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하늘과 새 땅,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요한계시록 21장 : 9 – 27
9)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1)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12)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13)동쪽에 세 문, 북쪽에 세 문, 남쪽에 세 문, 서쪽에 세 문이니, 14)그 성의 성곽에는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양의 열 두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15)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측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 16)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17)그 성곽을 측량하매 백 사십 사 규빗이니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이라, 18)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19)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 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 째는 남보석이요 셋 째는 옥수요 네 째는 녹보석이요, 20)다섯 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 째는 황옥이요 여덟 째는 녹옥이요 아홉 째는 담황옥이요 열 째는 비취옥이요 열한 째는 청옥이요 열두 째는 자수정이라, 21)그 열 두 문은 열 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22)성안에서 내가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24)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25)낮에 성문들은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26)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27)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들어가는 말
제가 먼저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천국 어린양의 생명책에 여러분의 이름이 기록되어있음을 확신하면서 살아가십니까?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연 나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인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름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름이 없으면 안 됩니다. 이름이 있어야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졸업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름이 있어야 세상의 모든 일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름이 없으면 사생아요 아무런 권리와 의무도 없으며, 아무 가치 없는 존재가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 생명책에 이름이 있어야 그리스도인이며 그가 구원받은 자이며 천국을 차지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요한계시록 20:12)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요한계시록20:15)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요한계시록21:27) 이름이 이처럼 정말 너무도 중요합니다. 합격자 명단에 이름이 없으면 거기에 있을 수 없습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없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도, 거할 수도 없고 천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됩니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더 나아가 주님이 기억하시는 이름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주님은 이름을 다 기억하십니다. 그럼에도 만약 이름을 모른다면 곤란합니다.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누가복음 16:19-20) 부자는 잘 살았지만 이름이 없었습니다. 부자 이름이 없을 리 없고 모를 리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는 기억되지 못하는 이름이고 다만 부자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거지는 분명히 이름이 있었습니다. 사실은 거지 이름을 기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몰라도 거지의 이름 나사로를 주님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전개되었습니까?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누가복음16:22-23)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름이 없는 부자는 불꽃 가운데서 물 한방 댈 수 없는 괴로움에 처해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거지였지만 이름이 있는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 안겨있었습니다. 이름을 기억하는 자와 모르는 자와의 차이는 이렇게 극과 극으로 지옥과 천국이었습니다.
천국환송예식장에서 분명한 이름을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이름을 소유하되, 3글자의 이름뿐 아니라 주님 앞에 기억될 만한 직분자로서의 충성된 이름 역시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한평생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모든 헌신의 수고들을 주님은 기억하고 계십니다.
지금까지 사도 요한은 일곱 대접을 가진 천사들이 행한 여러가지 재앙들을 목격하였습니다. 이러한 재앙들은 더 이상 사람들이 이 땅에서는 아무런 소망도 가질 수 없는 엄청난 심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나타난 천사는 최후에 나타날 새 예루살렘에 대한 환상을 통해 사도 요한에게 소망을 갖게 하였습니다. 이 새 예루살렘은 장차 시련과 환난을 견딘 성도들이 들어가 살게 될 도성입니다. 반면에 이 성은 지금 우리 성도들이 생활 속에서 구현해야 하며, 또 소망하고 있는 거룩한 공동체인 하나님의 교회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제 본문 말씀의 새 예루살렘에 대한 환상을 통해 참 교회의 바른 표상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 섬겨야 합니다.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9절). 천사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성 예루살렘을 신부라고 불렀습니다. 이 신부는 어린양의 아내입니다. 즉 장차 신랑 되신 그리스도와 혼인하게 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킨다 하겠습니다. 