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계명,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8)
출애굽기 20 : 1 – 17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제5계명 : 네 부모를 공경하라 : 가장 근본적인 인간관계
들어가는 말
제5계명에서부터 인간에 관한 명령은 시작됩니다. 본문 말씀은 이러한 명령 중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으로써 인간에 관한 계명이 이렇듯 부모에 관한 명령으로 시작된 것은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가 모든 인간관계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언뜻 보기에 공경의 대상이 부모에게만 한정되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모든 권위자”들까지도 포함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예언자들과 교사들을 때로는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부르기도 하였고(열왕기하 2:12, 13:14),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받은 자들에게도 부모의 칭호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5:8, 사사기 5:7).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사회 전반에 걸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부모 공경”의 기본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부모”를 존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모의 권위는 부모가 이룩한 업적의 유무 또는 인격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만이 갖는 본래의 존귀함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하의를 벗고 잔 노아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조롱하며 업신여긴 “함”의 행위가 용서받지 못했던 것이며(창세기 9:20-27), 모세 시대에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거나 부인하는 자를 사형에 처했던 것입니다(출애굽기 21:17, 신명기 21:18-21, 신명기 21:18-21). 한편 부모를 성실히 공경하는 자에게는 땅에서 오래 사는 “장수의 복”이 약속되었는데, 이러한 복은 단순한 “장수의 복만이 아니라”, “복을 누리며”(신명기 5:16), “잘되는”(에베소서 5:2) 물질적인 복까지도 포함하는 약속이었습니다.
본문 말씀의 제5계명은 자녀들에게 주는 계명으로써 이 계명은 과거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자녀들에게 꾸준히 교육시켜야 하는 계명입니다(신명기 6:7). 그렇다고 해서 완고한 부모들이 독단적인 권위를 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이 계명을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부모들이 이 계명을 위하여 자녀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 역사하심의 말씀을 그들의 자녀들에게 충분히 교육하고 또한 훌륭하게 지키게 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계명을 다음 성경 구절들과 비교하여 보면서 그 뜻을 더욱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21:15-17, 레위기 20:9, 신명기 5:16, 21:8, 잠언 1:8, 6:20, 30:17, 말라기 1:6, 마태복음 15:4-6, 마가복음 7:10-13, 10:19, 18:20, 골로새서 3:20, 에베소서 6:1-4).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부모의 권위에 합당한 존경을 돌리는 것입니다. 즉 부모님께 순종하고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것이며, 하나님 다음으로 부모님을 존경해야 할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1-4계명은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고, 6-10계명은 사회적인 것이며, 그 사이에 부모에 대한 공경을 규정한 계명이 있습니다. 레위기 19:3에는 안식일 준수와 나란히 부모님 경외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또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성경에서는 여러 번 언급하고 있는데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고 거스리는 자는 죽일 것이라고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잠언 20:20, 30:17, 마태복음 15:4-6, 마가복음 15:4-6). 부모 공경에 대한 보상은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장수하는 복을 누린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0:12, 신명기 5:16, 에베소서 6:3).
본문의 말씀은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면 이 땅에서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는 복을 더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 다음으로 부모님 공경에 대한 규정을 강조하며 이는 보이는 부모님께 대한 공경과 사랑이 곧 하나님께 대한 사랑임을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줄거리
“네 부모를 공경하라”
십계명을 두 부분으로 나누는 데 있어서 학자들간에 이견이 있어 왔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두 돌판에 기록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처음 네 계명은 첫 번째 돌판에 기록되었고 나머지 여섯 계명은 두 번째 돌판에 기록되었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두 돌판에 각각 다섯 계명씩 기록되었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첫 번째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십계명의 앞부분에서 사람의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법이 규정되어 있는 반면에 뒷부분에서는 사람 상호간의 관계에 대한 법이 규정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두 번째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다섯 번째 계명도 사람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법에 속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파라(Farrar)는, 처음 다섯 계명은 첫 번째 돌판에 새겨졌는데 이는 피조물 된 인간이 반드시 행해야 아는 ‘피에타스'(Pietas:의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두 번째 돌판에 새겨진 다섯 계명은 성숙한 인간이 생활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프로비타스'(Probitas:성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다섯 번째 계명을 어느 쪽에 두느냐는 것이 어려운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채드윅(Chadwick)은, 다섯 번째 계명은 십계명의 두 부분을 연결하는 다리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이것이 가장 합당한 설명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섯 번째 계명이 전반부에 나오는 네 계명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계명인데 반해 사람들 상호간의 관계를 다루는 계명인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이 계명을, 인간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십계명의 후반부의 첫 번째 계명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이 계명은 이미 앞에 나온 네 계명들의 사상과 의도에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부모가 자녀에게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은, 아직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조차 파악할 수 없는 어린 시절에는 부모들이 보여 주는 개념을 통해서 하나님에 관한 아주 중요한 사실들을 배우게 됩니다. 자녀는 성장하는 동안 전적으로 부모의 은혜를 입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의 본성에서 일치하며 가장 명백하고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 중의 하나는 어린아이들이 부모에 대해서 마음을 열어 놓고 있으며 또 깊은 애정을 품는다는 것입니다. 이 태도는 어린아이들이 부모 이외의 다른 사람에 대하여 취하는 태도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시는 태도는 마치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태도와 같습니다. 그것은 곧 입법자와 사랑하는 자가 취하는 태도요 부양자와 통제자가 취하는 태도입니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인식하게 되는 더 높은 대상들에 대한 아이들의 태도는 기본적으로 부모와의 관계에서 형성된 아이들의 태도에 따라 좌우될 것입니다.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관계에 의해 부모를 공경하는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부모가 공경하는 하나님의 이름을 공경하는 데로 나아가게 되며 이러한 자녀들은 복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와 같이 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맡아서 돌보아야 할 자기 자녀들을 신앙의 길로 이끄는 부모 역시 복된 사람들입니다.
다섯 번째 계명의 이러한 이중적 개념은 이 계명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첫째, 이 계명은 자녀들이 아주 엄중하게 지켜야 하는 법이긴 하지만, 이 계명에 부모들이 실천해야 할 이상적인 생활도 포함되어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제하여 인간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첫 부분에 나오는 이 계명의 중요성을 결코 과소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 계명에 복종하는 정도에 따라서 그 뒤에 제시되는, 인간 관계에 관한 나머지 율법들을 순종하는 것이 쉬울 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먼저 이 예명이 의미하는 바 그 자체를 고찰하고 이어서 신약의 사상과 교훈으로써 이 계명의 보다 깊은 뜻을 밝힌 다음 마지막으로 이 명령을 현대 생활의 여러 상황에 실제적으로 적용시켜 보겠습니다.
