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과 염소의 비유, 반드시 오른편에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5 : 31 – 46
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25: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25:34)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25: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25: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25: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25: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25: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25: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25: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들어가는 말
본문 말씀은 마태복음 25장에 나타난 종말 즉 천국 비유의 세 번째 말씀입니다. 우리는 두 번에 걸쳐서 마태복음 25장에 나타난 주님이 말씀하신 천국 비유를 살펴보았습니다. 열 처녀 비유를 통하여 성도의 영적 생활을, 달란트 비유를 통하여 성도의 실제 삶의 모습을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세 번째 비유인 양과, 염소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계시는데, 이 비유는 두 번째 비유에서 말씀하신 달란트 비유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실제적으로 교훈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즉 성도는 주님께로부터 맡겨진 달란트를 사용하여 열심히 맡은 바 본분에 성실히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야 함은 물론이고, 믿음의 가족들 중에 지극히 작은 사람 하나에게라도 선행과, 봉사를함으로 궁극에 가서는 그 모든 인격들의 주인이신예수 그리스도를 섬겨야 함을 설명하고 있는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의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재림하셔서 영광의 보좌에 않으실 때에 이루어 질 사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영광의 보좌”는 모든 각 사람의 행위에 따라 심판하시는 주님께서 앉으실 “흰 보좌”를 가리킵니다.(요한계시록 20장11-15절)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행위를 어떤 기준에서 심판하실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는 말씀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민족을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오른쪽과, 왼쪽으로 구별하여 놓는 것처럼 모든 인류의 무리를 두 무리로 구별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용어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양과, 염소를 구별하는 배경을 살펴보면 양과, 염소는 낮에는 들판에서 함께 풀을 뜯어먹게 하지만 밤이 되면 이 둘을 나누어 각각 다른 우리 안으로 들여보내게 됩니다.
오른편과, 왼편의 말씀은 당시 산헤드린 공회에서 유죄로 확정된 사람은 왼편에 세우고, 무죄가 선고된 사람은 오른편에 세우는 관습을 비유로 설명한 것입니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별하는 것과, 산헤드린의 판결의 모습을 인용하여 당시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주님의 심판을 설명하시면서, 오른편은 생명의 자리로, 왼편은 멸망의 자리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내 형제”는 우리가 말하는 일반적인 친족 개념이나, 이웃 개념이 아닙니다.
여기서의 “내 형제”는 고난받고 슬픔을 경험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모든 고난받는 사람들 중에 가장 나약하고, 어려운 믿음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마태복음 12장 46-50절)
줄거리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 말씀해 주신 것처럼 주님은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초림 때의 모습과는 달리 모든 천사와 함께 오셔서 영광의 보좌에 앉아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는 심판의 왕이십니다. 그때에는 빌라도의 법정에 선 피고의 모습이 아니라 만민을 모으고 공의로운 심판을 하시는 심판주의 모습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모든 천사와 함께 오심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게 됩니다(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 여기에는 모든 천사, 즉 미가엘이나 가브리엘 천사를 비롯한 모든 천사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돕기 위해 동행할 것입니다. 이 천사들은 주님이 재림할 때뿐만 아니라 인자가 하늘에 오르시고 하나님 우편에 계실 때에 순복하였던 천사들입니다(베드로전서 3장 22절). 어떤 사람들은 천사의 존재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천사는 분명히 존재하며 그들의 활동은 매우 광범위합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성도들은 천사의 영접을 받으며, 그들과 함께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심
예수님이 앉으시게 될 자기 영광의 보좌는 불꽃과도 같은데 거기에 좌정하실 주님의 옷은 희기가 눈 같을 것입니다(다니엘 7장 9절). 보좌가 불꽃과도 같다고 하는 것은 어두운 세상을 구석까지 비취게 할 수 있는 빛의 능력이며, 이 빛으로 세상의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성경이 금하는 일을 행한 사람의 죄악이 드러날 것이며, 또 성경이 하라는 일을 행한 모든 의로움도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때에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때에 제자들도 열두 보좌에 앉아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릴 것이라고 하신 것으로 보아 주님의 제자들도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됨과 아울러 우리들도 그런 복에 참여할 것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마태복음 19장 28절).