성경은 종종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거룩하신 하나님과 혼인한 신부에 비유하였고, 또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혼인 계약을 맺은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말하였습니다. 특히 호세아서는 이런 사상이 집약적으로 함축된 대표적인 책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는 신약에서 성도와 그리스도의 관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재림을 천국 잔치로 설명하면서 신랑인 자신이 신부인 도성들을 맞이하기 위해 오시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25장 1-13절) 그렇기 때문에 신랑을 기다리며 등불을 밝히고 예비한 신부만이 신랑을 영접하며 즐거운 잔치 자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성도들의 신앙적인 정결함을 가리킨다 하겠습니다. 성도는 한분이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또 섬겨야 합니다. 어떤 물질의 유혹이나 신앙적인 박해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만을 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때를 알지 못하고 방종한 삶을 살며 타락하여 영적인 순결을 잃는 자는 결코 어린양의 신부가 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10절). 사도 요한은 새 예루살렘을 보기 위해 성령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성경과 교회 역사를 보면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성령의 인도로 말미암아 큰일을 수행해 내었습니다. 에스겔은 성령의 인도를 받고 새 예루살렘의 환상을 통해 장차 회복될 이스라엘의 영광스런 미래를 내다보았습니다(에스겔 43장 5절). 또 신약에서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의 발걸음을 아시아에서 유럽 대륙으로 옮기게 된 것도 환상을 통해 성령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16장 9-10절).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며 또 그분의 지체인 교회는 당연히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또 그렇게 할 때에만 교회는 이 땅에서 부여받은 교회로서의 사명을 다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10절).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인 새 예루살렘은 크고 높은 산 위에 있습니다. 이 거룩한 도성은 세상과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도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나와 험한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교회는 비록 세상 가운데 있지만 세상과 짝하여 살아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큰 성 예루살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상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지 모릅니다. 또 물질 만능 사고에 젖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온통 사치와 향락, 방탕으로 가득 차있고 심지어는 이런 조류가 하나님의 교회에까지도 밀려들어오고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악으로 만연하여 종말을 향해 줄달음친다 해도 교회만은 마치 노아의 방주와 같이, 험한 산 위에 우뚝 선 산성과 같이 끝까지 세상의 풍조에서 스스로를 지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가르침과 같이 교회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겠습니다(마태복음 5장 14절).
세상에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10절). 사도 요한은 거룩한 성이 하늘에 있지 않고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교회는 비록 그 완전한 형상은 하늘에 속해 있지만 그 형상이 완성되기까지는 여전히 세상에 속해 있습니다. 이는 교회가 세상과 짝해서는 안 되지만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대행할 사명을 맡았음을 말합니다. 이는 교회의 두 가지 성격, 즉 세상에 속해 있으면서도 세상과는 구별되는 교회의 본질을 가리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사회의 제반 구조적인 모순 덩어리를 깨부수고 그곳에 하나님의 진정 올바른 도성을 세우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원하였으며(마태복음 6장 10절), 또 교회가 세상에서 부패를 막는 소금의 역할을 다 감당해야 할 것이라고 교훈하셨습니다(마태복음 5장 13절).
줄거리
두 번째 : 천국 성 안에서 만납시다
(10)”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1)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12)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
본문 말씀에서 요한 사도는 환상 중에 성령의 이끌림을 받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봅니다. 이것은 옛 예루살렘 성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성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왔기에 거룩합니다. 또한 이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세계의 생활 터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새 예루살렘 성의 외형이 9-17절 말씀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바로 그 외형을 소개하는 일부분입니다. 이제 새 예루살렘 성의 외형에 대한 묘사를 살펴보며 그 상징적인 의미를 찾고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속적인 임재 때문입니다. 본문 11절 말씀에서 요한 사도는 새 예루살렘 성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영광의 궁극적 실체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때문에 어디든지 하나님이 계신 곳은 영광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의 이스라엘 회막에 임하실 때 그곳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였다고 하였습니다(출애굽기 40장 34절). 솔로몬이 건축한 새 성전에 하나님의 법궤, 곧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을 모시니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열왕기상 8장 11절)했다고 하였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본 환상 중에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대하여 스랍들이 찬양하는 소리가 다음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이사야 6장 3절). 하나님이 계신 곳은 어디에나 그의 영광이 빛납니다.