다섯째 계명의 이해
흔히 사람들은 이 계명이 오직 어린아이들에게만 해당된다고 그릇되게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면 이 계명에 내재 된 더 이상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계명이 맨 먼저 어린아이들에게 적용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부모와의 관계에 있어서 자녀들은 언제나 처음에는 어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커서 어른이 되면 이 계명이 그 효력을 상실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적어도 이 계명이 지닌 깊은 의미의 절반은 잘못 생각하는 처사입니다. “공경하라”은 말에는 순종보다 훨씬 더 넓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물론 이 계명에는 필연적으로 순종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어린아이는 성인이 되며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이릅니다. 이 때가 되면 사람들은 인생의 크고 작은 문제에 봉착해서 자신이 직접 결정해야 합니다. 자녀가 언제까지나 부모의 말을 들어야 한다면 결코 성인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에게 복종해온 어린 시절의 훈련은 그 이후 인생의 모든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보호와 통제를 받는 시기가 지나면 그 때부터는 자신이 자신의 문제를 결정하며 그것에 따르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상의 사실을 생각할 때, 이 계명이 단지 어린 시절에 순종하는 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일생동안에 해당되는 말씀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면 모두 다 자기 부모에게는 언제까지나 자식이며 부모에게 마땅히 복종해야만 하는 때가 지나갔을지라도 마땅히 공경해야 하는 시절은 언제까지나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계명은 두 시기에 걸쳐 즉 어린 시절과 성인 시절에 모두 적용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한편 “공경한다”은 말의 의미는 “중히 여기다”, “높은 위치에 두다”, “높이 평가하다”, “가장 좋은 의미로 존경하다”는 것입니다. 아직 스스로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며 의지를 발휘할 만한 나이에 이르지 못한 아이들이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그리고 기꺼이 부모의 의사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모두 다 그렇듯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법 역시 아이들에게 스스로를 보호받는 자비로운 요구이면서도 동시에 절대로 필요한 요구입니다. 이 법이 자비롭다는 것은 인격이 형성되고 지성이 훈련을 받아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기까지는 아이들이 자신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면에서입니다. 아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배려는 언제나 아이들은 놀면서 자유롭게 성장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어리고 젊은 시절은 희망과 활동과 유머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은, 혈연관계에 의하여 아이에 대해 가장 좋은 배려를 하며 아이에게 가장 좋은 프로그램을 계획할 사람들에게, 아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발랄한 면이 방해받지 않으면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부모로 하여금 그 생명과 생활을 책임지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어린아이들이 아직 겪을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걱정거리들을 전혀 염려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자라며 방해받지 않고 발전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어린 시절의 미숙한 상태는 성숙한 사고로 발전하기 위한 준비와 훈련이 반드시 필요하고, 이와 같은 것들을 갖춘 후에야 비로소 아이들이 자기에게 내려진 의무를 수행할 수 있기 때문에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명령은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가장 자상한 보호자인 부모에게 복종하기를 거절하는 것은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며, 실로 생의 파멸을 가져오는 치명적인 행위입니다. 또한 이는 인생의 아주 아름답고 고귀한 모든 가능성을 이를 수 없게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명령의 강제적인 성격은 또한 이 명령의 자비로운 의도를 보여 주는 것이 됩니다.
이 계명의 아주 훌륭한 점은, 하나님께서 아이에게 단순히 부모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복종하라고 요구하고 계신다는 것에서 또 볼 수 있습니다. 즉 가정 교사나 학교 선생이 부모의 입장을 대신해야 하는 경우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이에게 급박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 경우에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학교 선생에 대한 복종의 원리는 거의가 권위에 대한 두려움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하나님이 바라시는 복종의 원리는 보다 차원이 높은 사랑의 원리입니다. 물론 교사들의 역할에 대한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런 견해에서 볼 때 나의 견해는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학교 선생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내 아이들이 일년 중 육개월 이상을 아이들 어머니의 생활과 아버지의 관심의 영향을 받지 않는 채 지나도록 두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를 가장 사랑하는 부모에 대한 복종은 하나님께서 아이를 보호하시기 위한 것이며 어린 시절의 인격 성장의 원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한편 자녀가 온전한 인격 성장을 위해 부모의 통제를 벗어나서 행동해야 하는 때가 오는데 그 때에도 여전히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이 때는 새로운 형태로 공경을 하게 된다. 즉 예의 바른 태도와 친절한 행동을 통해서 또한 부모님께 만년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공급해 드림으로써 공경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 복종을 잘 한 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공경을 잘 할 것입니다. 부모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시기를 지가서 자신의 의지로 혼자 선택하고 행동해야 하는 때에 이르게 되면 자식은 어렸을 적에 부모가 대신해서 생각하고 계획하고 명령을 하는 가운데서 받았던 사랑의 참된 가치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은 부모가 사랑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부모의 말년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으로 존경과 사랑을 표할 것입니다. 혹독한 삶의 투쟁을 현실적으로 깨닫게 될 때 자신이 어린 시절에 참으로 많은 보호를 받았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어릴 때에는 놀기만 했는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부모의 염려와 끊임없는 수고와 간절한 기도 덕분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점점 더 성숙할수록 더 깊이 부모를 공경하게 되며 과거에 부모가 자기에게 쏟았던, 그리고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서는 어쩌면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바랄지도 모를 자식의 사랑을 부모가 쏟은 만큼 부모에게 부어주는 것을 삶의 기쁨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1) 장수에 대한 약속
부모에 대한 공경의 명령과 결부된 장수에 대한 약속은 하나님께서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거의 모든 약속처럼 각 개인에게 적용된다기 보다는 오히려 민족 전체에 적용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이 약속은 개인적인 보상을 공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여 그것에 근거해서 행동한 결과로 얻게 되는 공동체의 복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 주어진 장수의 약속에 개인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체로 부모를 공경하는 가운데서 결국 수명을 연장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좋은 습관과 올바른 성품을 익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부모를 공경하는 분위기에서 형성된 성품에는 수명을 연장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평온함이 있습니다. 반면에 자기를 낳아주고 희생적인 사랑을 베푸는 부모에게조차 복종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형성된 성품에는 수명을 단축시키는 경향이 있는 무모함과 흥분하는 기질이 있습니다. 이처럼 이 약속이 개인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보다 이 약속이 진정으로 적용될 수 있는 대상은 민족 전체입니다. 사람들이 가정에 대한 신성한 개념을 유지하고 자녀들이 어릴 동안에는 부모에게 복종하고 더욱이 성숙한 후에도 언제까지나 부모를 공경하는 백성들은 자신의 소유를 잃지 아니하며 자기 땅에서 영구히 거하는 강한 민족이 될 것입니다.
