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계명,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11)
제8계명 : 도둑질하지 말라 : 개인 재산의 보호
출애굽기 20 : 1 – 17
들어가는 말
가정을 사랑하고 보호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점점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였는데, 제7계명에서 가정의 성스러움을 지키셨던 하나님께서는 이제 “도둑질을 금지”하심으로 가정에 속한 물질까지도 보호하고자 하셨습니다. “도둑질하지 말라” <로 티그노브> <로>는 부정의 부사로서 강한 “금지 명령”을 나타내며 <티그노브>는 “훔치다, …에 도취시키다”라는 뜻을 지닌 <까나브>의 칼형(Kal:기본형) 2인칭 남성 단수 미 완료형인데 부정의 부사와 결합하여 “금지명령”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문자적 번역은 “훔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입니다. “도둑질하다”라는 말인 <까나브>의 기본적인 의미는 어떤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을 그의 동의를 얻거나 알리지도 않고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몰래 행하는 도둑질에 한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명령은 단순히 은밀하게 혹은 공공연하게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탈취해 가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부주의함이나 무관심 때문에 발생하는 손상 그리고 사기로 남의 물건을 탈취하는 행위를 모두 금하고 있습니다(출애굽기 22:13, 23:4). 또한 이 명령이 단순히 외적인 행동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내면의 마음가짐까지도 그리스도께서는 진실하게 이루라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5:21).
이 계명은 하나님이 진리의 하나님이며 그의 피조물인 인간 모두가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시는 계명입니다. 또한 사유 재산권에 대한 보호를 나타내는 계명입니다. 도둑질에 대한 형벌에 관해서는 첫째, 출애굽기 21:16, “사람을 후린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라”(사람을 도둑질한 경우), 둘째, 출애굽기 22:1, “사람이나 소나 양을 도둑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셋으로 갚을 지니라” 출애굽기 22:4, “도둑질한 것이 살아 있으면 소나 나귀나 양을 무론하고 갑절을 배상할지니라”. 계약법에 나오는 도난 대상들을 보면 “사람”(출애굽기 21:16), “소나 양”(22:1), “나귀”(22:4), “돈이나 물품”(22:7), “의복”(22:9) 등이며 이는 농경문화, 화폐 체제를 반영해 줍니다.
인간은 자신이 수고하여 얻은 것은 오로지 자신의 것이며, 이와 같은 이유로 또 어떤 다른 것은 이웃에 속한 다른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웃에 대한 우리의 세 번째 의무는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각 계층이 존재하고 있는 사회는 사유 재산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사회 질서는 여기에 기초를 두고 세워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부는 주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여 주는데 그 존재의 가치가 있는 것이며 정부가 없으면 자연히 습격을 받게 되며 또한 그들을 징벌할 수도 없게 될 것입니다. 도둑질은 어느 나라에서나 징벌을 면하지 못합니다.
본문 말씀에서 재산의 사유권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것이 되며 현대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부는 착취다”라는 구호에 대해서는 철저히 반대되는 사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도둑질”의 근본 원인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것에 대한 불만족”인데, 이러한 불만족 때문에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타인의 재물을 탐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제8계명을 주신 목적은 주석가 “캘빈”(Calvin)이 설명한 대로 “자신의 재산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듯 엄하게 금하신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는데도 인류에 의해 저질러진 최초의 죄가 도둑질이었으며(창세기 3:6),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기록된 최초의 죄목 역시 “아간”의 도둑질이었고(여호수아 7:21), 신약의 초대 교회에서 저질러진 첫 번째의 죄 역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도둑질(사도행전 5:2)이었을 만큼 인류가 저지른 죄의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죄가 바로 도둑질이었습니다.
한편 일반적으로 도둑질이라 함은 “은밀하게 혹은 공공연히 다른 사람의 재산을 빼앗는 것”을 말하는 성경에서의 의미는 그보다 훨씬 넓어서 유괴(신명기 24:7), 착취 또는 고리 대금업(아모스 8:5), 횡령(미가 2:2), 하나님께서 받아야 할 영광이나 다른 사람이 받아야 할 칭찬을 가로채는 일 (잠언 3:27, 말라기 3:8), 그리고 심지어는 게으름과 낭비까지도 도둑질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도둑질에 대한 형벌로 일반적으로 물질을 훔친 자는 훔친 것의 다섯 배에 해당하는 배상금을 내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출애굽기 22:1-4), 유괴죄는 사형에 처하는 등(신명기 24:7) 특수한 절도죄는 특수하게 배상하였습니다.
