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계명,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14)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

 

10계명,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14)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

마태복음 22 : 34 – 40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들어가는 말

오늘을 살아가는 현실의 삶에서 십계명이 주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십계명은 홍해 건너편에서 주어졌습니다. 이미 홍해를 건넌 감격과 뜨거운 체험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이들은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이 세상은 더 이상 바로가 통치하는 곳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보는 눈도 달라졌습니다. 자신들은 더 이상 바로의 종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총을 누린 사람들입니다. 마치 탕자가 집에 돌아와 아버지 품에서 용서받고 다시 새롭게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한 것처럼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은 사람들입니다. 십계명은 바로 이런 시각, 이런 관점에서 받게 되는 계명입니다. 이런 십계명의 본질적인 정신은 오늘 현대에서도 결코 달라질 수 없습니다. 탕자가 잔치를 치른 이후 어떻게 살 것입니까? 집에 돌아온 그 날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 것입니까? 십계명은 이에 대한 대답입니다.

예수님께서 십계명을 간단하게 정리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37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랑” 계명입니다. 요한복음 21:15에서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너는 이 모든 것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앞으로 목회할 때 기본 정신은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랑을 기본 정신으로 삼고 인생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고, 우상을 만들지 말고,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고,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고… 이런 계명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구체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이 계명들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둑질 하지 말고, 거짓 증거 하지 말고, 탐내지 말라… 이런 계명들은 정말 이웃을 사랑하라는 구체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이 계명들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진정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줄거리

그동안 십계명을 함께 생각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계명을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십계명의 결론은 여기에 있습니다. 가장 큰 이 계명을 나는 얼마나 따르고 있습니까? 오늘 나는 이 큰 계명에 순종하고 있습니까? 십계명 연속설교를 계획하게 된 중요한 동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의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는 삶의 모습, 구별되는 거룩함을 잃어 가는, 아니 그런 의식조차 없어 보이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도전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전하며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하는 삶의 모습을 되찾는 계기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의 말씀처럼 Boundary, 경계선을 잃어 가는 오늘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말씀 속에서 조명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동안 십계명은 케케묵은 옛날 이야기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서 각 계명들이 일깨워주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야 하는 인생의 모습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러분 함께 복습해 보십시다. 첫 번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입니다. 두 번째 계명은? “우상을 만들고 절하지 말고 섬기지 말라”입니다. 세 번째 계명은?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네 번째 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입니다. 이상 네 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지켜야 하는 명령, 살아야 하는 인생의 모습입니다.

이어서 제5계명, 다섯 번째부터 열 번째, 마지막 계명까지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 대하여 주어지는 명령입니다. 다섯 번째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여섯 번째 계명은? “살인하지 말라”, 일곱 번째 계명은? “간음하지 말라”, 여덟 번째 계명은? “도둑질하지 말라”, 아홉 번째 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 열 번째 계명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입니다.

성도 여러분, 마음에 남는 것이 있으십니까? 깨달으신 것이 있으십니까? 내 삶에서 변화된 것들이 있으십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주간을 보내실 때였습니다. 어느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구약은 수 많은 계명들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이 많은 계명들 가운데 무엇이 정말 중요한 것인지, 무엇이 가장 핵심적인 명령인지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물음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주저함이 없이, 막힘이 없이 대답하셨습니다. 첫 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와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본뜻이 달려있다.”(표준 새 번역)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모든 예언자들이 외친 메시지의 핵심을 성경을 인용해서 명쾌하게 일깨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신명기 6:5의 말씀이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은 레위기 19:18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두 말씀을 인용하셔서 구약 성경의 핵심을 정확하게 정리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열 가지 계명을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열 가지 계명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야 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가야 하는 삶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 그의 소유된 백성들에게 기대하시는 인생의 모습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구약의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율법사들이 율법을 아주 복잡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시험하기 위해 질문했지만 주님은 이들의 질문에 대해서 명료하게 설명하셨습니다.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두 계명이 성경 전체가 가르치는 핵심적 강령입니다. 성경 전체에 많은 말씀들이 있지만 딱 하나로 이야기한다면 바로 오늘 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우선순위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라는 것인데 이 순서가 매우 중요합니다.

