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1)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주기도문은 기도의 초석입니다

 

 

주기도문(1)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주기도문은 기도의 초석입니다

마태복음 6 : 9 13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6: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들어가는 말

(우루과이의 한 작은 교회당 벽에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1. 세상 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하지 마라.
  1.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우리 아버지라고 하지 마라.
  1.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라고 기도하지 마라.
  1.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며라고 하지 마라.
  1.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지 마라.
  1. 죽을 때까지 먹을 수 있는 양식을 쌓아두려 하면서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하지 마라.
  1. 누구에겐가 아직도 노여움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하지 마라.
  1. 죄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지 마라.
  1.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하지 마라.
  1.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는 삶을 살지 않으면서 아멘이라고 하지 마라.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가장 먼저 만나는 자연스럽지 못하고 당황스러운 것은 눈을 감고 기도 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신적인 존재(하나님)을 대상으로 대화를 한다는 것이 그 내용에 있어서도 그렇고 그 방식에 있어서도 그렇고 평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신앙생활을 오래 하셨다는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보면 묘한 운율과 사람마다의 독특한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이것을 모방하자니 우스워 보이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창조하자니 어렵고… 기도는 여러 가지로 복잡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많이 하신 분들이라도 공중기도(혹은 대표기도)는 어렵게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들 앞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이 무슨 웅변을 하는 것과 같은 느낌도 들고 그 내용에 있어서도 어떤 것을 기도해야 하는지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기도에 대한 기초적인 이야기들부터 하고자 합니다. 기도(祈禱)는 한자로 의미하면 무엇인가를 신적인 존재에게 빌고, 구하여서 성취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란 종교 행위인데, 자신의 목적을 신적인 힘을 빌어 와서 성취하기 위하여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는 행위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기도의 의미이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기도는 그 의미가 좀 다릅니다. 바깥에서 보기에는 불교에서 하는 기도나, 서낭당에 지성을 드리는 것이나, 교회에서 기도를 드리는 것이나 다 잘되기 위한 방법이 아니겠느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기도는 결코 세상에서 말하는 그런 것이 아님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줄거리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았으며 그 목적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 기쁨이 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렇기때문에 인간은 그 목적에 합당하게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형성했을 때만이 기쁘고 행복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금지하신 선악과를 따먹은 것인데, 선악과 자체가 인간에게 저주를 주었다기보다는 선악과를 따먹는 행위가 곧 하나님을 의심하는 행위이며 배신하는 행위였기 때문에 그것이 죄인 것입니다. 조금 더 말씀드리면 처음에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시고 그것을 다스리는 권세를 처음의 사람 아담에게 일임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 말씀은 이러한 전권위임의 명령입니다. 우주 아래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우주는 하나님뿐 아니라, 아담에게도 복종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에 신분적인 차이를 나타내셔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선악과였던 것입니다. 이 선악과는 하나님은 법을 만드시는 분이고 인간은 그 법을 순종해야 한다는 묵시적인 상징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그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창세기 3장 3절 말씀에,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대답하는 말이 나오는데 “선악과를 따먹으면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2장 17절 말씀에는 분명히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와는 이미 유혹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또한 아담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금지를 알고 있었는데도 하와가 주는 선악과를 거절하지 않고 따먹었으니 이것은 그의 마음에도 하나님을 배반하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결국 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로 자신들을 지으신 창조주의 사랑을 거절하고, 의심하며, 배반한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은 인간과의 관계를 단절하셨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더이상 인간을 돌아보시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보다는 원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사랑받아야 할 인간이 심판과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자녀들을 양육하다 보면 아이들이 부모의 의사를 따라주지 않을 때 가끔은 이런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이해하게 될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건강하고 착해서 부모를 보면 밝게 웃어주는 존재가 되어주기를 바라는데, 가끔은 아이가 부모 보기에 미운 짓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부모와 자녀 사이의 온전한 관계가 깨어져서 사랑과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 미움과 징계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 깨어진 관계가 다시 회복되기 위해서는 용서와 망각이 필요합니다. 