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시니어타임즈US] 본지는 2019년 1월부터 518사건과 관련한 신간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The War of 5∙18 History between Moon Jae-in and Chun Doo Whan)>을 저자와의 합의 하에 연재를 시작한다.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은 5.18사태 전문가인 김대령 박사의 16년간의 연구 결산으로 지난해 11월 26일을 기해 출간됐으며, 인터넷 서점 아마존(www.amazon.com)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편집자주>
제5장 ∙ 문재인이 바로잡아야 할 5·18 기록
7. 국제적 사기 친 ‘5.18 시민법정 기소장’
<5.18시민법정 추진위원회>는 2002년 5월 14일에 (1) 제임스 카터, 1980. 5. 당시 미국대통령(James Earl Carter, Jr., 39th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2) 윌리엄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미국대사(William H. Gleysteen, U.S. Ambassador to Republic of Korea), (3) 존 아담스 위컴, 당시 주한미군사령관, 유엔군사령관, 한미연합사령관, 미8군 사령관(John Adams Wickham, Jr. Commander in Chief of United Nations Command and Combined Forces Command and Commander of United States Forces, Korea Eighth United States Army). 및 (4) 헤럴드 브라운, 당시 미 국방장관(Harold Brown, Secretary of Defense) 등 8인의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내란목적살인죄 혐의로 기소하는 ‘5.18 시민법정 기소장’을 발행하였다.
이 기소장에서 실명이 언급된 광주시민 희생자는 박금희 양이다. 이 기소장은 박양 사망 원인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한다: “16:00 광주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은 공수부대 중 11여단 병력은 17:50경 화순군 주남마을 일대로 철수하던 도중 마을 주민들에게 총기를 난사하여 헌혈을 마치고 돌아가던 박금희(여고생) 등 수명을 살상하였다.”
그런데 광주단체들이 이 기소장을 발행하였을 때 국제사기단처럼 하였다. 주남마을 총기사건 피해자 이름에서 박금희 이름이 왜 나오는가? 주남마을에서 무장시민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한 날짜는 5월 23일 오후였고, 박금희 양 사망사건은 그보다 이틀 먼저인 5월 21일이다.
5.18 시민법정은 기소장뿐만 아니라, 증인들의 증언도 거짓말이 난무하였다. 통일뉴스 장동렬 기자는 홍금숙의 증언을 이렇게 보도한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오빠를 찾으러 광주 시내로 나섰던 홍금숙(여, 당시 고1)씨는 자신이 함께 탔던 시민군 차량이 계엄군의 무차별 사격으로 차량안에 있던 16명의 대학생이 즉사했고, 살아남은 2명은 체포되어 산으로 끌려가 사살되었다고 증언했다 (장동렬 2017).
그러나 홍금숙은 5월 23일 오빠를 찾으러 광주시내로 나간 적이 없었다. 당시 춘태여상 1학년이었던 홍금숙은 이미 그 이전부터 백대환 등 1980년 광주제일고 졸업생들로 구성된 특수기동대와 더불어 광천동 삼익아파트에 근거지를 두고 시민군 활동을 하였다.[16] 전체 사망자 수는 18명보다 적었고, 그 중 대학생은 송원전문대 1학년 백대환1명뿐이었다. 그리고 계엄군이 무차별 사격을 한 것이 아니라, 버스 안 무장시민들이 먼저 총을 쏘았다. 약간의 간격을 두고 무장시민 버스가 나란히 두 대였으므로 앞서 가던 한 대가 갑자기 대각선으로 꺽으며 급정거하였을 때 기관총 쏘며 옆 차도에서 뒤따라오던 뒤 버스에서 앞 버스로 날아간 총탄들도 많았을 것이다.
홍금숙의 증언은 사람들에게 사건 발생 장소가 계엄군 검문소였다는 착각을 주는데, 실제 사건 발생 장소는 주남마을이 아닌 지원동이었으며, 공수부대는 지원동에 주둔한 적이 없었다. 공비들과 공비 부역자들만 그곳에 주둔하고 있었다. 5월 21일 저녁에 광주에서 퇴각한 11공수여단 병력은 차가 없어 도보로 송정리 비행장으로 이동 중이었다. 그런데 공수부대는 실탄이 없고 무장난동자들은 무기수송 차로 계속 실탄 지급을 받으며 공격해 오니 공수대원들이 모두 산에서 흩어져 도망다니다가 23일에야 비로소 처음으로 실탄 지급을 받고 하루만 주남마을 야산에서 야영하게 되었다.
