 그곳을 우리는 우리의 생활 기반으로 삼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교회라는 테두리 안에 있습니다. 신앙의 장소, 믿음의 장소, 이곳을 우리는 모두의 터전으로 알고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들 열명의 신부는 같은 소유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등과 기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말씀이라는 공동의 소유물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이라는 공동의 복을 선물 받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기도와 찬송이라는 무기를 선물 받았습니다. 주님은 이렇듯 똑같이 사랑하셨고 똑같이 보호하셨으며, 똑같이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크게 달랐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추구하는 목적과 소유의 진심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소유에 대한 사용에 있어 차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말씀을 듣고 준비했습니다. 말씀으로 준비하는 삶, 이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그 말씀대로의 순종이 뒤따를 때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말씀이 자신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그대로 실천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유월절 양의 피를 문설주와 좌우 인방에 바르라는 주의 명령에 순종하여 생명을 얻었던 모세 시대의 이스라엘처럼 말씀에 순종했고, 그리고 자신들의 거룩한 목적을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곧 오리라 한 신랑의 말을 경홀히 여겼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고 때문에 오실 신랑에 대한 온전한 준비를 갖추지 못하였으며, 그 결과 그들은 신랑이 임할 때 맞이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말씀에 대한 불신앙은 필경 불순종으로 이어지며, 그것은 그들이 바라는 소망과는 상관없는 방향으로 그들은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나누어 줄 수 없습니다. 나의 믿음은 내 부모나 형제, 그리고 친구의 몫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나만의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믿음을 타인에게 나누어 줄 수 없습니다. 오직 내 것은 나만을 유익하게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맞이하는 믿음과 신앙은 오직 자신에게만 달려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 때에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나의 믿음을 꾸어 줄 수 없으며, 나의 공력을 나눌 수 없고 오직 양과 염소, 의인과 악인으로만 나뉠 뿐입니다.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고 비유는 시작됩니다. 신랑이신 주님께서 오셨을 때 열 처녀가 보여주고 있는 반응과 같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열 명의 처녀들이 보여주는 반응이 천국의 한 단면을 설명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열 처녀의 행동에 우리의 시선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예 전제하기를 다섯은 슬기롭고, 다섯은 미련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미련함과, 슬기로움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달랑 등만 준비했느냐, 아니면 등과 함께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느냐에 있습니다. 즉 등과 함께 여분의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는 슬기로운 사람들이고, 달랑 등만 준비한 다섯 처녀들은 미련한 사람들이 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다른 차이는 없습니다. 여분의 기름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이 비유에서 주님께서는 원래 다섯 처녀가 준비성이 많았다거나, 아니면 미련한 다른 처녀들이 본래 덜렁거리는 성격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보통 결혼식은 초저녁에 시작되기 때문에 여분의 기름이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다섯 처녀는 보통의 관행대로 그렇게 한 것이고, 나머지 다섯 처녀는 혹시 있을지 모를 상황을 준비했던 차이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상외로 신랑이 늦어진 것입니다. 이 부분이 바로 비유를 구성하고 있는 예외적인 부분입니다.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자 기다리던 처녀들은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졸기 시작합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졸지 않고 미련한 처녀들은 졸고 한 것이 아닙니다. 다 졸았습니다. 그리고 신랑은 그들이 깊은 잠에 빠져 버린 한 밤중이 되어서야 도착했습니다. 왁자지껄 신랑이 도착했다는 소리에 깜짝 놀라 잠이 깬 열 처녀는 동시에 옷매무새를 고치면서 등을 들고 뛰쳐나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등불에 기름이 떨어져서 불이 곧 꺼질 것 같다는 것에 있습니다.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던 다섯 처녀들은 문제가 없습니다. 여분의 기름을 재빨리 등에 보충하고 달려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분의 기름이 없는 나머지 다섯입니다. 기름을 좀 나눠달라고 말해 보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준비한 기름이 너무 적었습니다.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밤은 깊었지만 기름을 사러 달음박질 쳤습니다. 헐떡거리는 숨을 쉬면서 등에 기름을 채워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잔치는 흥청거리고 있었고 혼인집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결국 함께 신랑을 기다렸던 열 처녀 가운데 다섯은 정작 혼인 잔치가 벌어졌을 때는 문전 박대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혼인 잔치는 그들이 없어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즐거운 소리만 높아갑니다.