거룩하게 구별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거룩함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그의 영광 또한 찬란합니다(이사야 6장 3절). 새 예루살렘 성에는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27절)고 하였습니다. 새 예루살렘 성에는 거룩한 자들뿐입니다. 거룩한 것들뿐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에 계신 것입니다. 그가 거룩하게 하시고 그가 계시어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빛나는 곳입니다.
보석처럼 빛납니다. 사도 요한은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라고 하였습니다. 그 성이 얼마나 아름답고 빛나는 성인지 지극히 귀한 보석같이 빛난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을 위해 준비한 성이 이렇게 아름답다는 사실은 참으로 두려운 사실입니다. 빛나는 성의 주인공이 되려면 우리도 역시 빛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성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로 말미암아 해와 달이 필요 없이 이렇게 빛나는 곳이라면 그곳에서 영원토록 살 성도들이야말로 빛처럼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수정처럼 맑습니다. 사도 요한은 새 예루살렘 성을 가리켜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고 하였습니다. 요한 사도의 이와 같은 비유는 “맑다”는 의미를 최선을 다해 부각시키려는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 성은 수정같이 맑은 곳이라는 말입니다. 거기에는 가리어진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정직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도 그렇게 맑지 않겠습니까? 때문에 성도들은 마음을 맑게 닦아야 합니다. 어린양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날마다 맑게 씻어야 합니다. 그 마음의 정직함이 수정처럼 맑게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은 양심이 마비된 세대, 정직이 상실된 시대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맑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범한 다윗은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편 51편 10절)라고 참회의 눈물로 괴로워했습니다. 정직한 자가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다고 했습니다(시편 11편 7절). 또 “정직한 자가 주의 앞에 거하리라”(시편 140편 13절)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도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태복음 5장 8절)라고 하셨습니다.
새 예루살렘 성은 안전한 곳입니다.
크고 높은 성곽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라고 말씀했습니다. 크고 높은 성곽은 튼튼하고 견고하여 능히 보호막이 될 수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성은 그 성의 안전과 방어를 위해서 견고한 성곽을 갖습니다. 우리는 이 성곽을 바라보며 주님께서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0장 28절)는 말씀을 확신하게 됩니다.
열두 천사가 문을 지킵니다. “열두 문이 있는데 열두 천사가 있고”(12절)라고 하였습니다. 열두 천사가 문을 지키기에 여기에는 음녀나 그 추종자들의 특성을 가진 자들은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요한계시록 17장). 곧 이것은 안전한 곳임을 상징합니다. 이처럼 안전한 곳이 성도들이 장차 있을 곳입니다.
사도 요한에게 천국의 성을 보여주는데 어떤 모습입니까? 1.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습니다.(11절), 2. 열두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스라엘 12지파 이름이 있습니다.(12절), 3. 열두 문은 동서남북으로 세문들이 있습니다.(13절), 4. 성의 열두 기초석으로 되어 있는데 열두 기초석에 열두 사도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14절), 5. 성은 네모가 반듯한 정사각형의 모양으로서 크기의 규모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큽니다.(16절), 6. 성은 정금으로 맑은 유리같이 되어 있고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습니다.(18절), 7. 성곽의 기초석은 12보석으로 되어있습니다.(19절), 8. 열두 문은 진주로 꾸며져 있습니다.(21절), 9. 성의 길은 정금으로 맑은 유리처럼 되어있습니다.(21절), 10. 성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차 있습니다.(23절)
이 기막힌 천국 성에서 우리는 만나야 합니다. 어떤 자들이 이 천국 성을 들어갈 수 있습니까? 1.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를 나타낸 자들만이 들어갑니다.(26절) 2.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이 들어갑니다.(27절) 3. 속된 짓, 가증스러운 짓, 거짓말하지 않는 자만이 들어갑니다.(27절) 열심히 신앙 생활하여 천국 성에서 만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 말씀은 새 예루살렘성에 대한 또 하나의 소중한 묘사입니다. 그곳은 어떤 곳입니까? 온 세상의 성도들이 고대로부터 오늘까지, 그리고 앞으로 올 세대들까지도 사모할 아름다운 성입니다. 우리는 그 비밀, 곧 감추어졌던 사실을 사도 요한을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랍고도 감사한 일입니다. 주님은 이 하늘나라의 비밀을 아무에게나 가르쳐주지 않으셨습니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마가복음 4장 11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밀을 깨닫는 자는 영광입니다. 또 소중한 미래를 가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경건하고 의로운 백성이 장차 들어가 살게 될 아름다운 새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 가 보겠습니다.
