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혜 칼럼] 고 김영길 총장과 한동대의 추억

고 김영길 전 한동대학교 총장

한동대 전 총장이셨던 고 김영길 총장님이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아침에 딸과 페이스 타임을 하면서 소식을 접했다. 이제 31개월 된 로아가 제 엄마를 거들었다.

“할머니, 아빠 엄마 선생님이 잠을 자다가 아침에 하늘나라로 가셨어요.” 로아가 나에게 설명 하면서 두팔을 하늘을 향해 활짝 폈다. 제 엄마가 로아가 알아듣기 쉽게 고 김영길 총장님이 소천하신 것을 이야기를 해 준 모양이다.

우리 가족만 해도 가족 중에 4명이 한동대 출신이니 얼마나 우리 가족이 한동대와 밀접한 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동대는 선교사인 나에게는 참 고마운 대학교이다.

내가 한동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선교지로 입국하기 바로 전해에 온누리교회에서 있었던 “한동대학교 입학설명회”에 참석하면서 부터였다.

그러니까 1996년 가을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온누리교회를 나가고 있었고 입학 설명회가 온누리교회에서 있었기 때문에 입학 설명회에 참석했지만 그냥 관심사로 참석한 것뿐이었다.

당시 중3 중2 초5인 삼남매는 아직 대학갈 나이가 아니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1997년 1월 15일 우리가족은 선교지 C국으로 파송을 받았고 3월 1일 선교지 C국으로 들어갔다.

중3이었던 아들이 선교지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진학을 하게 되었을 때 우리 부부는 고민이 되었다. 선교지에서 대학을 보낼 생각을 하고 들어 왔으나 막상 현지대학이 사회주의 영향아래 있는 대학들이어서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결국 고민 고민 하다가 선교지에 들어오기 전에 참석했던 고 김영길 총장님이 ‘한동대학교 입학설명회’를 하면서 한동대학의 비전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었던 생각이 났다.

한동대는 개교 이래 3회 졸업생인가를 이미 내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한동대 가을학기 입학을 위해서 아들을 데리고 한국에 나왔다. 아들은 2000년 9월 가을학기에 한동대 입학시험을 치렀고 합격하여 입학을 하였다.

맏이가 한동대에 진학하니 연년생 둘째인 큰딸도 자연스럽게 한동대를 가게 되었다. 오빠 언니가 한동대에 들어가니 막내딸은 다른 대학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고 자신은 한동대만 가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여 세 자녀가 다 한동대학생이 되었다. 선교지에 있던 우리 부부는 삼남매가 한동대에 다니게 되어 다른 대학에 보낸 것 보다는 상당히 안심을 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대학’ 이라는 닉네임을 갖고 있던 한동대학교는 이미 교육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고, 인성교육을 잘 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취직이 가장 잘되는 대학중에 하나이기도 했으며, 무엇보다도 학생들이 신앙생활을 잘 하도록 도왔기 때문이다.

자녀들이 포항의 한동대학교에 다니고 있으니 자연히 나는 선교지에서 한국에 들어오면 한동대학교에 가곤 했다. 그래서 채플이며 기숙사며 식당이며 도서관이며 한동대의 구석구석을 다 가 보았다.

종종 선교사 컨퍼런스도 한동대에서 열려서 또 한동대에 갈 기회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한동대에서 나의 큰 딸은 일생을 함께할 배우자를 만났다. 나의 사위 역시 한동대 출신인 것이다.

나는 또 한동대에 갔을때 내가 경험한 추억을 더듬어 보고 싶다. 첫째 한동대에 갔을때 나는 학생들이 친절한데 놀랐다. 처음 보는 어른들에게 학생들은 먼저 다가와서 인사를 하고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 물었다.

처음에 나는 이 학생에 나를 알고 있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은 바로 한동대학의 인성교육에 의해서 학생들이 그렇게 친절하게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늘과 바다와 산만 보이는 고즈넉할 한동대의 저녁 풍경은 또 독특했다. 저녁에 한동대는 와글와글 개구리 소리 같은 소음이 들리는데 이것은 다름 아닌 학생들이 그룹으로 모여서 통성으로 기도하는 소리였다.

