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여행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다. 선교지인 C국에서 우리는 주로 기차여행을 많이했었기에 추억이 많다. 그런데 나는 최근에 기차여행을 수시로 하게 되었다. 집을 대구로 옮기고 나서 매주 금요일 사역을 하러 김포로 올라가고 주일저녁엔 대구로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가정이 대구에 정착한 지 한달이 지나가고 있다. 이사짐만 내려놓고는 주말마다 대구에서 김포로 김포에서 대구를 오갔으니 몸에 무리가 되었나보다. 나는 지난 주간엔 장염이 걸려서 병원을 드나들며 지냈지만 아무튼 전과 다른 삶의 스타일에 열심히 적응중이다.
독자 여러분 가운데는 어떻게 사역지는 김포에 있는데 대구로 이사를 하게 되었을까 궁금해 하실 분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선교지의 어려운 여건속에서 살아온 우리 부부에겐 이런 일은 그리 어려운 일도 그렇다고 비합리적인 이상한일도 아니다.
첫선교지 H시에서 2년반을 사역하고 우리가정은 버스로 몇시간 가야하는 이웃도시로 이사를 한적이 있었다. 꼭 지금처럼 말이다. 사역을 하는 미션홈은 H시에, 생활을 하는 집은 N시에 두고서 매주말 사역을 하러 H시를 오가기를 수년간을 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합리적이냐 비합리적이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우리에겐 선교지에서 버텨내는 것이 관건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안전문제가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H시에서 N시를 매주 오가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던 것이다.
당시 나와 남편 K선교사는 매주 제자들을 먹일 음식을 준비해 가지고 H시로 가서2-3일을 머물면서 사역을 하고 N시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아직 학생이던 자녀들만 주말에 남겨두고 양부모가 다 부재한것이 옳지 못하다고 깨달아졌다.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후로 남편만 사역을 하러 가고 나는 집에 남아 자녀들을 돌보게 되었다. 주말에 사역을 하러 떠나는 남편을 배웅하러 나는 종종 시외버스터미널로 따라가곤했다. 허름한 점퍼를 입고 가방을 메고 제자들을 돌보러 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나는 아련한 심정으로 바라보곤 했었다.
선교지가 아닌 한국에 살았으면 멋진 양복을 입고 그럴듯한 자리에서 폼나는 모습으로 살았을 남편임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목사가 되기전 여고교사시절 남편의 별명은 베스트드레서(Best dresser)였으니까.
그런 남편이 선교지에와서 멋진 양복이 아닌 허름한 점퍼에 담배냄새가 자욱한 시외버스를 타고 힘들게 사역을 하러 떠나던 모습은, K선교사가 내 남편이기에 앞서 존경하는 선교사로서 나의 뇌리에 지금까지도 깊이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얼마전 남편의 퇴임을 몇 달 앞둔 어느날 이었다. 나는 거실앞 창가에 놓인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남편과 마주 앉았다. 내가 남편에게 질문을 했다. “당신은 올해 퇴임인데 퇴임하고 나면 무얼하면서 어떻게 살고 싶어요?”
남편 K선교사가 대답했다. “나는 퇴임해도 기도사역을 계속하고 싶어요. 그동안 근 4년간 매일같이 하루 4시간 이상을 나라를 위해서 중보 기도해왔는데 아직도 우리나라가 온전하게 되려면 40년은 더 기도해야 할것 같아요. ” 내가 또 물었다. “그럼 살고 싶은 장소는요?”
남편이 대답했다. “ 기본적으로는 당신이 살고 있는 곳에 내가 있는 것이지. 하지만 가능하다면 나는 대구로 가고 싶어요.” 내가 또 묻는다. “왜요?” 사실 나는 몰라서 묻는것은 아니다. 단지 남편의 입으로 나오는 말을 듣고 싶어서다.
남편은 “ 한참 아이들 키우느라 손이 많이 가는 딸을 도와주고 싶어. 아침마다 로아(첫손녀) 학교 데려다 주고 학교옆 서부도서관에서 책을 보다가 아이가 하교하면 집에 데려다 주면서 지내고 싶어. 기도생활은 어디서든 할 수 있으니까 말이지.”
내가 대답했다. “호호호… 그것은 당신의 소원일 뿐이지요. 결코 목적은 될 수 없어요. 내가 퇴임하는 기간인 2026년, 즉 앞으로 남은 3년은 김포에서 살아야해요.“ 그러자 그 말에는 남편은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남편은 삶의 원칙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늘 나에게 이야기하곤 했다. 즉 사람은 소원과 목적을 구분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소원은 소원으로만 두고 목적으로 두지 않아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해왔던 터라 내말에 반론을 펴지 못한것이다.
그런데 미래에 대한 그런 대화를 나눈지 불과 두어달만에 우리는 어찌된 영문인지 로아가 다니는 초등학교 바로 옆에 있는 아파트로 월세를 얻어 이사를 했다. 신기하게도 남편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남편이 나몰래 기도를 쎄게 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우리는 대구로 이사를 하는 결정을 내렸다. 내가 원했던것은 당연히 교회가까운 김포 풍무동에 집을 얻는 일이었다. 그래서 전.월세로 들어갈 수 있는 집을 열두군데나 보러 다녔던 것이다.
우리가 살던 김포의 아파트는 전세금을 시세보다 훨씬 많이 받는 조건이어서 삼주만에 집을 비워 주어야 했다. 다른 또 하나는 굳이 김포에 없어도 될 다른 매우 그럴듯한이유가 생겨서 대구로 이사를 결정하게 되었었다.
그러나 이사를 결정하고 이사할 집을 정하고 계약까지 했는데, 김포를 떠나 있어도 될뻔했던 매우 그럴듯한 그 일이 무산되었다. 그래서 별 수 없이 교회와 선교회에 책임을 지고 있는 우리 부부가 매주 대구 서울을 오가면서 사역을 계속해야만 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하여 우리는 매 주 기차여행을 한다. 이젠 기차안에서 도시락을 먹는것도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는것도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서울역엔 식당들도 많지만 한그릇 만원짜리도 별로 없다. 다 그이상의 가격이다.
매주 기차로 왕복을 해야 하니 경비를 줄여야 한다. 그러니 저렴한 무궁화일반열차를 타고 다니면서 밥을 사먹을 수는 없다. 밥을 사먹을바엔 두배나 빠른 KTX를 타면 좋을 것이다. 그래서 김밥 두줄로 식사비를 줄이려는 것이다.
나는 김밥을 사러 갈때 보온병을 가지고 가서 따끈한 우동국물을 받아온다. 기차에서 김밥과 함께 따뜻한 우동국물을 먹으면 김밥이라도 목메이지 않고 술술 잘넘어간다. 그뿐인가. 다른 보온병엔 커피도 타서 가져간다.
김밥먹고 커피와 함께 비스킷이라도 먹으면 훌륭한 후식이 된다. 상식적으로 김밥은 소풍을 가서 먹는 음식이다. 그러니까 우리 부부는 매주 소풍을 가는 셈이다. 그것도 기차타고 가는 소풍말이다. 이 얼마나 로맨틱한가. 무슨 일이든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것이 지혜다. 그러므로 자, 이제 기차여행을 즐기자.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눅 15:9)
글/사진: 나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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