모든 민족을 모으심
주님께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시는 그날에는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심판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시게 됩니다(3절). 모든 민족 가운데는 선민 이스라엘도 있을 것이며,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어온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또 백인들도 있을 것이며, 황인종도 있을 것입니다. 피부가 검어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흑인들도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나라별로 본다면 강대국의 국민도, 약소국의 국민도 모든 민족 가운데 끼어서 주님의 보좌 앞에 모여들게 됩니다. 이 순간이 있기 전에는 나라별로, 혹은 민족별로 우세하고 열등한 가운데 지내왔지만 주님의 보좌 앞에 모임으로 이들은 하나같이 평등한 입장에서 주님의 공의로움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양과 염소를 구별함같이 하심
주님의 공의로운 보좌 앞에 모여든 모든 민족은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게 됩니다”(33절). 이와같이 구분하는 것은 마치 바다에 그물을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일 후에 그물에 가득한 고기를 물가로 끌어내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는 것처럼 세상 끝에도 천사들이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가려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을 것입니다(마태복음 13장 47-49절). 이런 심판은 철저하고도 공의롭게 진행될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승복할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존엄 앞에 굴복하고 말 것입니다.
오른편에 양을 세우심
오른편은 능력과 권세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어서 하늘에 승천하신 후에는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사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주관하게 되었습니다(에베소서 1장 20-21절). 오른편에 대한 또 다른 의미는 풍요와 결실입니다. 이것은 십자가 사건 이후의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서 밤을 새우며 고기잡이를 했으나 허사였지만 주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하신 말씀에 의지하여 말씀대로 하였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잡았던 일로 알 수 있습니다(요한복음 21장 6절). 양으로 분류된 오른편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으며, 그를 따른 결과 보좌에 앉으신 주님께서 알아보시고 우편에 세워 주셨습니다.
왼편에 염소를 세우심
왼편은 저주와 형벌을 의미합니다. 왼편으로 가려진 사람들은 주님을 떠난 사람들로서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41절)고 하는 판결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저주와 형벌의 자리에 서게 된 사람들은 염소처럼 완고하여 주님이 이끄는 곳으로 향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주장과 세상의 법칙을 따라 살아온 사람들이며 주님의 음성을 외면하고 육신이 즐겨하는 욕망의 음성을 따라 행했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는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이지만, 목축을 하는 이스라엘인에게는 아주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목축을 할 때 양과 염소를 섞어서 키웁니다(창세기 30장 32절, 사무엘상 25장 2절). 양과 염소는 여러 면에서 그 특성이 다릅니다. 양들은 더위에 약합니다. 두려움도 많습니다. 이에 비해 염소는 더위에도 강하고, 두려움도 없습니다. 들판의 양들을 보면 무리를 지어서 다닙니다. 반면에 염소는 흩어져서 개별적으로 다닙니다. 양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는 것은 광야의 뜨거운 태양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는 태양을 직접 내려 쪼이기에는 너무 뜨겁습니다. 그래서 양들은 다른 양의 그림자 속에 자기 머리를 집어넣음으로 나름대로 해결책을 찾습니다. 태양이 뜨겁지만 건조한 날씨로 인해 그림자 밑은 시원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더위에 강한 염소들은 흩어져서 개별 플레이를 하며 돌아다닙니다. 양과 염소가 이렇게 다른 습성이 있는데 섞어서 같이 키우는 것은 양을 위해서 염소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하나는 양만 키우면 초장이 황폐화가 되는데, 양과 염소를 섞어 키우면 초장이 황폐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양과 염소는 풀을 뜯어 먹는 습성도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염소는 다 자란 풀의 잎사귀만 살살 뜯어 먹는데 비해, 양은 어린잎과 다 자란 잎을 구분하지 않고 뜯어 먹고, 줄기까지 뜯어 먹습니다. 그래서 건기와 우기가 교차하는 유대의 광야에서 양만 키우면 줄기까지 다 뜯어 먹어버려 초장이 황폐화되고 다음 해를 기약하기 어렵게 됩니다. 반면에 양과 염소를 섞어 키우면, 양들이 염소를 따라 함으로 초장이 황폐화가 되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듬해 우기가 되어 비가 오면 초장이 다시 살아나게 된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광야의 험한 길과 높은 바위를 지날 때 염소의 역할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양들은 평탄한 초장을 지날 때는 문제가 없지만, 새로운 초장과 물을 찾아 이동하면서 높은 바위와 험준한 비탈길을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 되면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래서 목자가 앞서 갈지라도 주저하며 따라오지를 않게 됩니다. 그렇다고 뒤에서 막대기와 지팡이로 때려가며 몰려고 해도 이미 두려움의 포로가 된 양들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때 개별 플레이를 잘하는 염소가 “돌격대” 역할을 하며 앞서가게 되면 양들은 그런 염소를 뒤따라가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특성 때문에 양을 목축할 때는 염소가 꼭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양 세 마리당 염소 한 마리를 섞어서 키우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양들과 염소들이 한 목자 아래에서 같이 들에서 풀을 뜯어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보듯이 양과 염소를 구분할 때가 반드시 있었습니다. 