2) 부모에 대한 적용
부모를 공경하라는 다섯째 계명이 자식에게 일차적으로 주어진 계명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나 동시에 부모에게 적용되는 측면도 있다는 점에 관해 몇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적용은 상식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너무나 명백합니다. 부모들이 자식으로부터 공경을 받으려면 그들이 반드시 공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자녀로하여금 즐거운 마음을 갖고 절대적으로 복종을 하게 하려면 반드시 사랑에 의해 결정되는 부모의 통제가 따라야 합니다. 그 사랑은 선견지명이 있으며 포용력이 커야 하며 현재의 즐거움을 위해 앞날의 고통을 대가로 지불하는 일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 엄격함을 지닌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성숙한 사랑은 오직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는 성품을 가진 사람에게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부모가 되는 선행 조건은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히 행하는 올바른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먼저 하나님께 복종하는 생활을 하며 모든 생활의 방식에 대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한, 어떤 부모도 자기 자식들에 대해 바른 사고를 하거나 자식들을 위해 진정 효과적인 프로그램을 계획할 수 없다. 사실 부모가 자녀로하여금 장차 자신의 의지로 결단하여 하나님께 복종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일을 맡았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성품에 일치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자녀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바르게 보여 줄 수 있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끊임없이 가져야 할 책임이 그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아이들에게 부모를 공경하도록 가르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부모가 자녀들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나타내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신약의 교훈에 의한 다섯 번째 계명의 조명
이 계명이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고 또한 구약 성경에 기록된 구약 시대의 계명들 중의 하나이지만 아무도 이것이 신약 시대에 와서는 철폐되었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다른 계명과 함께 이 계명도 부모와 자식 사이의 신성한 관계를 더욱더 명백하게 보여 주는 성경 다른 부분에 기록된 계시와, 하나님의 목적과 사상을 더욱더 뚜렷하게 진술하는 성경의 다른 기록 가운데서도 발견되고 있으며 또 거듭 강조됩니다. 특히 그리스도께서 친히 보여 주신 모범은 대단히 아름다우며 암시하는 바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둘째 아담으로 보내신 그리스도께서 첫째 사람 아담처럼 성숙한 인간의 모습을 지닌 영광스러운 점을 다 갖추고 세상에 오시질 않고 유년 시절을 겪어야 하는 아기로서 세상에 왔다는 사실은 다섯째 계명을 해석하는 데에 많은 빛을 비춰준다는 점에서 무한한 가치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 동안 아이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의 통제를 받았습니다. 아이 예수는 사람을 성장하게 만드는 부모의 따뜻한 사랑과 감독과 통제를 받으면서 지혜와 키가 자라갔으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아이 예수가 열두 살이 되어 부모가 그를 하나님 앞에 보이려고 성전에 데려갔을 때 예수께서 모친을 대하시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여기에서도 암시하는 바가 매우 많습니다. 주의 모친이 근심하며 그를 찾았다는 사실은 분명 예수께서 그 이전에는 모친이 금방 찾을 수 있는 곳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따라서 아이를 잃어버리고서 즉시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은 마리아로서는 처음 당하는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근심에 싸여 남편과 함께 아이를 찾아다니는 어머니의 모습은 나사렛 집에서 가졌던 그들 사이의 사랑과 복종의 원만한 관계를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마침내 모친 마리아가 아이 예수를 찾았을 때 아이가 모친에게 한 질문을 잘 읽어 보면 바로 그 사실 즉 주께서 모친을 공경하고 신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이 말을 글로 기록했기 때문에 이 말의 아름다운 소리가 상실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말에 대해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품고 있는 생각은 확실히 이 기사의 전체적인 장면과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과는 다소 어긋나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어떤 의미로든지 자기 모친을 책망하고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알지 못하셨나이까”라는 말을 중심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즉시 그것이 모친에 대한 사랑과 신뢰에서 나온 질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말은 마치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어머니께서 제게 가르쳐 주시고 보여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일 외에는 내가 어떤 일에도 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아실 만큼 나를 아주 잘 알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이것을 보가 예수께서는 부모의 통제를 뿌리치고 나간 일이 전혀 없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성경 구절에 “예수께서 한 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고 분명하게 진술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리켜 나의 모친이요 형제요 자매라고 말씀하셨을 때 다소 모친을 무시하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주님의 말씀의 뜻을 오해한 데서 기인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말씀에도 모친을 무시한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다만 그렇게 말씀하심으로써 모친과 형제와 자매의 친밀함은 그대로 두신 채 제자들을 아주 명예롭게 높이신 것 뿐입니다.
주님에게서도 역시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시기는 지나갔지만 공경해야 하는 때는 결코 끝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음을 눈앞에 둔 마지막 두려운 시간에 갈보리 언덕의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저주스러운 어둠 속에서도 그동안 깊이 사랑해온 모친을 여전히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더욱이 모친이 현재 겪고 있는 어려운 사정을 감안하여, 주님의 사랑과 그 사랑의 표현 방법을 가장 깊이 깨닫고 있던 제자에게 모친을 맡기고 사랑으로써 돌보아 드리도록 부탁하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자신의 인품과 모범을 통해서 다섯째 계명을 가장 영광스럽게 지키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가르치시는 중에 그 당시 성행하던 한 가지 악습에 다섯 번째 계명을 적용시킴으로써 이 계명에 대해 아주 설득력 있는 해석을 하셨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부모를 봉양하는 데 쓸 수도 있는 재물이 “고르반”되었다고 말함으로써 즉 제단을 봉사하는 데 드려졌다고 말함으로써 부모를 보살펴 드리는 의무를 기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부모를 봉양하는데 써야 할 것을 제단에 바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즉 주님은 늙은 부모님을 돌보고 위로하는데 재물을 사용하는 것이 그것을 하나님의 제단에 바치고 부모님은 소홀히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거룩한 일임을 가르치심으로 부모 공경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이러한 모범과 가르침이 곧 신약 성경이 나타내고자 하는 부모 공경에 대한 교훈인데 이것을 사도들은 그들의 글에서 거듭 거듭 밝히고 강조합니다.