자세히 보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따로 떨어져 있는 별개의 두 계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자연스럽게 이웃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놓쳐버리면 이웃 사랑도 온전해질 수 없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오늘 본문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핵심적 메시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라”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기면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관계를 열어가는 핵심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기 때문에 여기에 우선순위를 두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십계명을 살펴보았는데 1계명부터 4계명까지가 하나님에 대한, 5계명부터 10계명까지가 이웃에 관한 계명입니다. 질서 정연하게 우선순위를 두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관계에서 첫째 자리에 놓여 있기를 원하십니다. 사랑은 언제나 첫째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계명에서 살펴본 바 있습니다마는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관계로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질투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에 어떤 것도 끼어들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바로 맺혀지지 않는다면 율법 자체가 의미가 없습니다.

율법은 출애굽하여 광야의 여정속에서 새로운 가나안 땅에 살아갈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바로 구원을 경험한 사람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안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언약을 맺은 관계 안에서 이 계명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의 백성이 된 백성들에게는 이 명령들이 특권입니다. 부담이나 또 어떤 강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주어진 은혜의 시대에서 율법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한일서 5:3)” 구약시대는 계명이 무거웠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복음 안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계명이 무겁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면 서로에 대한 짐을 기꺼이 지려고 합니다. 없는 사랑을 긁어가지고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한일서 4:19)”고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일방적으로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먼저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사랑을 먼저 받은 사람이 사랑의 반응을 합니다. 사랑을 많이 경험한 사람은 사랑을 표현하고 전달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사랑을 받아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계명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쓰기 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경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랑을 먼저 경험하지 않고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종교 생활에 머물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처음부터 잘 배워야 합니다. 율법을 통하여 행함을 먼저 경험한 사람은 힘이 듭니다. 두려움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종교를 만들어 낸 것은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종교가 만들어진 겁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하기는 하는데 힘이 듭니다. 두려움으로 인해 신앙생활은 종교 생활이 됩니다. 교회에 의무감으로 오가는 하는데 즐거움과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삶의 첫 자리에 모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이 첫 자리에 오면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과의 관계 안에서 그분이 내 인생을 다 책임지시고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오락가락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돈이 없어 힘들다고 하나님에게 떼를 쓰기 전에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무엇을 달라고 하기 전에 이미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아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반응하는 것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만을 온전히 사랑한다면 하나님은 그 사랑 안에서 자유하게 하실 것입니다. 한 분만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에 모든 것을 걸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사랑에 빠져들면 저절로 하게 될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다.”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이 경험이 여러분들에게 있게 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제일 먼저 하신 일은 성전을 정화하신 것이었습니다. 이에 도전을 받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고자, 혹은 그분에게 망신을 주어 스스로 물러나게 하려고, 그들이 풀지 못하는 가장 어려운 질문들을 던졌습니다. 그래서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논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먼저 바리새인이 가이사에게 내는 세금 문제로, 다음은 사두개인이 부활 문제로 예수님께 도전했습니다. 이어서 지금은 바리새인이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것입니다. 이 대화가 논쟁에 속하는 이유는, 시험자가 예수님이 율법에 대해 어떠한 입장에 서 있는지를 검증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지도자, 특히 바리새인들에게는 예수님이 율법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셨는지 궁금했습니다. 사랑의 계명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다른 계명을 소홀히 하지 않으시는가? 그분은 안식일에 배고픈 제자가 곡식을 잘라 먹는 것도 허락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병도 고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심지어 간음한 여인까지 용서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이것은 간음자를 돌로 치라는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닌가? (요즘 용어로 말한다면) 그는 무 율법주의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자기 행위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그에게 율법의 기준, 즉 가장 큰 계명은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라 수상한 사람, 혹은 거짓 선지자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가장 율법에 박식한 바리새인 율법사가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마태는 질문자를 “율법사”(nomikos)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서기관(grammateus)보다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마가복음 12:28). 그는 율법 해석에서 명석하고 탁월한 학자입니다. 그가 정말로 율법을 올바로 이해했다면, 율법을 온전히 풀이하시고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능력을 이제 예수님을 시험하는 악한 일에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왔는데, 이는 예수님을 휘청거리게 하여, 그분으로부터 어찌하든 가르침에 있어서 잘못된 점을 잡아내려고 한 것입니다. 뛰어난 두뇌와 박식함이 이기적이고, 악하고, 사탄적인 일을 섬기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유럽의 매우 뛰어난 신학자들은 갖은 교묘한 방법으로, 예를 들어 성경을 비판(성경을 소위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방법)하여, 인간의 죄를 덮어버리고, 사람들을 실제적인 무신론자로 만들었습니다.