줄거리
“도둑질하지 말라”
여덟째 계명에서부터 십계명은 인간 생활의 본질적인 여러 사실에 대한 논의를 그치고 인간 상호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보다 덜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논의로 넘어갑니다. “보다 덜 중요한”이라는 말을 썼다고 해서 그 문제들이 대수롭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생명이 음식보다 중하다”는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계명들은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거나 어떤 방법으로든지 사람의 생명 자체에 해를 끼치는 죄들을 금하였습니다. 따라서 모세의 율법하에서는 앞의 일곱 계명 중 어느 하나라도 위반하면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세계명을 어기는 범죄에 대해서는 사형이 가해지지 않았는데, 이 사실은 처음 일곱 계명이 상대적으로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하나님은 예배와, 하나님 자신과 예배자와의 관계를 가장 중요한 문제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범죄한 인간의 반역적인 속성은, 인간이 제정한 법이 죄의 중요성의 순서를 뒤바꾸어 왔다는 사실에 의해 뚜렷하게 입증됩니다. 오늘날 모든 나라의 법령집을 보면 재산을 보호하는 법이 생명을 보호하는 법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사람이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거나, 참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예배하거나, 혹은 참 하나님을 예배하더라도 그릇된 방법으로 했다고 해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확실히 부당한 일일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적극적인 훼손 행위가 공적인 입장에서 전혀 죄로 간주되지 않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설교자가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말에 대해서는 몹시 분개하는 어조로 비난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할 경우 대체로 청중은 감동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불경건의 죄를 그와 같은 어조로 비난한다면 필시 대부분의 회중은 불쾌해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죄는 다른 모든 죄가 생겨나는 근원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고력을 갖춘 사람들은 깊이 생각할수록 하나님의 뜻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고 노인들은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생명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 안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다 인정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계명의 상대적인 가치에 관해서는 충분히 말씀드렸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인간의 소유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여덟째 계명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도둑질하지 말라.” 이 계명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면밀하게 살펴볼 절박한 필요가 있습니다. 즉 훔친다는 실제적인 행위가 점점 더 저속한 일로 간주되고 있는 반면에 도둑질의 방법은 더욱 늘어나는 것이 현대의 특징으로 나타나고, 사람들은 도둑질을 권리 이상의 어떤 특별한 능력으로까지 왜곡시켜 말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장사의 재능”(business acumen), “거래 관행”(the habit of the trade), “제국주의” (imperialism)라는 말은 모두가 다 훨씬 더 사실을 그대로 표현하는 단어인 “도둑질”이란 말을 쓸 수 있는 상황하에서 대신 쓰여진 표현들입니다. 심지어 실제적 도둑 행위 자체에 대해서도, 도둑질하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신분이 아주 높은 사람이라면 사람들은 그의 병적인 도벽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관습을 도둑질을 엄격히 금하고 있는 하나님의 명령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 통념에 가리워진 진실을 찾아내어 “도둑질하지 말라”는 명령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를 직시해 보아야 합니다. 먼저는 이 명령 자체를 생각해 보고 다음에는 이 명령에 대한 신약의 해석을 살펴보며 마지막으로는 이 명령을 우리 시대에 적용시켜 보고자 합니다.
여덟째 계명의 이해
이 명령은 우선 첫째로 개인이나 집단의 소유권을 전제로 합니다. 따라서 이 하나님의 명령은 무정부주의의 창시자인 프루동(Proudhon)의 “소유물은 도둑질한 물건이다”라는 말이 거짓임을 입증합니다. 소유물은 도둑질한 물건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은 본래 소유할 수 있도록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보다 근원적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모든 재산은 하나님께서 만드셨으므로 실제로는 모두가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소유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할 때는 누구나 자신의 소유물 중에 하나님이 간섭하실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 상호간의 관계에서 생각할 때는 타인이 간섭할 수 없는 배타적인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 여덟째 계명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소유권을 인정하는 까닭에 이 계명은 이 권리에 대한 어떠한 침해도 금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무엇인가를 소유하여 자기 것이라고 부르는 일이 당연한 사실로 인정될 때 그가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은 다음 세 가지입니다. 즉 누군가가 무료로 거져 주든가 아니면 수고에 대한 정당한 보수로서 얻든가 혹은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도둑질하여 얻는 방법입니다.