서운한 것을 두고두고 기억하면 용서하기도 어렵고, 용서한다고 하여도 다시 미움이 살아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인지라 잘 잊습니다. 그것이 이런 면에서는 복입니다. 자식이 서운하게 한 것, 형제지간에 나쁜 기억들을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의 관계를 지속하고 함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우는 어떠할까요? 완전한 지식과 기억력을 가지신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지 않고 잊으시는 법이 없습니다. 아담의 죄, 다시 말하면 수 천대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핏줄의 죄에 대하여도 하나님은 기억하시는 것입니다. 이 죄의 사슬, 다시 말하면 핏줄 속에서 연결되어진 온 인류의 죄의 저주를 끊어버리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는 삼위일체(三位一體)라는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쉽게 이해되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으로 존재하시고 각기 온전한 인격과 영광을 가지고 계시지만 하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더럽혀진 인간을 용서해 주시기 원하였고, 그래서 그 용서의 방법으로 자신이 직접 그 죄의 심판을 받는 것을 택하셨습니다. 고전적인 이야기에 보면, 자녀가 죄를 지을 때 그것이 바르게 가르치지 못한 자신의 죄라고 회초리로 자신의 종아리를 때렸다는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그 죄의 무서운 결과인 죽음을 자신에게 짐 지우셔서 인류를 용서하시고 또한 죄의 무서움을 깨닫게 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세워진 것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公義)와 사랑이라는 두 가지의 속성을 모두 만족시켰습니다. 한편으로는 죄에 대한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정의를 선포하신 것이고,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났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가리켜 대속(代贖)의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십자가를 바라보고 믿는 사람을 대신하여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말입니다. 죽음의 결과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대로의 죽음뿐인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세워서 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마음으로 느껴 돌이키는 자마다 예수님의 죽음을 그 사람의 죽음으로 여기시고 새로운 용서와 생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 사실에 대하여 아무리 예수님이 대단한 존재라지만 어떻게 한 사람이 모든 인류를 대신할 수 있느냐? 인간은 모두 평등하게 존엄하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간과한 오류에서 생겨나는 질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100만 마리의 양이 있다고 했을 때, 만일 그 사람의 친아들을 납치한 납치범들이 있어서 아들의 생명과 양 100만 마리의 생명을 바꾸자고 한다면 바꾸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피조물인 인간의 생명이 아무리 많이 모인다고 하여도 어떻게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가지셨던 그 생명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이루신 놀라운 구원을 전하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 믿음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켜 줍니다. 죄가 깨뜨린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자식과 아버지의 관계로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서두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부름의 호칭은 결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사용하지 못했던 호칭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 관계에 기초하여서 우리가 하나님께 대화를 나누는 것이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우리 구원의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또한 마음의 원함(기원)을 하나님께 알려드리며, 죄를 고백하고 양심의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 기도를 통하여 우리 마음에 자유와 평화를 주시고, 우리가 혹시 잘못된 것을 간구 할 때에 옳은 길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의사를 알려주시는 방법은 기도할 때 마음에 느껴지는 양심의 깨달음도 있지만, 성경을 읽는 중에 성경에 드러난 원리를 통해서이기도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솔로몬이라는 지혜로운 왕은 세상이 점점 발달한다고 하지만 정작 인생이 살아가는 원리는 반복적인 것이라서 “해 아래에 새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부정과 부패, 억압과 고통, 인간의 감정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똑같은 패턴으로 반복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통하여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은 고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를 향한 뜻이기도 합니다.