문병소 중사의 증언대로 지원동에 계엄군 검문소는 없었으며, 오로지 무장난동자들의 검문소만 있었을 뿐이다. 지원동에서 주남마을로 이어지는 도로, 즉 화순 방면의 진입로에는 몇 중으로 괴무장단체의 감시가 심하고, 괴무장단체가가 주변 고층건물에 배치되어 있었음을 황석영은 이렇게 기록한다:
잠시 후 그들은 차량을 이용하거나 도보로 각 지역에 배치되었다. 학동 시장 입구에 도착한 시민군 20여 명은 그 지역에서 무장한 채로 돌아다니던 몇 사람까지 합류시켜 화순 방면의 진입로의 차단 경계에 들어갔다. 이 조에 편성된 시민군은 10명 이상이 고등학생과 대학생이었고 나머지는 회사원, 상인, 점원 등이었다. 그들은 부근의 3층 건물에 각 층마다 2~3층씩 1개조가 되어 건물 안에서 도로를 관측하기 쉽고 자신을 은폐할 수 있는 곳에 총구를 밖으로 내놓고 감시하기 시작했다(황석영 1985, 123-124).
위종회도 지원동에 계엄군 검문소는 없었고, 오로지 무장시민들이 검문하는 검문소만 있었으며, 자신이 몸소 그곳에서 통행자 검문을 한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다음 날 23일은 도청에서 아침밥을 먹고 경비를 서기 위해 지원동으로 갔다. 그날 시민군 본부에서 특별히 내린 명령은 오토바이를 타고 오는 사람을 무조건 잡으라는 것이었다. 특공요원이 상황을 염탐하러 올 염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박병선과 나는 다른 두 명의 경비요원과 함께 지원동 숭의실고 앞에 있는 다리에서 경비를 섰다. 숭의실고 옥상에는 매복 시민군 20여 명이 있었다. 우리들은 외곽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의 신분을 확인했다(위종회 1989).
고등학생 총기오발 사고로 박금희 양이 사망한 사건을 가지고 해마다 국군에 누명을 씌우는데 이용하는 사기꾼들이 있는데, 심지어 미국을 피고로 하는 5.18 시민법정에서 5월 21일 사망자 박금희 이름을 5월 23일의 ‘주남마을 양민학살’ 사건이 대표적 희생자로 넣은 것은 국제적으로 사기를 치기 위해 박금희 양의 이름을 또 다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사기꾼들이 ‘주남마을 양민학살’ 사건이라고 이름 붙인 사건의 실체를 정확하게 규명할 필요가 있다.
이 사건은 공비 및 공비 부역자들 점령 지역 내에서 발생하였다. 사건 발생 하루 전에 그 일대가 이미 괴무장단체 완전 점령지역이었다는 사실을 김현채는 이렇게 증언한다:
10여 명의 시민군이 지원동으로 갔는데 버스 종점 부근의 산에서 총소리만 들릴 뿐 별다른 것은 없었다. 그 지역을 방위하는 청년들이 지원동다리 밑의 하천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때 나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아 배가 몹시 고팠다. 근처에 있는 시민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했더니 아저씨가 어제 만든 것이라며 김밥을 주었다. 나는 인수와 함께 김밥을 받아들고 숭의실고 공작실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때는 건물이 완성되지 않아 뼈다귀만 앙상한 건물이었다(김현채 1989).
실제로는 무장난동자들의 검문소였는데 홍금숙이 계엄군 검문소라고 부른 지점은 지원동 1번 버스 종점 혹은 버스 터미널이었다 (백대환, 박순례 2006, 147). 이곳은 이미 5월 21일 낮부터 무장공비 차량 집결지로 이용되던 곳이며, 5월 23일 정오 이전까지는 공비들은 이 도로를 통해 화순과 나주와 목포를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었다. 그래서 5월 23일 지원동 1번 버스 종점에는 무척 많은 무장난동자 차량들이 붐비고 있었으며, 홍금숙이 타고 있었던 103번 차는 그 중 한 대였다.
