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령 박사의 5.18 역사전쟁-41] 완도 사람 김재평의 수상한 동선

[LA=시니어타임즈US] 본지는 2019년 1월부터 518사건과 관련한 신간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The War of 5∙18 History between Moon Jae-in and Chun Doo Whan)>을 저자와의 합의 하에 연재를 시작한다.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은 5.18사태 전문가인 김대령 박사의 16년간의 연구 결산으로 지난해 11월 26일을 기해 출간됐으며, 인터넷 서점 아마존(www.amazon.com)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편집자주>

3. 완도 사람 김재평의 수상한 동선

문재인이 2017년 5월 18일 제37주년 5·18기념식 때 껴안아준 유가족 김소형 씨 부친 김재평의 광주사태 동선이 힌츠페터의 광주사태 영상을 이해하기 위한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괴무장단체 5월 20일 광주로 침투하는 광경을 보여주는 힌츠페터의 영상에서 광주시민은 괴무장단체가 광주로 침투하는 길을 안내하던 조사천과 박용준과 김양래 세 명뿐이었다. 김재평은 완도 수산협동조합 직원이었고, 완도 수협직원들이 단체로 군용트럭을 타고 괴무장단체와 더불어 광주로 침투하였다. 그때는 아직 광주사태라는 명칭조차 없어서 5월 18일과 19일의 소규모 소요는 언론에 보도조차 되지 않았던 때였는데 무슨 이유로 완도 수협직원들이 무장하고 광주로 침투하였는가? 그들이 총과 군용차량은 어디서 구했는가? 아마 여기에 광주사태의 큰 비밀이 있을 것이며, 이 비밀이 문재인의 5·18 눈물쇼를 계기로 세상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이다.

2017년 5월 18일 제 37주년 5·18기념식 때 유가족 김소형 씨가 “슬픈 생일”이란 제목의 추모사를 낭독하는 것을 들은 문재인이 김 씨를 안아주자 마자 각 언론들이 일제히 대서특필한 내용은 집단 사기극에 가까웠다. 동아일보 등 여러 언론 매체들이 김소형 씨가 태어나던 1980년 5월 18일 김재평 씨가 산부인과로 가다가 계엄군 총에 맞아 사망했다고 허위보도하였다. 실제로는 김재평은 산부인과로 가기 위해 광주로 올라온 것이 아니었다. 부인은 이미 5월 18일 출산 직후 퇴원하였고, 그는 이틀 후에 완도에서 출발하여 괴무장단체 트럭을 타고 광주에 왔다.

김재평은 완도 수산협동조합 직원이었고, 하루 먼저 5월 19일에 광주에 집결하였던 전라도 가톨릭농민회처럼 완도 수협 직원들도 광주사태를 5월 20일 밤에 폭동으로 격상시키는 일정에 맞추어 광주로 동원되었다.

금남로4가 가톨릭센터에는 가톨릭농민회 본부가 있었고, 금남로1가 전남도청 옆에는 수산협동조합 본부가 있었다. 힌츠페터의 5월 21일자 영상을 보면 무장 난동자들 중 다수가 도저히 광주 도시 사람 피부가 아닌 새까맣게 그을린 피부를 가진 자들, 즉 전라도 섬사람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어서 외신기자들도 의아하게 생각하였는데, 완도 수협 직원들이 단체로 5월 20일에 괴무장단체 트럭을 타고 광주로 입성하였다는 사실이 그 궁금증을 풀어주는 실마리가 된다.

해남은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세력이 강하였던 곳이고 김일성 특명을 받고 남파되어 광주사태 공작을 하고 있었던 간첩 손성모도 해남 출신이었으며, 완도가 원래 해남군 행정구역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전라남북도 가톨릭농민회 뿐만 아니라, 완도수산협동조합과 해남축산업협동조합이 모두 광주무장봉기에 동원되었다는 점에 광주사태의 비밀이 있다. 광주단체들 역시 광주사태보다는 5·18이라는 명칭을 선호하는 이유는 광주사태가 지역적으로 광주시에 국한하여 발생한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대생 휴학생으로서 해남에 거주하던 중 광주에서 괴무장단체가 해남으로 오고, 해남의 무장 건달들이 광주를 향해 출발하는 것을 목격한 손귀봉 씨의 증언에 따르면, 해남 건달 중에 해남축산업협동조합 직원(당시 24세)이 있었는데 괴무장단체 차를 타고 영암-강진-해남-완도를 거쳐 광주로 가려 하느라고 해남 축협 직원들 여러 명이 출근을 안하였다고 한다 (손귀봉 1991, 230).