저녁이 되어 우리에 넣을 때는 양과 염소를 구분하게 됩니다. 더위에 약한 양들에게는 서늘한 잠자리가 필요하고, 더위에 강하나 추위에 약한 염소에게는 따뜻한 잠자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자는 광야에서 풀을 뜯게 할 때는 양과 염소를 같이 키우지만, 우리에 넣을 때가 되면 반드시 양과 염소를 구분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익숙한 장면을 그리게 하면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모든 민족을 예수님 앞에 모으고,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그들을 구분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양을 오른편에 두실 사람들을, 염소를 왼편에 두실 사람들로 비유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때문에 양은 좋은 동물, 염소는 나쁜 동물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의 포인트는 양과 염소 어느 쪽이 좋은 동물이고 나쁜 동물인가를 말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포인트는 풀을 뜯을 때처럼 함께 할 때가 있을지라도 반드시 구분하게 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모든 민족을 모으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은 같은 세상에 더불어 살았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사람들을 두 부류로 명백하게 구분하게 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어느 쪽에 속하느냐에 따라 받게 되는 것은 극명하게 다릅니다. 오른편은 영원한 생명의 영생으로, 왼편은 영원한 저주의 지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오른 편에 둔 자와 왼 편에 둔 자에게 어떤 다른 처분을 하십니까? 3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예수님은 임금 곧 만왕의 왕이요 심판주로서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를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창세 때부터 예비해 두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만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기를 원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마침내 주실 때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하셨습니다. 상속받는다는 것은 오른편의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말해줍니다. 또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 것은 누구도 방해하거나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받게 하는 이유를 덧붙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5-36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주릴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주릴 때, 목마를 때, 나그네 되었을 때, 헐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를 한마디로 하면 몸과 마음이 힘들 때를 말합니다. 한 마디로 세상 사는것이 가장 힘들 때를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그렇게 힘들고 어려울 때 그들이 예수님을 섬겼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오른편에 있는 자들이 깜짝 놀라서 되물었습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요 언제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이 힘들고 어려울 때 섬긴 것이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나를 섬겼다고 하시니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왜 그들이 그렇게 하였다고 하셨습니까? 40절 말씀에 그 대답이 나옵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예수님은 오른편에 있는 그들이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그렇게 했으며, 그것이 바로 내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들, 다시 말해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저주를 받을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42-43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나를 섬기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도 우리가 언제 그렇게 아니하더이까?라고 반문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어렵고 힘든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지 봤다면 어떻게 섬기지 않았겠느냐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그러면서 그들은 영벌에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을 정리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2장 46-50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형제 된 자에 대해서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예수님은 혈연관계에 있다고 해서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가리켜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내 형제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중에서도 여러 가지로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사람,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영접하고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예수님과 복음 역사를 위하여 살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 세상에서 스스로 가난하게 되고, 헐벗고 병들게 되고, 박해를 당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천국 복음 역사를 섬기시던 당시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그렇게 실질적인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가야 하는 지극히 작은 것이 되는 것을 뜻했습니다. 