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시민사랑방] 보통 교회에서 많이 듣고 배운 바로는 율법은 억압적인 것이고, 형식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좋은 것이고, 자유로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신약성경 속에 등장하는 바리새들의 모습 때문입니다. 형식적이고, 억압적인 율법을 강요하는 그들의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비판하십니다. 그러나 율법이 억압적이고 형식적인 것 맞습니다. 왜요? 법이니까요! 그럼 율법은 버려야 할 구시대의 유물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비록 율법에 매여 있는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시지만 율법을 폐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본문 말씀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
율법의 의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가 천국에서 큰 사람이다
마태복음 5 : 17 – 20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이끄는 말 지난 시간에 심령이 가난한 사람, 온유한 사람, 주님을 위하여 핍박을 기쁘게 받는 사람이 영원한 천국을 심령에 소유한다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이 시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천국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 세상의 삶에는 모든 일마다 두 가지 결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 사랑과 미움, 부자와 가난한 사람,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지혜로운 사람과 미련한 사람,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 자연 가운데서도 해가 지고 해가 뜨고, 음지와 양지, 밀물과 썰물, 낮과 밤, 하늘과 땅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결과가 공존하는 세상 가운데서, 사람들은 더 좋은 것을 추구하고, 더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아무 일도 분간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도 좋은 것, 예쁜 것을 가지기를 더 원합니다. 음식 또한 맛이 있는 음식을 더 좋아하고, 즐기게 되는 것이 우리 사람의 타고난 습성입니다. 맛이 없는 음식을 즐겨 먹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사람은 편하게 살고 싶어 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생하면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삶에서 가장 좋고, 가장 아름다운 천국을 선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천국이 가장 좋은 곳인 줄 알면서 천국을 믿지 않고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지옥가고 싶은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세상을 좋아하고, 세상에 안주하고 사는 것이 영원한 천국을 선택하지 않고, 지옥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천국을 선택하며 살 것인지, 세상을 선택하며 살 것인지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며 살아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 세상의 삶 가운데서 세상과, 천국, 어느 쪽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은 영원한 천국을 선택하며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영원한 천국을 선택하며 살아가려면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살아가야합니다. 보통 교회에서 많이 듣고 배운 바로는 율법은 억압적인 것이고, 형식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좋은 것이고, 자유로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신약성경 속에 등장하는 바리새들의 모습 때문입니다. 형식적이고, 억압적인 율법을 강요하는 그들의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비판하십니다. 그러나 율법이 억압적이고 형식적인 것 맞습니다. 왜요? 법이니까요! 그럼 율법은 버려야 할 구시대의 유물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비록 율법에 매여 있는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시지만 율법을 폐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하게 하러 오셨다고 합니다. 율법은 일점일획이라고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진다고 하십니다. 또한 율법 중에 작은 것 하나를 버리거나 그 같이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럼 대체 율법의 성격이 무엇입니까?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 됨을 보여주는 법입니다. 이 율법을 언제 주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고 시내 산에 머물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법입니다. |
중심내용 율법을 지키며 가르치면서 살아갑시다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자세는 철저하게 압도하는 권위 그 자체였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자세는 율법을 지나치게 신봉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에게는 못마땅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하게 하러 오신 분답게법의 정신을 새롭게 깨우쳐 주셨습니다. 특히 본문 말씀에서는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19절).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은 율법을 기준으로 철저한 신앙생활을 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의로운 생활을 해야 한다고 명백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는 무엇입니까? 율법의 가르침에 충실하였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잘 지키는 것만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율법을 준수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이러한 이들의 행위를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하지만 이들의 율법을 준수키 위한 노력은 그 도를 지나쳐 율법을 준수하는 자신들의 행위를 드러내기를 좋아하고 자신의 기준이 되어 다른 사람의 신앙을 비방하고 정죄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들로 인하여 이들의 신앙적인 열심은 상대적으로 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지녔던 신앙의 열심을 살펴보겠습니다. ① 십일조를 철저하게 바쳤습니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기로 유명한 바리새인들은 구약의 말라기에 명시된 십일조를 빠짐없이 바쳤습니다. 오늘날도 십일조는 성도들과 분리하려고 해도 분리할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② 자주 금식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열심 있는 신앙생활을 표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금식을 행하였습니다(누가복음 18장 9-14절). 