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3)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1간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아버지의 이름을 위한 기도
마태복음 6 : 9 – 13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6: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들어가는 말
1간구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아버지의 이름을 위한 기도
주기도문의 완벽한 일곱 부분의 간구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서 대별되며, 10계명의 전후 부분과 대충 상응합니다. 전반부는 세 가지 간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나님 및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목표의 시작, 중간, 끝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 나라의 기초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만이 홀로 이루어지는 영역입니다. 이 세 가지는 숫자의 상징적 의미와 일치합니다. 즉 구약성경에서는 언제나 3이라는 숫자는 완전과 신성을 나타내는 거룩한 수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후반부는 네 가지 간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 자신에 관한 것입니다. 넷이라는 수는 피조물을 상징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개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다루심의 시작, 중간, 끝을 말하고 있습니다. 필요한 양식의 제공으로부터, 죄의 용서, 인도하심, 투쟁 중의 보호, 최종적 구원이 차례로 진술됩니다. 이 두 종류의 상호 순서가 주는 교훈은 하나님이 첫째이고 인간은 둘째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욕구 이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순서입니다. 자발적으로 이러한 순서에 따르는 자는 정말 적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지향하고 다음으로 자신을 지향하고 있습니까?
줄거리
주기도문은 모두 7가지의 간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본문은 그 첫 번째 간구로서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을 것과 온 땅에 그의 이름이 드러날 것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와 뜻은 무엇일까요? 이제 본문에 기록된 주기도문의 첫 번째 간구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기도의 모본은 어떤 것이며, 우리에게 드러내시고자 하는 그분의 뜻과 섭리는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나타내셨는가?
1) 하나님은 창조물들 안에 그의 이름을 나타내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며 궁창은 그의 솜씨를 자랑하도다’라고 증거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만든 모든 만물이 그분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의 이름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① 특별 계시와 ②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③ 율법을 통하여 나타내셨습니다.
3) 하나님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영접하게 되면 우리는 그분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긴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①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긴다는 것은 그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고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 것입니다. ② 그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은 점점 깊어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속성과 역사에 대해 우리가 다방면으로 체험을 하면 할수록 그의 이름 안에서 우리의 기쁨도 커지는 것입니다. ③ 우리 자신의 의견과 타락된 생각, 그리고 마음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④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걸어가는 자신의 길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고 그 안에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나타내고 그의 형상을 드러내며, 그분의 성품을 닮아 가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주님에 의해 세상에 보내어진 아버지의 이름이듯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해 불리움을 받았으며, 하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역사하심을 알 수 있도록 거룩한 생활에 힘써야만 합니다. 즉 아들의 선함과 훌륭함은 곧 아버지의 기쁨과 자랑이 되듯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선한 행실로 말미암아 믿는 자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마태복음 5:16).
- 어떻게 그분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을 수 있습니까?
거룩함이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자체가 거룩하신 분일뿐만 아니라 결코 인간의 노력이나 방법에 의해 거룩해지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이 모든 사람들의 삶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도록 해달라는 간구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기도는 가장 높은 의미에 있어서 선교를 위한 기도인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그분의 이름은 거룩히 여김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 이 기도의 성격
1)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길 원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그의 영광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바라는 기도는 우리의 모든 심령과 정성을 모아 그분의 영광을 바라는 기도이며, 더 나아가 그분의 영광이 온 누리에 충만하게 나타나기를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2) 인간의 무지를 깨우쳐 줄 것을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인간의 사악함은 무지를 낳았고 그 무지는 거룩히 여겨야 할 하나님의 이름조차도 거룩하게 여기지 못하고 만홀히 여기는 죄악을 낳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구하는 기도는 인간의 교만과 무지를 깨우침으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능하게 하시고, 그분께 영화롭게 경배드릴 수 있도록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3)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하는 기도는 믿음의 기도이며, 또한 순종의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이름만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원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믿음과 순종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4) 사람에 대한 가치 있는 평가를 내릴 수 있도록 하는 기도입니다.
그것은 단지 형식적인 간구이거나 단순한 존경을 표시하는 간구가 아니라 인간의 어두움이 빛이 되도록, 그리고 인간의 연약성이 강함으로 바뀌도록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그의 거룩함이 온 땅에 드러나기를 구하는 기도 이것이 성도들의 기도의 첫 번째 제목인 것입니다.