존귀한 자가 거할 곳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베드로전서 2장 9절). 성도는 택하신 족속으로 왕 같은 존귀한 제사장입니다. 바로 이런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이 준비하신 곳이 새 예루살렘성입니다.
진주로 된 열두 문입니다. 본문 21절 말씀에서 요한은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을 소개하였습니다. 열두 개의 문인데 그것은 하나같이 모두 진주로 되어있다고 했습니다. 진주로 된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진주보다 존귀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곧 모든 고난을 통과한 성도들을 하나님은 진주보다 더 귀한 존재로 대우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할 때 이 땅에서 받는 모든 고난을 못 참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잠시 받는 고난은 그 영광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의 길입니다. 역시 21절 말씀에 나타난 사실입니다. 진주 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그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 곧 황금의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맑고 맑은 유리 같은 황금 길을 통하여 새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갈 자격을 가진 성도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 날마다 죽는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서로 소중한 자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제는 이 세상 백성과 같이 서로 헐뜯고 매도하는 따위의 추잡한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늘나라 백성답게 서로 위해 주고 아껴주고 대우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이웃을 하늘나라 왕자답게 대우해 줄 때 이웃도 우리를 하늘나라 왕자로 대우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계신 곳
본문 22절 말씀에서 사도 요한은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새 예루살렘성 안에 별도의 성전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땅의 예루살렘 성 안에는 성전이 별도로 있었는데 왜 하늘나라 성 안에는 성전이 없는 것입니까? 본문 22절 말씀은 새 예루살렘성에 성전이 따로 있을 필요가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거기에는 예배를 받으시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그곳에 항상 계셔서 성도들과 함께하시니 별도의 성전이 필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예언적 신앙고백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확증을 해줍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장 12절). 그곳에선 성도들이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언제나 직접 뵈올 수 있습니다. 그분을 감히 마주 대하여 뵐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특별한 장소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다른 빛이 필요 없는 곳
하나님의 영광이 비춥니다. 본문 23절 말씀에 새 예루살렘성은 이 땅에서와 같은 해나 달의 빛이 필요 없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예언자 이사야는 일찍이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다시는 낮의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이사야 60장 19절).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빛이 충만하여 다른 빛이 일체 소용이 없는 곳입니다.
구속받은 자들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닙니다. 본문 24절 말씀은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 위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천하만국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모여 와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행하고 하나님께 스스로 굴복하여 그를 섬길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이사야 60장 3-5절).
새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과 그의 어린양, 그리고 구속받은 성도들이 함께 거할 거룩한 성입니다. 다시 말해서 새 하늘과 새 땅, 곧 하나님 나라의 중심입니다. 그 성은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그 어린양께서 등이 되심으로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는 곳입니다.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 자체는 정금으로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성의 길도 맑은 유리 같은 정금으로 되어 있습니다.