이제 이러한 말씀을 통해 신랑을 만나지 못한 불행한 신부들의 모습과 신랑을 만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신부의 자세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닫힌 문을 열리지 않습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입니다. 지금은 구원의 문이 열려 있는 때입니다. 지금은 누구나 그 문을 드나들 수 있습니다. 지금은 누구나 그 문을 열 수 있고 그리스도에게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자 하면 언제든지 들을 수 있으며, 기도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리스도와 막힌 담이 없으며, 지금은 그리스도께 나아가려는 우리를 붙잡는 자도, 그리고 가로막는 방해물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우리 앞에 계시며, 우리를 맞을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지금은 구원의 때요 은혜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이 날이로다”(고린도후서 6장 2절).
구원의 문이 닫힐 날이 있습니다. 지금은 은혜의 때이며 지금은 구원의 문이 활짝 열려 있는 때입니다. 그러나 그 문은 언제까지나 열려 있지 않습니다. 그 문은 때가 되면 닫힙니다. 그때는 구원의 때가 아닙니다. 그때는 심판의 때입니다. 구원의 문이 닫히는 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차단되고 구원으로 향하는 길에는 넘지 못할 절망의 벽이 생깁니다. 마치 구원의 때가 지난 노아의 방주 문을 하나님께서 닫으신 것처럼 구원의 문은 때가 되면 반드시 닫힙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신지라”(창세기 7장 16절). 그러나 “그때”는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는 언젠가는 꼭 올 것입니다.
한 번 닫힌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한 번 닫힌 구원의 문은 두 번 다시 열리지 아니합니다. 그 문은 어느 누구도 열 수 없습니다. 문이 닫힌 후에는 그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열리지 않는 그 문을 하나님께서는 두 번 다시 여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습니다. 구원의 기회 역시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습니다. 구원의 때는 하나님께서 구원의 문을 열어 두고 있을 그때뿐입니다. 지나간 버스 뒤에서 손을 흔드는 것이 아무 소용없듯이 구원의 문이 닫힌 후의 울부짖음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심판주로 오시는 주님께는 긍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초림은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장 28절). 그리스도의 초림은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오심은 죄인을 위한 것이었고, 죄인의 회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그에게는 긍휼과 사랑만이 충만했으며, 모든 죄인이 그에게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태복음 9장 13절).
그리스도의 재림은 심판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초림이 구원과 회개의 선포를 위한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재림은 심판과 멸망의 선언을 위한 것입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태복음 3장 12절, 누가복음 3장 17절). 그리스도의 재림은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심판의 재림입니다. 때문에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에게는 긍휼이 없습니다. 주님에게는 오로지 공의로운 심판과 엄위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때에 죄인들은 그에게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죄인을 구분은 더 이상 용납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때에는 한 편의 즐거움과 환희의 찬송, 그리고 또 다른 한 편의 회한과 눈물로 갈리는 두 종류의 구분이 있을 뿐입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주님, 공의로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시는 하나님, 그분의 재림이 언제 있을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분의 재림 후에 있을 회한의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없을 구원의 때를 놓치지 않으며 주의 재림을 준비하기 위해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망의 잠을 자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신랑이 나아올 때 잠들어 있음으로 해서 그를 맞이하지 못하는 신부는 불행한 신부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있을 때 신앙의 잠을 자다가 그를 맞이하지 못하는 성도 역시 불행합니다. 우리는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 주님의 재림이 임하는 불행을 막기 위해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재림하는 승리의 주님을 잠든 상태로 맞이하는 불행한 신부가 되지 말고 신랑을 맞기 위해 등과 기름을 준비하고 깨어 기다림으로 즐겁고 기쁜 혼인 잔치에 참예하는 슬기로운 신부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비유가 말씀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선 열 처녀가 모두 혼인잔치에 함께 했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등을 준비했었으며 신랑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처럼 그물 비유에서처럼, 그리고 혼인 잔치 비유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처럼, 미련한 다섯 처녀는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결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믿는 사람들의 결말에 대한 설명이 아닙니다. 이 비유는 이미 혼인 잔치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신랑을 기다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비유의 마지막 부분에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24장 42절 말씀에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는 알지 못함이니라” 그러므로 열 처녀가 보여주고 있는 태도는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랑은 말할 것도 없이 주님이십니다.
