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혜 칼럼] 푸쉬킨의 시(诗)와 장례비

올해 들어서 두번째달인 이번 2월에도 지출해야 하는 우리집 생활비가 턱없이 부족하다. 어떻게 하지? 나는 고민고민 하다가 문득 오래전 내가 가입해 두었던 상조회가 생각이 났다. 상을 당했을때 도움을 주는 상조회 말이다.

수년전 그러니까 2013년 8월인가였을 것이다. 어찌 어찌 알게된 ‘더케이예다함상조회’에 어머니의 장례비 준비를 미리 비축해 두어야 할것 같아서 가입을 하였었다. 매월 20,460원씩 현재까지도 불입하고 있던 터였다.

적은 금액이지만 자동이체로 매월 불입이 되어 벌써 9년째가 되었다. 금액을 합산해 보니 이달에 부족한 생활비가 얼추 될듯 했다. 지금까지 아무리 힘들어도 어머니의 장례비로 붓고 있던 상조회비까지는 해약할 생각을 한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그런데 나는 이달에 그 상조회비를 해약한 것이다. ‘산사람이 먼저 살아야지’ 하는 절실한 마음으로 해약을 신청했다. 상조회 직원은 어떻게든 해약하지 않도록 하려고 나를 설득하였다. 하지만 이미 생활비의 필요가 간절한 나는 그냥 해약해 달라고 하였다. 신기하게도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

그러자 상조회 직원은 오늘 저녁 6시까지는 다른 사람에게 위임을 하여 명의변경도 가능하니 위임할 다른 사람을 찾아 보라고 하였다. 나는 어머니의 장례비로 넣고있던 상조회비를 해약하면서 누군가에게 구구하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자체가 싫었다.

나를 위해서는 실손보험 하나 못들면서도 근 9년간이나 매월 꼬박꼬박 부었던 상조회비는 토탈 2,086,920원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성실하게 넣었는데 이자는 하나도 없고 온전히 원금만 되돌려 준다고 한다. 하지만 원금이라도 다 되돌려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9년전에 나는 맏며느리로서 무언가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예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던것 같다. 그래서 당시에 지금보다도 건강상태가 안좋으셨던 어머니가 혹 돌아가신다면 장례비를 준비해 두어야 할것 같은 생각에 상조회에 가입을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내 생각이 달라졌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어줄 자녀가 넷이나 있지 않는가? 살아계실때는 내가 모든 비용을 지불하고 모셨지만 돌아가셔서 천국입성 하실때 보내 드리는 예식인 장례식에 설마 장례비가 없어서 장례를 치르지 못할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장례비로 조금씩 모았던 돈을 해약해서 이번달 살아계신 어머니를 잘 모시는 편을 나는 택한 것이다. 조금 전에도 교회에서 돌아와서 먼저 어머니방에 들어가서 기저귀를 교체해 드리려고 하였다.

두겹으로 채워드린 기저귀인데도 변이 새어서 속옷이며 잠옷에 잔뜩 묻어 있어서 욕실로 모시고 가서 씻겨 드리고 대변 묻은 속옷들을 몇번이고 헹구어서 세탁기에 넣었다. 침구까지 똥물이 배어서 다 세탁을 해야 했다.

한참을 어머니의 대변처리를 하고 났더니 왼팔이 아프기 시작했다. 나도 이젠 젊지 않다. 물일을 많이 하다보니 손가락도 마디 마디 아프다. 부모님을 모신다는 것은 이처럼 몸으로 수고하는 희생과 함께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간다.

사실 어머니의 모든 대소변을 기저귀에 받아서 처리해야 하니 성인기저귀값도 만만치가 않다. 아무튼 나는 오늘 어머니의 장례비조로 불입하고 있던 상조회비를 해약하여 어머니를 섬기는 일에 쓰기로 하였다.

산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말이다. 다음달 살아갈 비용은 다음 달에 또 채워지겠지… 지금까지 그래 왔던것 처럼 말이다. 기적처럼 지금까지 살아온 지난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라왔다.

2007년 비자제한을 받아 예상하지 못하게 선교지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후 나는 제대로 된 거처도 없이 척박한 삶을 살았다. 처음에는 서울에 있는 한교회의 게스트룸에서 지낼 수 있었으나 시간이 길어지자 게스트룸에서 나가야만 하였다.

마침 장신대에서 신학대학원 공부를 시작한 나는 기숙사에 입소해서 지냈다. 4인 1실의 열악한 신학교 기숙사에서 살면서 주말에는 청주에 있는 대학교에서 유학생 사역을 하고 있던 남편 K선교사에게 내려갔다.

남편은 잠시 외국에 나가있던 한 가정의 문간방 하나를 월세 20만원을 주고 얻어서 살면서 유학생 사역을 하고 있었다. 그다음에는 그래도 좀 넓은 원룸을 구해서 그곳에서 생활했다. 비키니옷장 하나도 없는 행거에 옷을 걸어 두고 원룸에 살았다.

그다음엔 13평형 주공아파트에서 살게 되었다. 남편의 일신여자고등학교 교사시절의 제자들이 나서서 도배를 해 주고 자신이 나가는 교회에서 안쓰는 장롱이며 식탁이며 책장을 가져다 주어 살림을 차렸다. 지금도 우리는 그때 제자가 가져다 준 책장을 아직도 쓰고 있다.