“어느 계명이 율법 중에서 가장 큽니까”라는 질문은, 유대인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이들은 구약에 나오는 613개의 계명을 순서대로 정리하고자 했습니다. 물론 작은 계명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율법 서로 간의 연관성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문헌을 통해서, 그리고 누가복음 10:25-28을 보면, 바리새인 사이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장 큰 계명이라는 데에 어느 정도 일치를 본 것 같습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여기에서는 다른 환경에서 다른 율법사가 지금 예수님이 하신 대답과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점에서 이 질문이 시험이 될까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예수란 자가 메시아가 아닌 한, 이 질문에 대해 분명한 대답을 줄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수없이 많은 바리새인 석학들이 오랫동안 연구하고 토론했을지라도 100% 정확한 결론은 나지 않았으므로, 예수란 자가 이 문제를 풀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마가복음을 본다면, 그러면서도 그는 혹시 “예수가 올바른 대답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약간의 희망을 가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아들의 대답을 들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은 자기를 시험하려는 의도를 아셨음에도 변함없이 진지하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이스라엘 사람들이 진지하게 고백하는 그들의 신앙고백을 가리키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성전에서는 제사장들이 매일 이 계명을 낭송했습니다. 유대인은 “쉐마”(신앙고백: 신명기 6:4-10, 신명기 11:13-21, 민수기 15:37-41)와 함께 이것을 하루에 두 번 낭송했습니다. 많은 유대인 순교자들이 처형당할 때 이것을 낭송했습니다. „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다“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이것은 바리새인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실제로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입니다. 다른 계명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표현, 혹은 실천입니다. 십계명의 순서도 이런 원칙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계명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마라.” 마태복음 22:37을 신명기 6:5과 비교하면, 또 하나의 흥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6:5의 “온 힘을 다하여”라는 표현 대신 예수님은 “네 생각을 다 하여”(개역 개정, 뜻을 다 하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신명기 6:5의 “힘”을 의지와 에너지와 목적 지향적인 “생각”의 능력으로 이해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인간이 가진 에너지는 자기 생각으로 응결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마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옵니까? 인간은 심히 죄악되므로, 마음으로부터는 악하고 더러운 생각이 나오지 않습니까? 혹은 심하게 질문하자면, 하나님은 무슨 권리로 인간에게 무조건적이고 철저한 순종과 사랑을 요구하십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실제적이면서도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것을 알려면 우리는 먼저 이스라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에 이 계명을 준 시점은 이스라엘이 40년 광야 생활을 마친 후, 약속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입니다. 그들은 요단 강 건너편 아라바에서 가나안을 바라보며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들에게 40년간의 그들의 반역의 역사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회상시키면서 이들을 대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해방 시키시어, 아름다운 가나안으로 인도하려 하셨습니다. 이들이 하나님 백성이요 제사장 백성으로 살게 하려고 아름다운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시종 불평과 반항으로 대응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들을 징계로 다스리셨습니다. 이들을 멸하시되 그래도 은혜로 소수의 순종자들을 남겨두셨습니다. 또한 2세대들을 살려주셔서 40년간 광야에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이들이 율법대로 살고 하나님 은혜로 사는 법을 몸에 익히도록 가르치셨습니다. 40년간 훈련을 받은 이들은 이제 약속의 땅인 가나안 입구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기들을 노예 상태로부터 구원해주셔서 40년간을 광야에서 보살펴주시고, 인내로 가르치신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도 출애굽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이러한 역사가 없다면, 우리는 이 계명을 이해할 수도 없고 실행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나를 죄악의 능력과 죄의 결과로 받는 심판으로부터 구원해주셨습니다. 인간에게 붙어있는 죄의 능력이 얼마나 큽니까? 여러분은 죄를 이기고자 피를 흘리기까지 싸운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피를 흘리고 아무리 발버둥 칠지라도 우리 죄의 능력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일생 죄의 노예로 살 수밖에 없으며, 죽음 후에는 영원한 지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받아야 할 형벌을 모두 그리스도께 넘기셨습니다. 그분은 나의 죄책을 지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이로써 나는 형벌을 받지 않습니다! 나는 형벌에서 면제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나로부터 받아 가셔서 대신 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나의 죄책만 지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순결한 피는 나의 마음도 씻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이기적이고 악한 생각이 솟구치던 그곳에서 사랑하는 마음이 나옵니다. 이렇게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의 피로 씻기지 않고서는 우리에게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거룩한 마음이 나오지 않습니다. 나를 위해 큰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리가 없습니다. 그분이 이루신 교회 공동체를 위해 마음과 물질을 드려서 희생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또한 이것이 가능하도록 우리 마음을 바꾸어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사역이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제 매일 우리 마음을 파고드는 악하고 이기적인 생각과 싸워서 물리치라는 삶의 방향입니다. 이것을 대충하라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목숨과 생각을 다해서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나의 삶의 전 영역을 하나님의 주파수에 맞추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나의 모든 계획과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이 일은 쉬운 일이 아니므로,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바라보고 따라가지 않으면, 이러한 삶은 불가능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먼저 이루신 사역(인디카티브)에 근거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온 마음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하는 데에서는 목숨도 아끼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자기 목숨을 주시고, 우리로부터 우리 목숨을 달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면, 이 명령을 피해서도 안 되고 피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와 예수님의 관계가 생명을 주고받는 관계이므로, 우리는 마음을 다해서 그분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둘째 계명으로는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그분은 이 말씀이 모세의 둘째 돌판의 요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현대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첫 계명은 결코 이웃 사랑과 같거나, 이와 함께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이웃 사랑이 제자들의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 사랑 „ 같은“ 무게를 가짐으로써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가장 크고 또한 첫 계명”입니다!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마음에서 진정한 이웃 사랑이 나올 수 없습니다.