교회 안에는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함께 들어와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는 여전히 가라지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주님의 재림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열 처녀 모두가 흥분된 마음으로 신랑을 기다렸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런 차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랑이 더디 오자 문제가 발생합니다. 열 처녀들은 같이 졸고, 같이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분의 기름에 있었습니다. 신랑이 조금만 일찍 왔더라면 문제는 아무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랑은 벌써 200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오시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살아 숨 쉬는 기간은 고작 길어야 100년, 그렇게 세대를 이루어온 세월이 2000년입니다. 오고 오는 세대들이 신랑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내가 마치 2000년을 기다린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다린 시간은 불과 길어야 100년이 채 안 되는 시간입니다. 그러면서도 잘 기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핵심은 여분의 기름에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는 것입니다. 결론을 내리기 전에 24장 말씀의의 종말 설교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있기 전에 세상 곳곳에서 미혹하게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것이며, 난리와, 난리의 소문들이 있을 것이며,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고, 곳곳에서 기근과 지진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환난을 당합니다. 모든 민족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며, 그리스도인들은 시험에 빠져서 서로를 미워하고 사랑을 버리게 될 것입니다. 불법이 성행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신랑은 그 뒤에야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 처녀의 비유는 예수께서 언제 오시더라도 혹 너무 늦게 오셔서 그들이 환난과 박해, 미혹에 빠져든다 하더라도 끝까지 인내하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것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주님의 경고인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첫 번째 씨 뿌리는 비유에서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온갖 시련을 이겨야만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좋은 밭과 같은 결론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의 기름을 믿음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말 그대로 그냥 믿음이면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믿음이라고 말 할 때 그것은 여분의 기름까지를 포함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믿음은 단순히 “입술로 믿어”라고 말하는 것 이상의 행동을 포함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거룩한 삶까지를 믿음이라고 해야 합니다. 삶은 마음속에 심겨진 믿음의 필연적인 나타냄입니다. 그러므로 삶을 통해서 진실한 자신도 알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를 읽으시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입술로 고백하는 고백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고백이 만들어지는 마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기다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기다림에 지쳐서 이상한 종말론을 만들고 날짜를 계산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신랑이 언제 올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여분의 기름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와 있다고 해서,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해서, 그것으로 신앙생활이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은, 참된 믿음은, 행동과, 삶을 통해서 검증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름을 준비한 그리스도인만이 천국 잔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미련한 처녀들과 슬기로운 처녀들의 차이는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였느냐에 있습니다. 여분의 기름을 항상 준비한 처녀는 슬기로운 처녀요, 준비하지 않은 처녀는 미련한 처녀입니다. 그렇다면 기름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등을 외형적인 신앙생활로, 기름을 내면적인 신앙생활로 볼 수 있습니다. 즉 등은 교회 출석, 봉사, 전도 등을 상징하고, 기름은 성경 읽기와 기도, 말씀 순종 등을 통한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름 없어 꺼진 등은 신랑을 맞이하는 데 아무런 소용이 없듯이,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없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은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십일조 헌금도 하였지만, 외식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남까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고 하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그리스도인이라야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다면 말세를 사는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베드로전서 4장 7절 이하 말씀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기도, 사랑, 봉사의 삶을 사는 신자가 하나님께 인정받는 신자요, 기름을 준비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려면 기름이 얼마 남았는가를 매일 점검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매일 매일 하나님께 기도로 교통하며, 용서하는 사랑의 삶과 전도하는 사랑의 삶을 살며, 주신 은사대로 청지기로서 봉사의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삶이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이요, 기름을 준비하는 삶이요, 미래를 대비하는 삶입니다.
기름은 빌릴 수 없습니다.
“신랑이 왔다!”는 외침에 잠자던 열 처녀가 깨어나 자기 등에 불을 켜고 마중 나갔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등불이 꺼져갔습니다. 기름을 준비한 친구들에게 기름을 빌려 달라고 했지만 기름을 같이 나누어 쓰기에는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슬기로운 처녀들이 매정한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예수님은 신앙과 구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로 설명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남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하거나 권면을 할 수 있지만 믿음과 구원을 줄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남의 믿음이 아니라 나의 믿음으로 받습니다. 믿음은 빌릴 수 없습니다. 믿음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형성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했을 때 이렇게 응답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네, 집사람이 열심히 교회에 나가니까 집사람 치마 자락 붙잡고 천국 가지요.” 아내가 남편을 위하여 기도는 할 수는 있으나, 남편 대신 회개할 수는 없습니다. 회심도 중생도 구원도 모두 개인적인 것이기에 빌리거나나 빌려 줄 수는 없습니다. 