밤이 없는 새 예루살렘 성
새 예루살렘 성에 없는 것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성전이요(22절), 둘째는 해와 달이며(23절), 셋째는 밤입니다. 본문 말씀은 그 중에서 밤이 없음을 말해 줍니다. 25절 말씀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밤”은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악”한 때와 관련하여 사용했습니다. 즉 밤은 무지와 불신앙의 때(로마서 13장 12절), 환난과 고난의 때(이사야 21장 12절), 아무것도 일할 수 없는 때(요한복음 9장 4절), 죄악이 성행하는 때(요한복음 13장 30절)로 성경에 묘사되었습니다. 새 예루살렘성은 바로 이러한 밤이 없습니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 성의 열두 성문은 닫을 필요가 없습니다. 문은 도둑이나 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있습니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에 거하는 자들은 모두 거룩하게 된 자들입니다. 그런즉 성문을 닫아 방지할 도둑이나 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있습니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 성에 거하는 자들은 모두 거룩하게 된 자들입니다. 그런즉 성문을 닫아 방지할 도둑이나 적도 없는 것입니다. 성문은 언제나 활짝 개방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그 성은 하나님의 영광이 비추고 어린양께서 등이 되심으로 대낮보다 더 밝습니다. 성도들은 자유롭게 새 예루살렘 성을 출입할 수가 있습니다. 신분증이나 보호 장비가 없어도 안전합니다. 반면에 이 세상은 대낮에도 강도가 성행하고 사기꾼과 도둑이 들끓으며, 문이 없으며 생명의 위험을 느낄 정도입니다. 하물며 밤의 세상 지옥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악한 자들이 밤의 세상에서 서로 헐뜯고 상처를 입히고 지내는 동안 성도들은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평강을 누리며 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현세의 고난과 유혹을 이겨내고 믿음으로써 승리하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새 예루살렘 성의 구성원
26-27절 말씀에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고 했습니다. 새 예루살렘 성에 거할 수 있는 자는 만국 백성 중에서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 이외에는 없습니다. 이들은 모든 나라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 이마에는 하나님의 인이 표시되어 있고 환난이나 시련 가운데서도 결코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자로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죽도록 충성한 자들입니다(요한계시록 2장 10절). 그들 가운데는 왕들도 있을 것입니다. 권력 있던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평민과 종들과 과부와 고아들도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백인, 흑인, 황색인이 모두 있을 것입니다. 인종과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믿음을 지킨 자는 누구나 새 예루살렘 성에 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를 경배하기 위하여 온 세상에서 새 예루살렘 성으로 모여들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새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릴 것입니다(요한계시록 14장 3절).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이러한 사실을 예언해 주었습니다. 즉 그는 “나라들은 네 빛으로, 열 왕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이사야 60장 3-4절)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본문 말씀에 현실적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계획을 처음 계획하신 대로 성취하실 것이며 전혀 빈틈없이 완성하실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지 못할 자
27절 말씀에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 속함 받지 않은 것이나 사람은 결코 새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누가 더 악하기 때문에 못 들어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죄인을 구속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속량 못할 악이나 죄는 없습니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 성의 출입이 저지된 자는 의식적으로,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음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자기의 길을 가며,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는 자입니다.
죄인 중에는 자기 죄를 미워하는 자가 있고 사랑하는 자가 있습니다. 의지가 약하여 죄를 짓는 죄인이 있고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 죄인이 있습니다. 하나님 성에 못 들어가는 자는 회개하는 죄인이 아니라 거역하는 죄인입니다(8절, 로마서 7장19-25절). 이들이 거할 처소는 새 예루살렘성이 아니라 둘째 사망의 불 못입니다. 영원한 암흑이 있는 곳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은총을 거부했기에 그 대가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은총을 값없이 주시지만 그것을 거부할 때는 그 대가를 엄청나게 치르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요한이 본 천국보다 실제의 천국 성은 더 아름답고 크고 웅장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 시대에 인간으로서 표현할 수 있는 말을 다 동원하여 천국 성의 아름다움을 기록했습니다. 2절 말씀에, 천국 성은 신부가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결혼식장에 가면 아무리 못생긴 신부도 다 예쁩니다. 천국의 아름다움과 크기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아름다움과 큰 규모입니다. 우리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 천국을 소유하여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여 주어야만 하지만 택함 받은 자들은 이 영광스러운 기회를 절대로 빼앗기지 아니해야 합니다.