또한 이와 반대로, 이웃 사랑이 없는 하나님 사랑은 가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서 넘치므로 이것이 이웃에게 흘러가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매우 독특한 방법으로 믿음과 행위를 하나로 묶으십니다. 야고보는 이 사실을 정확하게 깨닫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야고보서 2:17, 2:8).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 말의 원어 직역은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선지자가 달려 있다(걸려 있다)”입니다. 이 말은 십자가에 “달려 있다”(누가복음 23:39, 사도행전, 5:30, 갈라디아서 3:13)라는 말에 사용된 단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달려 있다”는 말로써,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선지자”, 즉 전체 구약이 명하는 모든 것이 달려있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마태복음 7:12, 로마서 13:9-10, 갈라디아서 5:14). 다시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의 계명은 다른 계명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계명을 요약하는 것이며, 각 계명 안에 이 정신이 들어있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계명을 지킬지라도, 그 행위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정신이 결여되었다면, 그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과 같다”는 대단히 무섭고도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큰일을 한다고, 능력 없이 보이는 사람을 도외시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 일을 한다고 심지어 폭력을 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이웃 사랑을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저촉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유럽의 기독교 후기의 기독교입니다. 인간 사랑을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립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은 사라지고 이웃만 남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결코 이웃을 올바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율법사”의 반응이 기록되지 않았지만, 마가복음 12:32 이하에서는 율법사가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진심으로 예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가 하나님 나라에 가깝다고 격려하셨습니다(34). 그는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왔지만, 예수님을 직접 상대하면서 마음을 바꾼 매우 적은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율법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의 화신이신 예수님의 율법 해석을 듣는다면, 그분께 매료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율법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율법 해석은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이렇게 진심으로 말씀을 사랑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눈에 들어옵니다.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서기관의 질문에 예수님은 지체 없이 하나님 사랑의 계명을 언급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도 항상 이 계명을 안에서 살고 계셨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실 수 있으시고, 또한 사랑하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이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계명을 실천하려면, 예수님이 하신 것을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예수님처럼 실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이 죄인에게 하신 헌신을 생각한다면, 정말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도 마음이 바뀌어 이것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적이며 부활의 능력이며 새 창조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부지런히 배워서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사랑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분명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인이어서 이웃에게 소홀히 하기 쉬우므로, 항상 이웃에게 신경 써서 대해야 합니다. 이들을 사랑하고자 애써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란 어떤 삶을 말합니까?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까?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는 계명, 그것은 바로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갖는 것 이상을 뜻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교리나 가르침을 믿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하나님은 어떤 개념이나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지으셨고, 역사 속에서 일하셨고, 오늘도 우리를 돌보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죽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오늘도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고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하시면서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이론으로 전락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논리나 사상으로 전락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도 이 예배 속에 함께 하시며 우리의 찬양과 기도를 들으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갖는 차원 이상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분과의 사귐입니다. 그분과의 교제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전 존재를 드려서 이루어지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전 존재를 걸라는 말씀입니다. 생각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입술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란 취미생활 정도가 아닙니다. 여가선용 정도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그만한 가치, 그만한 중요성밖에 갖지 못하신다면, 여러분 그런 하나님 믿으실 필요 없으십니다. 그런 하나님은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은 내가 만든 하나님, 우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 존재를 걸 만큼 중요한 분이시기에 믿을만한 가치가 있으십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내 뜻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계시다면, 그분은 나라고 하는 우상을 섬기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도 따르지 않겠다는 분은 하나님을 내 이익만도 못한 분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역시 내 이익이라는 우상을 섬기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란 우리의 전존재를 드리는 삶입니다. 생각만이 아닙니다. 느낌만이 아닙니다. 입술만이 아닙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야 합니다. 