처음 한동대학에 와서 이런 것을 보게 된 사람들은 이곳이 신학교인가? 하고 착각을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교수와 학생이 기도하는 학교가 바로 한동대학교였다.

나의 큰 아들이 들려준 말에 의하면 마음이 곤고해질 때마다 학교에 마련된 기도실에 들어가 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기도하고 있는데 누가 아들의 두 눈을 두 손으로 가리더라는 것이다.

아들은 친구가 장난치는 줄 알고 장난치지 말라고 소리쳤더니 바로 고 김영길 총장님이 빙그레 웃으며 서 있더라는 것이다. 바쁜 총장님이 낮에 기도실에 가서 기도하는 학생들을 살펴보러 종종 기도실에 들리셨던 모양이다.

한동대학교는 새벽기도로도 유명했다. 학생들 스스로 새벽기도에 나가 찬양하는 ‘벌떡 중창단’을 만들어서 새벽을 깨웠다. 나의 막내딸이 이 벌떡 중창단의 부회장으로 봉사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동대학교에서 영성을 키웠던 막내딸은 후에 한동대를 졸업하고 장로교신학대학교에 입학하여서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전도사로 사역하고 있다.

내가 선교지에서 잠시 한동대학교를 방문했던 어느날 한동대학 식당에서 고 김영길 총장님을 만났을 때였다. 나의 큰딸은 의과대학을 가고 싶어 했었기 때문에 한동대학에 의과대학이 만들어졌으면 하는 소망이 있던 나는 총장님에게 질문했다.

“총장님 한동대학교에 의과대학이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했더니 김영길 총장님은 예의 그 환한 웃음띤 얼굴로 “한 이 년 후엔 만들어지지 않겠습니까?” 하셨다.

하지만 나라에서 의과대학 신설허가가 나오지 않아서 결국 한동대에 의과대학은 만들어 지지 못했다. 그렇지만 한동대학은 고 김영길 장로님이 총장으로 있는 동안 장족의 발전을 하였다.

큰딸이 한동대학을 졸업했을 때 졸업식에 참석했는데 고 김영길 총장님은 졸업생 한명 한명과 악수를 나누고 허그하면서 축하해 주었다. 이것은 고 김영길 총장님이 학생들 한명 한명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일면이다.

더 풍성하고 많은 한동대학교 이야기를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선교지에 있으면서 어쩌다 한국에 나왔을 때 방문했기 때문에 적은 한동대 경험을 나누고 있을 뿐이지만 말이다.

고 김영길 총장님의 81세 별세는 참 아쉽다. 90세 100세가 된 사회적 명사들도 많은데 말이다. 과학자로서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버리고 신설 기독교 대학교 총장이 되어 많은 고난을 겪으신 고 김영길 총장님은 위대한 삶을 선택하신 분이다.

한동대학교의 이야기를 담은 책 ‘갈대상자’에 나오는 숱한 기적은 고 김영길 총장님의 모세와 같은 믿음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학교를 잘 운영 하려다가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고 김영길 총장님을 모두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이 수십대의 관광버스를 나누어 타고 교도소로 찾아가 한동대학교와 제자들을 사랑한 총장님에게 ‘스승의 노래’와 함께 카네이션을 바친 한동대학생들의 전무후무한 스승의날 퍼포먼스. 한동대학생들의 존경과 사랑을 감옥에서 한 몸에 받았던 총장님으로 역사에 남는 분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한동대의 영향력은 복음의 능력이었다고 생각한다. 신앙 없이 한동대에 입학했던 많은 학생들이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리스도인이 되고 졸업반이 되기 전에 대부분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한동대가 왜 ‘하나님의 대학’인지를 알게 해 준다.

고 김영길 총장님은 대한민국 교육계에 큰 영향을 끼친 분으로 역사 속에 길이 남을 분임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위대한 예수그리스도의 종의 삶을 살았던 큰 별은 졌다.

하지만 고 김영길 총장님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고 자란 한동의 작은 별들이 세상을 변화시킬 큰별들이 되어 떠오를 것이다. 그분이 늘 외쳤던 세상을 변화시킬 사람들 말이다.

“Why not change the World?”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3)”

나은혜 선교사(지구촌 선교문학 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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