이 여덟째 계명은, 처음 두 가지 방법은 인정하지만 세 번째 방법은 금하는데 그 이유는 세 가지 방법을 검토해 보면 밝혀질 것입니다. 처음 두 방법은 인간 상호 관계의 근본적인 법칙 즉 사랑과 수고라는 법에 기초해 있습니다.
이 두 법칙 중 첫 번째 방법은 사랑의 법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상호간에 주고 받는 선물은 일종의 사랑의 표현으로서 그것을 받은 사람의 소유가 됩니다. 이 사회에는 아직 노동력이 없는 어린아이나 노동력이 상실된 불구자나 노인이 있는데, 이들은 사랑의 법에 의해 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장려하고 있는 구제와 같은 그러한 행동은 실로 그리스도인이 힘써 행하여야 하는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수고해서 얻는 것 즉 노동을 합법적인 대가로 지불하여 소유하게 된 것은 그것을 받은 사람의 정당한 재산입니다. 그러나 도둑질은 이 두 법칙을 모두 위반한 것입니다. 도둑은 자기가 물건을 훔친 사람을 사랑할 수 없으며 도둑질을 당한 사람이 도둑을 사랑한다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또한 도둑은 수고하지 않은 채 소유하려고 하거나 혹은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채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빼앗으려고 함으로써 수고의 법을 위반합니다. 이와 같이 이 여덟째 계명은 진정한 소유권 즉 사랑과 수고의 권리는 인정하지만 이 두 가지 법칙에 복종하는 조건을 제외하고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소유하는 것을 금합니다.
여덟째 계명에 대한 신약의 해석
이 계명에 대한 신약의 해석은 다음의 유명한 구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에베소서 4:28). 우리가 앞 단락에서 논의했던 바가 이 구절에서 한군데 모아지고 매우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을 즉시 알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대조법을 주의해 보십시오. 한편에는 그릇된 소유 방법인 도둑질이 다른 한편에는 참된 소유 방법인 수고하여 얻는 일과 그 소유물로써 구제하는 일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정당한 소유와 부정한 도적질 양자가 아주 뚜렷하게 구분됩니다. 이 구분에 따르면 수고하거나 구제에 의해 얻지 않은 재산은 모두 다 도둑질한 물건인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 있어서 사람들이 소유한 것은 모두 다 선물로 받은 것이거나 수고한 대가로 얻은 것이거나 아니면 도둑질한 것입니다. 이 원리를 우리 시대의 사회생활과 상거래와 국민 생활의 많은 부분에 적용시켜 보십시오. 그러면 도덕적으로 깨끗하다고 자랑하는 허다한 일들이 실제에 있어서는 엄청나게 부도덕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은 이 개념을 더욱 확대 해석하여 재산은 소유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그 잉여 재산을 무능력하게 된 형제 곧 일할 능력도 없고 도둑질은 더욱이 할 수 없는 형제에게 나누어 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수고해야 하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와 같이 “거룩한 나라”의 새로운 경제 법칙하에서는 단순히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만 일하고, 공동생활에서 약한 지체들과 함께 나누는 일 즉 구제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도둑질하는 사람입니다. 방금 한 말은 오직 현재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의 생활의 특성은 바로 자격 없고 무가치한 자를 돌보고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면류관을 그리스도의 머리에 씌워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으로서 궁핍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재물을 나누어주지 않고서는 자신의 왕에게 진정으로 충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덟째 계명의 현대적 적용
여덟째 계명은 개인의 소유권을 부인하는 모든 공산주의적 형태를 금하는 명령입니다. 물론 소유물이라은 말은 이 단원 전체를 통해서 아주 넓은 의미로 뿐 아니라 아주 단순한 의미로도 쓰였습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획득한 것은 크든 작든간에 무엇이든지 소유물입니다. 또한 이 사실은 선물이나 노동에 의한 소유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소유권도 있을 수 없음을 나타냅니다. 사람이 선물을 받거나 정당하게 수고하여 소유하는 것은 모두 다 여덟째 계명에 의해서 틀림없는 자신의 것이 됩니다. 