진정한 기도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보다는 아빠가 모든 것을 옳고 지혜롭게 판단할 것입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판단보다 하나님의 판단이 옳고 지혜롭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인간적인 눈으로는 퇴보이며, 실패인 것 같을지라도 인생의 전체를 놓고 보면 꼭 필요하고 유익한 과정이며 가르침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을 정성을 드려서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의사를 버리고 하나님이 나의 삶과 인생을 통하여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실천하기 위하여 그분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어렵고 힘든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받아들이려면 많은 고통과 노력을 필요로 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대화하면 할수록 내 의견보다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의견이 옳고 정확하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시기 때문에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변화를 동반합니다. 기도는 묘한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힘이 보호하고 일하는 것을 느끼게 만들어 줍니다. 막연한 일들이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풀어집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건강하게 하고, 정신을 맑고 기쁘게 해줍니다. 확신을 줍니다. 처음의 아담처럼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로 회복된 사람만이 기도할 수 있기 때문에 자부심과 용기를 줍니다.

기도하는 것이 처음에는 다 어색합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산가족 찾기에서 잃었던 아버지를 오랜만에 찾은 자식과 비슷한 태도를 연상합니다. 처음에는 얼싸안고 무조건 울며불며 감격하지만 막상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어색함이 감돕니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막연합니다. 아버지라는 호칭이 낯설고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피는 물보다 진하듯이 시간이 지나면 점점 그 내면에 흐르는 사랑과 연민을 느끼게 될 것이며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처음 기도하는 것은 어색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것이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이 될 것이며 자연스러운 대화가 되어갈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배경 이해

예수님이 사셨던 시대에 이스라엘에서는 훌륭한 스승들이 제자들을 교육하는 것이 유행과 같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스타일의 교육에 익숙하였으며 대체적으로 암기에 의한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통적인 교육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스승들을 유대인들은 랍비라고 부릅니다. 유대인들은 각 지역에서 훌륭한 스승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자식들을 위탁하였으며 그들은 스승을 따라다니며 수년씩 가르침을 받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이렇게 교육받아 스승의 이름과 견주는 랍비로서 인정을 받기 시작하면 그것은 유대인에게 있어 가장 존경받는 성공이었으며 민중에게 있어 정신적인 아버지가 되는 명예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대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름을 따라서 가족과 생업을 버려두고 당장 따라나설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유대인의 전통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승의 가르침(설교)들을 하나씩 가슴에 새겨 그대로 전달하는 메신저의 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그 가르침을 해설하는 해설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1장 말씀에는 마태복음 6장에서와 같은 주기도문이 나옵니다. 그곳에서는 제자가 예수님을 향하여 먼저 요청하였는데, 그것은 세례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가르쳐 주었던 것처럼 자신들에게도 기도문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랍비들은 자신들의 제자들에게 지혜로운 기도를 가르쳐 주어서 규칙적이며 습관적인 기도를 하도록 교육하는 것이 보편적인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문은 다른 랍비들의 기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함께 질적으로 다른 많은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이 기도문을 연구하고 묵상하는 중에 놀라운 영감과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수없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문을 주셨다는 사실은 몇 가지로 오늘의 우리에게 교훈이 됩니다.

첫째, 기도에는 모범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의 기도 모델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는 이 사실이 보다 명확하게 나타나는데, 예수님은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기도에 반하여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는 명령으로 주기도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우리의 의도를 하나님께 아뢰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받아 깨달아가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인격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시며, 이 만남의 결과는 곧 우리의 삶을 가장 아름답게 만드는 변화입니다. 이 만남이 인격적이기 때문에 인격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말을 많이 하거나, 기도에 시간을 많이 쏟아서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진실하고 명확하게 말할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십니다.

이런 점에 있어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자세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가를 주기도문을 통하여 보여 주셨습니다. 이 자세한 내용들은 앞으로 주기도문의 내용들을 하나씩 음미하면서 함께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기독교의 기도는 중구난방(衆口難防),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눈을 감고 간구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에는 올바른 자세와 마음가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러한 것들의 모델을 주기도문을 통하여 보여주고 계십니다.