이런 현실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수십 년이 지났던 마태가 마태복음을 기록할 당시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유대인 중의 크리스천들은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어려움을 당했고, 로마 세계의 이방 지역에서는 그 지역대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그 사회의 비주류요 소수자가 되는 온갖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 시대에 예수님을 따르는 참 신자가 되는 것은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과 복음을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을 뜻했습니다. 그래서 그 길을 갈 때 때로는 주리고, 때로는 목마르며, 때로는 돌아갈 집이 없는 나그네가 되고, 헐벗고 병들며, 옥에 갇히기도 해야 했습니다.
이것을 오늘날의 잣대로 보면 이해하기 힘들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세상에서 더 잘 먹고 더 잘 살고 더 잘 되는 것쯤으로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이 좁고 험한 길이요, 오히려 지극히 작은 자가 될 수도 있는 길이라고 하면 누가 예수님을 믿고자 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은 살아계시면서 역사하셨습니다. 그래서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항상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도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제자들이 나왔습니다. 이는 마태가 복음 역사를 섬기던 그 수십 년 후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대 세속 도시의 한 가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지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요 목자가 되었지 다른 무엇으로 신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결코 예수님을 믿으면 더 잘 먹고 더 잘게 될 것이라고 해서 그런 점에서 세상의 길보다 훨씬 좋게 보여서 내가 선택해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나 사도 마태 당시만은 아니지만 어렵고 힘든 일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잘 아십니다. 자기를 따르는 참 신자들이라면 세상에서 어떤 어려움도 겪게 되는가를 잘 아십니다. 그래서 그런 처지에 놓인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 때에 나도 힘들다며 서로 외면하게 되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렇게 할 때 제자들의 공동체는 와해될 수 밖에 없음도 아셨습니다.
그렇게 될 때 그런 그들을 통해서는 예수님의 천국 복음도 더 이상 전파될 수 없음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3장 말씀에,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유언으로 주신 말씀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장 34절)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 말씀에,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시고, 그렇다고 하는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마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을 섬기다가 어려움을 겪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사랑하며 돌아보는 것이라고 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마태는 예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기록함으로써, 주님이 마지막 날 모든 민족의 임금으로 오셔서 심판하실 때 보시는 것도 바로 그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을 섬긴 것”, 곧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중심으로 보시고, 그것을 한 자들이야말로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라고 하시고, 그들에게 창세로부터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예수님이 예수님을 섬긴 것으로 여기시는, 예수님 안에서 지극히 작은 형제들에게 한 일의 특징을 보면 어떠합니까? 주릴 때 먹을 것을 준 것,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준 것, 나그네 될 때 우리 집에 와서 있으라고 한 것, 헐벗을 때 옷을 입혀준 것, 병들었을 때 돌보아 준 것,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본 것이었습니다. 이는 크고 엄청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별한 달란트가 필요한 일도 아니었고, 많은 부나 능력, 지식이 필요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살아가면서 생각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자유롭게 주고 받을 수 있는 단순한 일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안에서 서로 그렇게 하는 것을 원하시고, 그렇게 한 것을 “예수님을 섬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라도 섬기고 돌보아야 할 분이 예수님이라면 섬기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찬송가 213장의 가사처럼 기꺼이 나의 생명 드려서, 나의 보화 드려서, 나의 손과 발을 드려서 예수님을 섬기고자 할 것입니다. 