퇴각하던 11공수여단 대원들에게 처음으로 실탄이 지급된 때는 5월 23일 정오가 가까운 무렵이었다. 그래서 그 전까지는 삼삼오오 흩어진 채 시민군 추격과 총격을 피해 산 속에서 이리저리 도망다니던 공수부대 대원들이 다시 모여 재정비할 수 있었던 오전 11시경이었으며, 주남마을 도로가 목포 방면으로 커브하는 도로 인근 야산에 여단이 처음으로 간이 본부를 꾸렸다. 무장시민군 차들이 집결해 있었던 지원동 1번 버스 종점으로부터 11공수 임시 본부까지의 거리는 약 1.5km였다.
빈 총만 들고 산 속에서 도망다니던 11공수가 5월 23일 오전에 처음으로 재정비되자 무장난동자들 차량의 광주외곽 진출이 잠시 주춤하고 광주외곽에서는 처음으로 공수부대와 대치상황이 되었다.[17] 이런 대치 상황에서는 양편에서 정찰조를 보낸다. 11공수 정찰조는 문병소 중중사(11공수여단 62대대 5지역대 6중대 팀장 겸 대대 통신하사)가 인솔하고 있었다.
조선대에서 화순 방향으로 1km 지점에서 능선을 넘으면 바위가 많은 산이 있었고, 이 산을 끼고 있는 마을 이름이 주남마을이다. 조선대 뒷편에서 주남마을 방향으로 초대형 고압철탑이 있었고, 고압철탑과 주남마을 도로 중간 지점에 채석장이 있었으며, 5월 23일 정오 이전까지는 시민군들이 여기서 다이너마이트를 탈취해 갔다. 채석장 주인이 그런 사정을 하소연하고 도움을 청하였으므로 주남마을에서 공수대원들이 주민들을 위하여 먼저 해야 할 일은 다이너마이트 창고 경비였으며, 그 팀장은 ROTC 장교 도용현 중위였다. 7~8명이 막 경비를 시작한 지 30분쯤 지났을 때 홍금숙을 태운 시민군 버스가 다이너마이트 창고 인근 도로로 접근하였다.
홍금숙을 태운 버스와 문병소 중사가 동시에 사고 지점에서 조우하게 된 경위는 이렇다. 7~8명으로 구성된 문 중사의 정찰조가 야산을 타고 지원동 1번 버스 종점 방향, 즉 무장시민군 차들이 많이 집결해 있는 방향으로 가다 보니 유일한 독립가옥인 양계 비닐하우스가 있었다.
비닐하우스 주인은 울산 사람이었는데 밥을 짓고 있었다. 문 중사가 왜 지금 이 시간에 밥을 짓느냐고 묻자 주인은 저녁에 피난 가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주인 눈에 문 중사 일행이 며칠 동안 밥 구경을 못한 것이 보였던지 막 지은 밥을 나누어 주고 된장과 물을 반찬 삼아 주며 먹으라고 하는 순간 총탄이 빗발처럼 비닐하우스로 날아왔다. 문중사와 양계장 주인이 대화하는 사이 공비 정찰조가 고압철탑까지 접근해 와서 거기서 쏘는 총탄이었다. 그때 지원동 1번 버스 종점 쪽에 집결해 있던 무장시민들도 그 총소리를 듣고 불과 100m 떨어진 문 중사 일행을 발견하고 총을 쏘기 시작하니 문 중사 일행은 야산 위쪽에서 쏘는 총과 야산 아래 쪽에서 쏘는 총에 협공을 당하게 되었다.
비닐하우스에는 총탄을 막아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바깥에 나와 계단식 보리논밭을 엄호물로 사용하는 것이 차라리 더 안전하였다. 야산 계단식 보리논밭 아래 폭 5~7m의 하천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 하천 둑 높이가 50cm였기 때문에 거기 몸을 가리면 총탄을 막을 수 있었다. 문 중사의 정찰조가 둑 옆으로 기어 750m 전방의 본진을 향해 이동하던 중 채석장까지 왔을 때 보리논밭 건너 다이너마이트 창고 인근 도로에서 두 대의 버스가 기관총을 쏘며 주남마을 방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문병소 중사의 증언에 따르면 그때 총을 쏘며 주남마을 방향으로 달려오던 무장시민 버스는 한 대가 아니라 두 대였다. 한 대는 타이어로 창문 방탄 장치를 한 24인승 미니버스(103번차)였고, 다른 한 대는 앞 유리창을 깨고 M1919기관총을 설치한 승합차(21번 차)였다. 미니버스 운전기사는 도망가지 못하도록 몸이 쇠사슬로 핸들에 묶여져 있었다.