그당시 프레임과 매트리스 합해서 십여만원 하는 싸구려 침대를 하나 구입했다. 그런데 누우면 뭔가가 몸을 찌르는 엉터리 같은 침대였다. 매트리스 안에 뭐를 넣었는지 누워서 자려면 딱딱한 나무 같은 것이 몸을 찌르는 것이다.

결국 서울로 올라와서 어머니집 근처에 반지하 빌라를 월세로 세들어 살때 나는 그 침대를 버리고 차라리 중고상점에 가서 에이스침대를 사기로 했다. 지금처럼 당근마켓도 없을때여서 중고 물건도 그리 싸지가 않았다. 그때 25만원을 주고 산 중고 침대를 거의 10년 정도 사용했다.

옷장이 없어서 비키니 옷장을 사러 간다는 나를 데리고 남편은 중고가게로 가서 중고 옷장을 25만원을 주고 사 주었다. 허름한 장롱이었지만 겉보기엔 깔끔해 보이는 장롱이었다. 그 장롱도 꼭 10년을 사용했다.

여름 장마철이 되자 겨울에 월세를 들었을땐 몰랐던 반지하 빌라가 온통 곰팡이 천지가 되어서 도저히 숨쉬기가 힘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새벽기도에 나가서 울며 기도한 응답으로 근처에 오래된 오층짜리 엘리베이터 없는 19평 아파트 2층으로 월세를 얻어 들어갔다.

좁고 낡은 아파트이지만 곰팡이가 없어서얼마나 좋았던지… 비록 세탁기도 없어서 매번 어머니집에 빨래감을 가지고 가서 빨아다 입곤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곰팡이 안피는 건조한 집에 살게 된 것이 기쁠뿐이었다. 그러다가 선교회 사무실겸 교회를 신월동에 개척하게 되었다.

교회겸 선교회건물은 매달 60만원의 월세가 나가야 하는 건물이었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 집의 월세 40만원까지 내기에는 너무 무리였다. 그래서 우리는 어머니가 사시는 빌라로 살림을 옮기고 들어가기로 하였다.

어차피 그동안에도 집은 따로 얻어 살았지만 식사는 이미 요리를 못하시는 어머니 집에 가서 준비해 드려야 했기에 살림을 합치는것이 합리적 이었다. 어머니가 사시는 빌라는 반지하였지만 그래도 다행으로 곰팡이가 피거나 하지는 않았다.

서재는 교회 사무실로 옮겨서 꽤 많은 책을 다 옮겨두고 13평 반지하 빌라인 어머니 집은 세식구가 잠을 자고 밥을 해먹는 숙식을 해결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거실도 없는 작은 집이어서 작은 4인용 식탁이 놓인 주방이 우리 가족이 교제하는 유일한 장소였다.

그곳에서 일년반을 살고 우리 가족은 김포의 풍무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아주 적은 돈을 넣고 미분양 된 아파트로 들어가게 되었다. 새 아파트는 따뜻하고 쾌적했다. 남의집 문간방으로, 원룸으로, 곰팡이피는 반지하 빌라로 전전하던 우리 가족에게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생활은 팍팍하다. 어머니의 장례비로 쓰려고 저축삼아 가입해 둔 상조회비를 해약해서 한달치 생활비로 써야할만큼 여전히 우리 가족의 삶은 만만치가 않다. 지난 한 해도 남편의 연금대출을 받아서 일년을 살았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드디어 이달까지만 넣으면 20년을 부어야 탈 수 있는 연금불입이 끝난다. 선교지에서 돌아와서 8년간 연금을 불입하지 못하고 있다가 한교회의 후원으로 나머지 연금을 다시 넣기 시작해서 드디어 20년을 채운 것이다.

하지만 연금을 타는 것은 아직도 만 이년이나 남아 있다. 2024년 1월부터 연금을 받을 수 있다. 연금만 매월 나와도 우리 가정의 생활이 훨씬 나아질텐데 말이다. 이제 이년 동안을 어떻게 삶을 버티어 나가는 가가 관건이다.

뜬금없이 러시아의 대문호 푸쉬킨의 시(诗)가 생각난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 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기쁨의 날이 오리니…” 위의 시는 러시아 북서부에 있는 도시 상트 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 에 푸쉬킨의 동상이 있는 그 아래 쓰여 있는 시이다.

이 诗(시)가 고난 속에 있던 많은 러시아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고한다. 그리고 가난과 함께 마음 편할날 없이 살던 지구촌의 한 가정에서 자라던 나도 이 싯귀에서 위로를 받곤 했었다. 그런데 젊은시절 암송하던 푸쉬킨의 이 诗가 다시 떠오르다니…

푸쉬킨의 시의 하반절을 조용히 되뇌어 본다.”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되 현재가 될 그 미래에는 오히려 과거의 그날이 그리워진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럴것이다. 세월이 지금보다 더 흐른후 우리 모두는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 “라고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가르친다. 과거 현재 미래를 통털어 너의 모든 날들을 기뻐하라고 말이다.

“또한 모든 일에 감사만 하고 살라고… 그리고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낱낱이 보고 있고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 쉬지말고 기도하라”고(말씀드리라고)가르친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서 말이다. (빌4:6)

어머니의 장례비로 쓸 돈을 찾아 생활비로 한달을 살아내며 푸쉬킨의 시(诗)와 성경말씀으로 내 마음을 위로하고 격려하니 그래도 살만하다. 어제도 그러했듯이 은총의 태양은 오늘도 내일도 다시 떠오를테니까.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나은혜 선교사(지구촌 선교문학 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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