그렇게 섬기는 것이 은혜라고 하고, 그렇게 섬기는 복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섬기면서 세상의 가장 큰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요, 구체적으로는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내 형제라는 책임감을 가지고, 나의 형편을 뛰어넘어 돌아보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재림과 그때 임할 천국을 준비하는 신앙의 삶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며 기다리는 삶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무슨 엄청난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예수님을 섬기는 삶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주님이 형제와 자매로 허락해 주신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돌아보는 것,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것이야말로 주님의 재림과 천국을 준비하며 깨어 있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고, 영적 방향이 됨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더욱 힘써야 할 주의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오른편에 있는 사람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주님은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34절) “의인들은 영생에”(46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 땅에서 누리는 물질의 복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복은 창세전부터 예비 된 유업의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복은 현세와, 내세를 초월한 복을 의미합니다. “상속”이라는 단어는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받는 일방적인 유산입니다.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이 예비 된 천국의 상속자가 된 이유는 “왕의 형제 된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40절)
여기서 우리는 선행의 개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일상적으로 베푸는 선행은 누구나 베풀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많은 선행을 베풀며 살아가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도 구제와, 착한 행실을 많이 합니다. 사람의 기본 감정이나, 도덕으로도 선행은 얼마든지 베풀 수 있습니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도 얼마든지 선행을 베풀며 살아갑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어도 선행은 얼마든지 베풀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 신앙으로도 선행을 얼마든지 베풀 수 있습니다. 도덕적인, 윤리적인 일반 사람의 양심은 누구나 가질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도, 유교에서도 다른 종교에서도 선한 양심을 가지고, 선행을 베풀면서 살아가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도 오른편에 선다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선행은 본질이 다릅니다.
지극히 작은 자는 누구를 말하고 있습니까? 믿음의 공동체 안에 있는 주린 자, 목마른 자, 헐벗은 자, 나그네, 병자, 죄수 등등 정말로, 실제적으로 이런 사람들이 주님의 모습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을 실천해야 할 교회에서 오히려 가난한 사람이나, 고난받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야고보서 2장 6절) 사회에서 존경을 받는 자, 학식이 높은 자, 재물이 많은 자, 명예가 있고, 덕망 높은 자, 이런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을 살펴봅시다. 주님이 말씀하신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님은 오늘도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십니다. 이런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을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영접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모습은 오늘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그들이 당하는 슬픔과, 고난을 그의 것으로 삼으시며, 그들 안에서 고난받고 계심을 기억하고 우리의 할 일을 찾아야 합니다.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이 베푼 선행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는 자신만을 위하는 극단주의 적인 사고와, 허세 등을 떨쳐 버리고 항상 눈을 낮은 데로 돌려서 정말로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실의와, 고난과, 슬픔을 당하면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온정과, 적극적인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이들을 외면하는 일은 곧 주님을 외면하는 일입니다.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의 선행은 믿음의 결과에서 오는 선행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베푸는 선행이었습니다. 모든 일에 주님의 이름으로 베푸는 선행이었습니다. 어느 때, 어떤 여건, 대상이 누구든지 상관이 없이, 조건이 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주님에게 하듯이 순종하는 마음으로, 순수한 믿음의 차원에서 행하며, 베푸는 선행은 모두가 주님께 한 것으로 인정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님이라면야” 하고 직접 주님을 만난다면 다투어 주님을 도울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어디까지나 실제적인 말씀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선행을 베풀면, 이 선행이 곧 주님께 한 선행이라는 사실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목적이 주님께 있고, 그 마음이 주님께 있고, 그 선행이 주님께 있으면 그 결과도 주님께 영광을 돌리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내가 사랑하고, 주님의 이름이 있는 사람을 내가 존경하고,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저를 영접하면, 그가 누구이든지 곧 주님을 영접한 것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른편의 사람들은 이런 마음과, 생각으로 선행을 베풀었다는 사실입니다.