입술만이 아니라 손과 발,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요한1서 기자는 5:3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란 우리 자신을 위한 최선의 삶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benefit, 유익함을 얻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득을 얻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까? 목사입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득을 보실지 모릅니다. 목사도 득을 볼지 모릅니다. 그러나 제일 득을 보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람 자신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유익함을 얻고 득을 봅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에 사람들이 주저하고, 적당히 믿으면서 살아갑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면 무슨 득을 봅니까? 셀 수 없는 유익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생명을 얻습니다. 살맛나는 인생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왜 사는지 인생의 목적을 알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생의 길을 알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생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바른 가치관 위에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혼돈에서 벗어나 바른 질서 위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돈은 돈의 자리에 있게 됩니다. 돈에 매인 인생이 아니라 돈을 다스리는 주인으로 살아갑니다. 인기와 출세에 매인 종의 인생이 아니라 그것들을 바로 다스리는 자유인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는 죽음 앞에서도 끊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생명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 생명의 길이고, 진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득을 누리며 살아가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건강하고, 보람있게, 뜻 있게 살기를 원하시기에, 하나님께선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넷째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에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이 구원의 역사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약에 와서는 우리가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탄의 사건을 우리 가운데서 이룩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 Amazing Grace, 놀라운 은혜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십니까? 왜 우리의 신앙이 아직도 머리로 아는 지식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고민하시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교회 문턱만 밟고 왔다 갔다 하실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시여, 그 사랑을 체험하게 하시사,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 기도야말로 중요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야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가능케 하는 열쇠입니다. 기도하시며 주님의 도우심을 요청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제대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깨우쳐 주실 것입니다. 그 사랑을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어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삶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란 어떤 삶을 말합니까? 어떻게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도 사랑은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십계명에 보면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첫 번째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입니다. 가까운 곳에서부터 사랑하라는 주님의 뜻이 이 계명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여러분, 이웃 사랑이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이곳에서부터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사랑을 멀리 가서 베풀려고 합니다. 여러분,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아내부터, 남편부터, 또 자녀부터, 믿음의 가족부터, 교회 안에서부터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정직하게 말씀드리면, 멀리 가서 사랑을 베푸는 것은 오히려 쉬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까운 곳, 가까운 사람부터 사랑한다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려운 곳,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까운 곳에만 머물러서는 온전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폭과 영역은 넓어져야 합니다. 가까운 자기 자식 사랑은 짐승도 합니다. 사람이 되었다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면, 그 사랑의 폭은 넓어져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번째 이웃 사랑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관심입니다. 사랑은 관심에서 시작됩니다. 관심이 있는 한 사랑은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관심이 사라지면 사랑도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십계명은 다섯 번째 계명을 빼놓고는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혹은 소극적인 명령으로 되어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지니라. 도둑질하지 말지니라. 간음하지 말지니라 등등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계명들을 적극적인 명령으로 바꾸셨습니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씀입니다. 나 한사람 이웃에게 피해주지 않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의 폭이 넓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웃을 향해 관심이 열려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관심은 바로 이 사랑의 삶을 여는 열쇠입니다. 진정한 이웃 사랑의 삶을 사시렵니까? 여러분의 관심의 폭을 넓히시기 바랍니다. 눈을 뜨시고, 귀를 열어놓으시고 우리를 향해 손짓하는 도움의 요청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관심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이웃 사랑의 삶은 관심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나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내 것을 잘라서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본문 말씀은 누가복음을 보면 10:25 이하에 나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이 말씀에 뒤이어 유명한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는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나서 소유를 뺏기고 매 맞아 거의 죽게 된 지경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사장이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는 이 사람을 외면한 채 지나갔습니다. 레위인도 외면한 채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개처럼 취급받는 사마리아인은 이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맨 후, 그를 주막에 데리고 가 주인에게 돌보아줄 것을 부탁합니다.