죽음이 눈앞에 닥쳤을 때, 환란과 시험이 갑자기 닥쳐왔을 때, 사고나 병이나 불행이 나를 엄습했을 때 그리고 심판의 날이 내 앞에 도래하였을 때 평소에 믿음의 기름과 성령의 기름을 준비하였던 신자는 승리의 때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남으로부터 기름을 빌릴 수 없어 후회와 통곡의 때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우주적인 종말과 나의 일생이 끝나는 개인적인 종말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환란이나 시험이 올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때를 대비하는 슬기로운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미래에 대한 대비는 오늘 살아 있는 동안에만 해 놓을 수 있습니다. 기도로 자라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화된 믿음으로 기름을 준비하는 슬기로운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의 삶을 살아 오늘이 행복하고 미래를 보장받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결혼식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신랑 되신 예수님과 신부 된 우리가 결혼식 하는 날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9절 말씀에『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재림은, 성도에게는 영광스러운 날입니다. 그러나 영광스럽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준비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오래 전 미국의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 하나의 묘안을 짜내었습니다. 어느 주일 저녁 예배 때였습니다. 목사님이 설교하다가 갑자기 중단하더니 큰 음성으로 외쳤습니다. “여러분 저 공중을 보세요. 지금 예수님께서 구름 타고 오고 계십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미리 지붕 위에 올라가서 숨어 있던 나팔수들이 신나게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랬더니 교회가 난리가 나 버렸습니다. 교회 안에 불이라도 난 줄 알고 출입구 쪽으로 뛰어가는 사람도 있고 안절부절 못하고 의자에 앉았다 일어섰다 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두려워서 의자 밑에 머리를 처박고 부들부들 떠는 사람들도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을 평소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주님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재림은 우리에게 기쁜 날입니다. 축제의 날입니다. 결혼식은 축제입니다. 즐거운 날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형사가 죄인을 색출하기 위해서 갑자기 들이닥치는 일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꺼이 사자 밥이 되기도 하고, 기꺼이 목 베임을 당하기도 하고, 십자가에 순교도 했습니다. 그들은 핍박을 피해서 카타콤이라는 깊은 지하 묘지에 살면서도, 서로 만날 때마다 “마라나타” 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이 곧 오십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힘들고 어려워도 조금만 더 인내하고 조금만 더 견디면 승리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이러한 인사말로 서로 격려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신 대로 우리를 영접하시기 위해서 영광가운데 구름 타고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위하여 기름을 준비하여야 합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쫓겨난 것이, 무슨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까? 무슨 죄입니까? 살인죄입니까? 간음죄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신랑을 기다리지 못하고 졸며 잔 것이 문제였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미련한 처녀만 졸며 잔 것이 아닙니다. 슬기로운 처녀들도 졸며 잤습니다. 그러므로 졸며 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등에 기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기름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로 설명합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또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한 가지는 내실 없는 형식적인 신앙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이 없는 것은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경건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반석 위에 세운 집이 되어야 합니다. 죽은 믿음,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지지 말고 살아 역사 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일들 때문에 막상 준비해야 할 기름을 준비하는 일을 놓쳐 버린다면 우리도 미련 한 처녀들처럼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야 말 것입니다. 성령으로 인해서 내 마음이 뜨거워지고 감동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고 가야되는데 그저 와서 엉덩이로 의자만 데우고 가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영어에 “Bench Warmer Christia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주일날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와서 엉덩이로 의자만 데우고 가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고 생동력이 있는 신앙생활을 통해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기름을 준비하되 지금 준비해야 합니다.
본문 말씀에 나오는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준비해야 될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또 그들에게는 기름을 준비 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도 있었습니다. 졸며 잘 수 있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회를 놓치고만 것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기름은 지금 준비해야 되는 것입니다. “한 달 뒤에 잘 믿어야지, 일 년 뒤에 천천히 잘 믿으면 되지”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입니다. 지금 잘 믿어야 합니다.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년도와 월 일 시간을 정확하게 이야기해 준다면 그런 대로 준비하겠는데 년도와 월 일 시간이 없습니다. 오늘 잘 믿어야 합니다. 내일로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종말은 아무도 모릅니다. 오늘 하루하루 착실하게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내일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현실에만 만족하고 내일을 준비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혼인잔치에 초대받아 신랑을 맞으러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기름을 준비하지 못해서 잔치 집에 들어가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의 비극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십니까?
첫 번째로, 내용이 없는 형식적인 신앙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은 미련한 자들의 삶이 슬기로운 자들과 비교할 때 외적인 환경이 전혀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미련한 자들도 결혼잔치에 초대받았고 그들도 똑같이 기쁨으로 초대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등도 준비하고 똑같이 신랑을 기다렸습니다. 보통은 슬기로운 자는 깨어 있었고 미련한자는 졸고 있었다고 생각하나 25장 5절 말씀을 보면 모두 다 졸고 자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외적인 모습은 비슷했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기름을 준비한자와 준비하지 못한 자의 차이입니다.