따라서 현 소유자가 무상으로 제공하는 경우나, 자신의 수고의 보답으로서 얻는 경우 외에 어떤 재물이라도 소유하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도둑으로 낙인찍히고 그 행위에 상당한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다른 사람의 무상 제공이나 자인의 수고의 보답으로서 얻는 방법 외에 어떤 방법으로든지 재산을 획득하는 사람은 모두 다 도둑으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밖에 이 계명은 오늘날 자행되고 있는 다른 많은 형태의 도둑질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 단순한 절도 행위에 관해서 무엇인가를 말한다는 것은 거의 불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평범한 경 절도죄가 지방 형사 재판소의 재판을 통해 엄하게 처벌될 수도 있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실제로는 부정행위(dishonesty)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은 많은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범법행위를 하지 않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처벌을 염두에 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매우 도덕적인 사회에서조차도 몇 가지 평범한 도둑질은 하나님께 대한 범죄라기보다는 오히려 유감스런 실책으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한 가지 예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그 집에 있는 모든 책의 소유자에 대한 정밀 조사를 실시해 보는 것은 재미있기는 하나 매우 씁쓸한 일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빌려 온 책을 돌려주는 것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로 인하여 서가에 꽂혀 있는 많은 책이 실제로는 다른 사람의 책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이 생기는 이유는 사람들이 책을 빌려 오고서 돌려주지 않는 것도 도둑질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소유에 대한 부당 취득은 전적으로 도둑질의 죄로서 다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사람의 “가치”가 그 사람이 지닌 소유물의 정도에 의해 평가되는 이 시대에는 소유를 늘리려는 과도한 소유욕으로 말미암아 다른 문제에서는 매우 양심적인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있어서는 평상시의 정직이라는 행동 원리를 저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속임수나 부정직, 거짓말과 같은 것들을 일종의 사업 수완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조차 있습니다. 오늘날 상거래 활동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계명은 “도둑질하지 말라”가 아닌 “들키지 말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무게나 치수를 속이거나, 허위 광고(이것이 가장 일반적인 도둑질)를 하는 행위는 모두 여덟째 계명을 어기고 도둑질하는 일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사업체의 정당성 여부를 면밀하게 조사해 보지 않고 사업하는 자들에 대해 모두 여덟째 계명을 범한 죄인들이라고 판단하실 것입니다. 하물며 유령 회사를 세워 사기 행각을 벌리며 소비자를 유인하여 피해를 주는 흔해 빠진 엉터리 회사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다음에, 모든 종류의 도박 습관 역시 본질상 도적질에 속한 것입니다. 일종의 재산 획득 방법이라는 점에서 도박은 재산을 정당하게 벌 수 있는 두 법칙, 즉 사랑과 수고의 법칙에 어긋나는 행위입니다. 장난으로든지 내기로든지 도박을 하는 사람은 정당한 수고의 대가 없이 돈을 얻습니다. 따라서 그는 바로 그 행위에 의해서 자기가 돈을 따온 사람에게 강도질을 하는 것이며 사랑의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대적하는 원수들이 뻔뻔스럽게 얘기해 온 어리석은 말들 가운데 노름판에서는 아비도 자식도 없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또한 간과해서는 안될 한 가지 사실은 대부분의 경 절도죄와 대대적인 사기 행각이 바로 이 노름병으로 말미암아 자행된다는 점입니다. 모든 도박 행위의 원인이 되는, 땀 흘리지 않고 소유하려는 이 사악한 욕망만큼 오늘날 모든 사람들의 성실과 정직을 약화시키는 교활한 악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단호히 그리고 어떠한 변명도 용납함이 없이 모든 도박꾼들-그들의 도박 행위가 화려한 왕실에서 행해지건 더러운 빈민굴에서 행해지건 간에-의 귀에다 대고 이 여덟째 계명의 말씀을 큰소리로 외칠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도박꾼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명백히 도둑인 것입니다. 따라서 정직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도박꾼을 타인의 재물을 노략하는 도둑으로 여겨야 합니다. 또한 양도할 수 없는 인간의 권리를 빼앗아 수단화함으로써 재산을 모으는 행위도 모두 이 여덟째 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희생시켜서 모은 재산은 부당하게 번 소득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온전한 법에 비추어 볼 때 그런 재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명백히 도둑으로 낙인찍혀야 합니다.