- 이 간구의 의미를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여지게 하시옵소서”입니다. “이름” 곧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름”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노마”는 일반적으로 “이름”을 뜻하며, 본문 말씀에서는 이런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친히 그 이름을 계시로 알리셨습니다(창세기 17:1, 출애굽기 3:14, 6:2). 진실로 여호와의 이름은 그의 인격적 통치와 활동의 강력한 표현이기 때문에 여호와 자신을 말함에 있어서 그 이름이 대용될 수 있습니다(레위기 18:21, 시편 7:17, 아모스 2:7, 미가 5:4). 따라서 그 이름은 하나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여호와”나 “야웨”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은 4문자(YHWH)로 구성되었으며, 이를 신성 4문자라 부릅니다. 이 이름이 너무 거룩하므로, 유대인들은 습관적으로 그것을 발음하지 않았습니다. 사본 필사자들이 신성 4문자를 기록할 때는 매번 완전히 목욕하고 완전히 옷을 갈아 입었으며, 그 문자들을 기록하는데 사용한 붓을 부러뜨렸습니다. 감히 입으로 말하기가 황송한 “여호와”라는 이름에 대한 경외감 때문에 회당에서 성경을 낭독할 때 또는 읽는 자들이 그 이름을 볼 때 명사 “아도나이”, 즉 “나의 주님”으로 불렀습니다. 이는 “여호와”라는 실제 칭호를 피하기 위한 것이며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곧 헛되이, 경솔히 부르지 말라는 계명을 범하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옛적 유대인들에 대해 우리가 뭐라고 평가하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장엄하심과 거룩하심에 대한 그들의 감각은 칭찬할만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히 여겨서 헛되이, 경솔히, 함부로 부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존경하고 높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온 세계를 통해 하나님이 이렇게 존경과 높임을 받으며 영광되게 하옵소서”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성품을 가리킵니다.
여호와께서 인간과 접하시는 면이 바로 그의 이름입니다. 그의 이름으로써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계시합니다. 따라서 그 이름은 역사 안에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심으로써 알려진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러 가지 이름을 통해 자기의 성품을 계시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들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엘”, 또는 “엘로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힘, 능력”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이 이름을 사용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의 힘과 지배와 능력에 대한 감각(센스)를 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특히 엘로힘은 피조물과 관련하여 전능의 작용을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엘은 모든 것을 아시며(창세기 14:18-22), 모든 것을 보시며 (창세기 16:13), 그의 백성을 위하여 모든 일을 행하시는(시 57:2) 하나님임을 보여줍니다.
그 후에 하나님은 크고 놀라우신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이 이름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 곧 영원히 자존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이름은 특히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구속받은 자들의 하나님을 보여 주실 때 사용되었습니다.
“엘로아”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그의 능력보다 그의 의지와 관련하여, 모든 것을 결정하고 명령하고 이루시며, 그의 백성의 예배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임을 보여줍니다(신명기 32:15, 17).
“엘 엘욘”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 번역되며 하나님은 이 이름으로 자신을 천지의 소유자와 지배자임을 나타내셨습니다(창세기 14:18, 시편 83:18).
“삿다이”는, ‘전능자’로 번역되며, 하나님은 이 이름으로 자신을 힘의 근원보다는 주시는 은혜 곧 그의 백성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능력의 하나님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주“를 뜻하는 하나님의 세 가지 이름 “아돈”, “아도님”, “아도나이”는 간단히 구별하면 “아돈”은 통치자로서의 주를, “아도님”은 소유자로서의 주를, “아도나이”는 복을 주시는 자로서의 주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다른 표현들에서 이름이 성품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9:10에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그분을 의지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며, 그분의 존재와 성품을 아는 사람이 그분을 의지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또 시편 20:7에서 시편 기자는 “혹은 마차를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느니라”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서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향해서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나에게 나오지만 나는 네가 모독하는 만군의 주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나간다”고 외쳤습니다. 이 이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명예를 걸고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 로페카(라파)-너희를 치료하시는 여호와(출애굽기 15:26).
여호와 메캇디쉬켐-너희를 거룩하게 하시는 여호와(출애굽기 31:13).
여호와 칫케누-우리의 의이신 여호와(예레미야 23:6; 33:16).