다섯째 계명의 현대적 적용
아마도 오늘날, 자녀들이 어린 시절에는 부모에게 불순종하고 성장해서는 부모에 대해 불손한 행동을 하거나 존경심을 갖지 않는 태도가 만연해 있는 이 현상만큼 슬픈 징조는 없을 것입니다. 이 현상은 여러 면에서 아주 많이 나타나는데, 슬프게도 이것이 불신자들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 가운데 어떤 자녀들은 제멋대로 행동하기 때문에 항시 실수하며 또한 접촉하는 모든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는 아이들, 그들의 좋지 못한 행동을 통해서 그들 자신의 미래가 불행할 것임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친구들 사이에서 아버지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남자 아이들은 경박하고 무례한 별명을 대신 사용해왔습니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양식있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녀들이 부모를 경박한 말로 조롱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그들의 부모를 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 자신이 형편없는 아이임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자 아이들은 흔히 자기 어머니를, 엄청나게 많은 집안의 하찮은 일에 자기들이 전혀 손대지 않을 수 있도록 해주는 가정부 정도로 보는 것 같습니다. 가정에서 멀리 떨어져 생활하므로 부모의 금지나 명령을 받지 않아도 될 날을 고대하는 현상이 여러 곳에서 보이는데, 그것은 아주 슬픈 현상입니다.
이러한 불행한 현상이 만연하는 현실에 있어서 대부분의 경우 아이들은 부모보다는 책임을 덜 지게 됩니다. 어떤 경우이든지간에 이와 같이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부모에 대한 개념이 무너진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들은 자신을 자기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나타내는 자로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의식주를 제공하는 자로 혹은 도덕 수호자 정도로만 생각해 왔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자기 자녀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서 사람들은 아버지라는 이름이, 자녀들과의 참된 관계를 유지하게 하며 자녀들에게 지워져 있는 무거운 책임을 깨닫도록 교육하는 자의 이름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생계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을 가리키는 호칭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들이 자녀를 올바르게 훈련시키는 문제에서 지은 죄는 그들이 이제까지 생각해 왔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합니다.
“살렘의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예수께 데려 왔을 때”라고 시작하는 찬송이 성경의 이야기를 바르게 해석한 것인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이 기록된 마태복음 19:14에서 사용된 헬라어의 대명사는 남성이며, 또한 당시 아버지가 자녀를 훈련시키는 책임을 졌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들이, 하나님이 그들에 대해 의도하시는 것보다 자녀에 대한 자신의 역할을 과소평가한다면, 자녀들이 자기들을 더 이상 공경하지 않을지라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오늘날 어머니들도 흔히 자발적으로 자식의 노예가 되어서 육체적으로 자식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일일이 간섭하면서도 자신이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하나님의 은혜를 분명하게 나타내야 하는 사람이라는 중요한 사실은 잊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 계명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해야 한다는 명령이라는 사실에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계명이 그와 같이 명령하는 이유는,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가 자녀에게 하나님을 바르게 보여줌으로써 아이의 잠재력을 완전히 개발시키는 데 다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부모들이 먼저 자신의 거룩한 위치에 대한 높은 이상을 품어야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틀림없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는 명령에 순종할 것입니다.
한편 자녀들은 그들이 십계명 중 이 다섯째 계명에 복종하는지 여부에 따라서 다른 모든 계명들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이 처음 4가지 계명을 잘 지키느냐는 것은 이 계명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의해서도 입증됩니다. 불신앙, 신성 모독, 반역, 이 모든 것 역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죄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여섯번째 계명 이하의 모든 계명도 다섯 번째 계명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들은 살인, 간음, 도적질, 비방, 탐욕의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젊은 남녀들이 순식간에 일어나는 야릇한 유혹을 받으면서도 경건한 부모를 기억함으로써 거듭 그 유혹을 이겨냈다는 사실은 수세기 동안의 많은 이야기들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은, 대중이 무엇이라고 비판하든지간에 자상하면서도 엄격하게 다스리는 가운데서 태어나면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주는 자로서 거룩한 존재인 부모의 그 신성한 역할이 공격받지 않도록 지켜야 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절대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공경
자녀들에게 있어서 부모를 공경하는 행위는 그 부모가 생존할 때나 아니면 이 세상을 떠나 계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일입니다. 또한 유식하거나 아니면 무식할지라도 마찬가지이며 선하거나 악하거나 간에 관계없이 자녀들은 부모에게 절대적인 공경을 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녀들의 의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에게 부모를 향한 온전한 마음을 갖도록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행함으로 우리의 생활의 토대가 되는 가정이 화목하여 하나님의 복과 그의 영광이 나타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하기 위한 일
때로는 부모의 일이 우리의 이상에 맞지 않고 또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라고 일축하여 부모의 가슴을 아프게 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이러한 이유를 앞세울 수 없는 자녀”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현실 안에서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한다면 우리는 부모를 공경하는 좋은 자녀들이 될 것입니다.
① 우리는 먼저 부모의 명령을 항상 온전하고 합당한 말씀으로 받아들여 그 말씀에 복종함으로써 부모를 공경하여야 합니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부모를 악하다고 정죄하는 결과만을 남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②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심혈을 기울여 부모님을 공경하여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서 자신의 일에는 최선을 다하면서도 자신의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부모 공경에 소홀히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들 일과 비교될 수 없는 부모님의 고귀함을 인식해야 합니다.
③ 자녀들을 향한 부모의 희망에는 실현 불가능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떠한 일이든지 간에 부모가 바라는 희망을 우리의 발로 짓밟는 모습을 부모에게 보여 드림으로 실망을 안겨 드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희망을 갖지 못한다면 그 자녀는 부모에게서 버림받아 잊혀진 자녀입니다. 즉 부모의 희망이 되지 못하는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걱정과 근심을 주는 불효를 하는 것입니다.
④ 자녀를 위한 부모의 수고는 그의 일생이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계속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부모를 공경할 수 있는 시간은 그 시간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간입니다. 이 짧은 시간에 우리는 보모의 유익을 위하여 일하는데 게으르거나 혹은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평생을 부모의 은혜로 살면서, 만약 부모를 위한 조그마한 유익을 위한 일에 외면을 한다면 그는 참으로 부모를 공경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⑤ 부모님을 난처한 입장에 빠뜨리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자녀는 부모에게 영광스러운 결실이 되어 질 때 그 부모를 공경한다고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에게 수치가 되고 그분을 난처한 입장에 빠뜨리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⑥ 우리는 인생의 황혼으로 접어드는 부모를 위하여 평안과 평강을 위한 일에 우리들의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부모는 우리를 위하여 차고 더운 것과 마른 곳과 진 곳을 가려 주시는 등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제 자녀가 그 보은의 배려가 없다면 부모는 비탄에 빠져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⑦ 부모를 위하여 우리의 모든 것을 희생할지라도 감사함으로 공경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자녀들의 부모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요, 의무의 이행인 것입니다. 불행에 앞서 충실히 이 모든 의무를 이행한다면 당신의 행위는 곧 모든 이들에게 부모 공경의 좋은 귀감이 될 것입니다.