무장시민들의 미니버스에 기관총이 탑재되어 있었다는 문병소 중사의 증언은 무장시민 김현채의 증언으로 뒷받침 된다:
나는 인수와 함께 어떤 경위인지는 모르지만 광주공원으로 갔다. 광주공원에는 ‘특수기동대’라고 씌어진 24인승 마이크로버스가 있었다. 나와 인수가 그 차에 올라타려고 하는데 지휘자로 보이는 사람이 죽기 싫으면 차에 타지 말라고 했다. 우리는 목숨을 던질 각오를 하고 차에 탔다. 특수기동대차 안에는 12명 정도의 청년들이 있었고 석이라는 친구도 있었다. 특수기동대 대원 중 26일 조직된 기동 타격대로 활동했던 대원은 나, 인수, 여수, 그리고 별명이 사무라이라는 친구였다.
우리는 석이를 보자 전쟁터에서 동지를 만난것처럼 기뻤다. 석이는 자기가 버스에 고무장갑을 끼고 페인트로 특수기동대라고 썼다고 했다. 그 당시 TV에서 테러진압대의 활동을 그린 외국영화 제목이 특수기동대였는데 그 이름을 딴 것 같았다. 차안에는 TNT 두 박스와 LMG 기관총, 그리고 많은 실탄과 수류탄이 실려 있었다 (김현채 1989).
그러면 중무장한 두 대의 무장시민 버스가 5월 23일 기관총을 쏘면서 주남마을 도로를 달린 이유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고 있었는가? 홍금숙은 나주라고 했다가 화순이라고 하는 등 말이 왔다갔다하고, 5·18 측도 홍금숙 일행이 화순에 제사 드리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가 나주로 관을 구하러 가는 길이라고 하는 등 말이 오락가락 한다.
공수대원들 입장에서 무장시민 버스를 정지시켜야 할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 문병소 중사가 순간적 판단에는 그 차가 계속 기관총을 쏘며 달리게 놔두면 불과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여단 본부가 위험했고, 다이너마이트 창고를 경비하던 ROTC 장교 도용현 중위의 임무는 괴무장단체의 접근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문 중사와 도 중위가 45도 좌측 전방에서 정지 신호를 보내는 광경이 홍금숙의 눈에 보였다.
지원동 버스 종점 지대 쪽은 고지대였고, 주남마을 쪽은 저지대였다. 그래서 문 중사 일행이 보았을 때는 등성이 꼭대기에서 무장시민 버스들이 출현하는 것이 보였는데, 처음에는 그 광경이 바다 수평선에 떠 있는 배같은 광경이었다. 두 대의 버스가 기관총을 쏘며 주남마을 방향으로 달려오자 문 중사 일행은 정지하라고 외치며 정지 신호를 보냈으나 버스들이 정지 신호를 무시하고 계속 총을 쏘며 질주하였다.
그때 김민수 하사 등 10여명이 엄폐물을 이용해서 엄폐하고 있었다. 김하사 일행이 도로 전방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45도 좌측 전방에 있었기 때문에 무장시민 버스 앞에 설치된 기관총은 별 소용이 없어서 버스 안 무장청년들이 옆 창틀에 총을 거치하고 쏘기 시작하였으며, 김하사 일행도 응사하였다.
그런데 몸이 쇠사슬로 핸들에 묶인채 무장청년들이 시키는 대로 운전하던 운전기사는 핸들을 대각선으로 꺾어 급정거하였다. 운전기사가 왜 갑자기 돌발적으로 그렇게 하였던 것인지, 고의로 공수대원들을 도우려고 그렇게 했던 것인지 아니면 차 방향을 바꾸려 핸들을 꺾는 사이 앞바퀴에 총탄이 명중했기 때문인지는 규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24인승 미니버스가 대각선으로 도로상에 정차해 있는 것이 뒤 버스에서 쏘는 총을 앞 버스가 막아주어 공수대원들에게는 천만다행이었다.
기관총은 홍금숙이 탄 버스에서 쏜 것이 아니라, 옆에서 달리고 있던 작은 승합차에서 쏘았다. 그런데 홍금숙이 탄 미니버스가 대각선으로 정지하며 길을 막았을 때 길이 막히면서 순간적으로 승합차 기관총 총탄이 홍금숙이 탄 버스를 향해 날아갔을 것이다.