천국 성은 정금으로 되어있고 성곽은 벽옥으로 되어있습니다. 정금으로 지어진 집 본적 있습니까? 사도 요한의 눈에 천국 성은 말할 수 없는 빛을 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금 같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도저히 눈을 똑바로 뜨고서는 볼 수 없는 빛이었을 것입니다. 그 빛은 곧 하나님의 영광의 빛입니다. 성곽은 그 빛에 반사되어 푸른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성곽의 기초석은 12사도들의 이름이 기록되어있고 모두 12보석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12사도들을 통해서 이 땅에 천국 복음이 전파되었고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12사도들은 예수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여 보석 같은 신앙을 지켰습니다. 천국 문은 열두 진주 문으로 되어 있었고, 그 문에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함이 없이는 천국 문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공로로 천국 문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과 은혜로 천국 문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열두 진주 문을 들어서자 천국 길이 나오는데 정금으로 되어있는 길이었습니다. 이것 또한 “정금 같은 믿음으로”만이 천국 길을 거닐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금으로 된 길을 걷고 싶으십니까? 믿음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하여야 만이 이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속된 짓이나 가증스러운 짓이나 거짓말을 하는 자는 이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속된 짓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썩어질 것들을 좋아하는 것이 모두 속된 짓들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이루려는 것들이 속된 것들입니다. 돈을 좋아하고 쾌락을 좋아하고 명예, 권세를 좋아한다면 속된 자들입니다. 가증스러운 짓은 우상 숭배하고 귀신을 섬기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우상 숭배는 어떤 물체에게 절을 하는 것만 말하지 않습니다. 나 자신이 우상이 될 수 있고 내 가족, 내 남편, 내 아내가 내 자식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그 어떤 다른 것을 더 좋아하고 마음 뺏기고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거짓말하는 자도 천국 길을 거닐 수 없습니다. 거짓의 아버지는 마귀입니다. 남을 속이는 것은 곧 나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되고 그 거짓은 나를 천국 가는데 까지 못 가게 만들고 만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아름다운 천국을 바라보면서 어떤 미혹에도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이 아름다운 곳에서 사는 것이 배가 아픈 것입니다. 사탄은 후에 자기가 갈 곳이 어디인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어두운 곳으로 인간들을 데리고 같이 들어가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다랴 지방에 갔을 때 귀신들린 두 사람이 예수께 소리 지르면서 하는 말이 “아직 때가 이르지 아니했는데 왜 벌써 와서 우리를 쫓아내려고 합니까?” 라고 하였습니다. 사탄은 자신의 그 때가 언제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탄의 미혹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때에 갖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미혹하고 있습니다. 주일을 지키지 못하게 미혹하고 있고,…..말씀을 보지 못하게 미혹하고 있고, 기도, 전도를 못하게 미혹하고 있고 교회 봉사를 못하게 미혹하게 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돈을 더 사랑하고 자기를 더 사랑하고 쾌락을 더 사랑하기를 미혹하고 있습니다. 속으면 우리는 천국 길을 거닐 수 없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 말씀에, “(1)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아니하며, (4)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믿음을 지키며 끝까지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셔서 우리 모두 열두 진주 문에서 만나 정금으로 된 길을 거닐 수 있는 자들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무리
9-27절 말씀은 새 예루살렘 성에 대한 묘사입니다. 9절의 `신부와 어린 양의 아내`, 10절말씀의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모두 신구약 교회 공동체를 말합니다. 이 새 예루살렘 성의 외형과 재료와 성안 생활에 대한 묘사가 어떠합니까?
먼저 외적인 모습입니다. 11절 말씀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 성은 보석같은 빛으로 충만한 곳입니다. 그것은 그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영광이며, 성도의 영광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 보석처럼 빛나는 곳입니다. 성도들 안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보석처럼 빛나게 됩니다.
12-15절 말씀은 가장 기본적인 새 예루살렘 성의 건축구조를 말합니다. 성의 문은 열두 문이요, 기초석은 열두 기초석입니다. 열두 문에는 열두 천사가 있고, 열두 지파의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또 열두 기초석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이는 신약과 구약의 모든 성도들의 대표로서 우주적인 교회와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 그 성의 외적 모습은 네모 반듯한 정사각형으로서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았습니다. 그 갈대 자로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다디온 곧 약 2400㎞였습니다. 아주 웅대한 모습의 사이즈로서 성의 웅장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12,000 스다디온은 12×1,000으로서 이는 실제 크기보다, 완전수로서 모든 성도들이 거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성곽은 144규빗으로 약 70m입니다. 이도 물리적인 사이즈보다 영적 교훈의 완전함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같았습니다. 또 그 성곽의 기초석은 이름도 생소한 12종류의 각색 보석으로 꾸몄습니다. 열두 문은 열두 진주로, 성의 길은 맑은 유리같은 정금이었습니다.