부모의 권위는 부모의 인격이나 성공 여부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현대는 자신을 낳아 주고 길러 주신 부모의 사회적 지위가 낮다고 해서 부모를 업신여길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부모의 재물을 탐하여 부모를 살해하기까지 하는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죄까지도 서슴지 않고 행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이러한 사악함은 주님의 재림이 가까운 말세의 징조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마태복음 24:12).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계명이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십계명 연속설교의 여덟 번째 말씀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십계명은 과연 케케묵은 옛날이야기인가? 라는 물음에서 출발해서 제4계명까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다시 한 번 복습해 보십시다.
여러분 제1계명이 무엇입니까?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삶에 대한 명령입니다.
제2계명은 우상을 만들고 섬기지 말라.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에 대한 계명입니다.
제3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길 것에 대한 명령입니다.
제4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우리의 전 존재가 건강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가 담겨있는 명령입니다. 이상 4 계명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야 하는가를 일깨워 주는 계명입니다. 오늘부터 앞으로 여러 주간 동안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하여 주신 계명을 살펴보겠습니다.
다섯 번째 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명령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제일 먼저 주어지는 계명이면서, 또한 약속이 담겨있는 계명입니다. 다른 계명과는 달리 이 명령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에서 장수하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 계명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제일 먼저 주어질 만큼 중요한 계명입니다. 왜냐하면 부모와의 관계야말로 다른 모든 관계에 영향을 주는 가장 기본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1) 무엇보다도 이 관계는 인간 생명이 태어나는 과정에서 제일 먼저 맺게 되는 관계입니다. 한 생명이 존재케 되는 것은 바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를 통하여 태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에 태어나면서, 제일 먼저 맺게 되는 관계 역시 부모와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관계의 시작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2) 그런데 부모와의 관계는 인간의 모든 관계의 첫 출발이라는 점에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부모와의 관계가 우리의 모든 관계 속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또한 중요합니다. 어려서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원만한 관계 속에서 자란 사람은, 이후에 맺어지는 친구 혹은 부부의 관계에서도 원만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부모에게서 상처를 많이 받고 자란 경우는, 그 아픔과 상처가 다른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어려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이 뒤에 자녀나 배우자를 사랑하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것은 바로 이런 건강하지 못한 부모와의 관계 때문일 경우가 많습니다.
(3) 그리고 부모와의 관계는 순종을 배우는 첫 관문입니다.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고, 훈련을 받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라나 혹은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게 되는 삶의 기초가 될 수 있습니다. 청소년기에 법을 우습게 알고 범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렸을 때 부모의 말씀을 존중하고 순종하는 훈련이 결핍되어 있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부모와의 관계를 바로 정립해 나갈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단지 부모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부모를 공경함으로 공경하는 내 자신의 삶이 바로 세워 질 수 있습니다. 내 자신의 삶이 건강하고 원만하게 성숙해 갈 수 있기 때문에 성경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어떻게 행하는 것입니까? 어떻게 하면 부모를 공경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먼저 공경하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십시다. “공경하라”는 말의 히브리어 의미는 “be heavy” 혹은 “give weight to” “무겁다” 혹은 “무게를 둔다”는 뜻을 갖습니다. 원어의 의미대로 풀면, 부모님을 귀중하고 무겁게 여기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부모님을 귀중히 여기고 존경할 수 있습니까?
(1) 무엇보다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부모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자라나는 성장기에는 순종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부모님의 말씀에는 경험과 지혜가 담겨져 있습니다. 또 바로 된 부모치고 자녀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녀가 잘못되기를 바라서 그릇된 길을 가라고 권고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설사 우리 생각으로 맞지 않는다 해도, 부모님의 사랑의 뜻만은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이 10세 될 때까지는 부모가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데, 16세쯤 되면 부모가 아는 것에 대해 회의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19세가 되면 자신이 부모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고, 22세가 되면 부모가 뭘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30세쯤 되면 우리 부모님이 많은 경우 옳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40세가 되면 우리 부모님은 거의 완전하셨다고 생각하게 된다고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그의 말씀, 그의 가르치심을 귀중히 여기고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말씀 속에는 지혜가, 우리를 향한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2)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부모님의 모습 그대로 accept, 용납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연로하신 부모님을 대할 때 이런 마음가짐이 요청됩니다. 부모님께서 연로해지시면 점차 생각도 우리와는 달라지시고, 부모님의 말씀이나 판단에 동의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부모님이 이렇게 해 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말씀을 드릴 때가 있습니다. 물론 이런 태도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삶의 모습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수십 년 걸쳐서 이루어지신 삶의 습관이나 태도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조언대로 바꾸시지 않는다 해서 화를 내거나 부모님과의 관계에 상처를 내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저희 가족도 이런 경험이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제 부모님이 하늘나라에 입성하셔서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은 부모님을 모시고 있다 보면, 좀 마음에 안드는 행동을 하실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좀 고쳐 주십사 하고 말씀드리면, 들으실 때도 있지만, 마음에 노여움을 품으실 때도 많습니다. 합리적인 설명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과 함께 내린 결론이 어머님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우리가 이해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부모님 모습 그대로 accept,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경하는 길입니다.
(3) 그리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길은 그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오늘이 있음은 부모님의 땀과 눈물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부모님의 사랑과 돌보심이 없었다면 우리의 생명은 결코 건강하게 자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한 생명이 제 발로 서기까지 부모님께서 투자하시는 것은 25만 불을 훨씬 넘는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부모님께 25만 불 이상을 빚진 사람들입니다. 집을 사느라고 은행에 빚진 것은 어김없이 꼬박 꼬박 갚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생명이 있도록 투자해 주신 부모님의 사랑의 빚은 얼마나 충실하게 갚고 있습니까?
감사의 표현은 다양하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따뜻한 관심과 연락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정기적인 방문이나 경제적인 지원을 통해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는 일들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입으로 때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때를 놓치지 말고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공경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4) 또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으로 중요한 것은, 부모님의 영혼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몸으로 편하게 해드리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참으로 부모님을 공경한다면, 부모님의 믿음, 부모님의 영혼을 또한 염려해야 합니다. 이 땅 위에서 아무리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 해도 그 생명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이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정한 부모 공경은 부모님의 영혼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도록 권고하고 인도해 드리는 일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 일은 우리의 힘이나 우리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모님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부모님께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시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 승리자가 되시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기도야말로 우리가 당당히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또 우리 주님께서 응답하기를 기뻐하시는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잃은 생명이 돌아오는 것을 우리 주님은 그 무엇보다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확신을가지고 부모님의 믿음, 부모님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부모님을 공경한다면 부모님의 영혼, 영원한 생명과 멸망의 문제를 귀중히 여겨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회를 얻는 대로 전하고 권고드려야 합니다.
