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숙생이라는 주제는 소설에서도 대중음악에서도 영화에서도 종종 다루어지는 주제이다. 인생을 살면서 자신이 하숙생으로 살아 보거나 혹은 하숙생을 집에 들여 하숙을 해본 경험도 적지 않을 것이다.
나는 20대 중반에 결혼한 후 4년만인가 집을 사게 되었다. 당시 보일러도 안되는 5층 단층의 주공 아파트였다. 방이 세개나 있는 그 17평 아파트가 왜그리 넓어 보였는지 모른다. 당시 4살 3살 연년생 아이들이 있어 4식구였지만 아기들이 어려서 안방 하나만 사용해도 충분했었다.
거실은 피아노와 남편의 책장을 놓고 서재로 쓰면 되었으니까 방 두개로 하숙을 해서 집을 살때 빌린 대출금을 갚기로 하였다. 남편은 독실한 CCC맨이어서 기왕이면 후배 대학생들을 하숙을 하면서 제자훈련을 하고 싶어 했다.
그렇게 해서 대학생 하숙생 3명이 우리집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조금 큰 방엔 두명의 학생이 사용하고 좀 적은 방엔 한명의 학생이 사용하게 되었다. 내인생에 있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숙집 주인의 경험을 갖게 된 것이다.
같은 그리스도인 형제이며 CCC맨 이었던 학생들이었기에 나는 동생을 데리고 있는 마음으로 밥을 해 주었고 매일 아침 남편것과 포함해서 4개의 도시락을 똑같이 싸 주었었다. 매일 밥위에 달걀후라이 하나씩을 올려서 도시락을 싸주곤 했었다.
하숙생 형제들도 자동차와 엘리베이터가 없는 그시절 내가 시장을 봐오면 종종 시장근처까지 시장본것을 들어주기 위해 형제들이 나오곤 하였다. 저녁엔 다함께 모여 기타를 치며 찬양을 부르기도 하며 한식구처럼 지냈다.
길지 않은 일년동안 하숙을 쳤지만 지금도 그 세 사람의 이름과 얼굴이 또렷이 기억이 난다. 그중에 한 형제는 후에 목회자가 되어 현재 서울의 한 교회에서 훌륭하게 목회를 하고 있고 지금도 서로 교류하며 지내고 있다. 정말 잊지못할 하숙생들이었다.
3일아침 눈을 뜨자마자 처음 접한 소식이 놀라웠다. 윤석열 안철수 후보가 새벽 3시에 단일화를 극적으로 이룬 것이다. 나는 어젯밤 마지막 대선후보 토론회를 지켜 보는 내내 마음이 답답했었다.
며칠전에 단톡방에 올라온 안철수 후보의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나도 단일화를 촉구하는 문자메세지를 보냈던 터였다. 안후보의 핸드폰으로 3만건의 문자가 왔다는 기사를 읽었다. 정권교체를 희망하는 국민들이 단일화를 촉구하는것이다.
“안녕하세요? 안철수박사님!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이 나라가 공산화나 사회주의화 되지 않도록 정권교체가 간절합니다. 안후보님이 역사속에 남을 위대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라며 이번에 윤석렬 대표와 단일화를 이루어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이것은 내가 안후보 핸드폰으로 보낸 문자 메세지이다.
애국시민들의 간절한 바램에도 단일화는 물건너 간것 같아 많은 사람들이 속상해 하고 있던 터였다. 마지막 대선후보 TV토론회까지 나왔으니 말이다. 이젠 더 이상 단일화는 없을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극적으로 단일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도 여당대표와 단일화를 할 조짐이 있다고 하여 애국 국민들은 저마다 실망하고 있던 터에 정권교체를 이룰 희망을 갖고 있는 야댱대표인 윤석열후보와 단일화라니 실로 깜짝 뉴스였다.
아침에 단일화 했다는 그 뉴스를 보면서 남편이 한마디 했다. “눈물이 다 나려고 하네” 얼마나 간절히 기도 했으면 점잖은 남편의 입에서 저런 말이 다 나올까 싶었다. 나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예요.”
그리고 누군가가 올린 단톡방의 글에서 윤석열 후보가 33살의 젊은 검사로 대구지검에서 근무했을때 머물렀던 하숙집을 찾아가 취재를 한 기자가 쓴 글이 올라왔다. 한마디로 지금은 80대인 하숙집 노부부는 윤석열검사를 ‘난망(难忘)의하숙생’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인격과 인성 품격은 지금이나 그때나 똑같다는 것이다. 부모연배인 하숙집 주인에게 부모에게 대하듯 했다는 것이다. 출근할때마다 “다녀오겠습니다.”하고 인사를 했고 연말엔 하숙집 부부를 초청해서 고급 중식당이나 한식당에서 음식을 대접했다고 한다.