그러나 그들의 금식은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금식이었기에 예수님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성도의 금식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경건한 신앙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③ 하나님을 모독하는 참람(僭濫)죄를 제일 무서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제일 잘 섬긴다고 자부하는 그들은 하나님에 관한 일이면 무엇이든지 양보하지 않는 철두철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고 참람(僭濫)죄를 적용시켰습니다. 신앙의 교만은 때때로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내세울 때가 있습니다. ④ 계명을 어기는 자들을 처형하였습니다. 율법의 신봉자인 그들은 계명을 어기는 자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끌려온 여자를 돌로 쳐 죽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켰습니다. 이들은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에만 전념하였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주일 성수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현대의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렇듯 율법을 지키기에 열심이었던 그들은 정작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가장 큰 실책이었습니다. 오직 메시아의 강림만을 대망하며 고난의 세월을 살아온 그들은 정작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메시아로서 이 세상에 오시자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외면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의식적인 종교 관습과 맹목적인 교권 수호, 그리고 깊은 영적인 훈련이 결여된 외식적인 경건은 예수님을 가리어 바로 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는 이들보다 훨씬 나은 의를 지녀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성도의 의는 무엇입니까? 성도의 의는 바리새인의 의보다 훌륭한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입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은 오직 우리들로 하여금 죄인임을 자각하게 할 뿐입니다(로마서 3장 20절). 아무도 율법 앞에서 온전한 자가 되지 못합니다. 바리새인은 이러한 의를 이루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완전한 의인은 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완전한 의에 도달합니다. 성도는 율법을 지키지도 율법에 의해 구속받지도 않지만 온전한 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의는 율법의 완성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해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바리새인의 의가 크고 완전해 보여도 실제로는 온전하지 못한 그들의 의보다 믿음으로 온전하여진 그리스도인의 의가 더욱 크고 완전한 것입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의미는 바로 일한 뜻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즉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욱 큰 믿음이 없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율법을 지키고자 노력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자를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의로 거듭난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선을 행하고 그의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합니다. 때문에 성도들의 선행은 바리새인의 선행보다 큽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의 선행과 의는 의무감이나 체면, 또는 자기 과시를 위한 억지 행동이지만 성도의 선행은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로 인한 진실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성도는 어떻게 살아가야합니까? 율법의 말씀을 행하며, 가르치는 쪽을 선택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17절-19절 말씀에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8복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제자란 어떤 자인가를 상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들을 살펴보면 “제자는 율법 곧 구약성경과는 상관이 없는 가”하는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심으로 구약에 많은 변화가 왔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은 산상 설교 본론의 첫 단락으로 여기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과 율법의 관계가 어떠하며, 그러한 관계는 율법과 제자들 사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펴볼 본문 말씀은 “율법 폐기론과 율법주의”에 대해서 원론적인 관계를 예수님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과 율법의 관계를 바로 이해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의”를 덧입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면서 한 가지 고민이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자의 삶에 율법이 차지하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율법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까?” 이 문제를 생각할 때 생길 수 있는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율법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율법 경시론 입니다. 율법주의는 율법 조항 하나하나를 지키는 것이 “의”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의가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에 반해 율법 경시론은 율법을 원하지도 필요하지도 않다는 주장입니다. 이 두 가지는 다 위험한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위험에 대해서 우리에게 분명히 대답해 주십니다. 17절 말씀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들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내가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로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들”은 구약성경 전체를 통칭하는 전통적인 유대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성취하러 오셨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성취”(플레로사이)라는 말은 “말레”라는 동사에서 왔는데 그 뜻은 “가득히 채우다”, “궁극적인 목표를 성취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구약을 성취하셨다는 것은 구약이 목표했던 그 목표를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가 전체적으로 지향하고 의도한 그 궁극적 목표를 성취하신 것입니다. 구약이 바라본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도래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구약이 바라본 것을 성취하셨습니다. |