(5) 부모님을 공경하는 삶에서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님이 공경할만한 분이 되지 못할 때, 자라는 과정에서 부모님은 사랑과 양육 대신 상처와 아픔을 준 경우입니다. 아버님이 알코올 중독자였던지, 혹은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함으로 늘 마음에 고통을 안겨준 경우입니다. 그 아픈 마음의 상처가 오늘도 남아 있어서 부모님이라고 하면 진절머리가 나고 감사의 마음 대신 미움과 분노가 솟아오를 때입니다. 이런 마음의 상처에서 어떻게 부모님을 공경할 수 있습니까? 내가 오늘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은 바로 그 아버지 혹은 어머니 때문인데, 어떻게 그런 부모를 공경할 수 있습니까?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과거의 아픔은 과거로 끝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다. 과거의 아픔 때문에 오늘 우리의 걸음이 장애를 받고 있다면, 우리는 이중으로 고생하는 것입니다. 아픈 그 추억에 덧붙여 오늘 내가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 속 깊이 묻어 놓은, 이 아픔 이 상처를 목회자 혹은 믿을만한 믿음의 형제 혹은 자매와 나눔으로 그 분노를 풀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 용서함이 없이는 우리는 어제의 상처와 아픔으로부터 자유 할 수 없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말씀은 허공을 치는 이야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자유의 복음입니다. 해방의 복음입니다. 우리를 어제로부터, 어제의 가슴 아픈 추억과 상처로부터 고침을 받아, 진정한 자유인의 인생을 살아가도록 일으켜주는 능력의 복음입니다.
도저히 공경할 수 없는 부모님이십니까? 오늘도 아픔과 상처를 안겨주고 내 인생을 망쳐놓은 부모님이십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용서할수 있는 힘, 사랑을 주님께 구하시기 바랍니다. 용서는 과거로부터 자유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상처의 아픔으로 고민하는 오늘의 나를 고쳐줄 수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길, 그것은 용서일 수 있습니다. 가슴을 여는 용서 속에서 참으로 부모를 공경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베스트 셀러로 널리 읽혀졌던 조창인 님의 소설 “가시고기”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가시고기란 민물고기의 일종으로 엄마 가시고기가 알들을 낳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면, 아빠 가시고기가 혼자 남아서 알들을 지키고 돌봅니다. 알들이 깨어나서 새끼 가시고기들이 자라 제 갈 길을 가면, 아빠 가시고기는 돌 틈에 머리를 쳐 박고 죽는다고 합니다.
정연호라는 주인공 시인, 다움이란 10살 된 아들이 백혈병으로 고생할 때 이 아버지는 정말 순수하고 뜨거운 사랑으로 온갖 희생을 감수합니다. 미술을 전공한 다움이의 엄마는 스승 화가와 눈이 맞아 이혼을 하고 프랑스로 떠나갑니다. 다움이의 병상을 지키며 모든 사랑을 쏟는 아버지, 소생의 희망이 사라져 버린 아들을 데리고 산골 구석에 틀어 박혀 생명을 이어갑니다. 드디어 일본에서 다움이와 match되는 골수의 소유자가 발견되어 이식 수술을 받게 되자, 아버지는 신장을 팔아 수술비용을 마련하려다 자신이 간암의 말기에 접어들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자신의 각막을 팔아 아들의 수술비를 마련해주고, 다시 아들을 찾으려는 아내에게 아들을 넘겨줍니다. 그리고 자신은 외롭게 죽어간다는 이야기입니다. 뜨겁고 순수한 아버지의 사랑을 가슴 속에 느끼게 해주는 이야기였습니다. 우리 모두 크든지 작든지 이 같은 부모의 사랑 안에서 오늘 우리들이 있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함은 자녀들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아니 이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그 고통을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어머니에 대한 염려와 부탁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거창한 이웃 사랑의 표어도 필요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이웃 사랑을 부모님을 공경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해 갈 수는 없을는지요. 가시고기 같이 자신을 희생하며 쏟아주신 그 사랑을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것, 말로만이 아니라 입술로만이 아니라, 참으로 감사드리고 공경하는 것, 우리가 걸어야 할 삶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마무리
사도 바울의 경고는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모두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다섯 번째 계명의 말씀입니다.
십계명의 5계명은 특별히 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2절을 보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6장 1~3절에서 바울은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하는데 “땅에서 잘되고”가 덧붙여졌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과 신명기 5장 16절 말씀을 조합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네 생명이 길리라.” 장수의 복입니다. 다음은 “잘되는 복”입니다. 구약에서 잘된다는 표현은 영적인 복을 포함하지만 물질적 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잘 공경하는 자에게 장수의 복, 형통의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왜 5계명에서 이 복을 약속하셨을까요? 부모 공경이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렵고 잘하지 못하니 하나님이 다른 계명에 없는 이 복을 딱 덧붙여 놓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은혜를 입은 것에 비해 은혜를 되 갚는 것에는 좀 부족함이 많은 것 같습니다. 사랑이 아래로는 잘 흐르는데 위로는 잘 안 올라갑니다. 부모 공경의 복을 약속하신 것은 일종의 격려입니다. 힘겹게 부모를 돌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노쇠해지면 병간호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요즘은 고령화 시대라 이 기간이 더 길어졌습니다. 가정을 꾸려가기도 힘든데 부모에게 경제적인 지원까지 한다면 참 힘든 것입니다. 시간과 물질을 희생해야 합니다. 삶의 많은 부분에서 대가를 치러야 하고, 많은 수고를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을 수도 있고 피해를 입을 수도 있고 오히려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복을 주시겠다는 것은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신다는 겁니다. 자녀라면 복과 상관없이 부모를 공경해야 하지만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부모 공경은 그런 관점에서 대충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복과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을 약속하고 있다는 것은 반대편은 복과 상관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염두 해야 합니다.
부모를 공경할 때 주어지는 복이 어떤 것이고 어떻게 오나요?
첫째, 하나님이 직접 복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의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이 복의 개념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돈을 많이 벌었거나 성공을 했다고 “저 사람 복 받았다.” 이렇게 얘기하기는 어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그 물질의 부요함이, 성공이 출세가 누구로부터 온 것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면 그 부와 성공은 복이 될지 안 될지 모르고 오히려 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돈과 성공과 복은 다른 것입니다.