둘째로, 기도의 중요성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그분은 종교적이며 외형적인 형식들을 결코 좋아하시지도 않고 긍정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배격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믿음을 규칙화하여서 하면 안되는 일과 해도 되는 일들을 분류하고 자신의 규칙에 합당하지 못한 사람들을 정죄하여 자신의 우월성을 나타내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종교도 오래되면 항상 기득권층이 존재하고, 부패와 타락이 그늘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모든 부패에 대하여 도전하셨습니다. 항상 예수님은 인간들의 규칙에 대하여 왜? 라는 질문을 던지셨고 원래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목적에서 벗어나는 것들은 결코 인정하거나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을 교회에서는 “개혁 정신”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곧 종교개혁의 정신이며, 오랫동안 교회를 지켜온 주체적인 마음의 내용인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이 제자의 요청을 받고 기도문을 주셨습니다. 혹시라도 제자들이 이것을 잘못 이해한다면 마치 귀신을 쫓아내는 주문(呪文)이나, 형식적인 우상이 될 수 있는 위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규정된 기도를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사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기도문을 예배 마칠 때마다 하지만, 그 원래의 정신과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외우기만 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것은 바로 우려되었던 오용(誤用)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예감하셨을 것이면서도 이렇게 기도문을 가르쳐 주셨던 것은, 바로 기도가 그만큼 중요한 것이라는 의미라는 말입니다. 다소 부작용이 있더라도 그것을 무릅쓰고 더 큰 가치를 위하여 주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주기도문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아주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바쁘고 힘든 중에서도 항상 기도의 시간을 구별하셨고, 기도를 하시면 밤을 새우며 눈물과 통곡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생활 태도가 바로 주기도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지기를 원하신 것이며, 그 안에는 기도를 값지게 여기시는 마음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기도의 계시적 성격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기도하는 당사자는 나 자신이지만, 기도는 결코 내 의사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사대로, 예수님의 의사대로, 성령님의 의사대로 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것이 성령님을 통하여 적용됩니다.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영(靈)인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이미 성령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그러한 생각을 가지도록 의도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고자 결심하면 성령은 우리의 마음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느끼게 하시며, 우리의 생각을 바꾸시고, 우리가 더 성숙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인도해 가십니다. 그래서 진정한 기도를 하려면 내 마음 가운데서 함께 기도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으면서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지혜로운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성경은 성령님을 많은 칭호로 나타내고 있는데, 이 칭호들이 아마도 성령님이 하시는 일들을 보다 확실히 아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님은 변호자(우리의 죄와 잘못에 대하여 하나님께 변호하심), 상담자(우리 마음의 문제와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심), 위로자(슬픔과 고통에서 참된 평안을 주심), 중보자(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서로의 이해를 도우심), 보호자(죄와 사탄의 권세에서 우리를 보호하심)로 불리어지십니다. 이러한 호칭들은 특별히 우리가 기도를 통하여 얻고자 하는 목적과도 밀접한 연관성이 있기때문에 기도는 반드시 성령님과 함께해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기도의 성격을 아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뜻을 접어두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기도문을 통하여 기도의 올바른 정신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주기도문은 예수님의 12 제자들이 교회를 섬겼던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독교 신자들의 입을 통하여 고백되어 지는 공적인 유일한 기도입니다. 처음 기독교가 로마의 박해를 받았던 시대에도 신자들은 하루에 세 번씩 규칙적으로 주기도문을 고백하였으며, 주기도문에 대하여 처음으로 해석을 달았던 주석가 터틀리안(AD155- 220)은 이 주기도문을 가리켜 “전 복음의 요약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주기도문 안에 성경 전체가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주기도문 안에는 심오한 기독교의 사상적 풍부함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 안에는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진리의 힘과 겸허하게 하는 깊은 깨달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 주기도문을 함께 살펴보는 동안에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서 일하심으로 함께 그 모든 풍요함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서론 부분인 주님의 명령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주기도문의 서론에서 주기도문의 구성과 내용, 그 사용의 주의와,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주기도문의 구성과 내용

그리스도의 말씀은 하나님의 역사(役事)처럼 무궁무진합니다. 외견상으로는 어린아이와 야만인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만 그 이면에 깊은 의미가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정신을 집중하여 살펴보면, 그리고 이 모든 의미를 알아보려고 노력하면, 우리가 파란 창공을 바라볼 때 마치 하늘이 열리듯이, 우리가 물속의 투명한 암흑을 굽어 꿰뚫어 볼 때 마치 바다가 열리듯이, 이 말씀의 의미가 열리게 됩니다.

지극히 부족한 자들과 지극히 연약한 자들이라도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강력한 도움에 관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지극히 마음이 깊은 이들이 경외와 사랑의 마음으로 이 말씀을 묵상해 보면, (그리고 온갖 시대의 경험에 의하면) 이 말씀에는 언제나 새롭게 다가오는 깊은 진리가 있으며 아직도 배우지 못한 많은 내용이 숨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마시고 마셔도 다함이 없는 샘물 같고, 배불리 먹고도 남는 기적의 떡과 같습니다.

이것은 특별히 주기도문에서 그러합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면 그들은 이 간단한 주기도문을 작은 두 손을 합장하고 혀짤배기 발음으로 잘도 암송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내용을 깊이 묵상하면 할수록, 그리고 이를 우리 기도의 모본으로 삼고자 애쓰면 애쓸수록, 그 충만하고 풍성한 의미가 더욱 놀랍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옵소서”라는 제자들의 간청에 따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누가복음 11:12). 이 주기도문의 내용 구성에 대해 먼저 살펴봅시다. 이 주기도문은 마태복음에 의하면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기도의 대상을 부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입니다.