매일신문 김병훈기자가 취재한 원문 일부를 올려본다. “박 씨는 “윤 검사를 우리가 2년 동안 겪었는데 지금 보태는 것도 빼는 것도 없이 인간으로서 가진 덕목은 거진 다 갖춘 사람이었다”며 “성격, 인성이 좋고 그리고 예의도 바른거야 사람이. 부모 교육을 굉장히 잘 받았더라고. 인정도 있고 의리도 있고 하여튼 젊은 사람이 그렇게 원만하더라 카이”라고 회상했다.
윤 후보는 출근길에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인사를 빠트린 적이 없다. 당시 초등학교 교사였던 권 씨의 외벌이로 살림살이가 넉넉하지는 못했는데, 윤 후보는 1년에 한 번씩 고급 중식당과 한정식집에 박 씨 부부를 데려가 식사를 대접했다고 한다.
박 씨는 “하숙생이 그런 사람이 어디 있노. 우리는 돈 다 받았는데”라며 “윤 검사가 퇴근하면서 전화로 나오라는데 우리 생전 처음으로 이 빙빙 식탁 돌리는 데를 갔지. 생각해 보니까 우리를 부모로 생각한거지. 하숙집 아줌마가 아니고”라고 했다.
윤 후보가 1996년 강릉지청에 발령받고 하숙집을 떠나던 순간도 기억이 생생하다. 박 씨는 “나가는 날에 책하고 뭐 이래 차에 싣고는 우리 내외가 너무 섭섭해가지고 이래 막 내다보는데 윤 검사가 선생님 잠깐만 앉으세요 이러는거야. 왜 앉아있게 하노 하는데 갑자기 큰절을 넙죽하는거야”라며 “그러면서 우리한테 잡비까지 내놓고 가더라고. ‘그동안 너무 고마웠습니다 감사했습니다’라고 하면서. 그런 하숙생이 어디 있나 감동하지. 우리끼리 진짜 희한한 사람이라고 그랬어”라고 했다.”
전직 학교교사였던 하숙집 주인은 선생님이었기에 윤석열 후보가 받은 가정교육에도 관심과 일가견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박 씨는 윤 후보의 인성이 모친 최정자 씨를 빼닮은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하숙비를 아들한테 보내면 될 건데 서울에서 직접 일부러 와가지고 고맙다 카더라고”라며 “한 번은(윤석열후보의 어머니 최정자여사가) “사모님 나도 내 아이지만 욕실을 온 천지 물 천지를 만들어서 짜증날 때 많은데 사모님이 아무 군소리 없이 우리 윤 검사를 잘 돌봐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더라니까”라고 웃었다. 윤 후보가 하숙집을 떠나기 직전 대구를 마지막으로 방문한 최 씨는 감사의 의미로 박 씨에게 금노리개를 선물하기까지 했다.
같은 아들을 둔 어머니끼리 자식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다.
박 씨는 “어머니가 윤 검사한테 누구한테든지 절대로 짜장면 한 그릇도 공짜로 얻어먹지 말라 캤다는거라. 검사 처음 월급 얼마 안 되잖아. 그런데도 돈이 모자라면 집에 돈을 갖다쓰더라도 절대 남한테 폐 끼치지 말고 훌륭한 검사가 돼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그러대”라며 “나중에 윤 검사가 2년 동안 집에서 돈 1천만원 가까이 갖다 썼다고 하더라니까. 얼마나 밥을 많이 사줬겠노. 우리한테도 대접한 거 보면”이라고 전했다.
(기자가)윤석열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바라는 것을 물었다.
그들은 “우리야 이제 얼마 살면 죽지만은 우리 자식들이 잘 살아야지. 대한민국이 비록 작지만은 선진국 대열에 섰잖아. 참으로 자식들 잘 키우려고 부모들 희생하면서 자식들 공부를 그리 시키는 나라가 어디 있냐”며 “정치만 좀 잘하면 된다. 윤 검사가 법과 원칙대로 잘 해가지고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됐으면 한다”고 했다.
난망(难忘)의하숙생을 추억하는 하숙집 주인처럼 나도 꼭 그렇게 소망한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단점도 많지만 장점이 더 많은 국민들이다. 악법을 만들어 국민들을 괴롭히지만 말고 자유롭게 살게만 두면 알아서 창의적이고 생산적으로 삶을 개척하고 발전시켜 간다(황교안전총리의말)
진심으로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 법치주의와 종교의 자유(기독교입국론포함) 가 지켜지는 나라가 되는 정상적인 나라가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나라가 이처럼 빠르게 잘살게 되고 발전한 것은 헌법을 잘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김승규전법무부장관은 말했다. 그 좋은 헌법을 잘 지키도록 정치하는 대통령을 기대한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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