이 계명은 거대한 노사 조직 내에서 하루에도 수없이 많이 깨어집니다. 오늘날은 다음과 같은 야고보의 말이 너무나 자주 아전인수격으로 인용되기도 합니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야고보서 5:4). 많은 노동자들이 임금을 받으면서도 그 임금에 해당하는 정당한 몫의 노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자기 주인의 재산을 약탈하는 행위는 슬픈 일이지만 실제로 많이 발생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여덟째 계명에는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에게 주는 이중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정당한 하루 노동에 대해서는 정당한 몫의 임금을 지불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정당한 하루 임금에 대해서는 정당한 몫의 하루 노동을 지불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 원칙들은 개인과 국가에 똑같이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이 여덟째 계명은 오늘날 세계 각국에서 점차로 뚜렷이 나타나는 그릇된 제국주의적 성향을 맹렬히 비난합니다. 강한 민족들은 까닭 없이 약한 민족의 땅을 약탈해 왔습니다. 약소국들은 실제적으로는 그렇게 할 권리가 없는 새로운 강대국들에게 통제를 받고 부당한 대우를 받아 왔습니다. 많은 나라의 사람들은 조용히 앉아서 자기 나라의 역사를 이 중대한 말씀에 비추어 검토해 보면 수치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는 사람들 즉 그리스도의 통치로 말미암아 공의로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기를 염원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선물로 받은 것과 수고해서 번 것에 대해 갖는 권리를 인정 함으로써 일상생활 가운데서 끊임없이 이 계명을 의식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형태이든지 간에 이 도덕의 원칙을 깨뜨리는 일에는 조금도 가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라는 단체는 사랑의 단체이지 도적질의 단체가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도둑질하지 말라”는 이 명령은 언제까지나 구속력이 있습니다.
“도둑질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라는 여덟 번째 계명은 우리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도둑질을 어떻게 정의하십니까? 큰 것은 아니지만, 사소한 것들을 도둑질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정말 우리는 도둑질과 관계없습니까? 십계명 연속설교의 열한 번째 말씀입니다.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우선 저 자신의 마음이 많이 찔렸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다시 한번 돌이켜 보는 시간을 갖기도 했습니다. “도둑질하지 말라”라는 여덟 번째 계명도 대개의 경우 나와는 상관없는 계명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 계명은 도둑질을 해서 감옥에 갇혀있는 죄수들에게나 해당되는 계명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도둑질이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상관없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내 양심의 눈이 열려지게 되면, 우리는 이 계명, “도둑질하지 말라”라는 명령 앞에서 온전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이 계명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서 어떤 기준, 어떤 근거에서 이 계명을 생각해야 하는지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도둑질의 문제를 어떤 근거에서 이해해야 합니까? 세상의 법의 기초 위에서입니까? 양심의 기초 위에서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위에서입니까?
- 세상의 법이란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요청 사항입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이 최소한의 규정마저도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 된 그리스도인들은 법의 기준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법을 지키는 것 만으로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양심을 말하기도 합니다.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 이 사람은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생각해야 할 이슈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양심인가?의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남의 돈을 수십만 불 횡령하고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강철 양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보다 예민한 양심을 갖고 있어서 남이 느끼지 못하는 아픔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도둑질하지 말라”라는 계명 앞에서 남들과는 다른 가책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Kierkegaard의 지적처럼 인간은 양심적이되면 될수록 자신이 비양심적임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양심도 천차만별이기에 어떤 양심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양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선인들은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이 시간 “도둑질하지 말라”라는 계명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볼 때 생각게 되는 것은 무디어진 양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어난 양심, 말씀의 조명을 받는 예민한 양심입니다.
- 이제 말씀의 조명을 받고 깨어난 양심의 기초 위에서
도둑질의 문제를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 도둑질이 무엇입니까? 국어사전을 보면 “남의 재물이나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거나 하는 따위의 나쁜 행위”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이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깨달아야 하는 도둑의 행위들을 살펴보십시다.
(1) 먼저 도둑질을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부당하게 취하는 것 혹은 갖는 행동으로 볼 때, 우리 생활 속에서 많은 도둑질의 모습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위에서 잠깐 살펴본 흔히 하는 말에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과연 그렇습니까? 물론 빌려주고는 아예 준 것으로 치부하고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남의 것을 부당하게 취하는 것이라면, 책 도둑도 분명히 도적질입니다. 세금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미국의 법은 소득이 있으면, 세금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으려고 온갖 거짓 보고를 하는 것은 분명히 도둑질입니다. 그 세금은 내 것이 아니라 나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절한 세금 납부를 위하여 여러 가지 길을 이용하는 것 그것은 도둑질이 아닙니다. 절세 대책은 도둑질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세금을 안 내려고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나라의 것을 내 것으로 갖고 있으니, 이것도 분명히 도둑질입니다. 남의 소유를 훔치는 것만이 도둑질이 아닙니다. 남의 소유를 부당하게 취하는 것도 도둑질입니다.
