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혜 칼럼] 대한 수도원의 추억

수 년 전 초겨울의 어느날 이었다. 남편 K선교사가 미리 생각 하고 있었는지, “사실 오늘은 대한 수도원에 가려고 했었는데…” 라고 한다. 기도는 매일 새벽기도에 충실하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나였지만 남편의 말을 듣는 순간 왠지 대한수도원에 나도 가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도 같이 갈테니 우리 함께 대한수도원에 올라가요.”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서둘러 여장을 갖추어 출발했다. 강원도 철원군에 있는 대한 수도원은 우리집에서는 자동차로 두시간 거리에 있었다. 그리 부담 되는 거리는 아니다 싶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하룻밤은 자고 와야 할 것 같았다. 기왕 기도하러 대한수도원에 가는 것이니 기도를 빡세게 하고 와야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루 묵을 여장을 갖추고 출발하였다.

대한수도원은 고속도로와 국도를 거쳐서 가야 하는 길이어서 노선이 썩 좋지는 않았다. 다만 길이 막히지 않아서 넉넉히 두시간 안에 대한수도원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대한수도원은 나에게는 영원히 잊지 못할 장소이다. 왜냐하면 잊지못할 사연이 있는곳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곳은 내가 자주 다니던 기도원은 아니었다. 나는 청평에 있는 한얼산기도원을 주로 다니면서 기도했다.

그러나 젊은 시절 대한수도원을 다녀온 후 우리 가정에 아주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고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임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대한수도원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젊은 청년시절에 나는 경기도 청평에 있는 한얼산 기도원에 자주 올라가서 기도하곤 했다. 그러나 대한 수도원은 남편 K 선교사가 총각때 부터 이곳에 다니면서 기도 하였던 곳이다.

우리 부부가 결혼후 둘째 아이까지 낳았을때였다. 여름방학에 우리는 바캉스 대신에 젖먹이 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이 함께 대한 수도원에 여름집회에 은혜를 받으러 가기로 하였다.

뜨거운 한여름 이었다. 연년생 젖먹이 둘을 데리고 시외버스를 타고 대한수도원에 올라갔다. 큰아들이 막 두돌이었고, 둘째인 딸은 9개월된 아기였다. 두 아이가 다 우유병을 떼지 못했을 때였다.

대한수도원에 올라가서 아기들 먹일 우유를 타기위해 끓는 물을 구하려고 애썼던 기억이 있다. 기도원들이 지금처럼 시설이 좋을때가 아니었다. 이런 여러 불편을 참고 우리 가족은 대한 수도원에서 있었던 집회를 며칠 참석하였다.

집회가 있는 밤이면, 우리 부부는 기도 하느라고 부르짖는데, 우리 아기들은 대한수도원의 성전 바닥을 벌벌 기어다니곤 했다. 그러나 사랑스러운 우리 아이에게 이후 어떤 일이 닥칠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집회가 있던날 저녁예배때 피아노를 치며 특송을 불렀던 자매는 놀랍게도 맹인 이었다. 맹인인 자매는 스스로 피아노 반주를 하면서 찬송가를 불렀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이상하게도 30여년이 지났는데도 그 맹인 자매의 찬송을 부르던 노래소리는 내 귓가에 고스란히 녹음이라도 해 놓은듯이 저장되어 있다. 찬양을 부르는 자매의 목소리가 무척 미성이었다.

그 맹인 자매는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평화로운 모습으로 노래를 불렀다. 나는 신비한 느낌을 받으며 그녀가 부르는 찬송가를 은혜롭게 들었다. 불과 두 주 후에 발생할 우리 가정에 닥칠 엄청난 시험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말이다.

1983년 8월 15일서부터 며칠간 대한 수도원을 다녀온 후, 우리 가정엔 엄청난 시험이 닥쳐왔다. 그해 8월 29일 이었다. 나는 청주지구 CCC나사렛 월례회에 두돌이 갓지난 아들과 9개월된 딸을 데리고 참석하고 있었다.

남편은 당시 고등학교 교사였는데 숙직을 하고 있어서 내가 혼자 두 아이를 데리고 참석한 것이다. 밤새 집회를 하기 때문에 나는 딸아기만 가슴에 안고 홀에서 집회를 참석하고 있었다.

잠들어 버린 아들은 방 하나에 재워 두었다. 방안에 다른 자매가 있어서 잠든 아들을 부탁하고 나와서 집회를 참석했다. 그런데 아들아이가 깨어나서 라지에이터 를 밟고 올라서서 창밖으로 떨어져 내리는 대형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방에서 지키던 자매는 자는 아기를 두고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여름 더위에 창문을 열어 두었는데 두돌 아들은 밖이 환하니까 문인줄 알았던 모양이다. 모임을 하던 홀과 통하던 출입문은 닫아 두었기 때문에 두돌짜리 아기가 열 수는 없었다.

집회에 참석 하다가 아들이 잘 있나 보러간 내가 아들이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70여명 형제 자매들이 월례회 집회를 하다가 일어난 사건이어서 통성기도를 하고 난리가 났다. 시각은 밤 12시를 넘어서 8월 30일이 되고 있었다.