이 비유는 두 가지, 첫째는 이웃이 누구인가? 둘째는 진정한 이웃 사랑이 무엇인가? 를 깨우쳐 주는 말씀입니다. 이웃은 나와 친한 사람이 아닙니다. 나의 도움, 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함은 내 것을 꺼내서 나누는 것입니다. 말이 아닙니다. 행동입니다. 삶입니다. 이웃 사랑은 입으로만 때우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편안한 친구, comfortable한 사람의 한계선을 뛰어넘어야 진정한 이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기 시작할 때, 내 것을, 사실 내 것도 아니지만, 자르고, 나누어주기 시작할 때 사랑의 삶은 시작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넷째로 이웃 사랑이야말로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길입니다.

여러분,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명령하신 것은 또한 우리들을 사랑하시기에 우리들을 위하여 주신 삶의 길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없는 세상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삭막합니까? 얼마나 메말랐습니까? 얼마나 고달픈 세상입니까? 사랑이 있기에 세상은 살맛이 있습니다. 사랑의 이야기는 사막 속의 오아시스와 같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 나아가 세상에 힘을 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원천입니다. 얼어붙고 싸늘한 세상을 녹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의 온기입니다. 사랑은 인간을 세우며,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어 갑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은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길입니다. 사랑하며 살 때, 우리는 진정 사는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두워져 가는 세상 속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땅을 포기하지 않고, 소망 중에서 다시 일어나 새 역사를 창조해 갈 수 있습니다.