완도 사람 김재평은 2017년 5월 18일 일부 언론 매체들이 왜곡한 것과 달리 5월 18일 산부인과에 가기는커녕 광주에 있지도 않았던 사실을 그의 부인 고선희씨는 이렇게 증언한다:

21일이 휴일이어서 재평 씨는 그 전 날에나 광주에 올라올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가 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접고 금남로로 먼저 달려갔다. 광주에서 보건소에 다니는 아내를 만나러 온 다른 직원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다 밤에서야 돌아왔다……

다음날도 그는 아침을 먹자마자 나갔다 들어왔다. 오후에는 완도에 내려가기 위해 송정리까지 나갔지만 교통수단이 없어 다시 작은 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계엄군의 시내진입을 막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친 농성동 공단입구로 간다며 나갔다가 늦게 돌아왔다 (김재평, 고선희 2006, 399).

사진 62 ▲ 동아일보의 왜곡 보도와 달리 김재평은 5월 18일 산부인과 근처도 간 적이 없었다. 그는 완도 수산업협동조합 직원이었으며, 20일에야 비로소 군용차량을 타고 괴무장단체와 더불어 광주로 침투하였다. KBS가 삭제 편집한 ‘푸른눈의 목격자’ 영상 원본에는 5월 20일 전라도 서남 해안 지역에서 출발한 괴무장단체가 군용트럭을 타고 광주로 침투하는 장면이 있다.

5월 21일 아침으로 예정되어 있었던 전라도 44개 무기고 습격을 앞두고 이미 20일부터 난동자들이 고속버스 징발을 시작하여 그 날부터 교통이 두절되기 시작하였다. 그는 완도에서 고속버스 타고 광주로 왔는가? 아니다. 힌츠페터의 영상은 그가 5월 20일 괴무장단체와 더불어 군용차량을 타고 광주로 왔음을 보여준다. 그는 혼자서 광주에 왔던 것이 아니라, 완도 수협 동료들과 단체로 왔다. 김재평은 광주에 도착하자 마자 갓태어난 딸을 보기 위헤 쌍촌동으로 갔던 것이 아니라, 완도 수협 직원들과 함께 금남로 광주사태 현장으로 갔다 (김재평, 고선희 2006, 399).

광주시청 등 관공서와 방송국들에 방화하는 폭동은 광주시민들이 자기 동네에서 한 것이 아니라, 힌츠페터 영상에서 보이듯이 5월 20일 오후에 힌츠페터과 일행과 같이 광주에 도착하여 금남로로 직행한 외지인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부인 고선희 씨는 김재평도 5월 20일 늦은 오후 광주에 도착하자 마자 자신과 아기를 보려고 시작은댁으로 온 것이 아니라, 금남로 시위 현장으로 갔다고 증언한다. 관공서와 방송국 방화 등 광주사태 사건들은 주로 금남로 일대에서 발생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광주시민 70 프로는 광주사태가 끝날 때까지 광주사태가 일어난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완도 사람들이 무장난동자들의 차량을 타고 금남로로 직행한 동선은 아무래도 수상쩍을 수밖에 없다.

1980년 3월 신민당 후보 경선에 김영삼 총재에게 패배하여 대선 후보가 될 수 없었던 김대중이 정권 찬탈하는 방법이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1979년의 이란의 호메이니의 회교도 혁명을 모방하여 민중봉기로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스스로 집권자가 되는 것이었다. 즉, 최규하 과도정부가 제5공화국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를 실시하면 김대중은 출마 자격이 없으니까 최규하 과도정부를 전복함으로써 선거를 치루지 못하게 하고, 김대중 스스로 대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5월 15일과 22일 사이에 임명할 예비내각까지 미리 구성한 것이 광주사태 발생의 시대 배경이었다.