둘째는 기도의 내용으로서,

그 전반부는 하나님에 관한 간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이며, 그 후반부는 인간에 관한 간구, “6: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입니다.

셋째는 송영,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입니다. 주후 3세기의 라틴 교부 터틀리안은 주기도문을 가리켜 ‘전 복음의 요약’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인격과 삶과 모든 사역을 대변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나라를 전파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고,

-인간의 사죄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시고, 마귀와 대결하여 투쟁하는 일생이었습니다.

주기도문에는 이러한 것을 위한 간구가 있습니다. 주님의 삶이 우리의 삶이 되고, 주님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주기도문 속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와 세상에 관한 하나님의 목적을 밝혀 주는 지극히 고상한 계시가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인간의 관계, 기독교 신학과 윤리 및 기독교적 사회와 정치의 초석들이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 죽음의 시간과 심판의 날을 위한 힘과 용기가 여기에 있습니다.

– 하늘 아버지의 마음이 지닌 영원한 깊이에 대한 계시가 여기에 있습니다.

– 우리 자신과 우리 형제들을 위한 머나 먼 미래에 대한 예언이 여기에 있습니다.

– 지극히 사소한 요망 사항을 위한 도움과, 매일의 의무를 위한 빛이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이 기도에서 우리의 영적, 또는 육적 행복을 위한 어떤 것도 빠져있지 않습니다.

-주기도문은 하나의 [신학]으로서,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온갖 무가치하고 잘못된 사상을 산산조각으로 깨뜨립니다.

-주기도문은 [신앙에 관한 강해]로서, 그 정신을 마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고집과 죄를 버리게 합니다.

-주기도문은 [사회 윤리의 근본 초석]으로서. 참된 인간애의 유일한 토대로 군림합니다. 이 기도의 분위기 속에서 사는 사람은 모든 인류에 대한 자비와 도움의 손을 뻗치는 삶을 영위합니다.

-주기도문은 [개인 생활의 지침]으로서, 온갖 인간 욕구의 상대적 가치 및 가치순서를, 그리고 이와 아울러 우리가 추구할 일과 삶의 목표의 순서 및 종속 관계를 권위 있게 밝혀줍니다.

-주기도문은 하나의 [기도]로서 온갖 영역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완벽한 7가지 간구 속에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야만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담고 있으며, 그 모든 내용은 하나님의 신적 이름에 기초를 두고 있고, 또한 그 모든 내용을 감사의 합창으로 종결시키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하나의 [예언]으로서, 이 세계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질 나라, 투쟁하고 범죄하고 근심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온갖 악에서 최종적으로 구원받을 나라로 변화될 것이라는 지극히 숭고한 환상을 펼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다 사용할 수 없을 만큼 이 기도는 넓고 광대합니다. 시대마다 자신들의 새로운 임무와 복잡한 문제들에 대한 교훈을 이 간단한 몇 마디 말씀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천국에서 쓸모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기도를 바르게 사용하기 위해 그 의미를 완전하게 궁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기도를 해석하십니다.

기도에 대한 기본이해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입니다. 예수께서는 본문의 주기도문을 통해서 우리의 기도에 분명한 형식과 순서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형식과 순서, 그리고 그 내용과 의미는 무엇일까요?

  1. 기도의 형식에 대한 모본

본문에 나오는 기도는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의 형식에 대한 모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특성을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간결성, 명확성, 그리고 단순성입니다.

1) 간결성

참된 기도의 기준은 기도의 길이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기도의 신실성과 열성에 있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많이 말하는 것이 곧 많이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적게 기도해도 거기에 진실한 마음만 깃들어 있다면, 그것이 바로 훌륭한 기도요 참된 기도인 것입니다.