홍금숙의 증언도 이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홍 양의 귓전에서 울리던 콩 볶듯이 나는 총 소리는 계엄군의 M16 소총 소리가 아니라, 바로 옆 시민군 버스 M1919 기관총 발사 소리였음이 분명하다. 홍금숙은 1989년 2월의 광주청문회에서 “차안의 바닥에서 콩 튀듯이 무엇이 튀면서 굉장히 심했거든요.”라고 증언했다. 그것은 버스 앞 수십 미터 전방에서 공수대원들이 버스를 정지시키기 위해 쏜 총소리는 아니었다.
두 대의 무장시민 버스에 각각 몇 명씩 분승하고 있었는지는 규명하기 어렵다. 그리고 얼마쯤 시간이 지나서 문병소 중사 일행이 홍금숙을 구조하게 된 것인지도 정확한 파악이 어렵다. 문 중사의 증언에서는 막간에 지원동 무장단체의 전투가 있었으며, 지원동 무장청소년 안성옥의 증언이 문 중사의 증언을 뒷받침한다.
홍금숙이 품는 의문은 미니버스 시민군들은 사격을 멈추었는데, 왜 계속 총소리가 들렸는가 하는 것이다. 그 의문은 문병소 중사의 증언으로 풀린다. 일단 무장버스 안 총성이 멈추자 그때부터 15명의 공수대원들이 총을 쏘기 시작하였는데, 홍금숙 일행이 탄 버스를 향해 쏜 것이 아니라, 그 버스를 엄폐물로 이용하여 350 미터쯤 떨어진 지원동 1번 버스 종점의 무장단체와 총격전을 벌였다.
그 전까지는 문병소 중사의 정찰조는 차도 없고 지원동 버스 종점 일대에 매복한 무장단체의 총격에 대항하여 응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무장시민 버스가 공수대원들을 위한 엄폐물 역할을 해 주었다.
어차피 사고지점의 두 대의 무장시민 버스가 화순과 나주와 목포로 가는 길을 모두 막았으므로 그때까지 버스 종점 일대에서 대기하고 있던 무장난동자들 차들은 방향을 반대로 바꾸어 광주로 되돌아갔다.[18] 그렇게 상황이 완료되자 문병소 중사 일행은 일단 본진으로 복귀하여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 사이에 주남마을 도로 상의 두 대의 무장시민 버스 안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문병소 중사의 정찰조가 본대로 복귀하여 두어 시간 휴식을 취한 후 버스 종점 상황을 살피기 위해 다시 정찰을 나왔다. 이번의 정찰 임무는 버스 종점 쪽의 무장난동자들의 동정을 살피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이너마이트 창고 옆을 다시 지나는 길에 그 두 대의 버스가 여전히 거기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접근하였다. 당연히 공수대원들 입장에서는 방어 사격 자세를 취하고 접근하여 버스 문을 여는 순간 십여명이 시신 상태로 쓰러져 있는 광경이 눈에 띄자 경악하였다. 홍금숙 외에도 방송통신고 학생 황호걸 등 세 명은 중상을 입은 채 아직 목숨이 붙어 있었다.
“살아 있으면 무서워하지 말고 일어나라.”고 문병소 중사의 음성이 들리는 순간 춘태여상 1학년 홍금숙 양이 “오빠! 나 살려줘!” 하고 외쳤다. 홍금숙의 목소리로 홍양이 아직 살아있음을 확인한 문 중사는 홍양의 왼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 칼빈 총탄이 끼어있음을 확인한 후 즉시 자기 러닝셔츠를 찢어 붕대를 만들어 응급 지혈을 해 주었다.
홍금숙의 한쪽 손 검지와 엄지 사이의 칼빈총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미니버스 안에는 무장시민들만 있었는데, 홍 양은 무장시민 총에 손가락을 맞았다. 그렇다면 홍 양은 버스 맨 뒤 의자 밑에 몸을 가리고 있었을 때 누군가 무장시민이 (혹은 무장시민들을 인솔하던 공비가) 버스 뒤쪽에서 서서 쏜 것이 거의 분명하다.
문병소 중사가 사망자 총상 부위를 확인해 보니 모두 허리 아래쪽을 누군가 등 뒤에서 쏜 총에 맞았다. 5월 29일 전남의대 부속병원 의사들이 부검을 실시한 후 기록한 검시기록 역시 사망자들의 총상 부위에 대한 문 중사의 증언과 일치한다.