여호와 이레-여호와가 준비하시리라(창세기 22:14).
여호와 닛시-나의 깃발(승리)의 여호와(출애굽기 17:15).
여호와 샬롬-평화를 주시는 여호와(사사기 6:24).
여호와 체바오트-만군의 여호와(사무엘상 1:3).
여호와 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신다(에스겔 48:35).
여호와 로이-나의 목자이신 여호와(시편 23:1)등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에 대하여 이런 여러 가지 이름을 주심으로써 자기를 나타내셨고 그의 성품과 존재를 인간에게 계시하셨습니다.
다음에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아스테토”는
“거룩하게 하다, 성결하게 하다, 성별하다”를 뜻하는 “하기아조”의 명령 과거 수동태로, 여기서 “거룩하여 지게 하시옵소서”이며, 과거형이 사용된 것은 완전한 실현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행위자가 명시되어 있지 않으며, 따라서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합니다. 첫 번째 의미는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거룩하게 하거나 여김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시는 행동을 하실 때 그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거나 여김을 받게 됩니다. 두 번째 의미는 인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거나 여김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거나 여길 때 그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거나 여김을 받게 됩니다.
힐(D. Hill)은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거나 여긴다는 말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높인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며,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예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였습니다. 로메아어(Krnst Lohmeyer)에 따르면, 주기도가 기원하고 있는 성화는 적극적인 의미와 소극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상반되는 감각적 영역에 속한 모든 것을 버림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존재와 행위에 있어서 거룩한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봉사하는 천사와 같이 행위를 존재에, 그리고 존재를 행위에 일치시키는 사람이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둘째로,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안에서 모든 인간적, 역사적 존재가 고양되고, 그리하여 완성에 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화의 과정은 또한 그 자체를 넘어섭니다. 왜냐하면 성화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을 통한 세상의 성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통한 하나님의 성화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와 인류도 결국은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을 나타내시는 성화 과정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이 간구는 바로 이것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 이 간구는 하나님의 이름이 알려지고 영광을 받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간구는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이 알려지기를 원하신다는 확신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간구는 자기 자녀들에게 아버지로서의 자신의 본 모습 그대로를 알려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부성애적 사랑에 대한 확신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간구는 인간들에게 그 이름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확신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사람들이 그 이름을 거룩히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알려지지 않는 한, 인간이 그 이름에 대한 지식이 없는 한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관해,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게 해 달라고 간구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본성(또는 성품)이 알려지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간구가 주기도문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고려해 볼 때,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온 인류에 대해 매우 중요한 점들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이 모든 인류에게 있어 가장 깊고 근본적인 요망 사항이라는 사실,
– 그 지식이 인간의 사상과 삶의 전 구조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
–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모든 문제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
– 내적인 것(inward)이 외적인 것(outward)에 선행한다는 사실.
– 주기도문의 여러 간구의 순서가 보여 주듯이, 지식은 감정과 실제적 삶의 안내자라는 사실들을 시사해 줍니다.
그러므로 이 간구에는 하나님에 대하여 더 알려는 갈망과 더불어 노력하겠다는 서약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보다 충분하고 깊은 지식에 도달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는 열망과 관련된 한 사건이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어떤 분을 만나 날이 새도록 씨름하다가 마침내 그에게 굴복하여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하면서 축복하여 주기를 간구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고 축복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그분에게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야곱은 그분이 누구인지 몰라서 그 이름을 묻거나 그분을 부를 이름을 물은 것이 아닙니다. 그 이름은 그 본성 또는 성품의 표현이며, 야곱의 고별의 간청은 입술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친밀하고 깊은 어떤 것을 위한 것입니다. 야곱은 오로지 자기를 축복할 수 있는, 바로 지금 자기와 이야기 하고 있는 그분 하나님에 대하여 보다 분명하고 깊은 지식을 갖기를 갈망한 것입니다.