그래서 예수님은 18절 말씀에서 분명하게 선포하십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율법의 일점일획도 반드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는 선언은 율법이 손상될 수 없는 전체적인 유효성을 강력하게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확증은 “율법의 일점일획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다”는 중앙 주절을 앞뒤로 감싸고 있는 두 종속절 곧 “하늘과 땅이 없어지지 전에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기 까지는”에 의해 한정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종속절인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라는 말은 결코 발생하지 않는 일을 표현하는 유대인들의 통속적 과장법입니다.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는데, “히브리어는 점과 획이 하나가 있고 없고”에 따라서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처럼 율법은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까지 그 가장 작은 세부 사항까지도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두 번째 종속절인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까지”에서 “모든 것”은 아마도 율법 또는 구약성경이 예언한 메시아적 사건들을 의미합니다. “메시아적 사건들”이란 메시아이신 예수의 전 생애, 곧 예수의 인격과 사역들을 전체적으로 포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그의 지상 사역들, 그리고 재림까지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까지는 결단코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구약의 성취이십니다. 구약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미” 성취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장차 예수님의 재림 시에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는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오신 이후에도 구약은 신약과 동등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구약은 신약에 비해 결코 덜 중요하거나,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림자와 모형인 율법(구약)은 실체요 원형인 예수님의 등장과 함께 이미 그 소임을 다했기 때문에 그 기능에 있어서 변화가 생겼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완전한 대속물이요 희생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더 이상 구약의 제사제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동시에 성소의 휘장을 찢으셨고, 후에는 성전도 아예 없애버리셨습니다. 이제 제사제도와 성전과 관계된 세부적인 율법조항들의 모든 의미는 예수님 안에서 더욱 온전하고 분명하게 발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과 희년과 같은 절기 역시 참 안식이신 예수님을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안식일과 같은 “특정한 날” 자체가 안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안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유월절도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제 구약의 모든 율법은 우리에게 직접 문자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성취자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그 의미가 분명하게 되어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구약의 계명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19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여기서 “이 계명들”은 18절 말씀의 “율법”을 지칭하는 데, 구약의 옛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 성취된 율법을 지칭합니다. 이 “성취된 율법”이란 “옛 율법”이 지향하고 목표하였던 새 율법이고, 예수의 종말론적 사역에 의해 이미 성취된, 그리고 그의 재림에 의해 완성될 때까지 예수의 제자들이 아직 지켜야 할 메시아적 율법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에 의해 성취된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더 이상 구약을 문자적으로 적용해서 유월절이나 안식일을 지켜서는 안 됩니다. 돼지고기를 먹는 것과 같은 금기된 음식을 먹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지상 사역에 의해 성취된 율법을 그의 재림을 내다보며 계속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성취된 율법은 그 범위나 정도에 있어서 구약의 율법보다 훨씬 더 넓고 높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율법 폐기론에 대해서 단호히 반대하셨습니다. |
20절 말씀에 이제 예수님은 율법주의에 반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의 의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0절 말씀에서 제자들의 의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 사이의 대조는 질적인 것일까요? 아니면 양적인 것일까요? 21-47절 말씀의 여섯 가지 대조법들에 비추어 볼 때, 제자들의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양적인 향상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그 질적 차이에서 발견됩니다.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더 나은 의”는 “하나님의 통치에 근거한”, 그리고 “그것에 의해 가능하게 된” 행동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 통치적 관계는 율법과 선지자에 의해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신 예수님에 의해 가능하게 됩니다. 하지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통치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의 의는 예수님과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의는 예수님과 관계가 없는 자기 행위를 강조하는 율법주의적인 자기 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의는 메시아께서 도래하게 하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기준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 제자들의 의는 예수님과의 관계에 의한 의입니다. 곧 제자의 의는 하나님의 통치의 결과로 인해 이루어지는 의였습니다. 이 “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행위에 기초한 의와는 비교될 수 없는 완전한 의였습니다. 제자들의 “더 나은 의”는 하나님 나라에 그 시발점을 두며, 하나님 나라를 그 목표점으로 삼습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기대되는 “더 나은 의”는 하나님의 통치의 결과인 동시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의는 구약의 계율들이나, 더 나아가서 예수에 의해 계시된 윤리적 교훈들을 단순히 문자적으로 지켜 행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요구되는 “더 나은 의”는 윤리적인 규범들에 대한 문자적 준수 이상의 것으로서, 하나님 통치에 기초한 의이며, 그 통치의 결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행동을 수반하는 의입니다. 