김대중은 이 목적으로 3월부터 5월까지 불과 두 달 사이에 전남 국민연합회와 청년동지회와 연청 등 무려 20 여개의 사조직을 우후죽순 만들었다. 그 중 큰 조직이 김대중의 장남 김홍일이 수장이었던 연청이었다. 김대중 세력은 거사에 성공하면 전리품을 공유하기로 하고 청장년들을 무더기로 가입시켰으며, 대다수의 청장년들이 여러 개의 김대중 계열 단체들에 중복으로 가입되어 있었다[25] 광주 양림동, 방림동, 학동의 김대중 청년동지회 조직부장이었던 정재회는 그런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1979년까지도 정치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그저 보통의 전라도 사람들이 김대중씨에게 거는 기대와 신뢰를 갖고 있는 정도였다. 그러던 중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이관형이라는 사람의 알선으로 김대중씨의 청년동지회 일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 청년동지회에서 양림동, 방림등, 학동의 조직부장 일을 맡아 하였다…사건이 끝난 후 김대중 씨가 구속까지 된 마당에 청년 동지회 입회원서와 그동안 촬영한 필름을 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에게 집에 있는 30∼40명의 입회원서와 필름을 마땅한 장소가 없어 지붕 위에 숨기라고 했다 (정재회 1989).

김재평의 부인 고선희 씨의 증언에서 “오후에는 완도에 내려가기 위해 송정리까지 나갔지만 교통수단이 없어”라는 문구에서 삽입구 “교통수단이 없어”는 5월 22일의 김재평의 동선과 관련하여 납득하기 어려운 설명이다. 김재평 일행과 행동을 같이 하였던 김대중 계열의 괴무장단체들이 5월 20일 고속버스가 보이는 대도 모두 징발하여 시민군 차로 사용하였기에 차주둘이 그날부터 버스 운행을 모두 중단하였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김재평이 송정리에 교통수단이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날 쌍촌동에서 송정리에 가는 교통수단도 시민군 차밖에 없었다.

그 날 괴무장단체의 차량들이 송정리로 집결한 이유는 다른데 있었다. 황석영 책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그 즈음 괴무장단체 공격 목표에는 교도소뿐만 아니라 송정리 미군비행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21일, 광주 시내에 거주하던 미국인 약 200명은 미리 빠져나가서 송정리에 대기하다가 군용 비행기로 서울에 공수되었다. 송정리 비행장에서는 이날 밤 9시부터 자정에 이르기까지 그곳에 착륙해 있던 전투기와 모든 군용기를 군산, 오산 비행장으로 이동시켰다 (황석영 1985, 130).

광주를 점령하고 해방구를 설치한 괴무장단체는 송정리 미군 비행장마저 점령하여야 윤상원 등 반미주동자들이 미국인들을 인질로 붙잡고 미국 정부를 대상으로 이란의 호메이니처럼 협상 요구를 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그래서 전 날 광주에 도착한 보병부대 20사단 그 날 송정리를 사수하느라 괴무장단체와 20사단 사이에 장시간 대치가 있었다.

김재평이 그 날 쌍촌동 친척 집에서 산모 및 갓난아기와 더불어 가만히 있다가 시민군 총에 맞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날 온종일 시민군 활동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아기를 보러 갈 생각은 하지 않고 5월 20일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금남로 일대를 무대로 한 폭동에 동참한 김재평은 21일 밤 늦게야 쌍촌동 친척 집으로 들어오더니 22일 아침이 되자마자 부랴부랴 송정리로 가서 한나절 시민군 활동하다가 귀가하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농성동 공단입구로 출동하였다.

김재평이 멀리 완도에서 광주로 왔고, 산후조리차 부인이 유숙하고 있는 쌍촌동 친척집으로 실제로 온 때는 5월 21일 늦은 밤이었다. 어떻게 왔는가? 무장시민군 차를 타고 왔다. 시민군 차는 어떻게 구했는가? 5월 21일 늦은 밤에 왔으면 갓태어난 딸을 아직 보지 못했는데 단 하루도 산모 및 아기와 같이 있어 주지 않고 이른 아침 눈을 뜨자마자 완도로 되돌아가러 했다는 설명은 납득이 어렵다.

김재평이 그 날 오후 “계엄군의 시내진입을 막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친 농성동 공단입구로” 갔다고 하였다 (김재평, 고선희 2006, 399). 오전에 고향 완도로 돌아간다고 나간 사람이 오후에 계엄군과 전투하기 위해 정반대 방향으로 동선을 바꾸었다. 김재평은 그 날 20사단 62연대 2대대가 광주통합병원 경비를 위해 오후 5시에 상무대를 출발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농성동 공단입구로 갔다. 62연대 2대대가 연대장으로부터 광주통합병원 경비 지시를 받은 것은 쌍촌동 토박이 주민들도 전혀 모르는 사실이었는데, 쌍촌동에 온 지 하루도 채 안되는 완도 사람 김재평이 그런 정보를 어떻게 즉시 입수하였는가? 여기에 그가 무전기를 소지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의혹이 있다. 국군광주통합병원을 국군이 경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광주시민도 아닌 완도 사람 김재평이 무슨 이유로 그것을 저지하려 하였는가?