사람은 전능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과의 신비로운 친교의 시간을 끝내고 그곳에서 세상으로 들어가야 한다면 적어도 그의 가장 깊은 마음속에서 하나님에 관한 평화로운 진리가 위안과 격려를 주고 어떤 감미로움이 되는 속삭임을 사랑의 징표로서 지니기를 갈망할 것입니다.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라는 하나님의 응답은 처음에는 거절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정녕 나는 나의 성품을 네게 더 계시할 필요가 없다. 너는 충분한 빛을 가지고 있다. 네게 필요한 것은 통찰력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이미 우리에게 알리신 것들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야곱보다 더 확실한 지식의 원천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 자연 계시에서,
– 성경 계시에서,
– 하나님의 섭리에서,
– 기도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힘을 얻는 그와 교제에서,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지식의 원천을 가집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알리고 거룩하게 하시는 위대한 매개체입니다. 그를 떠나서 인간 자력으로 하나님에 대한 고상한 지식에 결코 도달할 수 없습니다 :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요한복음 17:26). 이것은 모든 구속 사역의 결과이며, 하나의 장엄한 예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원천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보다 충분하고 깊은 인식과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알 때 비로소 그의 복을 받고 그를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아서 영화롭게 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합시다.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을 반석으로,
하나님을 우리의 평화로,
하나님을 우리를 인도하시는 목자로,
하나님을 우리의 의로,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시고 언제나 임재해 계시는 분으로 찬양하는 것을 기뻐했습니까? 시편 34편에 보면 “나와 함께 여호와를 크게 하며 다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자”고 찬양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자존하시며 완전하십니다. 연약한 인간이 어떻게 이러한 존재를 크게 혹은 더욱 크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그 이름을 더 높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사람들 중에 더 크게 나타날 수 있게 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관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여 이 세상의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크게하고 높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그의 이름을 크게 높이고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해야 하는 것과 관련된 한 사건이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신 광야에 들어왔습니다. 백성들이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모세를 향해 비난과 원망을 하면서 다투었습니다. 모세는 이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게 하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지니라”(민수기 20: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백성의 반역과 비난에 견디다 못해 그만 혈기를 내었습니다: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물이 반석에서 많이 쏟아져 나오자 백성들과 짐승들이 마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게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화가 나서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내리쳤습니다. 그리고 물은 하나님이 내시는 것이지 모세가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화가 난 모세는 자신의 능력이 물을 내는 것처럼 행동하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은 이러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얼마 후에 모세에게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은 주기도문에 있는 이 간구에 적용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의 성품으로도, 그의 말로도, 그의 행위로도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가 가로채는 실수를 범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모세는 무거운 징계를 받았습니다. 가나안 땅을 볼 수는 있었으나 그 땅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항상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관심을 가지고 불타는 열정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나는 나의 영광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러 왔다. 내가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셨사오니,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17장). 주님은 아버지께 속하는 영광 곧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를 아셨습니다. 주님은 이 영광을 보셨으며. 이 영광을 아버지와 함께 가졌으며 나타내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 의식으로 층만하셨으며, 주님의 최고의 소원은 인류가 이 영광을 알아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주기도문의 이 간구에서 이 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온 세계가 하나님과 그 성품을 알 수 있도록 그리고 온 세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름을 위한 간구는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바라는 강렬하고 깊은 소원의 표현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린도전서 10:31)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특별한 관심과 불타는 열정을 가지고서,
– 하나님의 자아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 보이소서
– 인간의 인식을 통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 인간의 바른 감정을 통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 인간의 경배와 찬미와 감사를 통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라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이 기도에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곧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하겠다는 서약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생활을 하겠다는 서약을 하고, 또 그렇게 생활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말로, 우리의 인격과 행위로, 우리의 바른 감정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과 그의 거룩한 속성들을 반영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경배와 찬미와 감사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과 헌신과 봉사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보다 온 세상이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게 되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는 힘써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겨야 합니다. 또 우리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매개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에 의해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당하든가 거룩히 여김을 받든가 한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든가 치욕을 당하든가 한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즉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이 그 이름을 기릴 수 있는 참된 길임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이름을 알고 있습니까? 이 이름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고 노력합시다.
- 이 간구가 제일 먼저 나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간구가 제일 먼저 나오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일상적 기도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서는 안되며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또한 이 세상의 일시적인 필수품이나 심지어 자기 자신의 영적인 요망 사항으로부터 시작해서는 안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필요한 것을 제일 먼저 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필요한 것을 제일 먼저 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요망 사항을 말씀드리기 전에, 그것이 설사 영적인것이라 할지라도 먼저 구해야 할 것은 그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최고의 소원이 되고 있습니까? 기도할 때마다 이것이 항상 우리 마음에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께 나아올 때 어떠한 절망 상태와 환경에 처해 있을지라도 그리고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에 어떤 큰 근심이나 문제가 있을지라도 잠깐 멈추고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행복이 직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없이 우리의 행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속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알고자 하며, 우리의 기도가 효과적이며 가치 있는 것이 되게 하려면 이 순서를 따라야 합니다.