2) 명확성

이상적인 기도는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자신의 요구 사항을 알리듯이 솔직하고도 직접적으로 자신의 간구를 하나님께 알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기도의 대상에 대한 정확하고도 명확한 인식을 전제로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에 대해 명확히 인식할 때만이 솔직하고 직접적인 기도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단순성

본문에 나오는 기도는 교양 있고 학식이 높은 사람들만 드릴 수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는 단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용이 빈약하거나 천박한 것이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기도의 의미와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풍부하고 심오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어야 하지만 그 형식은 단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기도의 순서에 대한 모본

본문의 기도는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떠한 순서를 따라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함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위의 필요를 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며, 그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법을 배우게 될 때 우리의 삶은 위대한 승리를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1. 영에 관한 교훈

무엇보다도 기도의 힘은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드리는 중심과 마음, 그리고 정성과 영혼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려면, 우리는 영으로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과 맑은 영으로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는 능력 있는 기도가 될 것이며,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우리의 아버지’라는 표현은 이러한 사실에 대한 강력하고도 함축적인 강조입니다.

주기도문의 사용과 주의

주기도문은 삶의 필수적인 영역을 다 포함하는 포괄적인것이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도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분별하게 보편적으로 누구나 사용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기도는 처음에 특정한 집단으로 뚜렷이 구별되는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오순절 후 날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들었으며 사도들은 “그 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교회의 규모가 커지고 전통이 세워지고 박해의 위협이 더해짐에 따라 입교자의 세례(침례)를 받는 밤에 주기도를 가르치는 것이 관습이 되었습니다.

주기도문은 이교도까지 포함하는, 누구나 할 것 없이 함부로 외어대는 기도가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러합니다. 모든 기독교인은 실제로 주기도문을 알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어린 시절부터 주일학교에서 배웁니다. 그러나 그 기도의 참된 의미를 알고 기도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어느 원로 목사님은 목회 만필에서 ’19세에 예수님을 믿고, 주일학교 교사, 집사, 권사, 장로로 목사가 되어 90세가 되는 오늘까지 주기도문을 수없이 외워왔으나 금년에 와서 주기도의 깊은 뜻을 확실히 깨달았다. 철들자 망령이라더니 참으로 만각이라고 하시면서 나의 깨달은 것을 여기에 적는다’고 했습니다.

말틴 루터의 저작집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는 ‘나는 오늘까지 어린아이와 같이 주기도에서 젖을 먹고 있다. 노인이 되어서도 이 기도에서 먹고 마시지만 아직도 더 먹고 마시려고 갈망하고 있다. 이 기도는 최고의 기도이며, 내가 매우 좋아하는 시편보다도 더 좋아한다. 이 기도는 확실히 한 참된 스승만이 만들고 가르치셨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스승의 기도가 세상의 전 지역에서 그렇게도 무례하게, 경솔히 재잘거리는 것이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한 해 동안 주기도문을 수천 번이나 기도하고, 그들이 천년동안 그렇게 기도하기를 계속한다 할지라도 주기도문의 일점일획의 진정한 맛도 맛보지 못하는 기도를 얼마나 많이 하고 있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모든 사람이 이 기도를 남용한다. 이 기도를 적절하게 사용함으로서 위안과 복을 얻는 사람은 극히 적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씀을 생각할 때 보통 일어나는 의문은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지만 언급할 필요를 느낍니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기도의 한 형식을 만들고자 하셨습니까? 아니면 오로지 한 실례를 들고자 하셨습니까? 어떤 교회(영국 국교회)는 한 형식이라고 말하고, 어떤 교회(비국교도들)는 한 실례라고 말합니다. 이 기도문이 한 형식이든 아니든, 주님의 주요 목적이 단어들을 규정하는데 있지 않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라는 것은 단순히 그 내용을 반복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둘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이 기도를 하나의 형식으로 주셨다기보다는 한 실례 또는 하나의 모델을 제시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명령이 가지는 그 중요한 의미는 주님이 우리의 기도를 구두로 짜 맞추어야 할 형식(틀)을 주셨는지, 혹은 우리가 기도할 때 그에 준해 간구를 올려야 할 어떤 개요를 주셨는지 하는 문제보다 깊은 것입니다. 또 단어 하나하나 자체를 기도 시에 사용해야 하는지의 문제는 각자와 각 교회가 알아서 결정할 일입니다.