우리의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낫지 않으면 결단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나을 수 있습니까? 우리의 노력과 행위로는 불가능합니다.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가장 존경을 받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대중들로부터 가장 의로운 삶을 사는 자들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노력하였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들이 안식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서 노력한 것은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234가지 조항을 만들어 놓고 지켰습니다. 또한 그들은 십일조를 철저히 드렸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일 년에 한 번씩 금식하라고 했는데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들의 행위를 따라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자들의 의는 자기 행위에 기초한 의가 아닙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에 기초한 의입니다. 곧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그의 통치를 받음으로 이루어지는 의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의 결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기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위해서는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자기가 죽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때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행위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통치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더 나은 의를 덧입을 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
우리 속에는 율법경시론과 율법주의라는 것이 공존합니다. 우리는 이런 이중적인 적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율법으로 구원받지 않고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렇다고, 율법의 말씀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날 믿음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율법의 말씀을 너무 소홀하게 생각하는 성도들이 많은데 예수님께서는 본문의 말씀에서 율법의 중요성을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말씀이나, 선지자를 폐하시려고 오신 분이 아니시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율법의 말씀이나, 선지자를 폐하신다면 율법의 말씀대로 살라고 강조한 선지자들의 사명도 폐하시게 되는 것이므로 우리 주님은 두 가지 모두 다 인정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의 말씀을 완전하게 이루시고, 선지자들이 선포했던 예언들을 이루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말씀이 하나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 주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시기 전까지는 율법의 말씀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의 말씀이 천국에서 어떻게 사용됩니까? 상급을 결정하는데 사용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에서 작다, 크다 판단하시는 것을 율법의 말씀으로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의 말씀을 지키지 않은 사람은 작은 사람으로 인정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의 말씀을 잘 지킨 사람은 큰 사람으로 인정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이 우리에게 장식품으로 보관하라고 주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성도의 믿음을 판단하고, 확인 할 수 있는 길이 율법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이 어떻게 율법의 말씀을 다 지키며 살 수 있습니까?라는 생각으로 율법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또는 적당하게 지키며 넘어가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말씀 가운데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율법의 작은 말씀 하나라도 지키며, 가르치고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율법의 말씀을 온전히 다 지킬 수 있습니까? 한 마디로 사람의 힘으로는 다 지킬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율법의 말씀을 다 지킬 수 없다고 버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본문 19절 말씀에, “율법을 버리는 사람”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율법의 작은 말씀 하나라도 지키려고 애를 쓰다가 지키지 못한 사람이 율법의 말씀을 버린 사람입니까? 이 사람은 율법의 말씀을 버린 사람이 아닙니다. 율법의 말씀을 버린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스스로 율법의 말씀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처음부터 지키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율법의 말씀을 온전히 다 지킬 수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율법의 작은 말씀 하나라도 중요하게 여기고 지키려고 몸부림 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율법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다 지키지 못하더라도 지키려고 애쓰는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나는 지킬 수 없다”라고 생각하고 미리 율법의 말씀을 버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율법의 작은 말씀 하나라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과 처음부터 지키지 않으려고 포기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님이 보실 때 어떤 사람을 더 사랑하시고, 인정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천국에 가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큰 사람들 편에 반드시 속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은 율법의 작은 말씀 하나라도 지키고, 더 나아가서는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율법의 작은 말씀들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날 교회가 작은 율법의 말씀을 적당하게 가르쳤기 때문에, 세속 주의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물론이고,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율법의 작은 말씀도 지키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율법의 말씀에 따라 행하며 살고, 율법의 말씀을 가르치는 성도들이 되어서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는 귀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진정한 의를 선택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0절 말씀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칭찬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열심히 율법을 지키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들이 종교적으로, 형식적으로 지킨 의보다 더 낫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들은 실제로 엄격한 종교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율법 외에도 수천 가지 규례와, 규정을 정해놓고 지켰습니다. 