여러분이 참 지혜가 무엇인지 알고 싶으면, 여러분이 복을 받고 번영하고 싶으면, 여러분이 평화의 기쁨을 누리고 싶으면, 여러분이 가치 있게 살다가 죽을 수 있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의 삶에 관하여 지혜를 원한다면, 그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곧 그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데서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요망 사항을 입 밖에 내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얻을 것입니다. 어떠한 절박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구해야 합니다.
마무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 청원은 주기도문의 첫 번째 청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간구의 소원이 주기도문에는 모두 7가지가 들어있는데 그 중에서 첫 번째 소원이라는 말입니다. 그 소원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각기 바람과 소원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세 사람이 항해를 하다가 폭풍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간신히 어떤 무인도에 상륙하여 목숨을 부지하였는데 그중의 한 사람은 몹시 부자였고, 한 사람은 유명한 연예인이었고, 한 사람은 실업자에 백수였습니다. 부자와 연예인은 날마다 자신이 살던 세계가 그리웠지만, 백수에게는 먹을 것만 있다면 전에 살던 세상이나 여기 무인도나 별로 다를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 사람이 함께 바닷가에 앉아 지나가는 배가 나타나기를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데 그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는지 천사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천사는 세 사람이 마음을 깨끗이 하고 기도했기 때문에 한 가지씩 소원을 들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부자가 말했습니다. 나는 내가 살던 대 저택에 돌아가 하인의 수종을 받으며 점심 식사를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러자 그는 당장 자신의 저택으로 옮겨졌고 진수성찬이 그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연예인이 말했습니다. 나는 대군중이 모인 공연장에서 조명과 환호를 받으며 다시 한 번 멋있게 재기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러자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천사는 마지막으로 백수를 쳐다보았습니다. 백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천사를 향하여 입을 열었습니다. 저는 별로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저 그런 세상에 돌아가 보아야 별로이고, 그냥 여기 살면 족합니다. 그런데, 저 혼자 있으려니 그건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는군요. 아까 같이 있었던 친구들이 계속 같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그것도 그대로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사람들마다 소원의 순서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면 그 사람의 가치관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능력을 중요시하고, 어떤 사람은 물질을 중요시하고, 어떤 사람은 명예를, 어떤 사람은 신앙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외적인 활동을 통하여 사회적인 지위와 인정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의 가정을 지키는 것은 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테러범이 자기의 목에다 칼을 겨누었을 때에는 용기를 내던 사람도 그의 가족을 앞에 놓고 위협하면 거의 항복하는 것이 미국 영화의 특징입니다. 반대로 동양적인 것은 대를 위하여 소를 희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나라를 위해서는 가족이라도 버리는 것이 용기이며 정의입니다. 그래서 가미가재 같은 일본의 특공대가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서양적인 소원의 순서를 보면 작고 개인적인 것부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동양적인 소원의 순서를 보면 크고 공적인 것부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곧 이들이 사는 사회의 가치관이며 생각을 대변하는 일면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소원을 아는 것은 그 사람의 가치관에 있어 속옷을 보는 것과 같은 성격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무엇을 바라며 살아가고 있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이 앞으로 가지게 될 성격과 과정을 대충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으로 말할 때에는 갖가지 은혜로운 말을 다하고 아무리 믿음이 좋은 듯이 모양을 가졌을지라도 그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 첫 번째 소원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 그의 신앙적인 수준과 상태를 단번에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복권이나 맞았으면 좋겠습니다!? 라는 소원은 백수의 소원입니다. 장사나 잘되면 좋겠습니다! 는 장사꾼의 소원입니다. 아이가 건강하길 원합니다! 는 부모의 소원입니다. 이 모든 소원이 각기 나름대로의 가치와 수준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우리가 마음에 가져야 하는 첫 번째 소원을 새롭게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이전에는 결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소원을 가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인이라면 적어도 소원이 이쯤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본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기도문의 첫 번째 청원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르침입니다. 이 소원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기도 속에 담긴 소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여야 할 뿐 아니라, 아버지로 대접해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아버지로 대접하지 않는다면 그 호칭은 빈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대접해 드려야 하는데, 그것은 곧 그 이름을 거룩히 여김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름을 무척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신기하게도, 유대인의 풍속을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것들과 비슷한 것이 매우 많습니다.