이처럼 새 예루살렘 성이 보석으로 꾸며진 사실이 말해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첫째, 성도들의 아름다움과 존귀함입니다. 성도들은 어떤 존재들입니까? 보석처럼 맑고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자들입니다. 성도는 보석처럼 순결하고, 투명하고, 영광스러운 자들입니다. 오색빛깔 무지개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존재들입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진정 아름다운 보석들입니다. 탤런트 정보석만이 보석이 아닙니다. 그건 가짜 보석이고 진짜는 우리들입니다. 어떤 분은 벽옥입니다. 남보석(사파이어), 옥수, 녹보석도 있습니다. 다이아몬드, 정금, 진주, 홍마노, 홍보석, 황옥, 비취옥, 청옥, 자수정도 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갖가지 보석들이 모두 모인 아름다운 보석상자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새로운 품격과 인격의 아름다움을 말합니다.
성도는 이처럼 아름다운 보석이 되어야 합니다. 보석으로 살아갈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은 보석으로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십니다.
둘째, 보석은 하나님의 변치 않는 영원한 속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보석처럼 아름답고 영원합니다. 그 분의 사랑과 빛, 의로움, 거룩함, 영광스러움 등은 보석처럼 영원히 빛납니다. 새 예루살렘 성은 보석처럼 영롱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곳입니다.
22-27절 말씀은 새 예루살렘 성 안에서의 생활을 보여줍니다. 새 예루살렘 성 안에는 없는 것이 세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건물개념인 성전이 없습니다. 그것은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어린 양이 친히 그 성전이 되시기 때문입니다(22). 이제 건물로서의 성전은 없어지고, 성전의 핵심인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님이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둘째는 해와 달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과 어린 양 예수님이 등불이 되셔서 친히 밝히 비추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새 예루살렘 성은 해와 달이 없어도 더욱 환한 빛으로 충만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만국과 열왕들이 그 빛 가운데로 자유롭게 다니게 됩니다.
셋째는, 밤이 없습니다. 어두움이 조금도 없는 곳이 새 예루살렘 성입니다. 낮에도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합니다. 이러므로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들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로서 출입의 자유가 보장된 자들입니다.
그러나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들은 결코 그리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27). 속되고 가증되고 거짓된 자들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자들입니다. 이와같은 죄의 요소를 가지고는 하나님과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 앞에는 이 두 가지 길이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최종적으로 어느 곳으로 들어가야 하겠습니까? 이 땅에서 일시적으로 손해를 보고, 마음이 아픈 상황을 겪더라도 영원한 새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님과 함께 영원토록 영생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날에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님이 우리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수고했다며 품에 안아 주시고, 위로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 곳에는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는 곳입니다. 한마디로 생명이 왕 노릇하는 곳입니다.
성도들은 이 땅 뿐 아니라 오는 세계, 곧 새 예루살렘 성에서도 영원한 보석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석과 같은 하나님의 성품을 덧입도록 복을주셔서 주셔서, 진정 고상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또 이 땅의 아름다움이나 화려함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육신의 아름다움과 젊음도 얼마나 가겠습니까? 곧 갱년기가 찾아올 것입니다. 눈이 침침해지는 인생의 어두움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 성을 유업으로 받는 하나님의 상속자들은 더욱 큰 희망으로 불타오를 것입니다. 이것만이 산 소망으로서 우리에게 진정 새 힘을 주고, 에너지를 주며, 꿈을 주게 됩니다. 강력하게 살아갈 동기부여를 해주는 것입니다. 이 영원한 산 소망을 가슴에 품고 보석처럼 살아가는 은혜가 항상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말씀은 목사님들의 설교와 참고자료를 인용하여 올린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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