마무리

십계명의 마지막 결론은 바로 우리 주님의 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다 같이 붙들어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을 바로 사랑할 때, 우리는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이웃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참으로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결코 케케묵은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계명들은 오늘도 우리의 삶에 중요한 길잡이가 됩니다.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적극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이 계명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아간다면, 이 계명을 무시해도 좋습니다. 신경 안 쓰셔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우리는 이 계명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발에 등이요 우리의 길에 빛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인생이 살맛 나는 삶입니다. 이 길이 뜻있게 사는 길입니다. 이 길이 인생이 마땅히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 길이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길입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해 가는 길입니다.

십계명과 우리의 사명은? 마지막으로 우리가 십계명을 지키는 이유는,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신 이유는 이들을 도덕적인 백성으로 만들기 위한 이유만 아니라 이들을 통해서 이 땅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제는 이들에게 십계명을 주심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들고 새로운 사회를 만듦으로써 이 땅을 새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십계명을 내게 주신 은총과 복일 뿐 아니라 내게 맡겨주신 사명입니다.

십계명은 어느 날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주신 도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큰 구원의 역사의 과정 가운데서 주신 사건입니다.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 복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에서 주신 계명입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면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애굽기 5, 6절) 하나님께서 이 십계명을 통해서 이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히 만들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이들을 제사장으로 삼아 열국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십계명을 주심은 이 땅을 구원하기 위하신 하나님의 뜻 때문입니다.

여기에 유대교의 문제가 있고 오늘 우리들의 문제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십계명을 자신들을 위해서는 사용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는 도구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고의적으로 거부했습니다. 오히려 십계명으로 세상을 멀리했고 세상을 멸시하고 정죄했습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충실히 지킴으로 이 땅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거짓을 몰아내고, 진실이 자리하도록 해야 합니다. 편견이 물러가고 공평함이 자리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십계명을 통해서 이 땅을 새롭게 해야 할 겸손한 파수꾼들입니다. 우리가 사회의 도덕의 기둥을 붙들고 있어야 하고 우리가 사회의 방향을 잡고 있어야 합니다. 사회가 도덕적으로 바로 되는 것은 우리 책임이요 교인들 책임입니다. 오늘날 미국 사회가 도덕적으로 혼란하다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정죄하시기 이전에 먼저 미국 교회를 향해 정죄할 것입니다. 당연히 미국 목사를 향해서, 미국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도덕적으로 바로 서 있느냐고 정죄하실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회가 도덕적으로 혼란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한국 교회를 향해서 정죄할 것입니다. 한국 목사들이 얼마나 도덕적으로 바로 서 있느냐고?, 한국 교회가 얼마나 바로 서 있느냐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흐름에 참여한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구원의 은총만 아니라 십계명을 주심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나아가 이 땅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십니다.

십계명의 바른 정신을 회복하심으로, 생명을 사랑하고, 가정을 회복하고, 바른 삶의 모습을 가지고, 이 땅의 청지기로서 살아야 합니다. 그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지상의 삶이 끝나는 그 날까지 십계명을 잘 지키면서 살아가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적용을 위한 질문 *

  1. 오늘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내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습니까?
  1. 왜 이웃 사랑하기가 힘듭니까? 이웃을 사랑하며 살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1. 십계명 연속설교 속에서 깨닫고 고친 삶의 모습이 있다면 함께 나누십시다.

이 강해는 목사님들의 설교와 참고자료들을 정리한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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