(2) 둘째로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여 공적인 것을 개인의 것으로 사용하는 것도 도둑질에 속합니다.
미국 사회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 가운데 하나는 공과 사의 엄격한 구분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회는 아직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한참 뒤떨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미국 정부에서 오는 우편물 가운데는 봉투 한 장에도 사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문구가 들어 있습니다. 편리를 내세워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 내 것이 아닌 공적인 기관이나 단체의 소유를 내 것처럼 사용하는 것, 도둑질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3) 또 남의 소유나 물건을 빌리고 갚지 않거나 돌려주지 않는 것도 도둑질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부당하게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의 돈을 빌리고 갚지 않는 것 도둑질입니다. 물론 갚고 싶지만 갚지 못하는, 갚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갚지 못하는 어려운 현실은 상호간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갚지 않는 것, 되돌려 주지 않는 것은 도둑질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빌려서라도 내 수중에 들어온 것은 다 내 것이라는 그런 마음을 우리는 “도둑놈 심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Credit Card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거저는 없습니다. 손쉽게 거저 얻으려는 것은 대부분 게으름에서 나옵니다. Credit Card 빚, 살 때의 좋은 기분은 잠깐이고, 갚는 오랜 기간은 부담입니다. 요즈음 Credit Card 빚은 떼어먹을 수도 없고, 또 떼어먹어서도 안 됩니다. 빌리고 갚지 않는 것, 혹은 되돌려 주지 않는 것 역시 도둑질입니다.
(4) 또 사업을 하면서 정직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폭리를 취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업을 하면서 내가 수고한 대가를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폭리를 취하는 것은 상대방의 돈을 정당하게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돈을 받을 만큼 받는 것, 즉 적절한 이윤을 남기는 것은 사업을 하면서 결코 죄짓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폭리를 취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폭리를 취하는 경우는 대개가 거짓이 담겨져 있습니다. 정당한 이윤이란 결코 허황되지 않습니다. 폭리와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동포사회를 보면서 안타까운 것은 사업을 팔고 사는 과정에서도 폭리를 취하려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업의 현황을 정직하게 알리고, 그 기초 위에서 적절한 이윤을 부치는 것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매상을 속이고, 또 몇 푼을 위하여 양심을 파는 것입니다. 남의 돈을 부당하게 취하려는 이 같은 행위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도둑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5) 또 한 가지 성경에서 말하는 도둑질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인간이 자기 것으로 취하는 것입니다. 이 도둑질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날 혹은 시간이요, 다른 하나는 재물, 십일조의 문제입니다.
1) 여러분, 주일의 의미를 아십니까?
주일은 주님의 날입니다. 내 날이 아닙니다. The Day of the Lord, 주님의 날입니다. 모든 날이 다 하나님의 날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일주일의 하루를 주님의 날로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주일은 시간의 십일조입니다. 그런데 이날을 자기 자신의 날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 마음대로 써도 되는 날로 착각을 합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이 하루마저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쓰는 시간의 도둑질이 아무런 가책도 없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2) 재물의 십일조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 3:8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겠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실상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것이 아닙니다. 나의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쓰라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관리인이지, 주인이 아닙니다. 이 같은 우리의 믿음의 고백을 우리는 내 수입의 1/10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고백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은 십일조와 헌물을 하나님께서 나의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2/10이라고 혹은 5/10이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1/10, 곧 십일조를 내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이것을 내게로, 하나님께로 가져오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1/10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온갖 이유를 들어 드리지 못하는 자신의 입장을 변명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혹시 성도 여러분 가운데는 제가 10계명 연속설교를 하면서 계속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죄책감을 주느냐 안 주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연 이 말씀이 성경적인 기초 위에 서 있는가? 아닌가?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설교에서 듣기 좋은 말만을 기대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입에 쓴 약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가책이 필요 없을 만큼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인생들이 아닙니다. 말씀 앞에서 나를 살피고 깨어나야 합니다. 그러기에 저는 서두에서 이 말씀의 기초는 세상의 법도 아니요, 적당한 양심도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깨어난 양심임을 말씀드렸습니다. 도둑질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내가 범하고 있기도 한 나의 이야기입니다. “도둑질하지 말라”라는 여덟 번째 계명은 케케묵은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 오늘도 말씀 앞에서 양심이 깨어나시는 분들 계시리라 믿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깨워 주시기를 빕니다. 과거에 도둑질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오늘 도둑질하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진심으로 호소드립니다.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 다 그렇게 사는데, 뭐 그럴 필요가 있느냐고 자신을 합리화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모르신다면, 그렇게 사셔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아신다면, 그렇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여덟 번째 계명을 계속 어기며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백성으로 우리들을 부르셨습니다. 세상의 법을 지키는 인생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회개한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도둑질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수 있습니까?