병원에 근무하는 형제의 도움으로 새벽 두시에 자기집에서 자고 있던 의사를 깨워서 불러왔다. 어린 아들은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들은 아무런 외상도 없었고 이상이 없었다.

자다가 불려온 의사는 시종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는 것이다. 그 높은데서 떨어진 아기가 아무 이상이 없었으니 말이다. 물리적인 힘을 믿는 의사로서는 그럴 만도 했다. 결국 아들은 삼일간 중환자실에 있다가 별 이상이 없어서 퇴원을 하였다.

당시 우리 가족이 나가던 사도교회의 고박로홍 목사님은 우리 아들을 보고 ” 너는 이 다음에 목사가 되어서 사람들에게, 나는 4층에서 떨어졌는데 하나님이 살려낸 사람이요. 이래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못 믿겠소?” 라고 증거만 해도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튿날인 9월 1일은 러시아 상공 사할린 부근에서 KAL기가 폭파되어 269명의 사람들이 공중폭파되어 생사를 알 수 없는 사건이 발생 하였다.

당시 청주 CCC 대표간사였던 주서택 목사님은 이 두 사건을 들어서 하나님의 섭리를 설교 하였다. 한 생명을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설교하였다.

나는 시간이 좀 지난후 사진을 현상 하였다. 당시 우리 가정에 있던 사진기는 작은 사이즈의 올림푸스 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사진기로 찍은 필림안에는 8월15일 대한 수도원에서 찍어둔 사진이 현상되었다. 아울러 CCC회관 4층에서 아들이 떨어졌을때 찍어둔 현장 사진과, 병원 중환자실에 있었던 아들의 모습이 나란히 현상이 되었다.

남편과 나는 그 사진들을 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 아들에게 위험이 닥칠것을 미리 아시고, 온 가족을 대한 수도원으로 부르셔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셨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즉 미래에 닥칠일을 미리 막도록 방패기도를 하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 가정에 닥친 이 엄청난 아들 추락 사건은 하나뿐인 아들을 잃는 비극으로 끝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우리 부부는 아들을 살려주신 살아계신 하나님께 너무도 감사해서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다.

사실 남편 K가 선교사로 나가야 겠다고 결단을 내린 것은, 죽은거나다름없는 아들을 하나님께서 살려 주신 사건을 접하고 나서였다. 부모에게 자녀의 생명은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것이다.

그 귀한 자녀의 생명을 살려주신 분명한 실체가 하나님 이신것을 알게 되자 우리의 삶이 구태연 할 수는 없었다. 아들이 4층에서 떨어지던 그날 우리교회 부목사님은 우리가정을 위해 중보하는 성령님을 체험 하였다고 간증 했다

용문산에서 은혜를 많이 받은 부목사님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3층에 있는 교회사택에서 자고 있는데 2층에 있던 예배당에서 내가 와서 간절하게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소리가 들려서 예배당 문을 열어보니 어무도 없었다고 한다.

한밤중이니 다시 사택에 올라가서 누웠는데 이번엔 나의 남편이 예배당에서 간절히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이집에 무슨 일이 있나하고 다시 내려와서 예배당 문을 열어보니 아무도 없었다. 부목사님은 그때서야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신 것을 깨닫고 우리 가정을 위해 중보하고 있다가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달려 오셨다.

이런 영적인 체험을 미리했던 목사님은 우리 아들이 누워 있는 병원의
중환자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첫마디가 지금도 나는 잊혀지지 않는다. 그분은 기쁜 표정이었다. 그리고 “할렐루야 주님께서 다 받으셨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와같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나서 남편 K는 선교사로 나갈것을 결단했다. 고등학교 교사직을 사표를 냈다. 당시 도와 주던 교수님이 있어서 미국 텍사스주에 가서 언어학 박사학위를 받은후 교수가 되겠다던 꿈도 접었다.

우리 부부는 함께 신학을 하고 중국어문선교회에서, 한국해외선교사훈련원에서 그리고 총회파송 선교사가 되기 위한 총회선교훈련을 받고 1997년 3월 1일, 우리 가족 다섯명은 드디어 선교지로 출발 하였다. 그런 만만치 않은 사연이 있는 대한 수도원에 30여년만에 갔으니 어찌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 있을까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30년이 더 흘렀으니 대한 수도원도 참 많이 변해 있었다. 당시 성전외에는 부속건물이 별로 없었던 기억인데, 가보니 부속건물이 10동도 더 되는것 같았다.

목사관, 선교관, 숙소동들이 새로 들어섰고, 한탄강을 마주보는 기도원 마당에는 가족들이 함께 올것을 고려해서 어린이 놀이터와 수영장까지 만들어 놓았다.

한탄강을 바라보는 일명 ‘회개 바위’에서 나는 따뜻한 겨울 햇살을 받으며 기도 하였다.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종의 가정에 베푸신 그 크고 놀라운 은혜를 어찌 잊겠습니까. 더욱더 주님을 앙망하며 남은 생애를 살아가겠습니다. 자손 대대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종의 집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진정 잊지 못할 대한 수도원에서의 1박 2일은, 우리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재확인하는 감사가 넘치는 특별한 시간 이었다. 우리의 생을 통하여 후손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 되어질 것이다.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눅 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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