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경향도 그러하고, 마을 공동체적인 문화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이름에다 뜻을 담고 귀하게 여기는 것도 그러합니다. 우리나라는 얼마나 사람의 이름을 귀하게 생각하는지 작명소가 번창하지 않습니까? 이름을 잘 지어 부르면 그 사람의 인생이 달라진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도 그 사람의 인생과 이름은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브람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에 의하여 아브라함으로 바뀌었고, 사래는 사라로 바뀌었습니다.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바뀌어진 이름들은 모두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라는 뜻이고, 사라는 열국의 어미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 라는 뜻입니다. 이 모든 이름들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주신 복을 상징하고 있으며 또한 그 사람의 신앙과 비전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하여는 어떠할까요? 물론 비슷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이름을 가지셨고, 그 이름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점은 이러한 배경하에서 볼 때에 대단히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에는 그분의 성품과 인격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기도문에 등장하는 이름은 단지 호칭이 아닙니다. 이 이름은 곧 인격입니다. 이 이름은 곧 능력입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이며,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 할 가르침과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긴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성품과 그 인격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앞에 언급한 하나님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이 어떤 성품이나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실 때마다 한가지씩 이름이 늘어갔습니다. 그리고 이 이름을 간직하는 것은 곧 그 일을 하신 하나님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청원 속에는 하나님의 모든 인격과 성품을 이해하고 그 하신 일을 기념하는 태도가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청원에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아들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당연히 우리의 행실이 이 아버지의 영광과 상관되는 것입니다. 자식의 행실을 보고 가정 교육을 비판하는 것처럼 만일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성도의 이름을 가졌으면서도 사람들에게 선한 행실로 모범이 되지 못한다면 어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어느 날 전쟁터에서 막사를 순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병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던 나폴레옹은 그만 크게 화가 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병들의 말이 보나파르트는 사기꾼이며, 협잡꾼이고, 질이 나쁜 자식이라고 욕하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은 성큼 막사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불호령을 내렸습니다. 이 괘씸한 녀석들! 아무리 보지 않는 곳이라지만, 너희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서운하게 했다고 나를 그리 심하게 욕하느냐? 그런데 병사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폐하, 저희가 언제 폐하를 욕했다는 말입니까? 내가 들어오기 전까지 보나파르트가 사기꾼이며, 나쁜 놈이라고 욕하지 않았느냐? 하하, 그거 때문이군요. 그건 전하가 아니라, 저희 소대에 있는 보나파르트라는 병사의 얘기인데, 그는 정말 질이 나쁜 녀석입니다. 나폴레옹은 그때서야 일의 전말을 알고서 자기의 막사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의장대를 시켜 그 소대의 보나파르트를 붙잡아 오게 하였습니다. 장군들조차 함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천하의 황제, 보나파르트 앞에서 이 사병은 바짝 얼어 덜덜덜 떨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황제가 입을 열어 명령합니다. 네 이놈, 너는 둘 중에 하나를 고쳐야 한다. 네 이름을 고치든지 아니면 네 행실을 고치든지 알겠느냐?
하나님도 우리에게 똑같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면 그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름은 영웅의 이름인데 고작 하는 짓이 사기꾼과 협잡꾼의 노릇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살면 하나님이 속상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의 삶이 곧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데 이바지하도록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자세가 우리에겐 필요한 것입니다.
운전하다가 다른 차가 부당하게 끼어들어도 욕하고 싸우면 안됩니다. 누가 섭섭한 말을 했다고 꽁했다가 복수해서도 안됩니다. 노름판이나 술판, 혹은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자 할 만한 자리에는 가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렇게 하면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정리하겠습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신앙인이 가져야 하는 소원의 수준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칭호가 아니라 곧 인격이며, 약속이기 때문에 우리가 깊이 간직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이름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거룩하게 여김을 받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설교는 목사님들의 설교와 참고자료를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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