(1) 먼저 물질적으로 손해를 끼친 것, 빌리고도 갚지 않은 것, 지금 연락이 된다면 갚으시기 바랍니다.
남의 것을 부당하게 갖고 있는 것이 있으면 돌려주기 바랍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에 청산한다는 것 분명히 쉽지 않은 일입니다. 수치스러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시고 생각나게 해주시는 것이면, 꼭 갚기 바랍니다. 되돌려 주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9장 말씀에 보면 세리장 삭게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는 고백합니다.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남은 것을 억지로 뺏은 것은 4배나 갚겠다고. 그냥 입으로만 때우지 않았습니다. 죄송하다고 입으로만 말하지 않았습니다. 변상했습니다. 갚았습니다. 저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을 때, 이런 경험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다. 용기를 내셔서 변상할 것 변상하시기 바랍니다. 갚을 것 갚기 바랍니다.
(2) 그리고 회개하는 것은 과거를 청산할 것 뿐 아니라, 오늘 도둑질하는 삶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부당하게 이윤을 취해왔습니까? 비록 수입이 좀 줄어들더라도 정직하고 바르게 사업하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럼 없도록 새롭게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공과 사를 구분해 오지 않으셨습니까? 바로 구분하시기 바랍니다. 혼동과 적당주의를 청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해 오셨습니까?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와 헌물을 온전히 드리는 일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여러분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믿음을 위한 일입니다. 주님 앞에서 물질생활에도 거리낌 없이 서기 위해서입니다. 여덟 번째 계명을 주신 뜻은 사회 속에서 각자의 소유의 문제를 바로 세우시려는 데 있습니다. 건강한 인생, 건강한 사회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 계명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도둑질한 과거, 청산해야 합니다. 도둑질하는 현재, 중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진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이 길이 그리스도인들이 가야 하는 길입니다.
윤동주 시인의 널리 알려진 시를 소개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
잎 새에 이른 바람마저도 예민하게 느끼는 삶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입니다. “도둑질하지 말라”라는 여덟 번째 계명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입니다.
십계명의 여덟 번째는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현대 사회의 모든 나라들의 법이 도둑질의 죄에 대하여 강력하게 규제하고 있지만 본문 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좀 더 포괄적인 의미, 즉 직접 현실로 드러나지 않는 간접적인 도적질에 대해서는 거의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러한 경우를 몇 가지 살펴보면 생산자가 불량품을 양산(量産)하여 시판하는 것이나 허위로 과장되게 광고를 한다거나 또는 고용주가 계약을 악용하여 피고용인을 유린하다거나 피고용인이 고용주 모르게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 행동 등이 모두 간접적인 도둑질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을 부당한 방법으로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모든 행동이 이 법주에 속하는 도둑질입니다.
- 소유의 개념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국가를 제외하고 이 땅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국가들은 개인 재산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개인의 소유권은 자신이 땀 흘린 노력의 결과를 얻은 것이나 혹은 상속이나 타인이 증여한 것이거나 그 모든 물질을 모두 각 개인에게 그 재산의 소유권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이러한 재산의 소유권은 사회적 계약에 의해 법률로 명시되어 있지만 그 근원적인 개념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근본적인 구조를 통하여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뜻에 있는 것입니다. 재산은 노동의 산물인데 노동은 인간의 생존 수단으로 주신 것입니다(창세기 3:19). 그러므로 노동과 함께 그 소산물의 소유를 주셨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것이며 이로 미루어 볼 때 재산이 소유권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위임하신 개인의 권리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잠언 16:26, 에베소서 4:28, 디모데후서 3:10).
- 도둑질의 원인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여러 가지 원인 중에서 인간의 마음속에 충동에 따른 내적 원인과 외부에서 가해지는 외적 원인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내적 원인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의 것을 훔치게 하는 충동이 일어나는 요인을 살펴보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불신앙에서 말미암은 도적질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5-34절 말씀에서 우리에게 먹고 입고 마실 것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까지도 먹이고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그들보다 더욱 귀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공급하시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믿지 못함으로 자신들의 힘만을 의지하기 때문에 도둑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의 주 하나님께서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의 주관자이시라는 것을 이론이 아닌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염려에 위한 도둑질은 일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② 탐욕으로 말미암은 도둑질이 있습니다.