복은 위로부터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복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복의 원천, 그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복을 말씀하는 것은 그 복을 하나님이 주셔야 하는데 복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길로 갈 때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복이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이 낭비되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는 복을 받을 길은 없는 것입니다. 부모 공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거역하고 부모를 내팽개쳐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며 기준과 질서와 법칙을 지키지 않는데 그 사람이 잘 먹고 잘사는 세상은 온전한 세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지진이 무서운 이유는 기본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기준과 질서와 법칙을 따라 아주 정확하게 돌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서 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리와 법칙을 따를 때 복이 온다는 것입니다.
복은 철저히 하나님과 관계되어있고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신 것은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부모 공경이 중요한 것은 이 계명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에서 복을 약속하실 때는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순종이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지만 그것을 처음으로 배우는 것은 부모와의 관계, 부모의 권위 아래 그 말씀에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기본적인 기준과 질서와 법칙을 지키는 자에게 하나님이 하늘의 복을 우리에게 부어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부모로부터 복이 흘러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는 주로 부모를 통하여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족장들은 자녀들에게 축복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야곱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삭이 야곱을 축복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야곱이 그의 아들들을 축복합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할 때는 야곱은 손을 어긋 맞춰 머리에 손을 얹으면서 운명이 바뀌어버립니다. 가정에 아버지가 가지는 영적 권위 중의 하나는 축복권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축복을 흘려보내는 통로로 하나님이 삼으셨다는 겁니다.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영적 축복이 흘러나가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물려줄 최고의 축복이 있다면 그것은 부모가 믿는, 부모가 알고 있는 하나님입니다. 믿음을, 구원의 복을 물려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물려받는 것. 부모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는 것 때문에 그 집안에 내가 그 부모에게 신앙의 부모에게 태어나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그 부모를 통하여 예수를 알게 되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처럼 더 큰 복은 없습니다. 최고의 유산은 예수님을 믿고 믿음이 계승되는 겁니다. 그게 복 중의 복인 줄로 믿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마음껏 축복을해주는 인생이 되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부모가 축복을 쏟아붓고 싶은 자녀가 누구일까요? 부모를 공경해주는 자녀를 축복하고 싶을 것입니다.
혹시 과거에 부모로부터 좋지 않은 영향을 받고 좋지 않은 사건과 그런 것들로 통하여 상처로 살아가는 분들이 있다면 복음 안에서 그것을 해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뭔가 부모와 나와의 관계가 막혀 있다면 그것을 복음 안에서 풀어야 합니다. 이미 부모가 돌아가셨다 해도 부모를 깊이 용서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한국 가정 안에서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 특별히 아버지와 자녀 관계에 상처와 얼룩짐이 많습니다. 묶여 있는 것인데 그 매듭이 풀어지지 않으면 다른 것들도 다 묶여 있는 것입니다. 나와 부모와의 관계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현재의 사건으로 내 삶에 영향을 미치고 내 자녀에게도 쓴 뿌리들이 흘러갑니다. 그러므로 복음 안에서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시고 사랑해 주셨던 그 은혜를 이제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해결해야 됩니다. 아무리 안 좋은 부모라 할지라도 선으로 악을 이기는 복음 안에서 용서와 사랑을 경험해야 과거의 상처로부터 새롭게 회복이 되는 은혜를 얻게 됩니다.
셋째, 삶의 기본기가 복된 삶으로 이끕니다.
부모 공경을 하면 복을 주신다고 해서 복을 받으려고 부모 공경을 하기보다 부모 공경을 하는 그 태도 자체가 복을 가져오는 통로가 됩니다. 부모 공경 잘하면 기본기가 되어 있는 겁니다. 부모 공경을 하는 일을 통하여 인간관계를 맺어가는 법을 익혀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계를 맺어가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사회에서 나가서 좋은 인간관계를 맺기 이전에 아무리 책을 읽고 인간관계 기술을 터득하고 처세술을 수백 권을 읽어도 부모와의 관계 속에 기본적인 훈련을 경험하지 못하면 나도 모르게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권위자에 대한 상처가 없기 때문에 권위를 가진 사람들과 참 편안하게 아름다운 관계를 맺을 줄 압니다. 그런데 이게 쉬운 것 같아도 쉬운 게 아닙니다. 특별히 한국인 남성들 가운데는 아버지와의 권위와 굉장히 많은 마찰과 어려움들이 있고 억압적이고 굉장히 무뚝뚝하고 무서운 아버지라는 개념들이 많습니다. 권위와 편안한 관계와 대화를 하는 경험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직장에 가서도 보스들과 바른 관계를 맺는 법을 모릅니다. 삶에서 나도 모르게 익혀진 것들은 매우 중요합니다. 집에서부터 자기주장이 너무 강하고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하고 충돌을 잘하고 반항적인 사람들은 사회에 나가서 적응하기 힘듭니다. 인간관계에 뭔가 자꾸 막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하이델베르크의 교리문답에서는 5계명에 대해서 “나의 부모님과 나에게 권위를 가지도록 하나님이 정하신 모든 사람에게 존경과 사랑과 성심을 다 하는 것이며, 공손한 순종으로 그들의 모든 소중한 가르침과 훈계에 복종하는 것이며, 그들의 손을 통해 우리를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그들의 실패도 인내로 참는 것을 뜻한다.”라고 합니다. 윗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일에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보스와의 관계가 좋지 않으면 자연히 어려움이 있어 피하게 되면서 좋은 기회를 얻는 것도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특별은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은총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자연적인 원리들 안에서 그 자연적인 질서를 지켜나가는 가운데 주시는 하나님의 복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 공경은 자연적 원리 그것 하나만으로 가장 기본적인 이치를 말합니다. 부모 공경을 통하여 많은 삶의 길들이 열립니다. 부모 공경은 우리 삶을 엮어 가는 일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매듭이 됩니다. 이 매듭이 풀리지 않으면 다른 것들이 다 있어도 꼬여 있는 것입니다.
“땅에서 장수하고 잘되리라. 네 생명이 길리라.”라는 장수의 복은 순종에 대한 보상입니다. 이 땅에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은 복입니다. 세상에서 장수에 대한 소망이 많아 건강하게 사는 법, 음식 등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알려진 그런 방법들과 다른 접근이 필요합니다.