문 중사가 무장시민 부상자들이 있음을 무전으로 상급 부대에 알리고 헬기 지원을 받아 홍금숙을 병원으로 후송하기 전에 그녀 소지품 들을 찾아 챙겨주었다. 그런데 여고생 책가방 안에 책은 한권도 없고 M1소총 실탄 16 발과 권총 실탄 30 발과 거북선 담배 한 갑과 지프라이터 등이 들어 있었다. (북한군 상좌 출신 탈북사업가 김유송 씨는 국산이 아닌 그 지프라이터는 북한특수군이 작전에 투입될 때 지급되는 품목들 중 하나라고 증언하였다.) 문 하사가 깜짝 놀라 여고생 책가방에 책은 없고 실탄이 들어있는 이유를 물으니 5월 17일 하교하다가 어느 오빠에게 붙잡혀 책을 모두 빼앗기고 그때부터 오빠의 물품들을 자기 책가방 안에 넣고 오빠를 따라다녔다고 홍양이 대답하였다. [19]
홍금숙이 탄 103번 차 조장은 송업공업전문대 1학년 백대환이었다. 무장봉기는 사전 준비되었다는 증거 중 하나가 백 군 광주일고 1980년 졸업 동기 13명이 광천동 삼익아파트에 본부를 두고, 황금동 한일여관에서 합숙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홍 양은 5월 17일부터 백군 일행을 위해 밥을 지었으며, 5월 22일에는 이들을 따라 도청으로 들어가 방송요원 활동도 했었다.
홍금숙이 5월 23일 당시 대학생이었던 오빠를 찾으러 광주 시내로 나섰다고 광주청문회에서 한 말은 허위증언이다. 그녀는 이미 6일전인 17일부터 송원공업전문대학 1학년 백대환 등 13명의 시민군군들과 한일여관에서 합숙하고 있었다.
그러면 어째서 <5.18시민법정 기소장>에서는 홍금숙의 이름이 박금희로 바뀌고, 박금희 사망날짜가 5월 21일에서 5월 23일로 바뀌고, 박 양 사망장소가 양림동에서 주남마을로 바뀌었는가? 그 기소 내용을 풀어 쓰면 이런 황당한 거짓말이다. 5월 21일 오후 2시경 양림동에서 사망한 박금희 양이 이틀도 더 지나서 남광주역 부근 세종아파트 근처의 자기 집과는 전혀 엉뚱한 광주 외곽 화순군 주남마을로 귀가하고 있었다.
이렇듯 김대중 정부 시절이었던 2002년 5월 14일에 광주 단체들이 5.18 시민법정을 만들고 제임스 카터 (James Earl Carter) 전 미국대통령 등 8인의 광주사태 당시 주요 미국 인사들을 대상으로 내란목적살인죄 혐의로 기소하는 ‘5.18 시민법정 기소장’을 발행하였으나 사실에 의거한 기소가 아니라, 그 당시 또 급조된 황당한 거짓말에 의거한 기소였다.
영어 통역 없이 허위 공소사실과 거짓 증언에 의거하여 진행된 5.18 시민법정의 판결 내용 또한 몹시 황당하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미군은 11공수여단 통신하사관 문병소의 무전 연락을 받고 홍금숙 등 무장시민 부상자 긴급구조를 위해 헬기를 보내준 것뿐이었음에도 판결 내용의 골자는 작전통제권을 이양하라, SOFA를 개정하라, 주한미군 철수하라 등이었다.
* 이 판결이 선고된 후 조속히 대한민국 군대에 관한 일체의 작전통제권을 대한민국 정부에 이양하는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
* 미국은 대한민국 정부와의 사이에 “대한민국과 아메리카 합중국간의 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의한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에서의 합중국 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SOFA)”을 개정하기 위한 협의를 6월 이내에 개시하여 1년 이내에 호혜평등에 입각한 협정으로 개정할 것.
* 대한민국과 아메리카합중국간의 상호방위조약 제4조를 2년 이내에 호혜평등에 입각한 내용으로 개정할 것.
* 남북화해와 평화정착의 진전에 따라 가능한 한 조속히 주한미군을 단계적으로 완전히 철수할 것.
이렇게 기소 내용과도 관련 없는 황당한 판결을 내려 놓고 이때부터 이 판결문을 근거 삼아 본격적인 주한미군 철수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고, 반미촛불시위를 전개하였고, 이듬해 노무현 정부 초창기 시절부터 주한미군철수본부와 한총련 등 반미단체들이 노무현 정부에 SOFA 개정 압력을 넣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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