왼편에 있는 사람들이 지옥의 판정을 받은 이유를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가족들 가운데 고난받는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선행을 베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목회자였다면, 교회의 존귀한 사람들에게만 선행을 베풀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정치가였다면, 재벌이나, 권력자에게만 선행을 베풀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재벌가였다면, 나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이었다면, 사회의 이름이 날만한 곳에 엄청난 선행을 베풀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교회의 중직을 맡았다면,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은 위선의 선행을 베풀었을 것입니다. 이런 선행은 주님이 말씀하신 선행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선행을 베풀고 있습니까?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누가복음 14장 12-14절)
왼편에 있는 사람들이 주님께 항변을 합니다.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44절) 주님은 이들의 변명에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네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니”(45절)
이들의 결말은 무엇입니까? 이들은 악한 일을 행하여 저주를 받은 사실이 아니라, 받은 것을 가지고 믿음의 가족들에게 선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를 받았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믿음의 공동체,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마땅히 베풀어야 할 선행을 베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와 선물로 받은 시간, 재물, 또 모든 재능들 등등을 가지고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악한 행위를 하지 않은 것만으로는 저주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은 태만과, 무관심과, 행함이 없는 믿음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41절) “저희는 영벌에”(46절)
마무리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비유는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 10장 43-45절)
우리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들을 섬기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섬기려고 이 땅에 오신 주님이 섬김의 모습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주님이 마지막 심판 날에 주님의 섬김을 모습을 따라 살지 않은 사람들을 심판하십니다. 야고보 사도는 선행에 대하여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야고보서 1장 22절)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야고보서 2장26절)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야고보서 4장 17절)
이제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심판을 맞이하시렵니까? 주님이 심판하실 때에 오른편에 있는 모습입니까? 아니면 왼편에 있는 모습입니까? 양입니까? 아니면 염소입니까?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는 영생입니까? 아니면 예비 된 영영 한 불의 영벌입니까? 우리는 반드시, 분명히 오른편에 있어야 합니다.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는 영생의 자리에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제 마태복음 25장의 비유를 정리하려고 합니다.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주님은 반드시,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는 시기와, 날과,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다시 오실 때의 모습은 등과, 기름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신부를 맞이하는 신랑의 모습으로 다시 오십니다. 맡긴 달란트를 찾으시고, 정산하시는 주인의 모습으로 다시 오십니다. 선한 행위를 심판하시는 임금의 모습으로 다시 오십니다. 다시 오실 때에는 분명히, 반드시 심판주의 모습으로 심판의 왕으로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해야 합니다. 등과, 기름을 반드시 준비해야 합니다. 맡겨 준 달란트를 가지고 반드시 남겨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라도 선한 행실의 믿음의 흔적을 반드시 남겨야 합니다. 지금 기다리며, 준비해야 합니다. 내일로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 여러분, 남은 생애의 삶의 모습을 어떻게 살아가시렵니까? 등과, 기름을 준비하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맡겨 준 달란트를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사용하기를 바랍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까지 주님에게 하듯 선행을 베풀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생명이 다하는 그 날에,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에 주님의 즐거운 잔치 자리에 초대를 받으시고, 많은 것으로 보상을 받으시고, 창세전부터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시고, 영생의 자리에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말씀은 목사님들의 설교와 참고자료를 인용하여 올린 말씀입니다.
세션 내 연관 기사 보기
편집국
Latest posts by 편집국 (see all)
- [나은혜 칼럼] 핑크빛 KWMI 한국대면말씀기도회 - 09/06/2024
- [나은혜 칼럼] 한여름의 의자나눔 프로젝트 - 08/21/2024
- [김현태 칼럼] 그가 걸음을 멈춘 까닭은? - 08/21/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