이들이 만들어 놓은 수많은 규례와, 규정 때문에 도덕적인 사회가 이루어 질 수 있었는지는 모르나 율법이 요구한 진정한 성결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말씀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강하게 강조하시고 계십니다. “너희 의가”, 이 말씀은 율법으로 이루어보려는 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의는 바리새인보다 더 많은 계명과, 율법을 지키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이 말씀은 자신들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열심을 보였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열심보다 더 열심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열심입니까? 믿음의 열심입니다. 순종의 열심입니다. 충성의 열심입니다.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주신 믿음의 의를 이루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서 22절 말씀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이 이 세상에는 한 사람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를 깨닫고, 성결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말씀인데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자신의 의를 이루어보려고 열심을 보였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보인 열심보다 더 뜨거운 열심이 있어야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는데, 이 열심은 자신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열심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의를 열심히 지킬 때, 순종의 의를 열심히 지킬 때, 예수님의 의가 이루어져서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10장 3절에서 4절 말씀에,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보인 의는 어떤 의입니까? 누가복음 18장 11절에서 12절 말씀에,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바리새인은 십일조를 드렸지만 자신의 자랑으로 드렸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지만 자랑으로 했습니다. 하루에 3번씩 기도했지만 자랑으로 했습니다. 계명을 어기는 사람들을 처형했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켰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오직 자신들의 자랑과,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을 지켰는데 이 의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형식과, 외식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형식과, 외식으로 신앙을 지킨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우리의 신앙이 더 낫지 못한다면 결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그래도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자신의 의를 지키기 위하여, 형식과, 외식이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은 형식과, 외식이라도 가지고 있습니까? 형식과, 외식은, 모양을 갖춘 경건의 신앙 상태를 의미합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보면 이런 형식과, 외식의 모양도 없다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못한 신앙으로 어떻게 천국에 들어 갈 수 있겠습니까? 이 의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순간에 내 안에 의가 이루어 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안에 어떤 의가 있는지 확인 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안에 아직도 형식과, 외식만 갖춘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형식적인 의의 모양만 가지고 있다면 아직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할까 하는 고민이 있고, 예수님만을 위해 살고, 예수님만을 위해 죽고 싶다면 분명히 예수님의 의가 내 안에 이루어 진 사람입니다. 천국은 예수님의 의로 옷 입은 사람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천국은 내 방법으로, 내 자랑으로, 내 의로는 결코 들어 갈 수 없는 곳입니다. 세상적인 의, 외식적인 의를 따르지 마시고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따르셔서 천국의 기쁨을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마무리 말씀을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인에 비하면 아직은 소수의 사람들이지만 이미 상당수가 이슬람교로 개종을 하거나 믿습니다. 그들이 이슬람교를 선호하는 이유는 매우 엄격한 윤리와 도덕적 체계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어지럽고 혼란한 현실의 모습 속에서 황량한 심령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것은 엄격한 윤리로 무장한 이슬람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을 우리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면 그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보다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이 되어야 합니다. 덜 이익을 누리고, 손해를 조금 보더라도 정직해야 하고, 깨끗해야 하고, 존중할 줄 알아야 하고, 섬길 줄 알아야하고 자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우리의 믿음을 보고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믿으세요!”라는 원색적인 전도의 방법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외적인 부르심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예수님을 담아 보여 줄 수 있는 우리의 삶의 그릇도 필요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조금만 더 착하게 삽시다. 조금만 더 정직하게 삽시다. 조금만 더 깨끗하게 삽시다. 조금만 더 어른들을 공경하며 삽시다. 조금만 더 자족하며 삽시다. 무엇보다 조금만 더 사랑하며 삽시다. 그래서 우리의 모습을 통하여 아름다운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면서 전파하며 살아가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설교는 목사님들의 설교와 문헌을 참고하여 작성한 설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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