왜 성경은 부모 공경에서 장수와 형통을 약속하고 있을까요?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수중에 있고 부모 공경이 생명에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태도가 생명의 수한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장수는 정서적인 것과 영향이 있습니다. 좋은 감정을 가지고 살아야 건강하고 삶이 풀리는 것입니다. 요즘 암이나 질병을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1번 요인은 스트레스입니다. 이 스트레스의 가장 큰 요인은 인간관계에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이 바로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입니다.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를 잘 맺고 있으면 마음에 평안이 옵니다. 그런데 이게 꼬여 있으면 풀려지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기쁨은 어디로부터 올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입니다.
실제로 가장 많은 상처는 부모로부터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상처를 받았다 해도 복음 안에서 그것을 용서하는 과정을 겪지 않으면 명을 단축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래 살고 싶냐? 해결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용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일반적으로 많은 경우에 상대를 위한 것이기 보다 용서를 베푸는 당사자를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나를 위해서 용서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기쁘게 함으로 부모만 기쁜 것이 아닙니다. 그 기쁨을 통하여 내가 더 기뻐하고 이 은혜의 기쁨의 시너지를 얻게 됩니다. 언제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습니까? 권위자와의 관계가 깨어져 있으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습니다.
권위자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으면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얻기 힘듭니다. 두려움과 불안과 염려에 사로잡히고 평강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좋지 않은 감정이 나를 사로잡으니까 결국 내 삶을 파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모와의 관계가 꼬여 있으면 삶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인가 어긋나 있는 것입니다. 톱니바퀴 하나가 빗나가 어긋나서 돌아가다 보면 결국 망가뜨리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질병도 합병증이 무서운 것 같이 삶의 문제가 하나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 공경이라는 것은 우리 삶의 과정 속에서 얽혀져 있는 핵심되는 원리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 공경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훈련시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매우 힘든 부모와의 관계 속에 있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부모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훈련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인격을 다듬어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됨을 빚어 가셔서 우리를 쓰기를 원하십니다.
순종의 삶은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을 열어가는 것입니다. 잠언 4장 10~12절에서는 솔로몬이 자신의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0 내 아들아 들으라 내 말을 받으라 그리하면 네 생명의 해가 길리라 11 내가 지혜로운 길을 네게 가르쳤으며 정직한 길로 너를 인도하였은즉 12 다닐 때에 네 걸음이 곤고하지 아니하겠고 달려갈 때에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장수요 형통인 것입니다. 잘 섬기는 것이 복입니다. 섬길 줄 아는 사람은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왕. 무너지고 망가진, 섬기고 싶지 않은 사울 왕을 20년 동안 묵묵히 참고 인내하며 섬깁니다. 하나님께서 그 다윗의 인생을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나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어떻게 합니까? 압살롬은 아버지를 반역합니다. 결국 그는 단명합니다. 구약의 요셉은 형제와 아버지를 잘 섬깁니다. 형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성공의 자리에 있었을 때 오히려 그를 핍박했던 형들을 끌어안고 마지막까지 기가 막히게 섬깁니다. 형통이 무엇인가를 대표적으로 드러낸 인물이 요셉입니다. 그는 섬길 줄 아는 자였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가장 장수한 제자는 사도 요한입니다.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은 주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계실 때 예수님도 십자가의 극한 고통 속에서도 십자가 아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제자인 요한에게 부탁합니다. 예수님도 효도하신 분이십니다. 그처럼 고통의 한가운데서도 육신의 어머니를 기억하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스승의 말씀에 일평생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어머니를 자기의 친어머니가 아니지만 자기의 어머니처럼 모십니다. 이것은 공동체의 의미를 우리에게 부여합니다. 내 육신의 부모님뿐만 아니라 우리의 공동체 안, 이 땅의 어르신들, 연세 드신 분들을 공경하는 문화가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 사회 전체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 온전한 부모 공경을 하는 가정이 얼마나 복을 받고 사는 가를 교회사 속에서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 같은 목사님의 가정이 그런 가정입니다.
순종은 복이 됩니다. 성경의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원리, 순종이 복이 됩니다. 그 순종은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훈련 되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순종은 쉽지 않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힘으로 본성을 꺾고 순종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순종하면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좋은 결과는 분명하지만 그것 자체가 우리 행동의 이유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다 보니 그런 좋은 결과가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때로는 현실이 말씀대로 돌아가지 않아 보일 때도 있습니다. 요즘은 고령화되어져 가니까 자녀들의 입장에서는 섬겨야 할 기간이 더 많아집니다. 그리고 현실은 녹록치 않습니다. 자녀 하나 키우는 게 보통 일도 아니니 긴장감이 있습니다. 짧게 보면 인생을 요령 있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편리한대로 살아갈 수 있지만 인생은 장거리입니다. 길게, 멀리 보아야 합니다. 내 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자손손 복을 받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 대에만 잘 먹고 잘 사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모대의 복이 자녀에게 흘러가고 그 자녀대가 그 다음 대로 물려주어야 한다는 중요한 메시지가 5계명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부모의 공경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나는 하지 않았는데 그 자녀가 나를 섬겨줄 것을 기대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복이 대대로 이어지게 하는 원리가 이 5계명 안에 있는 것입니다. 끝이 좋아야 합니다. 끝은 하나님이 주장하십니다. 요즘 자식 때문에 속 끓는 부모들이 많아져 가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지금 우리 세대를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부모의 세대들이 우리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성경적 원리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정말 오늘의 시대는 좋은 모습들이 아닌데 이럴 때 신자의 가정이 구별된 모습으로 사는 모습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것을 바로 이 5계명에서 붙잡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만을 위해 살지 않고 부모를 돌보고 책임을 질 줄 알 때 나도 너의 인생을 책임져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5계명의 약속입니다. “너의 부모를 공경하라. 그러면 나도 너를 돌보고 책임져 주겠다.” 이것은 친부모뿐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어른들에 대한 공경과 사랑의 돌볼 때 복을 받을 일인 것입니다.
신자의 주된 태도는 순종이고 그 순종을 실천하고 드러내야 할 곳이 가정이고 부모와의 관계가 첫 번째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섬기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틀림없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고 불편한 일입니다.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기억하고 이 말씀에 순종의 유무에 따라 우리의 인생의 복이 걸려 있음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에 대한 사랑과 순종의 법을 훈련하는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하나님을 배워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익혀가는 그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복이 임하는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적용을 위한 질문 *
- 부모를 공경하는 삶을 가로막는 어려움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까?
- 부모를 공경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공경할 수 있습니까?
- 존경받는 부모가 되기 위하여 내 삶은 무엇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합니까?
이 강해는 목사님들의 설교와 참고 문헌들을 인용하여 편집한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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