저는 본문 말씀에서 우리가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할 신앙의 내용의 삶을 주님이 말씀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교회 예배에 출석하면 형식이 있기 때문에 내용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 말씀에서 형식은 무엇입니까? 초대에 참여했고 등을 준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련한 다섯 처녀들이 내용이 없었던 것처럼 내가 예배에 출석하고 찬송을 부르기에 내가 신앙인이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일 수 있습니다. 내용을 포함한 형식은 아름답지만 내용이 없는 형식은 위기 속에서 문제가 드러납니다. 참된 신앙은 위기 앞에서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미련한 처녀들과 슬기로운 처녀들의 차이는 신랑이 올 때 드러났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삶에 위기가 찾아올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서 객관적인 신앙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내용이 확실하다면 많은 위기 앞에서도 내 인생을 주장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내가 가진 신앙의 내용을 내보일 수 있습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고 외적으로만 참여하고 있던 어리석은 다섯 처녀처럼 형식에만 집착하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것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믿음의 삶은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음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신랑이 도착한다는 소식을 받자 미련한 다섯 처녀가 자신의 등에 기름이 넉넉하지 않음을 알고 슬기로운 자들에게 빌려 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미련한 자들의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신앙의 내용이란 누구에게도 빌릴 수 없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주변에 좋은 믿음의 소유자가 있다면 그들과 더불어 교제하며 믿음의 길로 성숙은 할 수 있지만 그들의 신앙을 빌릴 수도 없고 그들과 동일시 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신앙의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는 진지한 신앙의 고백 없이는 믿음의 길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 신앙의 삶은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음을 주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기회는 다시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잔치 집의 문이 닫힌 후에 다시 열릴 수가 없음을 본문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기회가 있고 반드시 때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랑이 오기 전에는 미련한 다섯 처녀도 기름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들은 언제든지 기름을 살수 있다는 사실이 다섯 처녀들을 게으르게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회가 지나가자 다시는 기회가 없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언제든지 자신이 마음만 먹으며 예수님 영접할 기회가 있고 또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고 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기회가 언제나 주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는 한 순간 내 인생의 기회의 문이 닫혀 버릴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아무리 몸부림쳐도 영영 기회를 상실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기회란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신랑이 늦게 온다는 사실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아직 기름을 준비할 수 있고 아직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기회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해입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네 번째 마지막으로 주님과의 만남은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경고합니다. 예수님은 기대하지 않은 한순간에 도둑같이 오신다는 사실입니다.(마태복음24장 43절) 신랑이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온 것처럼, 그래서 준비된 자와 준비되지 않은 자가 잔치에 들어간 자와 밖에서 슬피 울며 애통하는 자로 구분된 것처럼 우리를 구분합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언제 어떻게 종말이 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웃들의 죽음이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여정은 준비하는 과정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가장 진지한 여행, 육체를 버리고 떠나가는 여행을 위해서 언제나 준비된 그리스도인 되어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시기 바랍니다.
마무리
잔치에 초대 받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나를 초대했다는 것은 나를 그만큼 인정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나를 초대 해주었는데도 기분이 썩 좋지 않는 초대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상대방에게 죄를 지었을 때 상대방이 나를 초대한다면 초대받은 나는 마음이 불편 할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의 초대를 받고도 거부하고, 대적합니까? 그 이유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많이 지은 사람들은 더욱 초대를 악착같이 거부하고, 소리소리 지르고, 기분 나빠합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포도원의 주인처럼 세상 가운에서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을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그렇게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초대받은 사람이 할 일은 감사할 뿐입니다. 내가 특별나서 초대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말고 항상 겸손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의 초대에 이 핑계 저 핑계대지 말고 순순히 주님께 나오는 어린 아이 같은 믿음으로 초대에 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구원의 초대에 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내 죄를 사함 받지도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믿지 않는다면 초대하신 분을 더 화나게 하는 것이라는 것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신랑 되신 재림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최대의 소망이고, 꿈입니다. 우리 시대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할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성경에 모든 예언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 시대에 언제 그 날이 올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내 영혼 가운데 믿음과, 성령을 충만하게 간직하고 살아가야 할 때입니다.
신문이나, TV를 통해서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전혀 없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보고, 우리는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라는 사실을 깨닫고 철저히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지켜 나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말씀을 잊지 말고, “청함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라는 말씀 또한 잊지 말고,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는 알지 못하느니라” 말씀 또한 잊지 말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서 초대받은 사람의 영광을 누리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말씀은 목사님들의 설교와 참고자료를 인용하여 올린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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