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구 칼럼] 가깝고도 먼 나라

정성구 박사(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아베 전 일본 총리가 흉탄에 맞아 유명을 달리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 정계와 국민들은 망연자실했고 크나큰 슬픔에 잠겨 있다. 그리고 한국의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해서 각 정당들이 아베 일본 전 총리의 비보를 접하고 <명복>을 빈다고 조의를 표했다. 그러나 나는 목사로서 그에게 명복을 빈다는 말이 적절하지 않아서, 우리식으로 고인의 가족과 일본 국민을 위해서 기도할 뿐이다. 지난날 아베의 8~9년 동안의 정치는 한국 국민의 마음을 엄청나게 상하게 했다. 그는 한국에 대한 혐오 발언, 과거사 덮기, 개헌으로 자위대 부활, 독도 영유권 주장으로, 한일관계는 항상 껄끄러운 관계였다. 그래서 일본과 한국은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말이 늘 있어왔다.

해방은 우리가 싸워서 승리한 것이 아니고, 제二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원폭투하로 갑자기 자유를 얻었다. 때문에 우리는 해방의 자유를 얻기는 했지만, 자립 국가를 세울 수 없었을 만큼 혼란스러웠다. 왜냐하면 과거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람들의 서로 간에 세력 다툼으로 갈라지는 무정부 상태가 되다 보니 미 군정이 실시 되었다. 그래서 <신탁>과 <반탁>으로 갈라져서 해방의 기쁨이 없었다. 해방을 우리의 힘으로 이루지 못하고,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뜨린 원폭투하에, 일본 천황은 견디지 못하고 항복을 했다. 이로 인해 해방을 맞은 우리나라는 한 번도 자유민주주의 훈련을 받아 본 적이 없는 터라, 테러가 많았고, <반일이다>, <항일이다>를 놓고 정당도 갈라지고, 교회도 갈라지게 되었다.

1980년 때부터 나는 일본 기독교계에 많은 인맥을 쌓았고 교제하면서 여러 차례 일본 고배 신학교에 가서 특별강연과 설교를 했었다. 또한 일본 개혁파 교회 전도 국장인 <야마자키 준치> 목사의 초청을 받고, 일본인 교회에서 최초로 1일 부흥회를 인도한 목사가 되었다. 또 오사카에 있는 홍영기 목사님이 시무하는 <무꼬가와> 교회에서 3일간 부흥회를 인도하기도 했다. 일본신학교는 대부분 자유주의자들이지만, 개혁주의 신학을 파수하는 곳은 <고배 개혁파 신학교>였다. 그 학교 교장인 <류조 하시모토>교장은 나와는 국적을 떠나서 친형제처럼 지냈다. 그 이유는 내가 암스텔담 뿌라야 대학교에서 공부할 때, 재정적 후원을 해주신 메이스트(Meester) 목사님이, 앞서 공부했던 하시모토 교장이 공부할 때도 뒷바라지를 했었다. 메이스트 목사는 정통신학자요, 목회자요, 교회 지도자로서 주간 기독교 신문발행의 대표이기도 했다. 그는 나중에 신문에 글을 쓰기를, “나는 국제적으로 세 명의 친구가 있습니다. 미국에는 필라델피아의 코넬리우스 봔틸 박사가 있고, 일본에서는 류조 하시모토 교장, 한국에는 정성구 박사가 있습니다”라고 발표할 정도였다. 그래서 하시모토와 나는 국적을 달리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학과 신앙으로 한 형체처럼 교제했다. 당시 통역은 신종국 교수였다.

그리고 김은수 박사의 통역으로 <동경 성서그리스도 교회>에서 두 번 강의의 집회를 했다. 그 교회 목사님이신 <오야마 레이지> 목사님은 동경에서 가장 큰 교회를 일궈낸 학자로서, 책을 120권이나 집필하신 목사였다. 특히 그는 일본 헌병이 한국 제암리 감리교 성도들을 불태워 몰살시킨 것을 늘 가슴 아파하면서 제암리 순교기념교회를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그는 내 책 <한국교회 설교사>를 일본어로 번역해서, <요군, 羊群>이란 잡지에 내 글을 수년간 연재하다가 단행본으로 출판했었다. 또한 나는 일본 칼빈협회 초청으로 <생가리> 수양관에서 일본의 학자들 앞에서 칼빈 특강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내가 30~40년간 일본의 목사들과 교수를 만나고 교제하고 왕래해본 결과, 일본 그리스도인들의 숫자는 1%정도 이지만,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고 정직과 진실한 신행일치(信行一致)의 개혁파 신앙인들을 수없이 봤다. 그리고 일본인들의 사고는 굉장히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어서, <교의학>, <기독교 변증학>, <성경 신학> 학자들이 많으나, <실천신학>에 대해서는 부족하니, 나를 초빙교수로 가르쳐 달라고도 했다.

이처럼 하나님 아래에서는 국경과 인종을 초월해서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서로를 사랑할 때 선교는 이루어진다. 일본은 우리의 선교지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갔다. 단순 불순종이 아니라, 그의 생각은 ‘나 같은 선민의 선지자가 어찌 저 개보다 못한 이방 백성에게 복음을 외쳐야 하는가? 이것은 있을 수 없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가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풍랑을 일으켰고 급기야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를 체포했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은 요나가 가지고 있는 <선민의식>의 고정 관념을 깨부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고, 이방 백성인 니느웨 백성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일관계를 지나간 과거사에만 매여, 분노와 미움의 감정만 갖지 말고, 일본민족을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불쌍히 여겨 그들에게도 복음을 증거 해야 한다. 실은 일본은 우리보다 복음을 먼저 받은 나라이고, 한말에 이수정 외교관이 일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고, 최초로 요꼬하마에서 <이두 현토성경(懸吐聖經)>을 만들어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가져왔다.

일본에 대한 우리의 미움과 증오의 감정을 내려놓고, <사랑이 결국 승리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줄 때,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가 아닌,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가 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일본은 우리의 선교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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