농성동 바리케이드는 농성동 주민들이 친 것이 아니라, 외지에서 온 괴무장단체가 친 것이었다. 농성동 옆 동네 광천동에 군납업체 아시아자동차가 있었고, 괴무장단체가 차 급유를 위해 기름을 약탈하던 큰 주유소도 그 부근에 있었다.

광주통합병원은 괴무장단체의 바리케이드가 설치된 공단 사거리와 대건신학대학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공비 및 그 부역자들이 바리케이드를 친 농성동 광장은 불순세력의 도시게릴라전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괴무장단체가 농성동 광장에 바리케이드를 쳤기 때문에 광주통합병원도 의약품 및 환자 수송로가 막히고, 중앙정보부와 보안대 요원들도 모두 광주 분소에서 철수하여야 했다.

광주통합병원 앞 사거리에 화정동 로터리가 있었다. 조선대 여대생으로서 무장시민 차량에 승차하였던 안은경은 화정동에서 무장시민 총기난사 사고가 발생하기 하루 전에 이미 그곳에 무장시민 차량들이 집결해 있었던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렇게 한참 동안 시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차가 장성으로 무기를 가지러 간다며 시외로 나갔다. 가는 길에 비아에 들러 알아보니 비아에서는 이미 무기를 가져갔다고 했다. 우리는 다시 장성으로 갔다.

우리가 탄 차가 장성 고려시멘트에 도착하자 고려시멘트 직원들이 나와 시원한 음료수와 먹을 것을 차에 올려 주었다. 그러는 사이 어떤 외국 기자는 우리들의 모습을 취재하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가 탄 차의 운전수가 “취재만 하지 사실을 사실대로 알리지 않는 저놈도 똑같이 나쁜 놈“이라고 하면서 차를 몰아 그 외국인 기자를 받아내려고 했다. 불시에 습격을 당한 기자는 깜짝 놀라 혼비백산해서 도망가 버렸다.

우리는 다시 장성역 광장으로 차를 몰았다. 장성역 광장에는 많은 장성 군민들이 나와 광주에서 오는 시위대를 열렬히 환영했다. 도착하는 차마다 음료수와 빵, 사탕 등을 올려 주며 고생한다고 치하해 주었다. 우리는 장성 주민들이 준 음식만 얻어먹고 당초에 목표했던 무기는 접수하지 못한 채 다시 광주로 나왔다.

차는 다시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오후 6시경에 화정동 로타리에 차가 집결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갔다. 많은 차들이 모여든 화정동 로타리에서는 김밥을 싸들고 나온 아주머니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안은경 1991, 156).

5월 22일에 전투용 바리케이드들이 어디 어디에 설치되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광주시민들은 잘 모르고, 직접 설치한 공비들이 가장 잘 아는 사항이었다. 황석영의 5·18도서와 동시에 출간된 북한의 5·18도서에는 바리케이드가 설치된 위치들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때 놈들에게서 로획한 무기는 기관총, 소총, 권총 등 총기류가 5천 400여정, 각종 탄약 28만 9천 500여발, 수류탄 550여개, 폭약 3천 600상자, 장갑차와 군용트럭 450여대, 유류 3천도람이였다. 이즈음에 와서 ≪결사대≫나 ≪돌격대≫는 대학생들과 고등학교학생들을 기본으로 편성하고 ≪기동타격부대≫는 군사경험이 있는 50여명의 청장년들로 10~20명씩 4개조로 편성하였다. 무등산입구와 남광주역전, 광주고등학교가 이들의 본거지였다.

이 무장단위들은 ≪민주투쟁위원회≫의 긴급지시에 따라 필요한 방어지대에 자동차와 장갑차로 긴급 수송되여 해당지역에서 방어임무를 수행하는 ≪특별경계부대≫들과 협동작전으로 ≪공정대≫ 의 광주진압을 막게 되어있었다 (조선로동당출판사 1985, 102-103).

바리케이드가 설치된 농성동 공단입구에 괴무장단체가 주둔하고 있었으며, 일반시민이 암구호를 모른 채 접근하였다가는 언제 사살될지 모르는 위험한 곳이었다. 동네 주민들이 동네에 갑자기 출현한 복면무장괴한들을 보았을 때는 모두 무서워 거리로 나오지 않고, 문을 잠그고 집안에 숨었다.