이것은 일정한 기도의 형식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고상하고 참된 기도 방법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죄우 될 것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형식을 사용한다 하여 그것이 최고도의 영성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습관적으로 기도의 틀을 사용하는것, 특히 오로지 그 형식으로만 기도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그러한 틀 속에 안주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쓸데없이 중언부언하는 이교도적 기도 형식의 교정책으로 주어진 이 주기도문 자체가, 모든 기독교 국가에서 바로 이러한 이교도적 과오의 가장 서글픈 한 실례가 되고 말았다는 점은 심각하고도 아이러니칼한 문제입니다. 주기도문과 아베 마리아를 외우는 횟수가 공로에 비례한다고 생각하는 일부 천주교인들과 주기도문을 수백, 수천 번 암송하는 기도를 하면 놀라운 영적 경험을 한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듣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와 유사한 미신적 습관이 없습니까? 이런 어리석고 위험한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마무리

이렇게 기도하라의 진정한 의미

“그러므로”에 해당하는 접속사 “운”은 ‘그러므로, 그러면, 따라서’를 뜻하며, 여기서 어느 의미로도 가능하지만 ‘그러므로’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앞서 말씀하신 것과 이 주기도문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이렇게”에 해당하는 “부사 후토스”는 ‘이렇게, 이러한 방식으로’를 뜻하며, 일반적으로 상관관계가 있는 구문에서 앞에 있는것을 가리키기도 하고 뒤따르는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본문 말씀에서는 우리 주님께서 앞에 말씀하신 것과 동시에 그가 지금 가르치고자 하는 주기도문과 관련시키고 있습니다.

“이렇게”라는 말에 포함된 가장 중요한 사상은 기도에서의 삶의 정신과 주님께서 이 기도를 가르치시기 직전에 말씀하신 신자의 삶과 그 정신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주기도문에서 보여준 삶의 정신으로 기도하고 생활해야 합니다. 세속심에서 자신의 욕망과 세속적 소원을 토로하는 것은 우상 앞에서 할 일입니다. 자신의 욕심에 끌려서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만족을, 고상한 삶보다는 저급한 삶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몸부림치며 울부짖는 일이야 말로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리고 기도의 자세. 순서, 방법, 언어 등을 배워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라”에 해당하는 동사 “프로스케스데”는 ‘기도하다, 간청하다’를 뜻하는 프로스코마이의 명령 중간태 수동태 디포넌트 동사이며, 자신이나 타자와 관련하여 행해진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주님께서 “기도하라 “명령하신 것은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하시는 것이며. 또한 기도 응답의 약속입니다. 전능자 우리 주님의 명령이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기만 하면 확실히 기도는 응답되고 은혜와 복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기도의 정신을 흡수한 자들, 자신의 만족에 앞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는 자들, 하나님의 손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면서도 자신의 영적 굶주림을 채울 양식을 위해 탄원할 줄 아는 자들은, 이러한 주기도문의 용어들을 사용하든 하지 않든 확실히 “이렇게” 기도하게 됩니다.

이 기도문은 세상을 수위에 두고자 하는 우리의 어리석은 욕망을 버리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기도의 진정한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뜻에 맞추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과 조화되도록 굽히는데 있습니다. 분명코 자아 부정과 순종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일진대, 그 점은 종교의 지성소라 할 수 있는 기도에서 가장 잘 표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께 이것저것 해달라고 일방적으로 간청하거나 명령하는 정욕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영광을 첫째로 두고 나는 둘째가 되는 기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따르는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기도는 그리스도의 엄청난 요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이대로 기도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의 삶이 우리의 기도를 뒷받침하고 확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슴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에너지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을 가장 고상한 목표로 삼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의 심장 속의 피가 세상적인 것들을 향한 뜨겁고도 정열적인 욕망을 품어내고 있습니까?

혹시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영혼 속에 아무런 욕구도 불붙이지 못하고 우리의 삶을 다스리지도 못하는, 어떤 꿈결 속의 대상으로 보이지는 않습니까? 기도하는 우리는 우리 자신과 기독교계와 사회에 어떤 선한 영향을 발휘해야 합니다. 주님은 자신을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드려지는 모든 기도에 영감을 주시고 응답하십니다.

가장 빈약한 기도라도 진심으로 아버지를 구하는 마음에서 나온다면, 그리고 죄를 자백하며 구원과 순결을 구한다면, 나아가 자기 아들을 보내신 하늘 아버지의 큰 사랑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기를 소원한다면, 그 기도를 주님은 ‘이렇게’ 드리는 기도로 인정하실 것입니다. 주여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살고 이렇게 기도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이 설교는 목사님들의 설교와 참고자료를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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