좀 더 좋은 것을 원하는 것은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분수를 넘어서 허영에 사로잡힌 마음은 욕망과 탐욕으로 가득 차 도둑질을 하게 됩니다.
2) 외적 원인
① 타의에 의한 도둑질이 있습니다.
세계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약욕강식의 지배 원칙에 의해 다스려진다는 것은 가장 불행한 일 중에 하나입니다. 이러한 원칙이 강한 힘의 소유자가 약한 자의 힘을 돕지 못하고 그 힘을 이용하여 약한 자를 도둑으로 만드는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② 사탄에게 지배된 도둑질이 있습니다.
사탄이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게 될 때 우리는 가룟 유다와 같이 주님을 파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사탄은 자기의 소유가 아닌 것으로 우리를 유혹하여 지배하려는 도둑의 가장 큰 우두머리입니다.
- 도둑질의 유형
불로 소득을 원하는 자들은 타인의 재산에 탐욕을 품게 되고 그 탐욕은 사람들로 하여금 재물을 탈취하는 도둑이 되도록 만듭니다. 이제 재물에 대한 도둑질의 유형을 살펴보면
① 사기성 도둑질이 있습니다.
② 남에게 유익을 주는 척하는 위선적인 도둑질이 있습니다.
③ 법의 후광을 엎고 행하는 도둑질이 있습니다.
④ 법을 악용하는 도둑질이 있습니다.
-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지 말라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1) 안식일을 도둑질하지 말라.
안식일은 하나님의 날입니다. 그리고 이날은 거룩히 지켜져야 할 날입니다. 그러므로 이날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는 것은 이날을 하나님으로부터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2) 영혼에 대한 도둑질
오늘날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영혼들이 이단들로 말미암아 유린당하고 도둑질 당하고 있는가를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먼저 믿은 자로서 나중 믿은 자들의 영혼을 잘못 인도한다면 또한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 어떤 교육보다 강하고, 그 어느 교육보다 앞서는 그 무엇이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부모의 정신과 도덕, 그리고 신앙은 그 아이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며 무엇보다 앞서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다른 모든 범죄와 달리 도둑질은 하나의 습관성입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어렸을 때 저지르는 자그마한 도둑질을 방관만 하고 고쳐주지 않는다면 그는 점점 커다란 도둑으로 성장하여 필경은 파멸로 이르게 되고 말 것입니다.
마무리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도둑질하는 삶을 살지 않겠습니까?
- 욕망이 욕심이 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의식주(衣食住)를 위해 가지는 마음은 하나의 욕망이 될 수 있습니다. 멋있는 옷을 입고 싶은 것,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 것, 좋은 집에 살고 싶은 것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준 좋은 욕망입니다.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누리면서 살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런 좋은 욕망이 지나쳐서 욕심이 될 때 이것을 위해 결국은 도둑질을 하고 맙니다. 야고보서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 부지런하게 일하는 삶의 정신과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0-13,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잠언 6:6,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잠언 26:15,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와 하느니라 그리고 성경에서는 더 적극적인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28,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주는 것을 배우기 전에는 우리 속에 있는 도둑의 악한 심리가 치료될 수 없다”
- 옳고 바른 물질관을 가지는 것입니다.
재물은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만 합니다. 돈을 우리의 종으로 부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2:15에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 비교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인생을 주셨습니다.
- 정직한 직업을 가져야 합니다.
- 도둑질한 것에 대해 보상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다음과 같은 귀한 말이 있습니다.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으나, 잠은 살 수 없고 책은 살 수 있으나, 두뇌는 살 수 없고 음식은 살 수 있으나, 행복은 살 수 없고 유흥은 살 수 있으나, 행복은 살 수 없고 십자가는 살 수 있으나, 구세주는 살 수 없고 예배당은 지을 수 있으나, 하늘나라는 지을 수 없습니다.”
* 적용을 위한 질문 *
- 오늘 우리 주변에서 흔히 발견되는 도둑질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 내가 범해온 도둑질로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 어떻게 하면 이 시대 속에서 제8계명에 순종하며 살 수 있습니까?
이 강해는 목사님들의 설교와 참고자료들을 정리한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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