농성동과 화정동 사이에 바리케이드를 친 괴무장단체가 광주통합병원 쪽을 향해 총기 난사를 하던 즈음에 조선일보 주필 김대중 기자가 화정동에서 취재를 했었다. 그는 그곳에서 총을 든 난동자들이 활개 치는 무정부 상태 광주를 보았다. 어느 도시에 단 한 명의 복면무장괴한만 나타나도 시민들은 모두 도망가기 마련이다. 괴무장단체가 농성동에 바리케이드를 치자 인근 가게들이 일제히 문을 닫고, 인근 주민들도 대문을 잠그고 집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런 상태를 김대중 기자는 “바리케이드 너머 텅빈 거리엔 불안감만”이란 표현으로 표현하였다.

그렇다면 쌍촌동에 온지 하루도 채 안된 김재평이 옆 동네 화정동의 옆 동네 농성동 복면무장괴한들의 소굴로 스스로 찾아간 동선이 수상하다. 고선희 씨는 그녀의 남편 김재평은 5월 22일 농성동 공단입구에 간 것이 먼저였고, 총기사고를 당한 것은 그 후였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리고 계엄군의 시내진입을 막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친 농성동 공단입구로 간다며 나갔다가 늦게 돌아왔다.

5월 22일, 김재평은 집에 돌아와 막 샤워를 끝냈다. 갑자기 밖에서 총소리가 요란해 가족들 모두 바깥쪽에 접해 있던 방에서 뒤쪽 안방으로 피했다. 그런데 그곳까지 총알이 날아들었다 (김재평, 고선희 2006, 399).

사진 63 ▲ 사람들은 누구나 험악한 인상의 복면무장단체를 피하기 마련이다. 그러면 어째서 김재평은 농성동 복면무장단체 바리케이드로 스스로 찾아갔던 것일까? There is still an unsolved question about the identification of the masked gunmen called Gwangju militia because many of them were not residents of Gwangju city.

5·18 역사의 왜곡은 무장시민 대부분이 전남대 학생들이었다는 착각 및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다. 실제로는 전남대 학생들 중에 총을 든 학생은 다섯 명 미만이었다. 무장시민들 중에 대학생 수만 적었던 것이 아니라, 광주시민 수도 적었다. 무장시민들 중 대다수는 가짜 대학생들이요, 외지에서 온 자들이었다. 김재평 역시 광주시민도 아니요 대학생도 아닌 완도 수산협동조합 직원이었다.

여학생 운동권이었던 안진이 21일 나주에서 무장난동자들의 인상착의로 그 자들은 광주 학생들이 아니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나주에는 어느정도 시위가 있었는데 예비군 중대본부 근방에서 막대기로 차창을 두드리면서 군가를 부르고 가는 사람들을 태운 타이탄 트럭과 지프차를 3대쯤 봤다. 차에 탄 사람의 얼굴이나 옷 입은 것, 노래 등으로 보아 학생들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당시 나주에는 목포 등도 난리가 났다는 소문이 있었고 28일에는 한상석 씨를 만나기 위해서 완도로 갔으나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그냥 나주로 올라왔다 (안진 1988).

여기서 여대생 안진은 아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완도는 김양래의 고향이요, 5월 21일 김양래가 간 곳이었는데, 한상석이 웬일로 완도에 가 있었는가? 김양래와 한상석은 ‘기획팀’이라고 불리는 전남대 내 김대중의 사조직 학생들이요, 5월 11일에 불순세력이 시키는 대로 5월 19일로 예정된 폭동계획을 받아써서 문건을 작성한 학생들이었다.

고선희 씨는 김재평 씨가 5월 20일에 이어 21일에도 금남로에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김재평, 고선희 2006, 399). 그 날 금남로에서는 괴무장단체가 시민들에게 무기를 분배해 주었는데 무기를 분배하는 무장괴한들 중에는 대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19세의 재수생 윤석진은 그런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리고 무작위로 총을 지급해 주었기 때문에 오발사고가 많았을 것이다. 총을 들고 외곽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시민들에게 들어가라고 했다. 총을 다를 줄 아는 전문가들도 항상 총구를 하늘로 향하게 세워놓고 겨누지 않았다.

그런데 총을 잘 쏠 줄 모르는 나이 어린 사람들이 총알이 장전된 상태에서 그렇게 겨누었기 때문이다. 도로에 총을 쌓아놓고 나누어 주었는데 나눠준 사람이 학생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그날부터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거의 안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윤석진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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